에스겔(23-01)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행음
에스겔 23장 1-21절
이스라엘의 역사는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여정입니다. 그 길은 어둠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며, 안타까운 사건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찬찬히 되새기며,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과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닌, 현재와 미래를 위한 타산지석이 됩니다. 마음의 무게를 느끼며, 우리는 이 역사를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각각 오홀라와 오홀리바로 의인화해 이들의 무절제한 음란을 고발하며 멸망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고발은 이들의 종교적 음란(우상숭배)과 정치적 음란(동맹 정치)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한 어머니의 두 딸로, 이미 어렸을 때부터 행음에 깊이 빠졌습니다.
두 자매 오홀라와 오홀리바(1-4)
음란과 사랑의 차이는 대상과 책임 여부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는 ‘결혼’에 비유됩니다. 혼인한 후에 다른 이성을 사랑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없듯이, 다른 대상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진정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머니의 딸이라 3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나니 4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1-4)
선포의 명령(16:1) 없이 여호와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주어집니다(1). 먼저 주인공들이 한 어머니의 두 딸로 소개됩니다(2). 어머니를 헷 사람으로 소개하는 16장의 경우와 달리 어머니의 신분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고, 두 딸이 한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 자녀라는 사실만 알려줍니다. 특이하게도 두 딸의 음란한 행실이 먼저 소개되고(3) 뒤이어 이들의 신분이 밝혀집니다(4).
(1) 계시의 말씀(1)
처음부터 음행이 두 딸의 정체성의 핵심에 속함을 시사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두 여인을 비유로 사용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의 배신과 우상숭배를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두 여인은 상징적으로 각각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나타내며, 그들의 불신앙과 타락한 행위를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모습을 드러냅니다.
(2) 한 어머니의 두 딸(2)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두 여인, 즉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비유로 들어, 그들의 불신앙과 우상숭배를 언급하십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방 신들을 따르는 모습을 강조하며, 그로 인해 발생할 결과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백성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그들의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3) 애굽에서의 행음(3)
두 딸은 이미 애굽에서, 어릴 때(참조. 16:22,43,60) 벌써 음행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의 젖가슴이 눌렸고, 사람들이 그 처녀 젖꼭지를 어루만졌습니다. 애굽에서 음란을 행한 두 딸의 정체가 알려집니다. 언니는 오홀라(‘그녀의 장막’)이고 동생은 오홀리바(‘나의 장막이 그녀 안에 있다’)인데, 오홀라는 사마리아를,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체류할 때부터 두 정치적 단위로 나뉜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에스겔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에스겔은 시작부터 예루살렘의 남다른 지위와 특권을 박탈해버립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한 어머니의 두 딸로 그 기원에 있어 같을 뿐만 아니라(참조. 16:45-46), 그 음란함에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차이가 없다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운명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4) 오홀리와 오홀리바의 속(4)
4절의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는 오흘라와 오홀리바가 여호와의 아내가 됐음을 시사합니다(참조. 16:8). 애굽에 있을 때 결혼한 것처럼 보입니다. 23장에는 광야 시대가 나오지 않기에 결혼 관계가 애굽 체류 시대로 옮겨진 것 같습니다. 호세아와 예레미야에 따르면 광야 시대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신혼을 보낸 기간입니다(참조. 렘 2:2; 호 2:14-15; 9:10).
오홀라의 음행(5-10)
사람은 하나님도 믿으며 다른 것도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만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만 따르고 섬기는 데 실패한다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대상을 섬기면 결국에는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5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6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 7그가 앗수르 사람들 가운데에 잘 생긴 그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누구를 연애하든지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으며 8그가 젊었을 때에 애굽 사람과 동침하매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으며 그의 몸에 음란을 쏟음을 당한 바 되었더니 그가 그 때부터 행음함을 마지아니하였느니라 9그러므로 내가 그를 그의 정든 자 곧 그가 연애하는 앗수르 사람의 손에 넘겼더니 10그들이 그의 하체를 드러내고 그의 자녀를 빼앗으며 칼로 그를 죽여 여인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심판을 행함이니라(5-10)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이야기는 광야와 가나안 정착과 초기 왕정 시대를 생략하고 앗수르가 패권을 장악했던 시대로 넘어갑니다. 여호와 아래 있으면서도 오홀라는 애굽에 체류할 때부터 해오던 음행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1) 앗수르와 행음(5-7)
이번에는 앗수르의 멋진 젊은이들과 미친 듯이 음란을 즐기고 저들이 가져온 우상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했습니다(5-8). 주전 9세기 중반 이후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시대를 제외하고 앗수르의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북왕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통치했던 므나햄(왕하 15:19)과 호세아(왕하 17:3)도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2) 애굽과의 행음(8)
이 절에서는 두 여인, 즉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젊은 시절부터 우상 숭배에 빠져들었음을 언급합니다. 특히, 그들은 이방 신들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렸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경고합니다. 에스겔은 두 여인인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젊었을 때는 애굽 사람과 동침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 여호와의 징벌(9-10)
앗수르와의 음행으로 생존을 도모하던 오홀라의 시도는 파탄으로 끝납니다. 배반당한 여호와께서 오홀라를 정부 앗수르의 손에 넘겨 칼로 죽여 버리게 하십니다(9-10). 앗수르 왕의 봉신이었던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는, 아마도 애굽의 사주를 받아,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다가 나라를 멸망에 빠뜨립니다. 주전 722년 사마리아는 3년간 포위당한 끝에 앗수르 군대에 의해 함락당합니다(왕하 17:4-6).
