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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05-01)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베드로전서 5장 1-14절


세상을 보면 감히 맞설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언제라도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언제라도 포기할 것 같은 마음입니다. 어떻게 이 험한 세상에서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까? 주께서 돕겟다고 하셨는데 우리를 어떻게 도우신다는 것입니까?

 

4:12에서 시작한 고난 자체에 대한 권면을 이어갑니다. 이후 일반적 편지 형식을 따라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1-5절은 공동체 구성원, 특히 교회 지도자인 장로들에게 대한 것과 그들의 인도를 받는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입니다. 둘째, 6-11절은 결론적 권면입니다. 고난 상황에서 믿음을 곧게 지키라고 말합니다. 셋째, 12-14절은 편지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내용 정리와 문안 인사, 축복의 말이 이어집니다.

 

장로들을 향한 권면(1-5)

 지도자는 멀리서 보기면 영광스럽게 보여 부러워볼 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서보면 영광스럽기보다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동체가 은혜스러워지길 원한다면 함께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만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1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5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1-5)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는 다양한 연령대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성도들이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는 독특한 제도로서 출애굽 당시에도 이지 존재했습니다. 이는 공동체 내의 일정한 자격을 갖춘 연장자들에게 주는 명예와 책임입니다.

 (1) 장로들에 대해(1-4)

베드로는 ‘내가 권한다’로 독자를 향한 권면을 지속합니다. 이 표현은 2:11에서 세상 속 신자 삶을 구체적으로 권면하기 시작할 때 사용했습니다. 둘 다 고난을 배경으로 하지만, 초점이 다릅니다. 2:11은 세상 속 사회 구성원 역할에 집중했다면, 5:1은 공동체 구성원 역할입니다. 또한 4:12-19 내용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독자 전체를 다룬 앞부분과 달리 이 부분은 특정 부류를 다룹니다. 첫 대상은 장로들입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고 합니다(2). 그분의 백성인 교회를 이끌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장로들에게 다스림의 권세를 위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에 집중해 권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 표현을 첨가해 부연합니다.

첫째, 정체성 확증입니다(1b). 저자는 ‘장로’에 대한 세 가지 호칭을 언급합니다. ‘함께 장로 된 자’들과 ‘메시아 고난의 증인’,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입니다. ‘함께 장로 된 자’란 사도처럼 연장자란 말이지만, 같은 사역자란 의미이기도 합니다. 지역 교회 지도자의 사역을 사도의 사역과 동일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직접 목격자나 복음 증거 사명의 1차 수혜자는 사도입니다. 지역 교회 장로들은 사도 혹은 사도로부터 증거 받은 자들의 전도를 통해 믿게 된 자들입니다(1:12). 사도의 사역이나 권위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인 저자가 지역 교회 장로들을 자기처럼 장로로 부른 것은 그들의 사역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들 위치를 존중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한편, ‘메시아 고난의 증인’이란 장로들 사역의 내용과 관계있습니다. 예수 고난을 직접 목격한 자라는 말이 아닙니다(1:8).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구원의 복음을 증거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의 증거와 함께 고난의 삶을 통한 증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장차 있을 영광에 참여할 자’는 미래 소망에 대한 것입니다. 고난 이후 영광 얻은 예수님처럼 이 땅 사역에 대한 보상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참여하겠지만, 특별히 장로들은 사역자로서 그 영광에 기쁘게 참여할 것입니다.

둘째, 분사를 통해 ‘어떻게’ 요소를 첨언합니다(2-3). 1) 감독하되 2)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며 3) 더러운 이익이 아닌 열정으로 하고 4) 군림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는 방식으로 하라고 합니다. 바른 지도자의 덕목이지만, 인간적으로 좋은 지도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요소들을 가진 참 목자의 본은 하나님/예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백성을 돌보지 않던 유대 지도자들을 꾸짖고, 자신이 직접 백성의 목자가 되어 사랑과 정의로 돌보겠다고 하셨습니다(에스겔 34:11-16). 그분의 마음은 메시아를 목자로 보내는 약속으로 이어지고(에스겔 34:23),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이 땅에 와서 영혼의 목자와 감독으로서 사역하셨습니다(2:25; 참조. 요한복음 10:1-18). 장로들은 그 예수님을 주로 모신 자들이며, 하나님 백성을 섬기는 일을 맡은 자들입니다. 메시아 고난이 담긴 복음을 증언할 뿐 아니라 하나님/예수의 본을 따라 그분의 백성을 그분의 마음으로 섬기라는 뜻일 것입니다.

셋째, 사역에 대한 보상입니다(4).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썩지 않는 영광의 관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1절에서 언급한 미래의 소망을 부연합니다. 저자는 예수를 목자장으로 부릅니다. 장로들은 목자이지만 최고 권위자는 아닙니다. 장차 목자장 예수가 오실 때 긍정 평가를 받으려면 오늘 바르고 정성스럽게 섬겨야 합니다.

(2) 젊은 자들과 모두에 대해(5)

청년을 포함해 장로들보다 어리고 지도를 받는 자들입니다. 그들을 향해 장로들에게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앞서 사회 구조 속에서 상대적으로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한 것과 같습니다(2:13,18;3:1). 이어 저자는 ‘판테스(πάντες/모든)’라는 표현으로 장로와 젊은이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에게 서로에 대해 겸손한 생각으로 옷 입으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처럼 삶을 평가하시는 분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참조, 1:17).

