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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37-01)


죽음 골짜기에 있는 마른 뼈들의 환상

에스겔 37장 1-14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순종할 때도 사랑하시지만, 우리들이 절망하며 고통 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고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회복하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세워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회복시키시지 못할 대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참 생명으로 이끄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놀라운 능력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 바벨론에서 종살이하는 유배인의 해방과 폐허가 된 성읍들의 재건을 약속하지만, 실현이 가능한 약속입니까? 유다는 이미 죽은 몸이 됐는데, 어떻게 다시 생명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현실적으로 분명 불가능해 보이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땅의 흑ㄹ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사람을 ‘생령’이 되게 하신(창세기 2:7) 분의 약속이라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른 뼈의 소생에 관한 환상(1-10)

사람들이 불행해질 때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때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 근심과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그들에게 무한히 부어주십니다. 죄악 가운데 있는 죄인들을 보실 때, 그들을 긍휼한 시선으로 바라보십니다. 그곳에 멈추신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세우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7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8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1-10)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때가 되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것이 후회가 되지 않도록 황폐한 땅을 생명력이 충만한 땅으로 변화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놀라운 환상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곳은 죽음의 골짜기로, 그 골짜기 가운데 사람들의 뼈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을 지나시면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마른 뼈들에게 생명을 부어넣어 준다면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1) 환상의 배경(1-2)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네 번째 환상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처음 부르실 때와 같이 그의 성령으로 인도합니다. 여호와의 권능(손)이 에스겔에게 내리고, 그분의 영이 그를 데리고 나가 뼈들로 가득 찬 골짜기 한가운데 내려놓으시며 그 뼈들 사이를 두루 돌아다니게 하십니다. 골짜기 바닥에는 뼈가 아주 많았는데 모두 바싹 말라 있었습니다(1-2).

환상의 도입부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여호와의 손이 내게 내리셨다)와 ‘환상의 장소 골짜기’에 의해 네 번째 환상은 3:22-27의 두 번째 환상에 연결됩니다. 여호와의 권능에 사로잡혀 골짜기로 가서 여호와의 영광을 본 에스겔이 다시 여호와의 권능에 사로잡혀 골짜기로 가서 그곳을 가득 채운 마른 뼈들을 봅니다. 그 뼈들 사이로 돌아다니게 하셨습니다. 멸망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만든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고발하신 여호와께서 같은 장소에서 완악함으로 멸망당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2) 여호와의 질문과 예언자의 답변(3)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살펴보게 하신 후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3)라고 물었습니다.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이 뼈들은 스스로 살 수 없다는 질문입니다. 에스겔이 보고 있는 마른 뼈들과 다를 바 없는 상태에서 ‘다시 창조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질문에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3)하고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환상을 보여주시고 그에 관해 물으시고 예언자가 거기에 답변하는 것은 일반적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질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에스겔이 본 것에 관해 묻지 않으시고, 골짜기에 널린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에 관해 에스겔에게 그의 개인적 견해를 물어보십니다. 여호와의 질문은 수사적 질문으로 불가능함을 강조합니다. 죽은 지 오랜 시간이 흘러 바싹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그런 일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즉답을 회피하고 문제를 다시 여호와께로 돌린 에스겔은 질문의 의도를 알았던 것 같습니다.

에스겔의 답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질문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단순히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지, 마른 뼈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당신의 능력에 관해 묻지는 않으셨습니다. 반면에 에스겔은 후자까지 포함해서 답변했습니다. ‘뼈들이 다시 살 수 있는지는 여호와의 결정에 속하기에 여호와께서만 아십니다.’, ‘주께서’로 옮긴 독립인칭대명사 ‘아타’(당신께서는 아십니다)도 뼈의 소생이 오직 여호와의 결정에 속함을 보여줍니다. 누구도 죽어서 뼈만 남은 자들을 소생시킬 수 없기에 뼈들은 다시 살 수 없지만, 여호와께서 개입하신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뼈들’이 동사 ‘살다’의 주어라면 불가능하지만, 주어가 ‘여호와’라면 언제라도 가능합니다. 에스겔의 답변이 여호와께서 마른 뼈의 운명에 개입하실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3) 마른 뼈의 소생 : 첫 단계(4-8)

 

에스겔의 답변에 여호와께서 적극적으로 호응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5)라고 마른 뼈들에게 예언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를 제외하면 4절의 문장구조는 36:1의 문장구조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이스라엘의 산들’에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예언하게 하신 여호와께서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게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예언하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뼈들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거기에 ‘생기’를 넣어 살아나게 하실 것입니다(5-6). ‘생기’로 옮긴 ‘루아흐’는 마른 뼈의 소생에 관한 환상의 핵심 단어로, 단수로 아홉 번(1,5,6,8,9[3번],10,14), 복수로 한 번(9) 나옵니다. 1절과 14절에서는 여호와의 ‘성령’으로, 복수로 사용된 9절에서는 ‘사방’(‘네 바람’)으로, 나머지는 모두 ‘생기’로 번역됐습니다. 원래는 ‘입김’, ‘숨’, ‘호흡’, ‘바람’,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마른 뼈의 소생과 관련해서는 ‘생기’보다는 ‘숨’, ‘호흡’(breath)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숨’은 창조주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생명력으로 주신 것이기에(참조. 이사야 42:5; 57:16; 스가랴 12:1), 살아 있는 생명에만 숨이 있습니다(참조. 창세기 6:17; 7:15,22). 죽은 자는 숨(생명력)이 없기에, 힘줄과 살과 가죽으로 덮인 해골에 숨을 주어 다시 숨을 쉬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영(루아흐)이 숨(루아흐)이 끊어져 죽은 자들에게 숨(루아흐)을 불어넣어 살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에스겔이 마른 뼈들에게 예언을 하자 먼저 뼈들이 모여서 골격을 갖춥니다. 흩어져 있던 뼈들이 제 짝을 찾아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며 살이 오르고 그 위로 살갗이 덮이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생기가 없었습니다(7-8).

 

(4) 마른 뼈의 소생 : 두 번째 단계(9-10)

 

그러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주어집니다. 에스겔이 그분의 두 번째 명령에 따라 생기에게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하고 예언하자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섰는데, 그 수가 극히 큰 군대처럼 엄청 많았습니다(9-10). 두 단계의 소생이 아담의 창조(창세기 2:7)를 배경으로 했다면, 이스라엘의 회복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속함을 시사해줍니다. 죽은 자의 소생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주체가 창조주라면 쉬운 일이 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기로 결정하셨기에 가능해집니다. 에스겔은 단순히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환상 안에서 예언의 명령을 듣고 그대로 실행합니다. 에스겔의 입에서 나가는 예언이 환상 안에서 이미 성취됩니다. 에스겔은 이제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유배민에게 전하면 됩니다. 에스겔이 예언한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마른 뼈들이 소생했음은 에스겔의 선포 가운데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미 시작됐음을 보여줍니다. 에스겔이 전하는 메시지가 곧 마른 뼈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생기가 됩니다. 에스겔의 예언을 받아들인다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마른 뼈의 소생이 두 단계로 진행된 것도 시사적입니다. 멸망 당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한순간에 오지 않고, 점진적 과정을 거쳐 이뤄집니다. 유배민은 에스겔이 선포하는 여호와의 말씀에 의존해 유배의 어둠을 통과해야 합니다.

 

환상의 해석 : 여호와의 답변(11-14)

마른 뼈와 같은 영혼이 회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메마른 심령에 회복과 부흥이 일어나려면 말씀에 순종하며 성령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닮아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럴 때 회복되어지고 세워지며, 하나님의 큰 군사로 일어나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11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4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1-14)

 

이 예언은 골짜기 환상과 더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또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만드셔서 하나가 되게 하시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게 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그 구성원들은 성령으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온 세상에 알게 하실 것입니다(28).

 

(1)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탄식(11)

 

현재의 문맥에서 환상의 해석에 해당하는 이 단락은 유배민의 불만에 대한 여호와의 답변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하고 탄식합니다(11; 참조. 애 3:54). 유배의 시간이 계속 흘러가지만, 변화의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는 현실에 이들은 절망합니다. 이미 마른 뼈가 됐는데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이방 땅에 살다가 결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소망을 상실한 자들에게 회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비유적 표상이 마른 뼈들로 가득 찬 골짜기에서 무덤으로 바뀌지만, 둘 다 완전한 멸망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유배민이 죽어 무덤에 묻힌 자에 비유됩니다. 무덤에 묻힌 자가 무덤을 열고 다시 산 자의 땅으로 돌아올 수 없듯이, 유배민이 고토로 돌아온다는 것도 헛된 소망일 뿐입니다.

 

(2) 무덤에서 해방(12-13)

 

무덤에서 살아나올 자는 아무도 없지만, 여호와께서 개입하신다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무덤을 열고 묻힌 자들을 나오게 해서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12-13). ‘나오게 하고’는 ‘올라오게 하고’로 사무엘상 12:6과 호세아 12:13에서는 출애굽 사건과 관련해 사용됩니다. 바벨론 유배로부터의 해방이 새로운 출애굽 사건이 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동기나 이유는 직접 언급되지 않고, 유배민을 지칭하는 ‘내 백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시사됩니다. 이 표현은 언약 관계에서 나온 것으로, 음행 때문에 심판에 떨어졌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여전히 ‘내 백성’입니다.

 

(3) 하나님의 영에 의한 소생(14)

 

여호와께서 당신 영을 유배민 가운데 두어 이들을 소생시키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다(14). 유배민 가운데 함께하면서 이들의 소생과 귀향을 책임져주는 여호와의 영은 1절에서 예언자를 골짜기로 데려간 바로 그 영입니다. 여호와의 영에 의해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경험한 마른 뼈의 소생을 유배민도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른 뼈를 살리시는 능력을 통해 회복과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절망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일으키실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도 회복과 변화를 이루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과 믿음을 주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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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36-02)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이스라엘의 회복

에스겔 36장 16-38절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기쁨과 성공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뜻을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을 따라 성취해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 사람에게 임하는 놀라운 축복의 삶입니다. 항상 성도들의 삶은 이러한 숙제를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을지,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 살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은 피 흘림과 우상숭배로 멸망당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미래가 여호와에 의해 준비됩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결정하십니다.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유배민을 모아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서 맑은 물로 정결하게 해주시고, 율례와 규례를 지켜 다시 심판에 떨어지지 않도록 새 영과 새 마음도 주십니다.

 

더럽혀진 여호와의 이름(16-21)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 즉 ‘아가페’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지만, 식을 줄 모르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시면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갈 때 놀라운 사랑의 역사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본문에서 강력한 하나님 사랑의 고백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16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7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18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 위에 쏟아 19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여러 나라에 헤쳤더니 20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21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16-21)

 

선지서들은 전반부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시지만, 후반부에서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에스겔서 또한 그러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1-32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을 향한 심판을 선포하셨고, 33장에서부터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왜 회복시키시는지, 또한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 이스라엘의 부정과 유배(16-19)

 

먼저 여호와께서 구원에 관한 약속을 주시기에 앞서 유배의 원인을 요약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유배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고 교훈을 찾아낼 때 과오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까닭 없이 자기 땅에서 쫓겨나 여러 나라 가운데 흩어져 살게 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여인들이 월경 중에 그녀가 누었던 침상에 피를 흘리며 부정하게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족속이 자기들이 걸어온 길과 행실로 가나안 땅을 더럽혔기 때문에 쫓겨난 것입니다(17). 가나안 원주민들이 온갖 가증한 짓을 저질러 땅을 더럽혔기 때문에 땅에서 쫓겨났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거룩한 땅을 더럽혔기 때문에 더러워진 땅에서 쫓겨났습니다(참조, 레위기 18:27-28).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생명의 탄생을 위한 여인들의 중요한 신체적 주기이지 그것을 비하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피가 땅에 흘렸다는 이미지로 사용한 것뿐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하신 경고가 현실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땅 위에 피를 쏟고’ 우상들로 땅을 더럽혔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분노를 쏟으시고’ 민족들 가운데로 흩으셨습니다(18-19). 유배는 이스라엘의 윤리적 악행과 종교적 타락에 따른 심판입니다. 피 흘림은 이웃의 삶과 생명을 위협하는 중한 범죄였고, 우상숭배는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독점적 배타적 관계를 부정하는 악행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징계한 유배는 뜻밖의 부작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유배민이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졌습니다.

 

(2)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20-21)

 

이방 민족들은 유배민을 보며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이 자들은 여호와의 백성인데도 그분 땅에서 떠나야만 했지’)하고 떠들었습니다(20). 고대적 사고에 따르면 한 민족의 패배는 곧 그 민족이 섬기는 신의 패배를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배는 민족들에게 여호와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이들의 눈에 여호와는 힘이 없어 자기 백성도 보호해줄 수 없는 신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배민 때문에 조롱거리가 된 당신의 이름을 아껴서 이들의 운명에 개입하기로 하십니다(21). 이스라엘이 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회복을 위해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한 것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을 ‘아껴 보지’(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5:11; 7:4,9; 8:18; 9:5,10) 심판하셨던 여호와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아껴’(불쌍히 여겨)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하십니다. ‘아끼다’로 옮긴 동사 ‘하말’은 ‘불쌍히 여기다’, ‘동전하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22-32)

물은 흔한 것이지만, 모든 물이 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정말 안심하고 마실 물이 얼마나 될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좋은 물, 맑은 물, 깨끗한 물은 그 가치가 점점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냥 먹을 수 있는 물이 점점 줄어들어서 물은 당연히 돈을 주고 사먹어야 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맑고 좋은 물은 너무도 귀중한 것이 되어서 매우 비싼 돈을 주고서야 사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22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4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29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에서 구원하고 곡식이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닥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30또 나무의 열매와 밭의 소산을 풍성하게 하여 너희가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여러 나라에게 당하지 아니하게 하리니 31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 32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22-32)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대적한 죄로 열방 가운데 흩어져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 황폐한 땅을 회복시키시고 흩어진 백성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을 모든 더러운 것과 우상 숭배의 죄에서 정결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어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라는 언약 관계가 회복됩니다.