오홀리바의 더욱 심한 음행(11-21)
마지막 때에 성도는 롯의 처를 기억하며 죄를 떠나야 합니다(누가복음 17:32). 선도는 하나님을 택했으면 결단을 내리고 그분 외에 다른 것을 찾아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일을 심치 가증하다고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가듭난 백성답지 않는 모습이 있는지 살피고 돌이켜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해야 합니다.
11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의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의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12그가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연애하였나니 그들은 화려한 의복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말 타는 자들과 준수한 청년이었느니라 13그 두 여인이 한 길로 행하므로 그도 더러워졌음을 내가 보았노라 14그가 음행을 더하였음은 붉은 색으로 벽에 그린 사람의 형상 곧 갈대아 사람의 형상을 보았음이니 15그 형상은 허리를 띠로 동이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쌌으며 그의 용모는 다 준수한 자 곧 그의 고향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 16그가 보고 곧 사랑하게 되어 사절을 갈대아 그들에게로 보내매 17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행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 18그가 이같이 그의 음행을 나타내며 그가 하체를 드러내므로 내 마음이 그의 형을 싫어한 것 같이 그를 싫어하였으나 19그가 그의 음행을 더하여 젊었을 때 곧 애굽 땅에서 행음하던 때를 생각하고 20그의 하체는 나귀 같고 그의 정수는 말 같은 음란한 간부를 사랑하였도다 21네가 젊었을 때에 행음하여 애굽 사람에게 네 가슴과 유방이 어루만져졌던 것을 아직도 생각하도다(11-21)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이 사마리아보다 더 악하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모습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앙과 타락을 강력히 경고하며, 그로 인해 받을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회개와 돌아옴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 오홀리바의 요약적 평가(11)
이스라엘의 두 여인, 즉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타락을 더욱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예루살렘이 사마리아보다 더 악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리고, 더 많은 우상 숭배와 부정한 행위를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언니 오홀라의 비참한 운명은 동생 오홀리바에게는 남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언니보다 더 심하게 음행을 즐겼습니다(11).
(2) 앗수르와 행음(12-13)
오홀리바는 욕정에 사로잡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음행했습니다. 언니의 뒤를 따라 앗수르에 몸을 팔았습니다(12). 다메섹의 아람과 북왕국이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위협하자(주전 734-732년)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의 속국이 되어 위기를 극복했습니다(참조, 열왕기하 16:5-9). 그 후 요시야 왕이 등장하기까지 유다는 앗수르의 봉신국으로 있었습니다. 앗수르와 음란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음행에 깊이 빠진 오홀리바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채워줄 남자를 찾았습니다. 벽에 그려진 갈대아 남자의 준수한 모습만 보고도 음욕이 불처럼 타올라 사절을 보내 잠자리에 초대했습니다(14-16).
(3) 바벨론과 행음(14-18)
주전 605년 바벨론이 갈그미스에서 애굽을 대파하고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자 유다도 늦지 않게 바벨론 왕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이들과 침상에서 질탕하게 놀아보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애인을 찾았습니다(17). 바벨론과의 음행은 짧은 기간으로 끝났습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은 3년간 조공을 바치다가(열왕기하 24:1) 애굽의 도움을 기대하고 바벨론에 등을 돌렸습니다.
(4) 애굽과의 행음(19-21)
정치적 음란에 빠져 음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오홀리바의 안중에는 여호와가 없었지만, 여호와는 오홀리바의 음행을 모두 지켜보셨습니다(13). 오홀라의 경우처럼 대놓고 음행을 하는 오홀리바에게 여호와께서도 등을 돌리십니다(18). 오홀라와 오홀리바에게 애굽은 음행의 뿌리이자(4) 가장 갈망하는 대상이었습니다(21). 오홀리바는 애굽에서 몸에 밴 음행을 마지막까지 잊지 못했습니다(19). 바벨론과 잠자리를 함께하면서도 어렸을 때 애굽에서 놀았던 경험을 그리워했습니다. 오홀리바는 성기가 나귀의 것만큼이나 크고 말처럼 힘이 무척이나 센 간부 애굽에게 추파를 던졌습니다(20). 가나안의 변방에 속한 이스라엘에 애굽은 신과 같았습니다(참조. 이사야 31:3). 오랜 역사와 놀라운 문명과 넘치는 부와 지식은 애굽을 경이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17장의 독수리와 포도나무의 비유가 잘 보여주듯이, 앗수르나 바벨론의 봉신으로 있을 때도 유다는 내부적으로는 애굽을 훨씬 더 신뢰했습니다. 오홀리바가 자신의 젖꼭지를 어루만지고 여린 젖가슴을 애무해준 애굽을 그리워했다는 고발(21)은 애굽에 의존적이었던 예루살렘 정치의 민낯을 보여줍니다. 사실 21절이 고발의 정점입니다. 여기에서만 2인칭을 사용해 오흘리바를 고발합니다. 예루살렘의 맹목적인 애굽 의존적 정치가 결국 유다를 멸망에 떨어뜨렸습니다. 여호와의 약속(삼하 7장)에 근거한 다윗 왕조가 자리 잡은 예루살렘 왕궁에 여호와를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본문의 교훈은 우리에게 깊은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타락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우상 숭배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열려 있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오는 자를 환영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삶 속에서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발전시켜 나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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