 

마지막 권면들: 겸손하고 깨어 있어 믿음을 잃지 말라(6-11)

마귀에게 승리하기 위해 항상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믿음에 굳게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든 고난이라도 고난은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며, 고난 후에 반드시 될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 영광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영원합니다.

6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6-11)

베드로는 독자를 향해 마지막 권면들을 합니다. 모두 세상 속 신자의 고난을 배경으로 합니다.

첫째, 겸손하라고 합니다(6-7). 5절과 연결된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6절과 7절이 서로 다른 명령인 듯 번역했지만, 7절 원문은 분사이며 6절에 나온 명령을 이행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 그러면 때가 되면 독자를 높일 것입니다(6). 그 한 방법은 모든 염려를 주께 던지는 것입니다. 그분이 돌보시기 때문입니다(7). 이 명령은 몇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1)고난 속에서 고민하고 염려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단순히 교만/겸손에 대한 윤리 권면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신자를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신자에게 고난이 특별한 것이 아니듯, 그로 인한 염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뜻을 따르는 삶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2) 겸손의 의미를 말해줍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염려를 던지는 것을 겸손의 방법으로 제시합니다. 마치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듯 전전긍긍하는 것은 교만이고 불신입니다. 그분의 능력이나 돌보심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겸손의 핵심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이 신자를 높인다는 것은 세상 속 바른 신자의 삶을 인정해주신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고 염려를 맡기고 고난에 직면하는 겸손함은 세상에 지지 않고 바른 신자의 삶을 지속해가는 첫 단계입니다.

둘째, 마귀를 대적하라고 합니다(8-11). 신자는 하나님께 속해있지만, 마귀가 거짓말로 다스리는 반역 세상에 발붙이고 살고 있습니다. 1:1-2에서 말한 이중 정체성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백성으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저자는 몇 가지를 당부합니다. 1) 온전한 정신으로 깨어 주의해야 합니다(8). 세상 소리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바른 생각과 판단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대적자 마귀가 먹이를 찾아 헤매는 사자처럼 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편지 앞부분에서 당부했던 내용입니다(1:13; 4:7). 2) 믿음으로 맞서야 합니다(9). 특별한 무엇을 행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를 따르는 세상의 거짓 소리와 겁박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진짜로 중요하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지를 보는 믿음의 눈을 놓치지 않는 것이고, 일상의 삶에서 신자의 바른 모습을 계속 견지해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복음에 담겨 있는 구원의 큰 그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1:13). 실제로 그분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도 필요합니다(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두 가지를 첨언합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견디는 동료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믿음의 선후배들이 하나님을 향한 삶을 굳세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기억하고 힘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분은 고난당하는 자신의 백성을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신자들이 잘 버틸 수 있도록 강하게 하시고 흔들리지 않도록 도우십니다. 신자는 계속해서 시야를 넓게 열어야 합니다. 상황을 넘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분을 함께 섬기고 버티는 믿음의 식구들을 보고 세상 속 제사장의 삶을 지속해야 합니다.

 

편지 마무리(12-14)

고난 가운데 있는 양무리를 칠 때, 억지로 지배하려거나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자원하는 마음과 즐거운 뜻으로 해야 합니다. 양들을 자기 소유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먼저 본을 보이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자장이신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편지를 마감합니다.

12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13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14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2-14)

베드로는 바벨론에 있는 교회와 마가의 문안 인사를 전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강을 바는 인사말로 편지를 끝맺습니다. 베드로는 편지를 통해 소아시아의 성도들이 위로와 격려를 받길 원하며, 이 편지를 실라를 통해 보냈습니다.

대필자 실루아노를 통해 편지를 썼는데,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참 은혜를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독자가 딛고 서 있는 진리의 토대를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복음과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과정입니다. 둘째, 하나님 은혜 위에 굳게 서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자 삶에 대한 권면입니다. 결국, 이 편지의 핵심 내용은 복음과 그에 근거한 삶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지는 소아시아 성도들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위로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손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며 그 분에게 모든 걱정과 근심을 맡길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해 성숙한 성도들은 베드로처럼 다른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더 나가서 베드로처럼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다른 성도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연약한 성도들이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함으로 다른 성도들이 세우는 것은 정말 복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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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04-02)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학생들이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하지만 시험을 보는 목적은 학생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학생들의 학력을 파악하고 취약한 점들을 보강하여 위하여 테스트한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싫다고 시험을 보지 않는다면 성적은 자랄 수 없습니다. 시험을 통해 자신의 수준을 알며, 성적이 자란 것입니다.

 

세상 속성도 삶에 대한 주제(2:11-4:11)를 마친 저자는 독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고난 자체에 집중합니다. 5:11까지 진행됩니다. 이 부분은 성도 개인에 대한 권면입니다.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12-16절로 고난에 관련한 일련의 명령들을 전달합니다. 둘째, 17-18절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내용을 통해 고난과 관련한 명령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셋째, 19절로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결론적 권면을 전합니다.