 

(1)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22-23)

 

이방 민족들 가운데 흩어진 여호와 백성의 운명에 간섭하도록 여호와를 움직이게 한 것은 이들을 위하시는 그분의 마음도, 절망적 처지에 빠진 자들에 대한 그분의 연민도, 도움을 구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도 아니었습니다. 자기 땅에서 쫓겨난 유배민으로 인해 민족들 가운데 더럽혀진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이들을 구원하는 동기가 됩니다(22).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이실 때 당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시려고 불순종한 이스라엘에 심판을 집행하지 않으시고 거듭 미루셨는데(참조, 20:9,14,22,39), 이제 민족들에 의해 더럽혀진 당신의 큰 이름을 위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23).

고향을 떠나 이방 민족들 가운데 사는 여호와 백성의 모습이 이방인들의 눈에는 여호와의 무능력으로 보였기에, 유배민의 구출은 그분의 ‘거룩함’, 곧 크신 능력을 과시하는 사건이 됩니다. 민족들은 유배민에게 베푼 여호와의 구원행위를 보고 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배가 그분의 무능력 때문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더럽혀진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위한 유배민의 구원’은 이중적 의미를 갖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구원이 여호와의 일방적 결정(은총)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음에도 여호와께서 당신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해 구원하십니다. 또한 여호와의 단호한 구원 의지와 그 확실성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결정이기에 어떤 외적 조건도 그분의 구원의 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거나 거절할지라도 지체되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유배민을 구원하는 동기뿐만 아니라 목적까지도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로 돌려지면서 무조건적 구원 약속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2) 이스라엘의 정화와 새 영(24-30)

 

유배민의 귀향(24)은 여호와께서 세우신 구원 계획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복된 미래를 위해 더 많은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먼저 민족들 가운데서 이끌어내 고향 땅으로 데려온 유배민에게 깨끗한 물을 뿌려 이들을 깨끗하게 씻겨 모든 더러움과 모든 우상숭배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25). 제의적 용어로 죄를 기술한 18절에 일치하여 죄 사함도 제의적 관점에서 언급합니다. 월경하는 여인의 부정처럼 윤리적-제의적으로 더러워진 이스라엘이 여호와에 의해 씻김을 받고 깨끗해져 다시 가나안에 살 수 있게 됩니다. 피흘림과 우상숭배로 땅을 더럽혔다가 배우를 당한 자들이 다시 여호와에 의해 더러움과 우상으로부터 깨끗하게 됩니다.

‘맑은 물’(‘깨끗한 물’)은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더러움을 제의적으로 씻어내 다시 깨끗하게 하는 물을 가리킵니다. 민수기 19:11-20에 죽은 사람의 시체나 물건을 만진 사람에게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려 그를 깨끗하게 했습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더러운 것’은 18절의 ‘땅 위에 흘린 피’로 윤리적 악행을 가리킵니다. 물론 죄 사함으로 이스라엘의 미래가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죄의 유혹에 맞서 싸울 힘이 없다면 이스라엘의 구원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한계를 아시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율례와 규례를 지키며, 살 수 있게 이들의 영적 무지와 무능력을 치유해주십니다.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속속들이 부패한 이스라엘 영을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대체하십니다.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속합니다. 이들에게 ‘새 영’과 ‘새 마음’,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26). ‘굳은 마음’(‘돌의 마음’)은 멸망하기 전 이스라엘의 악한 성품을 특징짓는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2:4; 3:7)와 의미상 같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문자적으로는 ‘살의 마음’입니다. 육신을 의미하는 ‘바시르’는 인간의 피조성과 사멸성과 덧없음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실 ‘바사르의 마음’은 자기 존재가 ‘바사르’임을 인정하는 마음, 곧 사멸적 한계를 인정하고 창조주께 자신의 실존을 맡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이스라엘 한 가운데 두시기에 그런 놀라운 일이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의지(뜻)에 순종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분의 강함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불순종의 마음을 순종의 마음으로 바꿔 선함과 의로움을 행할 수 있도록, 그분의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27). 언약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되고, 땅에 다시 축복이 주어집니다(28-30).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저주 받았던 땅이 풍성하게 열매 맺습니다.

 

(3) 기억해야 할 과거(31-32)

 

오직 여호와에 의해 준비된 구원 시대에 참여하는 이스라엘은 수치스러운 자신의 과거를 반면교사로 삼아 같은 잘못을 다시 범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31). 여호와의 구원 의지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구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고, 아무 것도 없는 분이십니다. 과거를 잊지 않도록 자신의 지나온 길을 부끄러워하고 한탄해야 합니다(32). 하나님께서는 유배민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이방민족 가운데 더럽혀진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초라한 현실의 극복(33-38)

풍성한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것은 그분의 거룩한 이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서 구원하시고 새 언약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마음에 부어 주신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33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하게 하는 날에 성읍들에 사람이 거주하게 하며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인즉 34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폐하게 보이던 그 황폐한 땅이 장차 경작이 될지라 35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폐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주민이 있다 하리니 36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3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38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33-38)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언하시며, 그들이 다시 정착하고 풍성한 삶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과 수치를 치유하시고, 이스라엘이 회복된 모습으로 많은 민족에게 보여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회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들에게 새로운 소망과 미래를 제공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1) 폐허 재건(33-36)

 

바벨론의 공격으로 허물어진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거의 복구되지 못했고, 경작지도 황무지로 버려졌습니다. 특히 성벽의 파괴가 치명적이었습니다. 외부의 침략에 그대로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읍과 성벽이 재건돼 주민들이 안전하게 살고, 황폐하였던 땅이 경작되고 에덴동산처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33-36). 바벨론의 공격으로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과 유다 성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거의 복구되지 못했고 경작지도 황무지로 버려졌습니다. 성벽은 파괴되어서 외부의 침략에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이제 이것들이 재건될 것을 말씀합니다.

 

(2) 인구 증가(37-38)

 

이스라엘의 악행으로 단절됐던(14:3-4; 20:3)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통로도 다시 열립니다(37-3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당신께 간구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간구할 내용은 멸망 이후 현저하게 그 수가 줄어든 주민들에 관한 것입니다. 축제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물로 드려지는 수많은 양 떼처럼 폐허가 된 성읍들이 사람의 무리로 가득 차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 절망하지 말고 여호와께 간구하면 됩니다. 그분께서 개입하셔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다 이뤄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의 죄로 인해 고통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셔서 다시 그분의 길을 따르도록 하십니다. 이러한 회복은 단순히 개인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역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공동체로 모으시고,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의 공동체로서 성장하게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풍성한 삶과 안전한 미래를 약속하시며,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소망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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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36-01)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선언

에스겔 36장 1-15절


 

시인 유한진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지난 겨울 얼어 죽은 그루터기에도 새싹이 돋습니다. 말라 죽은 가지 끝 굳은 티눈에서도 분홍 꽃잎이 눈부시게 피어납니다. 해마다 기적에 증거가 되고 싶습니다.’ 아무리 짓눌러도 생명은 다시 피어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말라 죽은 가지 끝에서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고 분홍빛 꽃잎이 피어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죽은 생명 가운데 새로운 믿음이 솟아나길 소망합니다.

 

  • 에스겔 36-38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일 산에 멸망의 심판을 선포하셨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회복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이방 민족들의 노략거리와 조롱거리, 특히 에돔의 먹이가 된 이스라엘이 다시는 이방의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심판하고 떠나셨던 여호와께서 돌아오셔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절망적 형편(1-4)

하나님의 백성들이 망한 이유는 연약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방 나라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 반역해서 자기 멋대로 행하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을 기뻐하며 따라 행할 때 강력한 힘이 발휘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1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원수들이 네게 대하여 말하기를 아하 옛적 높은 곳이 우리의 기업이 되었도다 하였느니라 3그러므로 너는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너희를 황폐하게 하고 너희 사방을 삼켜 너희가 남은 이방인의 기업이 되게 하여 사람의 말 거리와 백성의 비방 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4그러므로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산들과 멧부리들과 시내들과 골짜기들과 황폐한 사막들과 사방에 남아 있는 이방인의 노략 거리와 조롱 거리가 된 버린 성읍들에게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1-4)

 

앞에서 하나님께서 에돔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었지만, 본문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내용이 선포됩니다. 그동안 에돔을 통해 고난과 핍박을 경험한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하십니다.

가나안 땅은 ‘이방인의 기업’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상숭배와 피로 물든 ‘이스라엘의 산들’에 ‘칼과 기근과 전염병’의 재앙을 선포하게 하셨던(6:11-12) 여호와께서 이방인의 조롱거리가 된 ‘이스라엘의 산들’에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심판의 시대를 끝내시고 값없이 회복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백성의 절망적 형편을 기억하시고 원수들의 비방에 반응하십니다. 유다의 멸망은 경쟁 관계에 있었던 주변 나라들에 기쁨을 주었습니다.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탐내던 땅을 차지할 기회가 왔다고 환호했습니다(2; 35:10).

본문에서 ‘높은 곳’(2)은 문자적으로는 ‘언덕들’로, 1절의 ‘산들’과 같은 의미입니다. 대부분 산지로 이뤄진 이스라엘의 지리적 환경을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옛적’은 문자적으로는 ‘영원’으로, 신학적 함의를 갖고 사용된 수식어입니다. 가나안은 여호와께서 오래전에 영원한 기업으로 이스라엘에 주신 땅입니다(참조. 출 6:8). ‘기업’은 11:15과 33:24에도 나오는데, 유배를 모면한 유다 사람들도 가나안이 자신들의 ‘기업’이 됐다고 주장했습니다. 가나안에 남은 자들이나 주변 민족들이나 모두 가나안의 소유권을 탐냈습니다.

개역개정의 5절 번역에는 빠졌지만, 3절에서 7절까지의 다섯 절은 모두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3-7절의 말씀을 가나안 땅을 노리는 원수들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황폐해진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여호와께서 직접 원수들의 탐욕과 교만에 맞서십니다. ‘남은 이방인의 기업’과 ‘사람의 말거리와 백성의 비방거리’가 된 이스라엘의 비참한 처지가 여호와께서 이들의 운명에 개입하시는 동기가 됩니다(3-4). 길고 흩어져 헤매는 양 떼가 들짐승의 먹이가 되(34:5-6), 황무지로 변한 이스라엘 온 땅이 이방 민족의 약탈거리와 조롱거리가 됐습니다.

25장에 의하면 암몬은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마음을 다하여 멸시며 즐거워하였고’(6), 모압은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8)고 조롱했고, 에돔은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12), 블레셋은 ‘옛날부터 미워하여 멸시하는 마음으로 원수를 갚아 진멸하고자’(15) 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두로도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26:2) 하고 기뻐했습니다.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탐욕스러운 주변 민족들의 차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습니다. 여호와께 심판을 받았기에 그분께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땅의 주인 여호와께서 눈을 감지 않고 개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 이스라엘’(8,10)이라고 절망적인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5-7)

성도들은 고난 앞에 섰을 때, 더욱 더 굳건해져 갑니다. 고난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을 돌아보고, 세상에서 떨어져 나오라고 흔드시는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을 괴롭혔던 사람들은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방 민족을 향해 분노하십니다.

 

5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내 맹렬한 질투로 남아 있는 이방인과 에돔 온 땅을 쳐서 말하였노니 이는 그들이 심히 즐거워하는 마음과 멸시하는 심령으로 내 땅을 빼앗아 노략하여 자기 소유를 삼았음이라 6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예언하되 그 산들과 멧부리들과 시내들과 골짜기들에 관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질투와 내 분노로 말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이방의 수치를 당하였음이라 7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맹세하였은즉 너희 사방에 있는 이방인이 자신들의 수치를 반드시 당하리라(5-7)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지만,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의 기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분의 양 떼였습니다(34장).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6:3)에 칼의 심판을 선언하셨던 여호와께서 동일하게 산들과 멧부리와 시내들과 골짜기들(6;4)에 이스라엘의 멸망에 환호한 민족들의 징벌을 약속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다고 가나안의 민족들의 차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은 그분의 소유로 그분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차지할 수 없습니다. 가나안을 빼앗아 제 소유로 삼으려는 자들은 땅의 소유주인 여호와의 권리를 침해하는 자들이기에 그분의 보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방 민족들은 여호와께서 그곳에 계심을 알아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훼손당한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스라엘 땅을 탐하는 자들과 에돔을 ‘맹렬한 질투’로 치실 것입니다(5). 이스라엘의 배반에 질투하셨던 여호와께서 당신 땅을 탐하는 민족들에게 질투와 분노로 보응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민족들에 당한 것에 상응해서 민족들도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7). 음란과 음행의 죄를 짊어지고(23:35) 수치를 당하던 이스라엘을 조롱하던 자들이 여호와의 소유를 탐하다가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남아 있는 이방인’(3,5)은 바벨론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이방 민족을 의미합니다. 에돔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에돔이 유다 남쪽으로 국경선을 확장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8-12)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패해서 힘을 잃고 버려진 것과 같은 상태에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들의 자격을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부르면 성도들의 인생에 가장 낮은 곳까지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세워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이전보다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8그러나 너희 이스라엘 산들아 너희는 가지를 내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열매를 맺으리니 그들이 올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이라 9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 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10내가 또 사람을 너희 위에 많게 하리니 이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을 성읍들에 거주하게 하며 빈 땅에 건축하게 하리라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8-12)

 

독립인칭대명사가 사용된 ‘그러나 너희’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에는 수치를 당할 민족들과 전혀 다른 운명이 마련됐음을 알려줍니다. 민족들의 노략거리와 비방거리가 됐던 이스라엘이 모든 수치로부터 벗어납니다. 유배민이 돌아올 때가 가까웠기에 하나님께서 이들이 어려움 없이 정착할 수 있도록 생활환경을 마련해주십니다. 땅에 풍요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무성한 나무들이 돌아오는 유배민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등을 돌려 얼굴을 가리셨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로 몸을 돌리십니다. 여호와의 돌아오심은 구체적인 열매로 그 모습을 들어내십니다.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일 년 반 이상 계속됐던 바벨론의 공격은 생존을 위한 토대를 완전히 파괴해버렸습니다. 경작지는 황무지가 되었고 산림은 남벌됐습니다. 땅이 결실을 맺지 못하기에 가나안에 남은 자들에게 굶주림은 일상사가 됐습니다. 유배민이 돌아온다 해도 먹을 것이 없어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귀향에 앞서 여호와께서 땅의 풍요를 회복시켜주십니다(8). 헐벗고 메말랐던 나무들이 다시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습니다. 무성해진 나무들이 돌아오는 유배민을 맞습니다. 우상숭배와 불의에 사로잡힌 당신의 백성에게 등을 보이고 떠나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이들에게로 몸을 돌리십니다(9). 그분의 떠나심으로 저주를 받아 메말랐던 땅이 그분의 돌이키심으로 축복을 받아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사람들이 떠나고 버려졌던 땅이 다시 경작되고 씨가 뿌려집니다. 폐허가 된 성읍들이 재건되고, 전쟁으로 많은 사람을 잃고 초라해졌던 이스라엘의 주민이 예전처럼 많아집니다(10).

유배기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인구 감소였습니다. 왕정 시대 말기와 비교해 볼 때 멸망 이후 가나안의 인구는 대략 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전쟁으로 죽거나 유배를 당하거나 주변 나라로 떠나거나 기근과 질병으로 죽거나, 주민의 수는 계속 감소했습니다. 영토 상실과 더불어 인구 감소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절망스럽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살아남는 것마저 위태로워졌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왕정 시대보다(‘처음보다’) 더 잘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11). 이스라엘 산들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해주십니다. 지금은 주민도 없이 황량하게 남겨진 땅이 다시 사람과 짐승으로 넘치게 될 것입니다. 심판 이후에 있을 미래의 축복이 과거의 축복을 능가합니다. 12a절은 관점을 달리해서 10a절의 약속을 반복합니다. 고대적 사고에 의하면 폐허가 된 땅은 귀신이나 들짐승이 사는 위험한 장소이기에 사람들은 그리로 지나다니지 않았습니다. 저주를 받아 버려졌던 가나안 땅에 여호와의 복이 다시 주어지고 사람들이 살게 됩니다. 예전처럼 가나안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소유가 됩니다. 이스라엘 산들에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잡혀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12b).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여자가 수치를 당하는 것처럼, 주민들이 감소해서 이스라엘 땅이 민족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는데,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수치에서 해방해 주시는 하나님(13-15)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는 수치와 암담한 처지는 짊어져야 할 죗값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곤경에 눈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회복시켜 주십니다. 수치스러운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크고 작은 환란이나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13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는 사람을 삼키는 자요 네 나라 백성을 제거한 자라 하거니와 14네가 다시는 사람을 삼키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나라 백성을 제거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내가 또 너를 여러 나라의 수치를 듣지 아니하게 하며 만민의 비방을 다시 받지 아니하게 하며 네 나라 백성을 다시 넘어뜨리지 아니하게 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셨다 하라(13-15)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땅이 폐허로 변한 상황을 언급하며, 하나님께서 그 땅을 다시 회복시키고 기쁨과 번영을 되찾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이방 민족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언하신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슬픔과 수치를 제거하고, 다시금 그들의 땅에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신다.

 

(1) 민족들의 조롱 극복(13-14)

 

수치스러운 삶을 사는 이스라엘을 향한 민족들의 조롱인 ‘너는 사람을 삼키는 자요 네 나라 백성을 제거한 자’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 온 족속의 회복을 내다보기에(10), 이것은 주전 587년의 멸망과 유배에 한정되기보다는 주전 8세기 후반부터 계속된 재앙과 관련해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2) 수치의 극복(15)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32년과 722년 앗수르의 침략으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유배를 당했습니다. 유다도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포위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고, 주전 597년의 첫 번째 유배와 주전 587년의 멸망과 두 번째 유배로 많은 주민을 잃었습니다. 적어도 인구의 반 이상이 이스라엘 땅에서 사라졌습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자라는 주변 나라들의 비방이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의 운명을 되돌려주십니다.

 

‘나는 네가 다시는 민족들의 수치를 듣지 않게 하고, 다시는 백성들의 조롱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다시는 네 민족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으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 (15절의 사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징계는 처음보다 더 나은 회복을 전제로 합니다.그것이 자기 백성을 향한 혹독한 심판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심판을 허락하신 참된 본 뜻입니다.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가 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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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35-01)


세일산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에스겔 35장 1-15절


 

도널드 클링턴이 ‘인생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고치는 데 20%의 노력을 사용하고 나머지 80%는 자신의 장점을 더 강화시키는데 사용했다.’라고 말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자신이 잘못하는 것을 고치려는데 힘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자신이 잘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고, 더욱더 힘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아무리 고친다고 한들, 물고기는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물속에서 헤엄을 더 잘하고, 더 깊은 물속으로 갈 수 있는 장점을 더 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잘 할 수 있는 장점은 이 시대를 위한 기도하는 것입니다.

 

  • 주전 587년 바벨론에 멸망당한 유다의 위기는 내부 만에 있지 않았습니다. 치명적 상체를 입은 유다는 주변 나라들의 좋은 먹이었습니다. 특히 유다 남부 네겝으로 세력을 확장해오는 에돔의 위험은 심각했습니다. 국가 권력이 없기에 에돔의 침략을 방어할 수 없었습니다. 귀향을 고대하며 사는 유배민은 가나안 땅의 현실을 보며 절망에 빠졌습니다. 

 

도입부 : 세일 산에 대한 예언(1-2)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고 인도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고난과 징계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중심은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민족을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심을 보여줍니다.

 

1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네 얼굴을 세일 산으로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1-2)

 

에스겔의 핵심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정하지 않는 백성들에 대한 심판과, 또한 그들을 되돌려 하나님을 경외하며 찾고자 하는 자들에 대한 회복의 메시지입니다. 세일 산에 대한 심판(35:1-36:15)은 전반부(35:1-15)는 이방인에 대한 심판에 대한 예언이라고 볼 수 있으며, 후반부(36:1-15)는 이스라엘의 편에 초점을 맞추어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에돔은 한 조상에서 나온 친족으로 서로를 인정했지만, 양자 사이의 정치적 관계는 조상 야곱과 에서가 보여준 시기와 불화의 관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당할 때와 그 이후 골수에 사무친 경험은 에돔을 유다의 철천지원수로 만들었습니다. 오바댜 11-14절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에서의 후손들은 바벨론 편에 서서 원수처럼 행동했습니다. 바벨론 점령군이 제비뽑아 포로들을 나누어 가질 때 약탈과 승리를 즐겼고, 유다의 자손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보고 기뻐했으며, 유다의 불행을 기회로 삼아 탐욕을 채웠고, 도주로를 감시하다가 피신하는 자들을 잡아 바벨론 점령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유다의 멸망 이후 에돔의 ‘영원한 적개심’은 가나안 땅에 대한 욕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던 주변 나라들과 달리 에돔은 네겝 지방으로 내려와서 유다 산지 남쪽 지역을 장악해 들어왔습니다. 영토를 지킬 조직과 군사력이 없었기에 유다는 국경선을 옮겨오는 에돔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에돔이 가나안을 차지한다면 유배민의 귀향과 이스라엘의 회복도 허황된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이 극도로 절망적이었을 때 선지자 에스겔이 등장해 소망을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가나안은 땅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직접 지켜주십니다. 가나안을 소유하려는 자는 여호와의 땅을 탐하는 자로 그분의 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에돔의 위협은 일시적인 것으로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여호와에 의해 곧 극복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의존해 절망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그분께서 어떻게 회복의 약속을 이행하실지 기다리면 됩니다.

에스겔 6:2에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산들을 향하여 네 얼굴을 돌리고 그것들을 거슬러 예언하라’고 하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얼굴을 세일 산으로 향하고 그를 거슬러 예언하라’고 하십니다. 개역개정은 달리 번역했지만 원문에서는 두 곳의 표현이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여호와께서 에돔의 심판을 결정하십니다. ‘세일 산’은 특정 산의 이름이 아니라, 아카바 만 동쪽에 위치한 험한 산악 지대를 가리키는 지명입니다. 여기서는 36:1의 ‘이스라엘 산들’에 대응하는 표현으로 에돔을 대신하여 사용됐습니다.

 

첫 번째 선포(3-4)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자주 던져지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고하거나 연약한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악인이 형통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 같은 삶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에돔의 멸망을 예언하는 에스겔 35장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직접 자신을 계시해주시는 중요한 장입니다.

 

3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세일 산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네가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할지라 4내가 네 성읍들을 무너뜨리며 네가 황폐하게 되리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3-4)

 

본문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강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 동안 일하지 말고, 그날은 거룩한 날로 지킬 것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성막 건축을 위해 필요한 재료를 모으는 일은 안식일과는 별개로 진행될 수 있음을 언급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공동체의 헌신을 동시에 강조합니다.

 

(1) 폐허의 심판(3-4a)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손을 펴서 유다 광야 세일에서부터 리블라(디블라)에 이르기까지 온 땅을 황량하고 황폐하게 하셨던(6:14) 여호와께서 이제 세일 산 위로 손을 펴서 에돔을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으로 만드십니다.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은 ‘황무지와 불모지’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이 표현은 6:14(‘황량하 원하고 황폐하게’); 33:28,29(‘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에 세 번 더 나오는데, 이스라엘 땅의 심판과 관련해 사용됐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으로 이스라엘 땅이 ‘황무지와 불모지’가 된 것처럼, 에돔 땅도 마찬가지로 ‘황무지와 불모지’가 됩니다.

 

(2) 인지 양식(4b)

 

6장에서 ‘이스라엘의 산들’에 선포된 심판이 성취됐듯이 ‘세일 산’에 선포된 멸망의 심판도 정해진 때가 되면 반드시 이뤄질 것입니다. 세일의 성읍들을 폐허로 만들어 황무지가 되게 하는 여호와의 심판을 통해 에돔은 여호와를 알게 됩니다.

 

두 번째 선포(5-9)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는 세상에서 강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없이 자신이 스스로 지켜야 하기 때문에 자기 힘을 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도 역시 자신의 힘을 얻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십니다. 더 이상 자기 힘을 의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약속만 의지하여야 되는 고달픈 인생이 되었습니다.


5네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마지막 때에 칼의 위력에 그들을 넘겼도다 6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너에게 피를 만나게 한즉 피가 너를 따르리라 네가 피를 미워하지 아니하였은즉 피가 너를 따르리라 7내가 세일 산이 황무지와 폐허가 되게 하여 그 위에 왕래하는 자를 다 끊을지라 8내가 그 죽임 당한 자를 그 여러 산에 채우되 칼에 죽임 당한 자를 네 여러 멧부리와, 골짜기와, 모든 시내에 엎드러지게 하고 9너를 영원히 황폐하게 하여 네 성읍들에 다시는 거주하는 자가 없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5-9)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과 제사에 대한 규례를 주시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각 지파의 기부와 성막 건축에 필요한 재료에 대한 상세한 지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과 헌신을 강조합니다.

 

(1) 심판의 이유(5)

 

여호와께서 에돔을 멸망의 심판에 넘기실 때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에돔은 옛날부터 가졌던 적개심을 품고 이스라엘 자손이 환난을 당할 때 그들을 칼의 위력에 넘겼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에돔의 적개심은 그 뿌리가 깊습니다. 창세기 27:41에 따르면 에돔의 시조 에서는 동생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을 가로챈 일로 인해 ‘야곱을 미워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야곱을 죽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에 병행하는 ‘죄악의 마지막 때는 마지막 벌을 받을 때’로, 주전 587년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 멸망시켜버린 때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빈사 상태에 빠졌을 때 에돔은 마치 점령군인 양 칼을 휘둘렀습니다. 일부 지파들은 바벨론 군대에 길잡이나 용병으로 참여했습니다.

 

(2) 멸망의 심판(6-9a)

 

이들의 부역 행위는 아주 노골적이었습니다. 에돔은 전투 중에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환란을 피해 도망하는 가엾은 사람들을 쫓아가 유혈 참사를 즐겼습니다.