 

고난 중에 있는 독자들에게 : 개인적 명령들(12-16)

세상에는 숱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한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면, 그것은 치욕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그것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즐거워 할입니다. 그것인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요, 사망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2-16)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으로 주제를 전환합니다. 동일하게 고난당하는 독자들 상태에 대한 것이지만, 이전과 초점이 약간 다릅니다. 앞부분은 세상 속 신자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집중했다면, 이 부분은 독자들의 고난 상황 자체에 대해서입니다. 세 가지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첫째, 불 시련(프뤼시스)입니다. 마치 불에 타고 있는 듯한 극심한 고통으로 표현합니다. 독자의 고난을 처음 언급한 1:6 묘사보다 심각합니다. 거기서는 단순히 여러 시험으로 근심한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불 시련이라고 합니다.

둘째, 시험이란 표현입니다. 1:6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고난의 본질이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과 관련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의 죄(창세기 3장)로 모든 피조 세계가 죄와 죽음의 통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참조. 로마서 8:19-22). 모든 이가 병에 걸릴 수 있고, 까닭 모를 고통을 경험할 수 있으며, 결국엔 죽습니다. 하나님의 현재 심판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참조. 로마서 1:28-31).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불 시련은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신앙과 진리에 대한 세상의 압박입니다. 더 나아가 이 어려움은 신자가 하나님 백성으로 잘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들을 더 순전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유혹이 아닌 시험(test)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셋째, ‘너희에게’ 표현의 반복입니다. 12절에서만 세 번 사용합니다.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이해될 수 있는 문장인데도 그렇게 했습니다. 믿음과 관련한 시험과 고통이 독자들에게 있음을 강조합니다. 고난과 관련해 일련의 명령을 전달합니다. 이상한 것인 양 당황하지 말고(12) 오히려 기뻐하라고 합니다(13). 얼핏 보면, 이전 내용과 비교해 약간 어색한 느낌이 있습니다. 1:6-8에서 시험과 기쁨 표현을 사용해 독자들이 고난에도 불구하고 이미 기뻐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편지 뒷부분에서 그런 독자들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 저자의 마음입니다. 그들이 잘 버티고 있음을 칭찬함과 동시에 그런 삶을 지속해 가라는 마음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초점의 차이입니다. 1:6-8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초점이라면, 이 부분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해 믿음으로 견디는 것을 넘어 그 고난을 경험하는 것 자체를 메시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의 증거로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훨씬 적극적이고 능동적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처럼 그 고난에는 미래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고난 가운데 기뻐하는 삶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첫째, 인지 요소의 준비입니다. ‘왜’와 ‘무엇을 위해’라는 신자 삶의 근거와 방향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전 설명에 의하면, 여기에는 하나님/예수님으로 인한 구원 과정, 세상에서 언약 백성으로 존재하는 이유와 소명, 미래에 대한 소망이 포함됩니다. 13절도 그 고난을 단순히 고통 자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에 대한 미래 소망, 곧 주의 심판을 근거로 지금 상황에 대한 반전의 보상을 생각하고 기대하라고 합니다. 둘째,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힘입니다. 저자의 명령을 따라 마음과 태도를 바꾸어 기뻐하며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두 요소는 반드시 함께 갑니다. 사람인 신자가 이행하고 살아가는 것이지만, 신적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계속해서 ‘만일’ 조건문을 사용해 메시아 고난에 동참하는 예를 듭니다(14-16). 조건절은 고난 상황이고 주절은 그에 대한 신자의 반응입니다. 첫째 상황은 메시아의 이름으로 모욕당하는 것입니다(14-15). 3:14과 같은 내용이며, 예수의 팔복 가르침 마지막 부분(마태복음 5:10-11)을 반영합니다. ‘메시아의 이름으로’란 예수님과의 관계성 때문이란 말입니다. 15절처럼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이 상황을 복된 것으로 여기라고 합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독자(너희)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은 전도자들에게 임해서 복음이 잘 전해지도록 도울 뿐 아니라(1:12),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구원 과정의 일을 합니다(1:2). 하지만 이 부분의 초점은 정체성 보증입니다. 성령님께서 함께하는 것은 성도가 그분의 백성이고 자녀라는 증거입니다(참조, 로마서 8:15-16;갈라디아 4:6). 이 성령님께서 성도 안에 있기에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얻는 고난을 성도가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확증으로 여기고 복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정체성 표지는 장차 심판에서 구원받을 은혜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참조. 17-18).

둘째 상황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메시아)를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이나 세상 권위자를 주(主)로 여기지 않고, 메시아 예수만을 섬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무시하고 가볍게 여깁니다. 하지만 3:18-22처럼 예수는 부활과 승천으로 원래의 영광스러운 위치에 있고, 장차 모든 권세들이 무릎 꿇어야 하는 온 우주의 주입니다. 그 예수님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제자임을 자랑스러워하며,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명령의 이유(17-18)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으로 고난 받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은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은 시작될 것입니다. 그날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주 앞에 설 수 없습니다.