 

(3) 인지 양식(9b)

 

이제 여호와께서 ‘피의 복수자’가 되셔서 유다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른 에돔을 칼에 붙여 심판하십니다. 피 흘리기를 즐긴 에돔이 피 흘림을 당합니다. 여호와께서 세일 산을 황무지로 만들어 오가는 사람이 없게 하십니다. 산과 골짜기와 시내가 칼에 죽임당한 자들의 시체로 뒤덮입니다. 영원한 멸망에 떨어진 소돔과 고모라처럼 영원한 황무지가 돼 다시는 사람이 살지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영원한 적개심’이 에돔을 영원한 멸망에 떨어뜨립니다. 멸망의 심판을 통해 에돔은 여호와를 알게 됩니다.

 

세 번째 선포(10-13)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창세기 17장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엘 샤다이, 전능자이신 하나님에 대해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삭을 드리고자 하는 아브라함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그 삶을 드리기는 자마다 모든 것과 피할 길을 예비하시는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십니다.

 

10네가 말하기를 이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 것이며 내 기업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느니라 11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그들을 미워하여 노하며 질투한 대로 내가 네게 행하여 너를 심판할 때에 그들이 나를 알게 하리라 12네가 이스라엘 산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 산들이 황폐하였으므로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삼키게 되었다 하여 욕하는 모든 말을 나 여호와가 들은 줄을 네가 알리로다 13너희가 나를 대적하여 입으로 자랑하며 나를 대적하여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을 내가 들었노라(10-13)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짓기 위해 지혜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세우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와 이해를 주셔서 성막의 모든 기구와 장식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을 부여하셨습니다. 이들은 성막의 구조와 제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정교하게 제작할 책임을 맡게 됩니다. 이를 통해 공동체의 협력과 하나님의 뜻에 따른 봉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심판의 이유(10)

 

에돔은 다윗 왕조의 몰락과 이후의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이용해 유다 산지 남쪽으로 정착촌을 확장했습니다. 네겝 지방이 에돔의 수종에 떨어졌습니다. 에돔의 욕심은 유다 변경에 머물지 않습니다. 에돔은 유다와 이스라엘, 즉 가나안 땅의 새로운 주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 것이며 내 기업이 되리라’(10). ‘두 민족’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두 땅’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영토와 남왕국 유다의 영토로 가나안 땅을 가리킵니다. 에돔은 유다뿐만 아니라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한 이스라엘의 땅에도 욕심을 냈습니다.

 

(2) 진노의 심판(11)

 

에돔은 아마도 에서의 후손으로서 동생 야곱 후손의 상속 재산을 넘겨받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에돔은 한 가지 사실, 곧 가나안의 소유주가 여호와라는 사실(참조. 레위기 25:23)을 간과했습니다. 전쟁과 유배로 많은 사람이 가나안을 떠났지만, 여호와마저 떠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가나안의 소유주로 변함없이 ‘거기에’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심판하셨다고 땅의 소유권마저 포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은 언제나 그분의 소유로, 그곳에 누가 살지는 그분만이 결정하십니다. 가나안을 탐하는 에돔의 행태는 여호와의 소유권을 침해하고 여호와를 대적하는 행위였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당신 소유를 탐내는 에돔을 심판하져서 누가 가나안의 주인이신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3) 진노의 이유(12-13)

 

12절의 ‘욕하는 모든 말’은 가나안에 대한 여호와의 소유권을 부정하고 제 것인 양 떠드는 말이고, 13절의 ‘나를 대적하여 입으로 자랑하며 나를 대적하여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은 여호와의 능력에 대한 비방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 에돔은 여호와를 자기 백성도 보호해줄 수 없었던 신으로 조롱했던 것 같습니다.

 

네 번째 선포(14-15)

이웃의 불행을 이용한 탐심과 양심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자기 욕망에 취해 형제와 이웃을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나의 존재도, 성공도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을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던 나라처럼 사라지게 하실 것입니다.

 

14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온 땅이 즐거워할 때에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되 15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폐하므로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리라 세일 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무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14-15)

 

본문에서는 성막의 제사에 필요한 기구들, 즉 금, 은, 동으로 만든 제단과 성소의 기구들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구들을 만들기 위해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에게 필요한 재료와 기술을 주셨습니다. 또한 이들은 성막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은 성막의 중요성과 제사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1) 죄에 상용하는 징계의 심판(14-15a)

 

여호와께서 에돔 온 땅을 폐허로 만들어 그 교만을 징벌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상속 재산 가나안이 황폐하게 되었다고 기뻐하던 에돔이 같은 운명에 떨어집니다. 온 세상이 에돔의 황폐함을 보고 기뻐합니다. 에돔은 자신이 무슨 짓을 범했는지 폐허가 된 땅을 보고서야 깨달을 것입니다.

 

(2) 인지 양식(15b)

 

에돔처럼 멸망의 심판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 백성까지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통치권을 무시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중시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에돔의 교만과 악행에 대한 경고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정의에 따라 살아가야 하며, 타인을 해치지 않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이루시며 모든 민족과 개인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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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34-02)


풍성한 생명의 길로 이끄신 하나님

에스겔 34장 17-31절


 

‘언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에 계약을 말합니다. 언약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옛 언약은 시내산에서 주신 첫 번째 언약이며, 그 시내산 언약은 인간의 부족함의 죄악으로 인해서 완전한 언약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한 새 언약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새 언약으로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언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때만이 언약은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 앞 단락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이들의 통치를 받는 백성 전체를 목자들과 양 떼에 비교했는데, 여기서는 앙 떼가 강한 양들과 약한 양들의 두 부류로 구분됩니다. 강하고 살진 양들이 약하고 여원 양들을 발로 짓밟고 밖으로 흩어버립니다. 악한 목자들 대신 난폭한 양들이 등장해서 연약한 양들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약한 양을 괴롭히는 강한 양(17-2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지키십니다. 또한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자신의 핍박을 받는 양들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양들을 반드시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목자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본문은 특별히 악한 양들에 대해서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1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 18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19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20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리라 21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를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 22그러므로 내가 내 양 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17-22)

 

패망 이후 이스라엘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기존의 공적 건위와 질서가 와해되면서 무질서와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포악한 지도자들을 대신해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착취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 위협의 말씀(17)

 

참 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세상에서 고통 받는 양 떼를 보호하시기 위해 이스라엘 지도자들뿐 아니라 정치권력과 결탁한 상위 계층 사람들까지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25:31-46에 양과 염소의 비유와 흡사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가운데 재림하셔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겠다고 하신 비유와 굉장히 흡사합니다.

 

(2) 고발의 말씀(18-19)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배는 유다 사회에 극심한 혼란의 상처를 남겼습니다. 공적 권력이 사라진 자리를 사적 권력이 차지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양 떼를 포악으로 다스리다가 들짐승의 먹이로 만든 악한 목자들 대신 살진 강한 양들이 등장해서 약한 양을 괴롭혔습니다.

악한 양들을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18)라고 지적하십니다. 한 울타리 안에 사는 양들이 다른 양들에 의해 생존을 위협받았습니다. 풀밭이 넓고 물이 많아 모든 양이 함께 먹고 마시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강한 양들은 이전 목자들처럼 탐욕을 부리며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좋은 풀밭에서 먼저 배불리 먹고 나서는 다른 양들이 먹지 못하게 풀밭을 짓밟고, 맑은 물을 마시고 나서는 다른 양들이 마실 수 없게 발로 더럽혔습니다.

힘없는 양들은 어쩔 수 없이 짓밟힌 풀을 뜯어 먹고 더러워진 물을 마셔야 했습니다. 폭력을 사용해 먹고 마실 것을 독점하려는 강한 양들의 횡포에 힘없는 양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들짐승이 숨어 기다리는 들판으로 내몰리지만,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3) 심판의 말씀(20-22)

 

야윈 양들의 절망적 처지에 양 떼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개입하십니다. 그분은 여윈 양들을 옆구리와 어깨로 떼밀고 뿔로 밀쳐내는 살진 양들의 횡포를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공동체의 연대성에 최소한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무자비하게 동료 양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살진 양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정의대로’ 양 떼를 먹이시는 분께서 살지고 강한 양을 없애버리고, 야위고 약한 양을 구해내 더는 약탈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 백성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는 자는 그분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양 떼에 속하려면 다른 양들과 먹고 마실 것을 나누며 더불어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내 양 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22)라고 자신의 양 떼를 구원하고 악한 양들을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실 목자 다윗(23-24)

성도들이 고난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켜보십니다. 지켜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선한 목자로 다가가셔서 모든 문제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며, 그 안에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이웃을 괴롭힌 양들은 심판하시겠지만, 연약한 양들을 위해서는 선한 목자를 보내실 것입니다.

 

23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24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23-24)

 

하나님께서는 ‘한 목자’를 세워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 계열의 한 목자를 세워 여위고 약한 양들을 먹이고 보호하게 하실 것입니다. 목자를 수식하는 ‘한’(유일한)은 회복된 이스라엘이 분열을 극복하고 한 민족이 될 것을 내다봅니다. 다윗 시대처럼 ‘한 하나님’을 섬기는 ‘한 민족’ 이스라엘이 ‘한 목자’에 의해 인도와 보호를 받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구원 시대의 목자를 두 번이나 ‘내 종 다윗’으로 부르십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목자와 양 떼의 관계입니다. 양 떼가 목자를 따라야 하듯이 종은 주인에게 속한 자로 주인의 명령에 따라야 하고, 목자가 양 떼를 안전하게 돌보듯이 주인은 종을 지켜줍니다. 악한 목자들과 달리 미래의 통치자는 주인이신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해 그분의 양 떼를 성심껏 돌봅니다.

24절은 아마도 언약 양식의 변형된 형태처럼 보입니다.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여호와께서 양들의 불순종으로 파기된 언약 관계뿐만 아니라 멸망당한 다윗 왕조도 회복해 주십니다. ‘왕’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나시’는 원래 ‘제후’를 가리킵니다. 에스겔은 ‘나시’를 왕과 동의어처럼 쓰는데(참조.37:24-25), 여호와의 왕권을 강조하기 위해 ‘왕’ 대신 ‘나시’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내 종 다윗’은 단순히 다윗 집안의 후손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미래의 통치자에게 붙은 ‘내 종 다윗’과 ‘한 목자와 나시’는 사무엘상 16:1-13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이 그의 아버지와 형들을 제사에 초대했을 때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고 밖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는 집안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던 이새의 여덟째 아들 다윗을 선택하십니다.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제 다시 여호와께서 다윗 왕조의 원뿌리에서 다윗과 같은 목자를 택해 당신 양 떼를 맡기실 것입니다(참조, 사 11:1; 미 5:2). 다윗이 자신을 택하신 여호와께 철저히 순종했던 것처럼, 미래의 다윗도 자신을 택하신 분께 온전히 순종할 것입니다. ‘내 종 다윗’은 후에 양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보호와 축복의 약속(25-31)

‘화평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화평을 보장한 약속입니다. 이것은 대상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포하시는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화평의 언약을 맺으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28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도 아니하고 평안히 거주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29내가 그들을 위하여 파종할 좋은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여러 나라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30그들이 내가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고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5-31)

 

하나님께서는 이제 저주의 시대를 축복의 시대로 바꾸십니다. 메마른 땅이 다시 소산을 내고, 폐허가 된 시온 산이 복의 근원이 되고, 대적들이 다시는 넘보지 못하는 나라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그 회복의 시점이자 정점입니다.

 

(1) 화평의 언약(25)

 

구원받은 새로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보호와 축복가운데 평화롭게 삽니다. 여호와께서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풍요와 안전을 보장해주십니다(25). 그분의 구원 의지가 생명에 적대적인 것들을 모두 쫓아내고 화평을 가져다줍니다. 그분께서 땅에서 위험한 짐승들을 없애주시기에 그들은 광야에서도 평안히 살고 숲에서도 잠들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적대 세력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살게 됩니다. 화평은 창조와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질서에 속하기에 이스라엘이 자기 능력으로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땅의 축복(26-27a)

 

이스라엘은 언약을 준수함으로써 그분께서 보장해주시는 화평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언약파기로 저주받은 땅에 다시 생명이 주어집니다(26-27a). 폐허가 된 시온 산이 복의 근원이 되고, 메마른 땅이 축복의 비로 생명을 되찾습니다. 자연 질서가 회복되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알맞게 내리고, 나무가 열매를 탐스럽게 맺고, 땅이 소출을 풍족히 냅니다.

메소포타미아나 애굽과 달리 가나안에서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비에 의존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때를 따라’ 내리는 비는 농산물의 결실에 결정적이었습니다. 뜨겁고 건조한 여름이 끝나고 12월의 우기가 시작하기 전인 10-11월에 내리는 ‘이른 비’와 우기가 끝나고 여름의 건기가 시작되기 전인 3-4월에 내리는 ‘늦은 비’는 식물의 성장과 결실에 요긴했습니다.

 

(3) 이방 압제에서 해방(27b-28)

 

구원 시대의 축복은 땅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방 민족들의 폭력과 억압에서 해방됩니다(27b-28). 여호와께서 저들의 멍에를 부수고 종살이에서 해방하시고, 민족들이 다시는 넘보지 못하게 지켜주십니다. 악한 목자들의 폭력적 통치로 인해 흩어져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8)이 됐던 여호와의 양 떼가 ‘다시는 이방이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도 아니하고 평안히 거주하게 된다’(28). 여호와께서 세우시는 목자 다윗이 그분의 종으로 양 떼를 돌보기에 모든 위험과 폭력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살게 됩니다.

 

(4) 기근과 수치에서 해방(29)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복된 소나기를 내려주셔서 땅이 비옥해지고 식물들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기에 ‘다시는’ 그 땅에서 굶주림으로 생명을 빼앗기지 않고, ‘다시는’ 민족들에게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29).

 

(5) 언약의 회복(30-31)

 

30절은 언약 관계 회복 이상을 내다보는 말씀으로, 원문은 다음과 같이 옮길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나 여호와 저희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있음을, 그리고 그들, 곧 이스라엘의 집이 내 백성임을 알게 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

이스라엘은 두 가지, 곧 언약관계의 회복과 여호와의 임재를 알게 됩니다. 양자가 서로 보충적이지만, ‘함께 계심’에 관한 언급은 에스겔의 문맥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우상숭배로 더러워진 예루살렘과 성전을 심판하고 떠나셨던(8-11장) 여호와께서 다시 시온 산으로 돌아오셔서(26)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후에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여호와의 영광이 새 성전으로 돌아오실 때 이용한 동문이 다시 열리지 않게 닫힌 것을 봅니다(44:1-2). 언약관계를 회복시키신 여호와께서 언제나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분의 함께하심이 26-29절의 축복을 지속해서 보장해줍니다.

31절은 34장 전체를 마감하는 구절입니다. 30절에서 사실적으로 언급된 언약 관계가 비유적으로 표현됩니다. 민족들로부터 구별을 전제하는 ‘내 백성’ 대신에 그분의 소유와 돌봄을 강조하는 ‘내 양’과 ‘내 초장의 양’이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여호와의 초장에 있는 그분의 양 떼입니다. 여호와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11-16) 이스라엘 족속을 당신 초장의 양 떼처럼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 떼를 돌보시고, 악한 목자들을 심판하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양을 보호하고, 올바른 목자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전과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강조하며, 신뢰와 순종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위해 최선의 길을 준비하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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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34-01)


양 떼를 먹이신 참 목자이신 하나님

에스겔 34장 1-16절


 

성경에서는 많은 곳에서 성도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양과 목자’로 비유합니다. 특히 시편 23편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동물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목자 되심을 인정할 때, 삶에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자 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면 여전히 공허하고 방황하여 괴로운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양 떼가 흩어질 때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양을 돌볼 책임이 있는 목자가 자기 역할을 전혀 등한시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양을 돌보도록 목자로 위임받은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돌보기는커녕 자기 뱃속을 채우기 위해 양을 잡아먹는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목자의 무관심과 탐욕이 양에게 치명적인 것처럼, 악한 통치자들로 인해 하나님 백성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도입부 : 말씀의 계시(1)

하나님께서는 자기 양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양들에게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 선한 일꾼을 통해서 바른 방향을 향한 말씀으로 양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악한 목자들을 심판하실 것을 위해 말씀을 전하십니다.

 

1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1)

 

에스겔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가운데에 위치한 25-32장에는 민족들에게 선포한 말씀이, 1-24장에는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선포한 심판의 말씀이, 33-48장에는 멸망 이후에 선포한 회복의 말씀이 수집됐습니다.

현재의 위치에 따라 읽자면, 1-10절의 말씀은 유다가 멸망한 이후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왕정 시대를 되돌아보는 회고적 말씀일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멸망의 심판이 이미 성취됐기에 2절의 화 선포(‘이스라엘 목자들은 화있을진저’)가 무의미해집니다.

본문의 시점을 현재로 이해하는 것이 좋지만, 이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목자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가 불분명합니다. 목자들의 무능력과 탐욕 때문에 양 떼가 사방으로 흩어져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음은(5-6,8) 목자들이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통치하였던 왕들임을 시사해주고, 목자들에게서 그 직분을 빼앗으리라는 미래 시점의 심판 선언(10)은 목자들이 유배기 공동체의 정치 지도자들임을 전제합니다. 이 모호성은 왕정 시대의 목자들과 유배기의 목자들을 한통속으로 만들어 고발하기 위한 ‘의도된 모호성’입니다.

에스겔은 ‘목자들’ 대신 ‘이스라엘 목자들’을 사용해 화를 선포했는데,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34:2에만 두 번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양떼를 돌보도록 목자로 고용한 모든 통치자가 고발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지 않는 불의한 목자란 점에서 왕정 시대의 통치자들과 유배기 지도자들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왕정 시대의 악한 목자가 양 떼를 포악으로 다스리며 잡아먹었던 것처럼, 유배지의 목자들도 자기만 먹고 양 떼를 먹이지 않았습니다.

 

악한 목자 : 이스라엘의 통치자(2-10)

목자가 되려면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양 떼를 돌봐야하기 때문에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점점 희생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결과로 양 떼들도 교만해져서 자신의 지도자를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목자들의 형태를 지적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2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3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4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5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6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7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8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9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10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2-10)

 

하나님께서는 양들을 돌보지 않고 이용하기만 하는 목자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친히 대적하실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굶주릴 ㅊ례입니다. 이제 그들이 버림받을 시간입니다.

 

(1) 탐욕스러운 목자들(2-4)

 

여호와께서 먼저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화를 선포하십니다. 양 떼를 먹이는 일이 목자에게 맡겨진 사명임에도 이들은 제 배를 채우는 일에만 열심이었습니다. 주인의 양 떼를 돌보도록 고용된 일꾼들이 소유주의 양 떼를 임의로 처분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운 자들이 그처럼 불의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통치 권력을 이용해 제 잇속만 차렸습니다. 이들에게 백성은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착취의 대상이었습니다.

화 선포에 뒤이어 고발의 말씀이 주어집니다(3-4).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고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세 가지 악행이 언급됩니다. 양의 기름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고 살진 양을 잡아먹었습니다. 양의 기름을 먹으려면 먼저 양을 죽여야 하니 내용상 세 번째 악행과 같고, 또 기름을 먹기 위해 양을 죽이지도 않습니다. ‘기름’이 원래적이라면, ‘기름진 것’을 즐기려고 양을 임의로 처분하는 목자의 난폭성을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악행은 도둑질에 해당합니다. 양털은 주인의 몫이며, 1년에 한 번 봄에 양털을 깎는 행사는 기쁨이 넘치는 축제였습니다(참조. 사무엘상 25:28; 13:23-24). 세 번째 악행은 더 질이 나쁜 도둑질로 목자라면 해서는 안 될 범죄였습니다. 짐승의 공격을 받아 양을 잃었을 경우에도 이를 입증하지 못하면 목자가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출애굽기 22:13). 다음으로는 직무유기를 다섯 항목으로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여호와의 양 떼에 최소한의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약한 양의 원기를 북돋아주지 않고, 병든 양을 고쳐주지 않고, 상처 입은 양을 싸매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찾아 데려오지 않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목자들은 포악(폭력과 강압)으로 양 떼를 억압했습니다. 통치 권력을 사유화한 목자들의 불법과 무능력이 양 떼에게 치명적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2) 흩어진 양 떼(5-6)

 

목자들의 돌봄을 받지 못한 양 떼는 흩어진 채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거나 산에서 헤매며 온 세상에 흩어졌습니다(5-6).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황무지로 도망하거나 이방 나라로 쫓겨 갔습니다.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는 일차적으로는 길 잃은 양의 절망적 처지를 묘사하지만, 여기서 우상숭배의 함의를 읽어내는 것도 가능합니다. 20:28에서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모든 높은 산과 모든 무성한 나무를 보고거기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고발했습니다(참조. 6:13). 양떼의 운명에 관심을 두는 자가 아무도 없기에 양 떼의 처지는 더욱더 절망적이었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길을 잃고 헤매다가 기운이 다해 죽는 일만 남았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양 떼의 주인이 개입합니다. 여호와께서 ‘양 떼’(2,3)를 ‘내 양 떼’로 부르시며 연민과 연대성을 내보이십니다.

 

(3) 고발과 심판 선언(7-10)

 

돌봄을 받지 못하고 흩어진 양 떼의 절망적 운명에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개입하십니다. 심판 선언에 앞서 다시 한 번 당신 양 떼를 멸망으로 이끈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고발하십니다(8). 고발은 내용상 앞에 나온 것의 요약입니다. 양을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는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져도 찾지 않는 악한 목자들로 인해 여호와의 양 떼가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됐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니’는 에스겔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며 이 사안이 중력하고 고발이 엄중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거듭 나오는 ‘내 양 떼’와 달리 ‘내 목자들’은 한 번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양 떼’가 그분이 고용한 그분의 목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멸망에 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 떼의 주인이신 여호와 앞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당신의 양 떼를 사지로 몰아낸 독자들에게 엄중히 책임을 물으십니다(10). 이스라엘의 독자들은 더는 여호와의 목자들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에게서 목자의 직분을 빼앗아 이들이 양 때를 제 먹이로 삼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백성을 돌보지고 제 배만 채우려는 자들은 하나님 백성을 다스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서서’는 목자들을 들짐승(5,8)처럼 묘사합니다. 들짐승의 공격에서 양 떼를 지켜야 할 목자들이 들짐승이 되어 양 떼를 노략질하기에, 참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이들의 등과 폭력에서 당신의 양 떼를 지켜주십니다.

 

참된 목자 : 여호와 하나님(11-16)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선한 목자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참된 선한 목자로서의 삶을 감당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공허함과 헐벗음과 빼앗김을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지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 풍요로운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풍요 속에 빈곤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 지도자인 목자를 갈망하며 찾고 있습니다.

 

11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12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13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14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15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6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11-16)

 

하나님께서는 자기 양을 찾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풍성하게 먹이실 것입니다. 홀로 흐리고 캄캄한 곳에서 불안에 떨고 있을 양들을 모으실 것입니다. 타국에서 흩어져 설움을 당한 양들을 모으실 것입니다.

 

(1) 당신 양을 찾으신 하나님(11-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목자들의 잘못으로 민족들 가운데 흩어진 당신 양 떼를 찾아서 구해주실 것입니다(11-12). 참된 목자가 성심껏 자기 양 떼를 돌보 듯 여호와께서 흩어진 모든 곳에서 당신 백성을 구해내 돌보아주십니다. ‘흐리고 칼칼한 날’(‘구름과 짙은 어둠의 날’)은 민족들을 심판하는 ‘여호와의 날’을 가리킵니다(30:3).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손아귀에서 당신 양 떼를 되찾아 고향으로 데려와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좋은 풀밭에서 꼴을 먹이실 것입니다(13-14). 이스라엘의 유배 생활이 끝나고 여호와의 보호 아래 가나안 땅에서 평안히 살게 됩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온 양 떼는 삯꾼 목자들의 손에 맡기지 않고 주인이 직접 돌봅니다.

 

(2) 이스라엘의 목자 여호와(15)

 

15절은 독립인칭대명사 ‘나’를 두 번 사용해 여호와의 개인적 돌봄을 강조합니다. ‘내가 친히 내 양 떼를 먹이리라. 내가 친히 그들을 누워 쉬게 하리라.’ 악한 목자들로 인해 양 떼가 다시 흩어지지 않도록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몸소 목자가 되셔서 양 떼를 돌보십니다.

 

(3) 참된 목자의 역할(16)

 

과거 폭력과 탐욕에 시달리던 양 떼가 앞으로는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쉬게 됩니다. 좋은 목자의 임무를 구체적으로 열거하는 16절은 악한 목자들의 탐욕스러운 행위를 고발하는 4절에 대응합니다. 전반 절은 4a절의 순서를 역으로 바꿔 기술하면서 대조를 한층 강조합니다. 후반절의 요약도 대조적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포악’으로 다스렸지만, 목자 여호와께서는 ‘정의’로 이들을 돌보실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거절하고 폭력과 강압으로 양떼를 압제한 악한 목자들을 대신하여 그분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는 다음 단락(17-22)을 예비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의와 부정이 결국 우리에게 상처와 고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이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깊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고 돕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믿음과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도록 다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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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33-02)


예루살렘 함락과 남은 백성을 심판

에스겔 33장 21-33절


 

영화 ‘암살’에서 주인공 중에서 배신자인 염석진이 나옵니다. 염석진은 독립운동을 하지만, 사실은 배신자입니다. 쁘락지로서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으며, 동지들을 팔아먹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은 나중에 들어나게 되어 됩니다. 그래서 다른 동지가 총을 겨누고 묻습니다. ‘너는 왜 매국노 짓을 했느냐?’ 염석진의 대답은 ‘나라가 독립될 줄 알았나?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깐, 내가 그랬지!’라고 하며, 그 총에 맞아 죽게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고 현실에 급급하며 살아가면, 나중에 심판을 받을 때, 이런 말로 변명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는 줄 알았나?’

 

  • 격렬했던 심판 예언자의 활동을 마감하고 다시 에스겔은 파수꾼 예언자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조용히 물러나 있었던 에스겔이 성의 멸망 소식을 듣고 무대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맡겨집니다.

 

다시 입을 열리는 에스겔(21-22)

찰스 스펄천 목사님은 ‘믿음에서 떠나간 사람은 먼지 낀 성경에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린 첫 번째 신호는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생명을 줍니다. 말씀대로 살아갈 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21우리가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내게 나아와 말하기를 그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는데 22그 도망한 자가 내게 나아오기 전날 저녁에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 입을 여시더니 다음 아침 그 사람이 내게 나아올 그 때에 내 입이 열리기로 내가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21-22)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의 멸망 소식이 에스겔에게 전해지고, 그 소식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다룹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고 명령하시며, 그의 입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경고와 에스겔의 사명감을 강조합니다. 에스겔이 선포했던 예루살렘 멸망이 역사적 현실로 드러납니다.