17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17-18)

명령에 대한 이유를 제공합니다. 일차적으로는 16절과 연결되지만, 보다 넓게 12절부터 언급한 것들에 대한 신학적 설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핵심은 주의 재림 때 있을 심판입니다. 성도(1:3-5,7,17.21; 4:7,13)나 세상(4:5)의 현재 모습을 설명하는 근거로 언급했던 주제입니다. 이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해 성도의 상황과 세상 불신자의 상황을 비교함으로 제시합니다. 두 가지 견제로 시작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역사의 종말적 완성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세상 반역의 통치 영역에 남아 있는 것 사이의 확연한 갈림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직은 그 미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상 역시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 때는 그분의 심판이 완성되어 그 결과를 모두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심판의 공평성과 보편성입니다. 이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별이 없습니다. 또한 평가 기준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는 것이며(1:17) 공정하게 진행될 것입니다(참조. 로마서 2:6-11). 흥미롭게도 저자는 그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구약의 개념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집, 곧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교회(2:5)에서 하나님의 평가가 시작될 것입니다. 다만 그의 십자가 피로 멸망의 판결을 받지 않을 뿐입니다. 마치 보험 증권 받은 듯 생각하고 함부로 살면 안 됩니다. 그 모습은 하나님/예수의 은혜로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간 자로서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더 집중하는 것은 불신자의 운명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 그분의 백성과 자녀가 된 사람들도 평가 받는다면, 그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 대한 평가는 어떻겠습니까? 의인이 예수의 피를 통해 은혜로 어렵게(몰리스) 구원받았다면, 그것을 거절한 자들의 운명은 어떻겠습니까? 독자 스스로 대답하게 해서 세상의 위협에 기죽지 말고 계속 주님께 신실하게 살라는 말을 하고픈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결론적 권면(19)

우리 힘으로 고난을 감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순간에 우리 영혼을 창조주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받는 고난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이요 생명이 될 것입니다.

19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9)

고난에 대한 결론적 권면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 받는 자들, 곧 선행을 하는 자들은 모든 것의 평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께 삶을 의탁하라고 합니다. 고난을 피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다 잘된다는 말도 없습니다. 오히려 계속 고난을 당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신자 삶을 계속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결론적 권면은 신자 삶의 초점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역시 우리에게 전하는 바가 크다.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기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고난을 수용하고 자처하는 사람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악을 미워하여 당하는 고난이요 의를 추구하여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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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04-01)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베드로전서 4장 1-11절


서양 속담에서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가장 빠른 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르고 잘못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의 잘못을 깨달았다면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특히 선한 일을 시작하기에 너무 시간은 없습니다.

 

예수 메시아의 모본을 근거로 3:13에서 시작한 하나님 백성으로서 겪는 고난에 대해 계속 권면합니다.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1-6절은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독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권면합니다. 특별히 세상에 있는 믿지 않는 이전 동료들의 압박에 견딜 것을 요청합니다. 둘째, 7-11절은 성도 개인과 함께 고난 받는 동료 성도들을 향한 태도를 다룹니다. 정신차려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고 권면합니다.

 

예수 메시아로 인한 세 삶과 고난(1-6)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봉사하려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봉사하면, 자칫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쉽습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고, 원망없이 서로 대접하고, 어려운 성도들을 섬기고 대접하라는 사도의 권면 가운데 스스로 좀 더 힘서 행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4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6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1-6)

실제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던 방탕한 삶의 방식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이 살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악을 더 들어나기 때문에 같이 죄악을 범함으로 동류의식 속에서 평범해지는 것입니다. 이 평범한 것은 세상을 깨끗함의 평범함이 아니라 죄악의 보편화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1) 거듭난 자로서 새 삶을 살라(1-3)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을 독자와 연결시켜 새로운 삶을 권면하기 시작합니다. 세 가지로 그 연결을 표현합니다. ① 인과 접속사 ‘그러므로’와 ② 등장인물 예수님과 ‘너희’, 그리고 ③ 분사구문과 그것의 꾸밈을 받는 주절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육체의 고난을 받았기에[분사구문] ‘너희’는 무장하라[주절]’입니다(1a). 메시아의 고난은 3:18에 언급했던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무장하라’는 것은 전쟁을 준비하는 군사 용어입니다. 세상에 맞설 신자의 바른 삶을 위한 준비입니다. 주목할 것은 준비의 내용입니다. 인지 영역을 의미하는 ‘엔노이아(ἔννοια)’를 써서 예수님과 같은 생각 혹은 의도를 무장하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신자 삶에 대한 베드로 권면의 특징을 다시 보여줍니다. 하나님/예수의 일하심이나 모본, 독자의 사고 영역 무장(내면 요소) - 삶의 외적 표현(외면 요소) 순서입니다. 1b-2절에는 신자 삶의 ‘어떻게’ 요소를 설명합니다.

육체로 고난 받은 자가 죄를 그쳤기 때문인데, 육체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사람의 정욕이 아닌 하나님 뜻에 따라 살게하기 위해서입니다. 몇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육계로 고난 받은 자가 누구냐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la절에 언급한 예수님입니다. 육계와 고난 당함 표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고난 받았기에 죄 짓는 것을 멈췄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자입니다. 후자가 좋은 듯합니다.