 

(1) 성의 함락 소식을 듣는 에스겔(21)

 

본문에서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주전 585년 1월 19일)에 예루살렘에서 도망쳐온 자가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전해줍니다. 그 전날에는 여호와께서 에스겔의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참조, 사무엘상 9:15-17). 에스겔 24:13-24에서 에스겔의 아내의 죽음을 소재로 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에 관한 표적행위(24:13-24)를 행한 후 에스겔은 표적행위의 예언의 성취되기까지 약 3년을 벙어리로 지냅니다(24:25-27). 에스겔이 침묵을 끝내고 다시 등장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2) 에스겔의 입을 열어주시는 여호와(22)

 

에스겔서의 연대기(24:1)에 따르면 에스겔은 ‘아홉째 해 열째 달 열째 날’(주전 588년 1월 15일), 곧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하였을 때 마지막으로 성의 멸망을 선포하고 벙어리가 되기에 침묵 기간은 대략 삼 년이 됩니다. 에스겔은 자신이 선포했던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다 멸망에 관한 소식을 들을 때까지 삼 년을 벙어리로 지냅니다(24:26-27). 주전 593년 그발 강가에서 심판 예언자로 부름을 받고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2:10)을 선포했던 에스겔이 바벨론 점령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잿더미로 파괴된 지(주전 587년 8월 28일) 대략 17개월이 지나 파수꾼 예언자로 다시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에스겔의 연대기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회복과 관련한 마지막 예언이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40:1)에 선포되기에, 에스겔은 십이 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파수꾼 예언자로 활동합니다.

가나안에 남은 자(23-33)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유익과 욕심을 채우는 수단과 도구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고, 겸손한 마음으로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그런 사람들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23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4인자야 이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 25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고기를 피째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26너희가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각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하고 27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황무지에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뜨리고 들에 있는 자는 들짐승에게 넘겨 먹히게 하고 산성과 굴에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게 하리라 28내가 그 땅이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고 그 권능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산들이 황폐하여 지나갈 사람이 없으리라 29내가 그들이 행한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그 땅을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면 그 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라 30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 31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32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33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23-33)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요 거주지가 세 지역으로 분화됩니다. 다수는 가나안에 남았고, 예루살렘의 주류에 속했던 자들은 주전 597년의 첫 번째 유배와 주전 587년의 두 번째 유배 때 대부분 사로잡혀 끌려갔습니다. 또 멸망 전후에 적지 않은 사람이 피난처를 찾아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다면, 누가 하나님 백성의 정통성을 계승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을 상속받게 되겠습니까? 본문은 여기에 대한 에스겔의 답변입니다. 첫째 단락(24-2 9)은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가나안에 남은 자들의 파렴치를 고발하며 이들에게 심판을 선포합니다. 둘째 단락(30-33)은 에스겔의 선포를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유배민의 위선적 경건을 고발합니다. 폐허가 된 가나안에 사는 자들이 ‘하나님 백성’에서 탈락했다고 자동으로 그 영예가 바벨론 유배민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유배민도 가나안에 남은 자들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적 자격이 가나안 땅의 소유권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살 수 있습니다.

 

(1) 가나안에 남은 자들(23-29)

 

주전 597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긴과 그의 신하들과 많은 예루살렘 주민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간 후,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첫 번째 유배민에게서 하나님 백성의 권리를 빼앗으려 했던 것처럼(11:15), 주전 587년 예루살렘과 유다가 멸망한 이후에도 가나안에 남은 자들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땅의 소유권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내세우며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의 약속(참조, 창세기 12:7; 13:15; 15:18-21; 17:8)을 자신들이 계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가나안에 남은 자신들이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들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웃의 재앙을 자기 탐욕을 채우는 데 악용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정통성과 가나안 땅을 독점하려는 이들의 주장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돌아갈 날만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유배민에게는 소망의 끝을 의미했습니다.

에스겔은 가나안에 남은 자들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주장에 맞서 이들의 윤리적, 제의적 파렴치를 고발하고 심판을 선포합니다. 유배당하지 않고 가나안에 남았다는 사실이 이들의 자격과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이들이 의로워서 유배를 모면하고 고향에 남은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자들이며 가나안은 이들의 기업이 될 수 없습니다. 이교적 제의에 빠져 우상을 숭배하고 윤리적으로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멸망의 심판뿐입니다. 이들은 칼과 들짐승과 전염병에 넘겨져 죽게 되고, 이스라엘 땅은 아무도 살 수 없는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약속을 주신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가 상속합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순종하며 제의적,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곧 파수꾼 예언자 에스겔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 죄악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가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가 되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2) 에스겔의 말을 듣기만 하는 유배민(30-33)

 

역설적으로 유다의 멸망이 심판 예언을 선포한 에스겔을 유배민 가운데 유명인사로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한 예언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조롱당했던(12:21-28) 에스겔이 참 예언자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모여 에스겔을 대화의 주제로 삼아 떠듭니다.

이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30) 하며 에스겔을 찾아와 그 앞에 앉아 말씀을 듣습니다. ‘가시와 찔레와 전갈’과 같았던(2:6) 사람들이 ‘여호와의 백성’이 된 양 말씀을 듣기 위해 에스겔을 찾습니다(31).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다시 회복된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아니었습니다.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말씀을 들으려고 에스겔의 집을 찾지만 이들은 듣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에스겔 앞에 앉아 열심히 듣지만 실천하지는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사랑이 있는 것처럼 처신했지만, 속으로는 제 잇속을 차리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귀로는 말씀을 듣고 몸으로는 제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말씀을 듣기에만 열심인 자들에게 에스겔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32)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에게 에스겔의 설교는 소리꾼들이 장터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부르는 ‘사랑의 노래’와 같았습니다. 귀에 거슬리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외치지 않고 귀에 좋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였기에 잘 받아들인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들을 때는 감동하고 좋아하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 ‘생명의 율례’를 지키려는(15) 구체적인 결단이 없었습니다. 경건한 자세로 말씀을 열심히 듣는 것으로 정의와 공의의 실천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삶의 자세는 안 바뀐 채 말씀만 들으면 하나님의 징벌을 초래할 뿐입니다. 사랑의 노래로 들었던 예언자의 선포가 저들의 위선적 경건을 폭로하고 심판할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단락 마지막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대신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가 나옵니다. 거의 독점적으로 여호와와 관련해 사용하던 인지 양식이 예언자 에스겔에게 적용됩니다. 말씀을 주시는 여호와와 말씀을 받아 선포하는 에스겔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줍니다. 이 변형된 인지 양식은 에스겔이 심판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2:5)에서 한번 더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 이스라엘의 심판뿐만 아니라 회복에도 함께하십니다.


어디에 있는지보다 어디에 마음을 두는지가 중요합니다. 남은 자들은 땅에만 관심을 두고 유배민들은 열매 없는 경건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실현된 예언 앞에서 요청되는 건 시대 통찰, 자기 성찰, 공감과 통감의 언어이지 가증한 말이나 미끈한 말이 아닙니다. 말씀의 실현 앞에서 말씀의 실천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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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33-01)


선지자를 파수꾼 삼으신 하나님

에스겔 33장 1-20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 한 송이도,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목적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분명히 부르셨고, 모든 사람에게 사명을 주셨고, 그리고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사명을 발견하며 그 사명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 주전 593년 그발 강가에서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에스겔의 예언 활동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뉩니다. 주전 587년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기까지는 심판 예언자로, 예루살렘에서 도망 온 사람에게서 예루살렘 성의 함락에 관한 소식을 듣고 난 후부터는 회계와 회복을 선포하는 파수꾼 예언자로 활동합니다.

 

파수꾼 예언자로 부름 받는 에스겔(1-9)

우리들이 받은 사명 중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대로 살아갈 수 있고, 목적을 발견할 수 있고, 사명 받은 자로서 받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분명히 그 민족을 향한 예언자로서 부르심을 사명자였습니다.

 

1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말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의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3그 사람이 그 땅에 칼이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4그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정신차리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거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5그가 경고를 받았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6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7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8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9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1-9)

 

본문에서는 파수꾼의 경고가 사람들에 의해서 무시되었을 경우를 다룹니다. 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경고의 나팔을 불었지만, 사람들이 이를 듣고도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사로잡혀 가거나 죽었다면 파수꾼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1) 말씀의 계시(1)

 

본문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1)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2) 파수꾼의 책임(2-6)

 

파수꾼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은 약탈이나 침략을 목적으로 은밀하게 접근하는 적을 발견해 사람들이 안전하게 피하거나 위험에 대비할 수 있도록 경고하는 것입니다. 파수꾼이 임무를 등한시하면 성은 적의 침략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됩니다.

하나님께서 유다가 멸망하기까지 심판 예언자로 활동했던 에스겔에게 새 역할을 맡기십니다. 에스겔은 위험을 경고하고 대비시키는 영적 파수꾼으로 임명됩니다. 에스겔의 역할이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에서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로 확장된 것입니다. 그는 주어진 말씀만 선포하는 자가 아닙니다. 공동체의 영적, 도덕적 형편을 살펴 잘못된 길을 가는 자를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예언자가 공동체의 영적 파수꾼이 되면서 예언자의 책임이 강조됩니다. 임무를 소홀히 한 파수꾼이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영적 경보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예언자는 엄중하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성벽이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도 않고 성벽을 보수하지도 않았습니다.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이 있다고 외쳤습니다(13:1-16). 구원 예언자들의 무책임한선포가 백성을 영적으로 마비시켰고 결국 멸망으로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영적 파수꾼의 역할을 맡기시고 상응하는 책임도 지도록 하십니다.

 

(3) 파수꾼으로 세움 받는 에스겔(7-9)

 

특별히 이 단락은 에스겔 3:17-19의 내용과 문자적으로 거의 일치합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임명하시고 파수꾼 예언자의 역할과 책임을 알려주십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여호와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에 경고해야 합니다. 파수꾼이 깨어서 주변에 다가오는 위협을 감지하여 경고를 발해야 하는 것처럼 예언자는 이스라엘 안에 불의와 불법을 잘 살펴서 사람들에게 악한 길에서 떠나도록 경고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정통이나 교리적 가르침이 아닌, 현재 영적이고 도덕적인 형편과 관련되어 지금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언자의 지위와 사명이 공동체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지도자로 높여진 것에 일치하여 그 책임도 막중해지는 것입니다.

파수꾼으로서 예언자는 유다의 멸망을 전후한 시대적 배경에서 이해 될 수 있습니다. 왕정시대의 활동할 수많은 예언자들은 여호와께서 오고 있는 위기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무조건적인 구원을 선포하다가 백성들을 멸망해 빠뜨렸습니다. 이들은 멸망의 위기에 처한 백성들에게 경고를 바르는 대신, 이들의 죄악된 길을 신학적으로 합리해 주면서 범죄를 조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고 자신의 이익에 따라 거짓으로 활동하는 에스겔 13:4에 황무지의 여호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전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호와께서 악인의 죽음을 알려주셨음에도 예언자가 경고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예언자에게 물으실 것입니다(8).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는 경고를 하지 않아 악인을 죽음에 빠뜨린 예언자의 과실을 살인죄에 준하는 죄로 언급합니다. 예언자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에서 떠나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떠나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예언자는 생명을 보존할 것입니다(9). 파수꾼이 깨어 주변의 위험을 감지해서 경고를 발해야 하는 것처럼 예언자는 이스라엘 집안의 행실을 잘 살펴 악인에게 그 악한 길에서 돌아서도록 경고해야 합니다.

 

범죄한 의인과 회개한 악인(10-20)

코로나와 같은 전사회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을 때, 속히 회복될 날을 달라고 기도할 뿐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에 온전히 통참하여 자신이 죽어야할 것, 자신이 정리해야 할 것, 자신이 버려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자신과 가정으로 부활하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 다시 말씀하십니다.

 

10그런즉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하거니와 11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12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13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14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15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 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 16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라 17그래도 네 민족은 말하기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니라 18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가 그 가운데에서 죽을 것이고 19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20그러나 너희가 이르기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가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하시니라(10-20)

 

에스겔의 심판 예언이 현실로 확인된 이후, 포로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겔 예언에 진정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문제를 제기 합니다.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다면 자신들에게 미래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1) 허물과 죄로 멸망한 이스라엘의 구원 가능성(10-11)

 

에스겔의 심판 예언에 따라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유다가 멸망한 후 바벨론 유배민은 절망의 심연에 떨어졌습니다. 성전과 다윗왕조가 자리한 예루살렘이 바벨론 점령군에 의해 잿더미가 된 것은 언약관계의 완전한 파기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출발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심판을 받아 멸망했기에 유배민은 언약관계의 회복과 같은 심판 이후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게 됐습니다. 유배민의 눈에는 절망적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죄가 초래한 심판의 영향 아래 살다가 유배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뿐이었습니다. 미래의 소망을 잃고 자포자기의 심정에 빠진 유배민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이 가능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포로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기포기적인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어조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악인이 자기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여호와의 성품이 유배민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줍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과거의 죗값은 현재의 결단에 따라 극복될 수 있습니다.

 

(2) 범죄한 의인과 회개한 악인(12-16)

 

12절은 타락한 의인의 멸망과 죄악에서 돌이킨 악인의 구원을 선언적으로 진술하고, 13절은 다시 타락한 의인의 경우를, 14-16절은 회개한 악인의 경우를 다룹니다. 의인의 이전 의와 악인의 이전 죄가 이들의 미래를 결정짓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한 의인이 있을지라도 자기 의를 믿고 악을 행한다면 지은 죄로 인하여 죽게 되고, 하나님께 죽음을 선고 받았을지라도 죄에서 떠나 의를 행하면 행한 의로 인하여 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시는 결정적 기준은 과거 행위(업적)가 아니라 현재의 삶입니다.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어두웠던 과거가 극복될 수도, 자랑스럽던 과거가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에 이스라엘이 과거의 무거운 짐을 운명의 굴레처럼 지고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과거를 뒤로하고 현재의 삶에 책임을 지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죄에서 떠남’은 물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담보로 받은 것을 돌려주고 강제로 빼앗은 것을 배상하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율법을 따라 불의를 저지르지 말아야합니다. 이처럼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면서 살면 과거에 저지른 죄악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습니다.

 

(3) 미래를 결정하는 현재의 삶(17-20)

 

유배민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구원의 길을 ‘주의 길이 바르지 않다’며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율법적으로, 곧 악인을 심판하는 공의로 이해하는 자들에 맞서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앞의 주장(12-16)을 반복하십니다. 의인이 공의를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 죄악 때문에 죽게 되고, 악인이 악에서 돌아서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것들 때문에 살게 됩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미래는 현 세대가 지금 어떤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지, 조상들의 과거 의로움이나 신학적 전통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유배민은 절망에 빠져 한탄하지 말고(10) 하나님께서 내미신 손을 잡고 구원의 미래로 나가야 합니다. 악인을 살리는 하나님의 공의에 이의를 제기하고 자기 길로 가는 자들은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경고의 사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시며, 책임 있는 전파자의 역할을 강조하십니다. 죄인을 경고하지 않으면 그의 피에 대한 책임이 전파자에게 돌아간다고 경고하십니다. 또한, 회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가 임함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경고하는 사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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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32-02)


애굽에 대한 마지막 예언

에스겔 32장 17-32절


 

[이유가 있어서 멸종했습니다]를 보면 동식물 70종이 멸종한 이유를 소개합니다. 너무 착해서, 밥을 천천히 먹어서, 너무 꾸며서, 턱이 너무 무거워서 등등, 다양한 이유가 나옵니다. 반면에 정신을 차려보니 다른 곳에 와 있어서 살아남은 동물도 있습니다. 멸종 이유는 알면 멸종 위기를 줄일 수 있습니다. 에스겔의 애가를 알면 하나님의 심판에 대바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애굽에 관한 마지막 예언으로, 애굽은 스올로 내려가서 할례를 받지 않는 자들 가운데 누어야 합니다. 스올에는 애굽과 함께 근동의 강자였던 앗수르와 엘림과 메섹과 두발이 먼저 내려와 있었습니다. 민족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이 끝나면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민족들이 패권을 놓고 다투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는 여호와께서 홀로 주관하십니다.

 

도입부(17-18)

어떤 위대한 인물이 치욕적인 죽음을 맞이한다면 전 생애가 치욕스러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거부한 자들은 생전에 결코 경험하지 못한 치욕으로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애굽이 결국에 거할 처소는 수치스럽게 스올입니다.

 

17열두째 해 어느 달 열다섯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8인자야 애굽의 무리를 위하여 슬피 울고 그와 유명한 나라의 여자들을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에 던지며(17-18)

 

이 예언은 애굽에 대한 마지막 예언이자 열방에 대한 최종 예언입니다. 에스겔은 애굽이 거할 미래의 집으로 그들을 안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게 그동안 비슷한 방식으로 몰락한 열방들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1) 계시가 주어진 때(1)

 

본문에 ‘열두째 해 어느 달 열다섯째 날’의 연대기적 정보에는 ‘달’이 빠져 있습니다. 1절의 경우처럼 ‘열두째 달’이라면 2주가 지나 다시 말씀이 주어집니다. 에스겔에게 두 가지 명령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명령 ‘애굽의 무리를 위하여 슬피 울고’는 표현은 다르지만 2a절에 상응합니다. 애가의 대상이 바로에서 애굽으로 확대됩니다.

 

(2) 예언자에게 주는 명령(18)

 

18절에서 애굽을 ‘구덩이’에 던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구덩이’는 지옥이나 무덤을 상징합니다. 애굽과 민족들을 저 밑 세상으로 내려 보내라는 두 번째 명령은 저들에게 이제 지상에서의 삶이 끝났음을 선포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셨기에 애굽과 민족들은, 그들의 세력이 막강할지라도, 스울로 내려가야 합니다.

 

스올로 내려가는 애굽(19-21)

오늘 우리는 지상에서 누구의 이웃이 되고 있습니까? 죽은 후에 그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세상에 힘 있는 자들입니까? 약한 자들과 함께 할 때, 그들과 함꼐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이 스올에 내려갈 것이라고 하면서 혼자가 아닌 다른 열방도 소개합니다. 과연 누가 스올에서 애굽과 거처를 함께하겠습니까? 놀랍게도 그와 함께 맘대로 이 땅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나라들입니다.

 

19이르라 너의 아름다움이 어떤 사람들보다도 뛰어나도다 너는 내려가서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와 함께 누울지어다 20그들이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엎드러질 것임이여 그는 칼에 넘겨진 바 되었은즉 그와 그 모든 무리를 끌지어다 21용사 가운데에 강한 자가 그를 돕는 자와 함께 스올 가운데에서 그에게 말함이여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이 내려와서 가만히 누웠다 하리로다(19-21)

 

본문에서는 애굽의 왕이 죽은 자들 중에서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묻힐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가진 권세와 영광이 이제는 사라지고, 다른 민족들이 그의 멸망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교만한 자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진리를 강조합니다.

 

(1) 너는 내려가가거라(19)

 

애굽이 다른 나라들보다 뛰어날지라도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운명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께서 칼에 넘겨주기로 하셨기에 애굽은 스올로 내려가야 합니다. 스올에 내려간 애굽에게는 그의 아름다움에 합당한 자리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2) 스올에 놉는 애굽(20-21)

 

애굽은 할례 받지 않은 자들과 함께 누워야 합니다. 애굽의 왕들과 제사장들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할례자들과 함께 눕는 것은 수치와 경멸을 의미했습니다. 애굽이 치욕스런 죽음에 넘겨집니다. 애굽이 스올로 내려왔다는 소식에 ‘용사 가운데 강한 자’(용사들의 우두머리들)가 흥분합니다. 27절에 의하면 용사들은 스올에서도 예우를 받는 전쟁 영웅들입니다.

 

스올에 살아야할 주민들(22-30)

공의로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대적한 나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인생은 다 죽습니다. 권세를 가지고 두렵게 하던 자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무덤에 들어갔고, 모든 제국 또한 모두 몰락해 땅 속에 묻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호령하던 나라들이 스올에 들어갈 열방을 소개합니다.

 

22거기에 앗수르와 그 온 무리가 있음이여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라 그 무덤이 그 사방에 있도다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27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가운데에 이미 엎드러진 용사와 함께 누운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용사들은 다 무기를 가지고 스올에 내려가서 자기의 칼을 베개로 삼았으니 그 백골이 자기 죄악을 졌음이여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용사의 두려움이 있던 자로다 28오직 너는 할례를 받지 못한 자와 함께 패망할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29거기에 에돔 곧 그 왕들과 그 모든 고관이 있음이여 그들이 강성하였었으나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있겠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30거기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내려간 북쪽 모든 방백과 모든 시돈 사람이 있음이여 그들이 본래는 강성하였으므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부끄러움을 품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웠고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22-30)

 

공의로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대적한 나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을 대표로 하여 그 주변에 있던 나라들, 앗수르, 엘람, 메섹과 두발, 에돔과 시돈 등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모두 망하게 될 것입니다

 

(1) 앗수르(22-23)

 

스올에 내려온 민족들 가운데 먼저 앗수르가 언급됩니다. 왕을 중심으로 칼에 맞아 죽은 자들이 둘레에 무덤을 파고 누웠습니다. 신들마저 업신여기며 절대 권력을 주장하던(참조. 이사야 10:8-11, 13-14) 앗수르의 무덤은 스올의 가장 깊은 곳에 마련됐습니다. 애굽을 포함한 근동의 많은 나라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앗수르가 가장 낮은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주전 671년 애굽의 멤피스를 점령하고, 주전 663년에는 테베까지 함락했던 앗수르는 한동안 번영을 누리다가 주전 627년 앗수르바니팔의 죽음과 함께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전 626년 느부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폴라살은 바벨론에서 왕위에 올라 신바벨론 제국을 세웠습니다. 나보폴라살은 주전 616년부터는 전선을 앗수르의 본토로 확장해나갔습니다. 새로운 강자의 등장을 막으려고 애굽이 앗수르를 도와 개입했지만, 이미 시작된 몰락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주전 614년 왕도 앗수르가 메대에 의해, 주전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에 의해 점령됐습니다. 에스겔이 이 말씀을 선포하기 대략 27년 전쯤부터 앗수르는 스올에 내려와 있었습니다.

 

(2) 엘람(24-25)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언급을 제외하면 앗수르의 경우와 대부분 유사합니다. 페르시아만 북동쪽에 위치한 엘람의 역사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주전 639년 앗수르 왕 앗수르바니팔에 의해 점령당했고, 그 뒤에는 바벨론과 메대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페르시아 시대에 엘람의 수도 수사는 베르시아 대제국의 행정 중심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민족들의 목록에 따르면(창세기 10:22) 엘람은 셈의 첫째 아들입니다. 예언자들은 자주 잇수르나 메대와 함께 엘람을 언급합니다(참조, 이사야 21:2; 22:6; 예레미야 25:25; 에스겔 32:22-26). 본문은 앗수르에 의한 엘람의 멸망을 배경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3) 메섹과 두발(26)

 

창세기 10:2에 야벳의 아들로 나오는 메색과 두발은 언제나 함께 등장합니다. 27:13에서는 야완과 함께 두로의 무역 상대국으로, 여기서는 폭력으로 다른 민족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지만, 지금은 칼로 살해돼 스올에 내려와 있는 자들로, 38장에서는 마지막날에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자들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전사로 유명했습니다. 메섹은 혹해 남동쪽 소아시아-카우카스 산악 지대에, 두발은 카파도키아 남동쪽 지역에 살았습니다. 주전 8세기에는 앗수르를 위협하기도 했지만, 7세기에 앗수르에 점령당하고 후에 러시아 남부에서 내려온 키메리오스 사람들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4) 예전의 용사들과 애굽(27-28)

 

스올로 내려간 자들이 모두 수치스러운 죽음에 넘겨진 것은 아닙니다. 일부는 스올에서 예우를 받습니다. 무기를 가지고 스을로 내려간 용사들은 전쟁터에 쓰러져 더럽힘을 당한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과 구별되는 전쟁 영웅들을 가리킵니다. 비록 할례를 받지 못했을지라도 이들은 할례를 받지 못한 다른 자들과는 구별되는 대접을 받습니다. 이들은 스올로 내려가는 애굽과 그의 무리가 제일 먼저 만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21). 2인칭을 사용해 직접 애굽에 수치스러운 죽음을 선포하는 28절은 마찬가지로 2인칭을 사용해 애굽의 운명을 선포하는 19절에 연결됩니다. 남보다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지만, 애굽은 용사들과 합께 누울 수 없습니다. 애굽은 앗수르와 엘람과 메섹과 두발처럼 할례 받지 않은 자들 가운데,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 가운데 누워야 합니다.

 

(5) 에돔과 북쪽 방백(29-30)

 

시선이 먼 곳에 있는 큰 나라에서 주변의 작은 나라로 옮겨집니다. 유다를 예워싸고 있는 나라들(25장) 가운데 에돔이 대표로 언급됩니다. 에돔도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과 함께, 할레 받지 않은 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돔을 혈통상 가까운 친족으로 인정했지만(참조. 창세기 25:21-34), 양자의 관계는 시기와 불화와 반목으로 얼룩졌습니다. 주전 587년 유다가 멸망한 후에 에돔은 네갭 지역으로 침투에 들어와 유다 남부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하였습니다(참조. 35:1-15). 스올에는 ‘북쪽 모든 방백과 모든 시돈 사람’도 있었습니다. 두로와 함께 페니키아의 무역항으로 유명했던 시돈(참조, 28:20-24)은 앗수르 왕 에살하돈에 의해 폐허가 됐고, 반바벨론 동맹에 가담하였다가 느부갓네살에게 정복당했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략에 노출된 시리아 중북부의 아람 나라들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스올에 들어갈 바로(31-32)

권력과 능력 있다고 오만방자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거만한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면 실수합니다. 바로는 혹독한 스올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오만방자한 사람들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올에서 받는 위로도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31바로가 그들을 보고 그 모든 무리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을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바로와 그 온 군대가 그러하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1-32)

 

본문에서는 애굽의 왕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멸망을 통해 그들이 겪는 고통이 다른 민족들에게도 알려질 것임을 강조합니다. 결국, 애굽은 그들의 교만과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바로의 반응(31)

 

풍자와 조롱을 담은 위로의 말씀이 바로에게 주어집니다. 패권을 놓고 싸웠던 앗수르와 같은 나라들이 먼저와 있는 것을 보고 바로는 자신에게만 주어진 혹독한 운명이 아님을 보고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바로는 스올에서 예전의 적들과 동맹국들을 만나 쓸쓸하지 않게 지낼 수 있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앗수르의 존재는 바로에게 주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한때 애굽을 점령했던 앗수르가 스올로 내려와야 했다면, 바로가 제 운명을 거슬러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2) 바로의 운명(32)

 

32절의 ‘이는 내가 산 자들의 땅에 두려움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사역)는 전체의 요약입니다. 강대국의 탐욕이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여호와만이 민족들의 흥망성쇠를 결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멸망을 통해 인간의 교만과 권력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애굽의 왕은 결국 죽음과 함께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묻히게 되며, 그의 영광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은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게 하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을 회복하고 구원하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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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32-01)


바로에 대한 슬픈 노래

에스겔 32장 1-16절


 

영화를 제작하는 회사는 영화가 다 만들어져 영화관에서 상영될 때까지 내용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포일러 금지령 등 극장의 조치를 취하곤 합니다. 하지만 바로를 향한 애가에는 바로와 애굽의 미래가 그대로 담겨 있음에도 앞당겨 부르도록 하십니다. 미리보기는 아니지만, 미리 듣기로 미래를 준비하도록 말입니다.