둘째, 육체로 고난 받은 사람이 죄를 그쳤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고난 받는다고 죄가 멈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쇠는 앞에서 다룬 고난과 관련한 문맥입니다. 이 고난은 일반적 어려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세상과 다른 삶을 살기에 받는 것입니다. 또한 죄를 그쳤다는 것도 모든 죄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 죄를 따르지 않고 있는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선을 행함으로 세상에서 고난 받는 자는 세상 따르는 것을 멈추었음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셋째, 고난의 목적입니다(2). 이 땅에 사는 동안 사람의 정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구원 이전 삶의 모습과 단절하고 다른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자는 3절에서 과거 세상속 모습(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 등)의 추함은 과거로 족하다는 표현을 부연함으로 새로운 삶을 촉구한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살면 더 고난 받습니다(4). 그럼에도 그렇게 살라고 한 것은 고난을 피하고 평안함만을 추구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황과 상관없이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바른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신자는 계속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신자를 핍박하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4-6)

1-3절이 예수 믿는 독자에 대한 것이라면, 4-6절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독자들이 버렸다는 3절 죄의 모습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고 당황해합니다. 어제까지 자기들과 같이 극한 방탕의 삶을 살았는데, 갑자기 그 모든 일을 버리고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신자들을 비난하기까지 합니다(4). 세상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자기들처럼 살다가 하나님/예수 때문에 갑자기 그런 삶을 악한 것으로 여기면, 계속 그 삶을 추구하는 자기들은 악한 자들이 됩니다. 말로 비난하든 그렇지 않는 삶이 대조되고 옳고 그름의 구분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신자의 삶을 따라 자신을 바꾸는 것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삶의 방식이 옳고 자기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기득권과 힘이 있으니 자연스레 신자를 미워하고 비난하며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복음 3:19-20처럼 빛(예수)이 세상에 왔지만 자기 행위가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빛을 겁박하고 제거하려는 세상 모습과 유사합니다. 시대와 장소와 상관없이 세상과 신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땅에서는 그들 목소리가 우세하고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장차 주님이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된 모습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5; 참조. 2:12). 이런 면에서 그들의 태도는 세상을 주관하는 창조주를 믿지 않는 불신이며, 어떤 것이 실제이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는 무지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다릅니다(6).

특별히 믿고 죽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 어리석은 것을 믿고 아무 유익 없이 자기들과 똑같이 죽었다고 판단 받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그들은 생전에 자신들에게 증거된 복음을 믿었습니다. 비록 육신으로는 죽었지만,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을 따라 산 것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에는 누가 실제로 웃는 삶을 살지 판명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과 보이지 않는 이면의 실제는 다릅니다. 또한 현재와 미래의 진실도 다릅니다.

그렇기에 신자는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런 삶에 고난과 어려움이 있지만, 비난과 겁박에 기죽거나 동화되어 살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예수를 믿는 것으로 인한 새로운 관계와 무엇이 실제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진리를 알고 있는 자가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개인과 고난 중에 있는 동료 신자들 향한 태도(7-11)

예수 그리스도에게 불림을 받기 전에, 즉 세상 가운데 있을 때는 우리들도 세상의 쾌락을 즐거웠습니다. 정욕적인 쾌락이 즐거웠고, 세속적인 영광이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고 난 후에 천국이 얼마나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국에는 이러한 것들이 아무런 소용도 없고, 그런 일들을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7-11)

베드로는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에 관해서 말합니다. 먼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어서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기에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1) 고난 중에 있는 신자의 태도 정신 차려 기도하라(7)

화제를 다시 신자에게로 옮겨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다룬다. 11절까지 지속된다. 먼저, 신자 삶에 대한 명령이 왜 필요한지를 다시 언급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선악 간에 모든 사람을 판단할 시간이다. 세상은 주님께 자기 일을 고하고 멸망의 심판을 받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인하는 때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종말에 있을 하나님 나라 완성이 시작되었기에 그 마지막 과정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에 세상 위세도 곧 끝날 것입니다.

이런 전제로 저자가 신자 삶에 대해 다루는 첫 요소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기본 기능은 유한자(有限者) 사람이 무한자(無限者)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어느 한 영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이 주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저자가 특별히 염두에 둔 기도 내용이 있습니까? 이 기도는 하나님 뜻을 위한 선행과 그로 인한 고난과 관련 있을 듯합니다. 세상에 대한 제사장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해 주의 도움을 구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저자는 ‘기도하라’를 명령법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명령법은 정신 차리라는 것과 근신하라는 것이고, 기도는 목적 전치사구로 표현됩니다. 즉, 기도를 위해서 정신 차리고 맨 정신으로 있으라는 말입니다. 신자 삶에 대한 일반 권면을 제시하는 1:13과 같은 내용입니다. 세상 소리에 휩쓸리지 말고 고난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도록 바른 사고와 판단이 가능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2) 고난 중에 있는 동료 신자에 대한 태도 여러 권면들(8-11)

동료 신자와의 관계 요소들을 언급합니다. 첫째, 사랑입니다(8). 뜨겁게 사랑하라고 합니다. 동료 신자들을 향한 죄 용서를 포함합니다. 1:22 내용의 반복입니다. 둘째, 불평하지 말고 서로 환대하라고 합니다(9). 셋째, 성령의 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를 향해 섬기고 봉사하라고 합니다(10-11a). 모든 일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1차적으로 은사 사용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언급한 신자의 삶, 곧 언약 백성으로서 세상 속 제사장 삶의 궁극 목적이기도 합니다(참조. 2:9-10).