 

  • 29:3-5의 경우처럼 여섯 번째 예언은 애굽의 바로 왕을 애굽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들에도 잘 알려진 나일 강의 악어에 비유해서 그에게 멸망을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어부가 되셔서 유다가 갈대 지팡이로 의지하고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떠받드는 나일 강의 악어 바로를 그물로 잡아 들판에 내동댕이치십니다.

 

도입부(1-2)

세상에서 얻어지는 권력은 스스로의 기회와 노력을 얻어서 성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공간과 시간 안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주변 나라들에 무서운 사자처럼 군림하는 바로의 진짜 모습은 나일 강을 휘저으며 더럽히는 악어에 불과합니다.

 

1열두째 해 열두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1-2)

 

다섯 번째 애굽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주어지고(31:1) 1년 7개월이 지나서 여섯 번째 예언이 주어집니다. ‘열두 째해 열두째 달 초하루’는 주전 585년 3월 3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대략 1년 반이 지난 후가 됩니다. 33:21에 의하면 에스겔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 도망쳐온 자에게서 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첫 번째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애굽의 바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부르게 하십니다. 보좌에 앉아 애굽을 통치하는 바로가 애가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멸망을 결정하셨기에 바로는 이미 죽은 몸입니다. 유다의 갈대 지팡이(29:6-7) 애굽도 유다와 같은 운명에 떨어집니다.

당시 애굽은 힘과 능력이 넘치는 ‘젊은 사자’와 같은 황금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다를 휘졌고 다니는 거대한 괴물에 비유됩니다. 애굽은 그만큼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막강한 그들은 두려움과 경외감의 대상이었습니다. 누가 애굽을 넘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바로의 멸망(2b-10)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통치자들은 스스로 자기 능력으로 통치하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면, 누구에 의존해야 할지는 처음부터 자명해집니다. 자신을 신의 아들로 주장하며 영원한 왕권을 자랑하는 애굽 왕 바로의 통치는 이미 그 종말을 결정되었습니다.

 

3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많은 백성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 그물을 네 위에 치고 그 그물로 너를 끌어오리로다 4내가 너를 뭍에 버리며 들에 던져 공중의 새들이 네 위에 앉게 할 것임이여 온 땅의 짐승이 너를 먹어 배부르게 하리로다 5내가 네 살점을 여러 산에 두며 네 시체를 여러 골짜기에 채울 것임이여 6네 피로 네 헤엄치는 땅에 물 대듯 하여 산에 미치게 하며 그 모든 개천을 채우리로다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내가 네 패망의 소문이 여러 나라 곧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들에 이르게 할 때에 많은 백성의 마음을 번뇌하게 할 것임이여 10내가 그 많은 백성을 너로 말미암아 놀라게 할 것이며 내가 내 칼이 그들의 왕 앞에서 춤추게 할 때에 그 왕이 너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할 것이며 네가 엎드러지는 날에 그들이 각각 자기 생명을 위하여 무시로 떨리로다(3-10)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위해 깊은 바다와 같은 멸망을 예고하며, 그들의 교만과 압박에 대한 처벌을 밝힙니다. 이로 인해 여러 민족이 애굽의 멸망을 보고 두려워하게 될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1) 심판의 원인(2b)

 

바로는 자신을 민족들의 사자로 여기지만, 실상은 바다 가운데 있는 괴물에 불과할 뿐입니다(2b). 이스라엘을 포함해 고대 근동에서 사자는 자주 왕을 상징했습니다. 바로는 자신을 땅의 동물 가운데 가장 힘이 세고 무서운 사자, 곧 왕들의 왕으로 주장했습니다. 애굽의 왕을 넘어 민족들의 왕을 자처했습니다. 나일 강에 서식하는 악어는 힘과 난폭함으로 유명했습니다. 사자와 악어의 비유는 바로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들짐승의 왕인 사자처럼 자신의 힘과 용맹을 자랑하며 민족들을 위협하지만, 실제로는 물을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는 악어에 불과했습니다. 악어의 활동 반경이 나일 강 유역으로 제한적이듯이 바로의 권력도 나일 강을 넘지 못합니다.

 

(2) 그물에 잡힌 악어 바로(3-8)

 

바로가 애굽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착각에 불과합니다. 악어가 제멋대로 날뛰며 물을 더럽히는 것처럼 바로는 애굽을 혼란과 불안에 빠뜨릴 뿐입니다. ‘큰 악어’로 옮긴 ‘탄닌’은 바다의 원시 괴물을 의미하기도 하기에(참조. 창세기 1:21; 시편 148:7), 바로를 상징하는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에서 여호와께서 정해놓으신 창조 질서를 위협하는 혼돈의 세력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합니다. 악어가 나일 강에서는 난폭하게 날뛰면서 무섭게 공격하지만 사로잡혀 물으로 끌려 나오면 무력해지는 것처럼, 바로 또한 민족들의 사자처럼 처신하지만 소리만 요란할 뿐입니다. 나일 강의 악어를 잡는 일은 실수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어부가 되셔서 잡으시기에 악어에게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3).

여호와께서 민족들과 함께 악어 잡이에 나서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물을 던져 악어를 잡으시면 민족들이 악어가 잡힌 그물을 끌어 올립니다. 뭍으로 끌어낸 악어를 여호와께서 들판에 내던져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이 배불리 뜯어먹게 하십니다(4; 참조. 31:13). 사자를 자처하던 바로가 날짐승과 들짐승들의 먹이가 됩니다. 악어를 잡을 때는 일반적으로 갈고리(29:4)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그물을 던져 잡으십니다. 바벨론의 창조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에서 마르둑(Marduk)은 혼돈의 괴물 티아맛(Tiamat)을 그물로 잡습니다. 그물의 언급이 의도적이라면, 바로의 멸망이 역사적 차원을 넘어 우주적·보편적 차원으로 확장됩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창조주 여호와에 의해 이미 태초에 정복당한 혼돈의 세력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연과 역사 안에서 당신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나일강의 악어 바로의 처참한 죽음이 애굽에 파국적 재앙을 초래합니다. 특이하게도 바로의 죽음이 몸의 멸망과 피의 멸망으로 나뉘어 언급됩니다(5-6). 바로의 살점이 이 산 저 산에 흩어지고 골짜기마다 그의 시체로 가득 채워지고, 홍수로 나일 강이 범람하듯이 바로의 피가 모든 개천을 가득 채우고 산까지 덮습니다(참조. 출애굽기 7:17-21). 애굽 전역이 바로의 죽음으로 뒤 덮입니다. 바로의 멸망이 애굽에 미친 치명적 영향이 우주적 재앙으로 기술됩니다(7-8). 불꽃이 사라지면서 불이 꺼지듯 바로가 멸망할 때 해와 달과 별이 그 빛을 잃고 어두워지고 애굽 땅이 어둠으로 덮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로를 심판하시는 날은 그분의 우주적 권능이 드러나는 날입니다. 출애굽 직전 애굽을 3일 동안 흑암으로 덮은 아홉 번째 재앙(출애굽기 10:21-23)과 유사합니다. 출애굽의 바로처럼 지금의 바로도 여전히 여호와께 적대적임을 시사해줍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군을 거절한 바로의 완악함이 애굽에 많은 재앙을 초래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바로의 교만이 애굽을 전면적인 파탄에 빠뜨립니다.

 

(3) 민족들의 놀람(9-10)

 

역사와 전통에 있어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던 애굽의 멸망은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애굽이 멸망했다는 소식이 온 땅에 신속하게 퍼집니다. 9절의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들’은 ‘세상 끝까지’를 의미합니다. 온 세상이 바로가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랍니다. 멸망을 모르던 애굽이 여호와께서 보내신 칼에 멸망했기에 모든 민족이 자신의 안전을 불안해합니다.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도 칼을 휘두르신다면 목숨을 구할 수 없기에 줄곧 뙵니다(10). 여호와께서 애굽의 바로를 심판하시는 날은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권능에 두려움을 느끼는 날입니다.

 

애굽의 멸망(11-15)

악한 자들이 득세하면 세상에 의로운 사람들은 사라지지만 정의가 바로 서면 많은 정의로운 사람들이 세상을 만들어간 것입니다. 이처럼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방죽을 흐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흐린 미꾸라지 한 마리를 잡으면 다시 맑아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바로의 최후가 섬뜩할 정도로 자세히 묘사됩니다.

 

11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바벨론 왕의 칼이 네게 오리로다 12나는 네 무리가 용사 곧 모든 나라의 무서운 자들의 칼에 엎드러지게 할 것임이여 그들이 애굽의 교만을 폐하며 그 모든 무리를 멸하리로다 13내가 또 그 모든 짐승을 큰 물 가에서 멸하리니 사람의 발이나 짐승의 굽이 다시는 그 물을 흐리지 못할 것임이여 14그 때에 내가 그 물을 맑게 하여 그 강이 기름 같이 흐르게 하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내가 애굽 땅이 황폐하여 사막이 되게 하여 거기에 풍성한 것이 없게 할 것임이여 그 가운데의 모든 주민을 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11-15)

 

앞에서는 애굽의 왕 바로를 중심으로 심판이 선포됐다면, 여기서는 바로가 대표하는 애굽과 그 주민들이 심판의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비유로 선포된 여호와의 심판에 역사적 모습이 주어집니다.

 

(1) 바벨론 왕의 칼(11-14)

 

여호와께서 나일 강의 악어 잡이에 동원한 ‘많은 백성의 무리’(3)가 바벨론 왕의 군대로 밝혀집니다(11). 바벨론 왕의 칼이 애굽을 쳐들어가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배반한 당신 백성을 징벌하시려고 날카롭게 갈아 바벨론 왕의 손에 쥐어준 칼(21:18-27)이 이번에는 애굽을 칩니다.

여호와께서 바로의 무리를 용사들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시고, 바벨론 군대가 애굽의 자랑을 파괴하기에 애굽의 모든 무리가 멸망합니다(12). 나일 강의 악어를 잡을 때처럼 여호와의 주도로 바벨론 군대가 애굽 군대를 진멸합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바벨론 왕의 칼이기에 애굽이 자랑하는 풍부한 경제력과 막강한 군사력과 견고한 방어 시설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애굽을 교만하게 만든 애굽의 자랑이 애굽을 멸망에서 구해 주지 못합니다. ‘모든 나라의 무서운 자들’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 가장 잔혹한 자들’로, 바벨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발로 물을 휘저어 나일 강을 더럽히던(2) 모든 짐승을 여호와께서 없애버리시고, 물을 맑게 하여 기름 흐르듯이 조용히 흐르게 하십니다(13-14).

 

(2) 인지 양식(15)

 

여호와께서 애굽의 모든 주민을 쳐서 황폐하게 만드시기에 나일 강을 휘젓는 짐승과 사람이 없게 되고, 나일 강을 휘젓고 다니는 것들이 모두 없어지기에 강물이 흔들리지 않고 잔잔하게 흐릅니다. 철저하게 집행된 심판을 보고 애굽 사람들은 여호와의 권능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는 슬피 부를 노래이니(16)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애굽의 패망에 백성들은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자신들이라고 애굽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두로와 애굽을 향한 애가를 자신들을 향한 애가로 삼고 미리 돌이켜야 합니다.

 

16이는 슬피 부를 노래이니 여러 나라 여자들이 이것을 슬피 부름이여 애굽과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이것을 슬피 부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6)

 

마지막 절은 2a절에 상응합니다. 에스겔이 바로를 위하여 부른 애가를 앞으로는 여자들이 애굽과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부르게 됩니다. 바로와 애굽의 멸망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다시금 확증해줍니다. 바로와 애굽은 이미 죽은 몸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애가는 주로 여자들이 불렀습니다. ‘민족들의 사자’를 자처하는 애굽이 멸망했기에 ‘민족들의 여자들’(‘여러 나라 여자들’)이 애가를 부릅니다. 문맥에 따르면, 바로의 파멸 소식에 질겁한 민족들(9-10)이 두려움에 떨며 애굽의 멸망을 슬피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심판을 통해 인간의 교만이 결국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교훈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할 때 겪게 되는 결과를 경고합니다. 애굽의 멸망은 그들의 힘과 영광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고를 통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생명의 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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