그리스도인답게 젓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수용하며 사는 삶입니다.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삶이 고난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쇄도하여 들어온 종말의 시간표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이 세상의 저항에 남다른 가치관으로 저항할 때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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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03-02)


 의를 위한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

베드로전서 3장 13-22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을 허락하시며 아내와 남편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가정을 세워 가기 위해, 배우자를 존중하며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함께 상속받을 자로서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복을 이어받기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면서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세상 속 하나님 백성의 삶을 계속 다룹니다. 이번에는 고난의 삶에 대해서입니다. 이 부분은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3-17절은 독자가 중심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선을 행할 뿐 아니라, 참고 견디는 소망의 이유를 준비함으로써 증거의 기회로 삼으라고 합니다. 18-22절은 메시아 예수를 고난의 모본으로 소개합니다. 고난 이후 승리의 영광을 경험한 주를 기억하고 함께 누릴 영광을 기대하고 견디라고 합니다.

 

고난 받는 성도들을 향한 권면(13-17)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선을 행하고 바르게 살아 누구에게든지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행하면서 살아가가도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난 받을 때에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고, 오히려 선한 일로 고난 받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야 합니다.

13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13-17)

악한 세상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악한 이 세상을 거스르는 것이고 그들을 불편하게 하고 부끄럽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고난이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복 있는 삶의 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고, 악을 행하면서 고난 받는 것보다 났습니다.

(1) 선을 행하라(13)

2:11에서 시작한 세상 속 신자의 삶에 대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고난 상황을 다룹니다.

조건문이 담긴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만일 선한 것에 열심 내는 자가 되면 누가 ‘너희’를 해하겠습니까? 그런데 생각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이 질문은 수사 표현입니다. 내용에 담긴 원리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뜻을 추구하고 살면 그분이 지키시고 악한 자들이 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닌데…’라는 생각을 유도한다. 독자들은 현재 고난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의 기능은 14절에 언급할 또 다른 상황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 이 질문의 실제 초점은 독자들이 선한 것에 열심인 상태입니다. 독자들이 잘못해서 어려움을 만든 것이 아님을 말해주기 위해서입니다.

(2)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을 때(14-17)

13절처럼 조건문을 사용하지만, ‘그러나’로 다른 상황을 다룹니다. ‘만일 의를 위하여 고난 받으면’ 상황입니다. 하나님 뜻을 따라 선하게 살아도 어려움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없기 때문도 아닙니다. 신자의 이중 정체성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나그네’ 표현으로 제시했던 것입니다(1:1).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저자는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바른 상황인식입니다. 주절의 ‘복 있는 자’ 표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는 상태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다가 얻는 고난은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는 표지이며, 그 고난을 견딘 사람에게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내용이 17절에 반복됩니다. 바른 생각과 인식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둘째, 복음 증거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일련의 명령법과 관련 표현을 통해 설명합니다. 우선,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거나 떨지 말라고 합니다(14b). 오히려 독자들 마음 안에 메시아를 주(主)로 거룩하게 모시고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합니다(15a). 삶의 이유 되신 하나님과 그분으로 인한 소망을 소개하여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과 연결하는 제사장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행하는 과정에 하나님 경외함과 사람에 대한 친절함과 함께 선한 양심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선행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신자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15b-16).

이런 요소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 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다 필요합니다. 하지만 핵심 토대는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지식입니다. 신자로 하여금 1)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게 하고, 2)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며, 3) 지속적으로 그분이 기대하는 삶의 모습을 살아가고, 4) 적절한 때 그분을 증거할 수 있게 합니다.

 

메시아 예수의 고난과 승리(18-22)

성도들은 고난에 대한 인식을 재조명해야 합니다. 성도에게 고난은 불행이나 실패가 아닙니다. 형통함은 고난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약속한 하나님의 복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인들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고난 없는 삶을 걱정해야 합니다.

18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18-22)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죄인을 위한 의인의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이 당장에는 실패로 보였지만, 부활로 그 고간이 옳다는 것을 인정 받으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노아와 그 가족만 구원을 얻었고, 그리스도께서도 왕의 자리에서 만물을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1) 메시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18)

‘왜냐하면’을 통해 고난에도 불구하고 왜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예수 때문입니다. 고난에서 승천 이후 영광까지의 과정을 다룹니다. 시작은 십자가입니다. 메시아가 죄들을 위해 단번에 고난당했다 의인이 불의한 자들을 대신한 것이다. 신자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18a).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2:24; 모라서 5:1-2).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고난 사역은 이후 진행될 영광스런 승리의 시작입니다. 승리의 첫 모습은 부활입니다(18b). ‘죽임 당함’과 ‘다시 살림 받음’이란 두 분사의 대조로 소개됩니다. 육체에 대해 죽임 당했지만, 성령에 의해 다시 살림 받았습니다(참조, 로마서 8:11). 표면적으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세상이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면적 진실이 있습니다. 부활입니다. 세상과 죽음의 통치가 패배했음과 함께 예수의 삶과 죽음이 옳았음을 선포한 것 합니다.

(2) 옥에 있는 형들에게 승리 선포(19-20)

예수님의 승리 이야기가 계속 진행됩니다. 부활한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옥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부활과 승천 사이의 기간인 듯합니다. 악한 영들은 노아가 방주를 준비하는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불순종한 자들입니다.

어려운 신약 구절 중 하나입니다. 구약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습니다. 중간기 문헌 에녹1서 6-11장을 반영합니다. 내용 이해를 위해 두 가지를 짚고 가야 합니다. 첫째, 영들입니다. 홍수로 죽은 사람들이란 견해도 있지만, 에녹 1서 경우처럼 인간 사회를 망가뜨린 타락한 천사들을 지칭하는 듯합니다. 노아 홍수 때 그들도 붙잡아 옥에 가두고 최후 심판 때까지 가두어 두었다고 합니다.

둘째, 선포입니다. 흔히 복음 전파와 관련해 많이 사용하지만, 본문에서는 승리의 선포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악한 천사들에게 부활로 인한 승리를 선포하고 예수가 그들의 심판주임을 보인 것입니다.

(3) 물과 신자들의 세례(20b-21)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에서 살짝 주제를 이탈합니다. 방주와 물을 세례로 연결시켜 신자의 구원을 설명합니다. 방주는 노아가 준비한 것이라는 20a절 표현과 연결된 것입니다. 방주 안에 있던 소수의 사람만 구원 얻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방주가 아니라 ‘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고 말한 점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방주에 있었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초점은 물을 통한 심판과 구원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하는 모든 이들은 물 심판으로 죽었지만, 노아를 비롯한 여덟 사람은 그물 심판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입증 받았습니다. 물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통로입니다. 구원과 멸망이 완전히 갈릴 역사의 마지막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 심판을 통해 완전한 죄 사함을 받고(로마서 5:9) 구원 안에 있음을 확인할 것입니다(참조, 4:5).

마지막 심판에서의 구원은 이 땅에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회개와 믿음으로 참여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 참여의 외적 표현이 세례입니다. 저자는 노아 때의 물을 예수와 함께 하는 세례의 물과 연결시켜 신자의 구원을 묘사합니다(21a). 물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죄와 옛 세상에 대해 죽은 것을 상징하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그의 부활에 참여해 하나님 나라에서 거듭남을 의미합니다(참조, 로마서 6:1-14). 이 세례는 또한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저자는 세례를 단순히 육체의 더러움을 씻는 목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맹세라고 부연합니다(21b). 이제는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라는 말입니다. 선한 양심으로 바른 삶을 사는 제사장으로서의 삶입니다.

(4) 메시아의 승천과 만물의 복종(22)

다시 예수에 대해 집중합니다. 승천을 통해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시편 110:1의 성취이며 예수님의 원래 영광을 회복한 것입니다. 당연히 피조물인 천사들과 모든 능력과 권세들이 그에게 복종하며 또 영원히 복종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서 부활과 승천과 영광 회복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몇 가지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첫째, 예수에 대한 진실입니다. 고난으로 죽은 실패자가 아닙니다. 부활로 승리하신 만유의 주님입니다. 독자들은 바로 이분을 ‘주님’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둘째, 세상 운명의 진실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커 보여도 언젠가는 그분 앞에 복종해야 합니다. 셋째, 고난에도 불구하고 지지 말고 계속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신자는 그 예수와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산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의 핵심은 그분의 고난을 닮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비에 가깝습니다. 고난당할 필요가 없고, 당하지 않아도 괜찮은 예수님이 외 굳이 고난을 당하시었습니까? 그 삶이 왜 승리의 길이고 선한 길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 말과 삶으로 설명한 만큼이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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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03-01)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장 1-12절


어떤 사람이 자신이 주장하는 말과 행동이 다르면 이중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능력은 행함에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의 없는 것처럼 산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성도들의 사회생활에 이어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믿음의 삶이라는 것은 아내는 믿지 않는 남편일지라도 그에게 순복하고, 남편은 연약한 그릇인 아내를 지식을 따라 대하라고 권면합니다. 또 그리스도인은 형제와 원수를 모두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에서 거론했던 것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참고해 볼 수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에 대해(1-7)

가정을 이루는 두 기둥은 남편과 아내입니다. 1세기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가장인 남편의 신앙을 따라야 하는 사회적인 관습 때문에, 남편이 그리스도인 되면 아내와 자녀들도 함께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남편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부부에 대한 권고를 들어보겠습니다.

1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7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1-7)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사람들이 사회생활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 다음에 가정생활과 교회 공동체 생활에 대해 말씀합니다. 먼저, 아내와 남편에 부부관계를 말씀합니다.

(1) 아내에 대하 남편에게 순종하라(1-6)

세상 속 성도의 삶에 대한 세 번째 명령입니다. 아내를 향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11). 앞의 경우처럼 당시 사회 구조에서 밑에 있다고 여김 받는 자에 대한 것입니다.

이 명령의 상황과 의도는 16절에 잘 나타납니다. 먼저, 상황과 관련해 이 명령은 모든 믿는 아내에 대한 것이지만, 특별히 불신자 남편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듯합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는 표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믿는 아내는 이중 정체성으로 인한 어려움을 가정에서도 겪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한편, 이 명령의 목적은 남편의 구원입니다. 남편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말로 설득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정결하게 살아가는 선한 모습을 통해 남편이 주께 돌아올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생각거리가 있습니다.

첫째, 아내 순종의 주된 목적은 남편 구원이 아닙니다. 만일 남편이 믿는 자라면 이 명령은 의미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특별한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은 보편명령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도 일반 상황을 다룬 에베소서 5:22-24에서 마치 교회가 메시아에게 하듯 아내도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순종이 보편적이듯 아내의 순종 역시 그렇습니다. 이 순종은 여자에 대한 저주 상황(창세기 3:16)의 반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와에 대한 심판 중 하나는 아내는 남편 다스리기를 원하지만 남편이 아내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한 아내의 주도권 다툼이 심판의 모습이며, 비정상적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믿는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심판 모습을 뒤집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이란 죄의 발로가 아닌, 섬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에베소서 5:21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바울은 아내의 순종을 말하기 전에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서로 순종하라고 합니다. 먼저 섬기신 예수를 본받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는 아내의 순종은 굴종이 아니라 자발적 섬김입니다.

 둘째, 믿는 아내가 선을 행한다고 반드시 남편이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편지 전체 분위기는 신자의 충실한 삶 때문에 어려움 받고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믿는 아내가 선한 삶을 살면 더 미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렇게 살라고 합니다. 언약 백성으로서 불신자 남편에 대한 제사장 역할을 신실하게 하고 고난 받는 것입니다. 혹시 남편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3절부터는 정결한 삶의 모습을 어떻게 보일지 설명합니다. 여자와 아내로서 단장하되 세상과 다르게 하라고 합니다.

먼저, 외적 치장과 내적 성품의 대조로 설명합니다(3-4). 값진 금이나 화려한 옷으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당시 사회 귀부인들이 세상 허영을 추구하는 모습을 예로 든 것입니다. 이것들은 썩어 없어집니다. 대신 마음에 숨은 사람, 곧 내면을 썩지 않는 온유함과 조용함으로 꾸미라고 합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합당한 인격의 모습으로 단장하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불신자 남편에 대한 배려와 받아줌의 태도와 관련 있는 듯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귀하다’라는 말을 첨가해 그 중요성을 강조합니다(4). 이후 사라를 비롯한 믿음의 여자들을 본받으라고 권합니다(5-6). 믿는 아내 역시 자기 남편에게 계속 선을 행하고, 혹시 그 일로 인해 어려움 당해도 놀라지 말고 견디면 언약 백성 조상의 아내인 사라의 후손, 곧 하나님 백성으로 인정된다고 말합니다.

(2) 남편에 대해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라(7)

남편에 대한 명령입니다. 앞 세 명령과 다르게 사회 구조에서 위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입니다. 비교적 적은 분량으로 다루지만, 그 중요성은 작지 않습니다. 크게 두 가지 명령과 그에 대한 목적 진술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명령은 ‘여자’(아내)와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저자가 집중하는 것은 ‘어떻게’입니다. 두 가지를 첨가합니다. ‘지식에 따라서’와 ‘더 약한 그릇처럼 표현입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상대적으로 신체적 힘이 약한 아내를 함부로 대하며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명령은 아내를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앞의 것보다 적극적입니다. 하지만 당시 문화 속에서는 굉장히 낯선 것입니다. 아내는 존중받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내를 생명의 은혜, 곧 구원의 미래 과정을 함께 받을 자로 여기며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이 역시 파격입니다. 상속이란 관점에서 아내와 남편을 동일 위치에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가정의 머리로 이해하고 상하구별을 가진 당시 문화에서는 상당히 낯설 습니다. 이 명령은 아내의 순종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아내는 순종으로 남편을 섬기고 남편은 존중으로 아내를 섬깁니다. 하나님이란 새로운 기준을 가진 신자에게 명령한 것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명령들의 목적은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단순히 기도가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아내를 함부로 대하고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악한 세상 방식을 따라 사는 모습입니다. 당연히 기도를 비롯한 그분과의 관계가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부부 영역에서도 조심해서 세상과 다른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섬기는 삶입니다.

 

결론적 권면들(8-12) 

선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창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일상에서 구현되어야 할 진리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정의되는 선의 개념은 다를 것입니다. 그 정도에서도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해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늘 의식하는 도리밖에는 없습니다.

8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8-12)

나그네로서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 안 사람들에게는 같은 마음을 품고 동정하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겸손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용하려들지 말고 자기 곁을 내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공감하고 통감해야 합니다. 악한 일을 당해도 원수 갚지 말고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1) 결론적 권면들 1: 공동체를 향한 대내적 권면들(8)

‘마지막으로’ 표현으로 세상 속 신자의 삶에 대해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12절까지 진행됩니다.

8절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다섯 가지 덕목을 형용사로 소개합니다. 같은 생각과 공감과 형제 사랑과 따뜻한 마음과 겸손한 생각입니다. 이런 성품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모두 관계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는 1:22 명령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어려움 받는 신자들이 대내적으로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 상황을 잘 견딜 수 있도록 돕는 기능도 있습니다.

(2) 결론적 권면들 2: 세상 관계를 향한 대외적 권면들(9-12)

결론적 정리의 두 번째 부분으로 세상에 대한 태도를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받는 부정적 상황을 전제하지만, 세상과 다르게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예수님의 가르침(마태복음 5:44; 참조, 출애굽기 23:4-5; 잠언 25:21)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고난을 참고 세상 죄를 위해 대속물이 되신 그분의 삶을 본받는 것이기도 합니다(2:21-25).

신자가 이런 삶을 견지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을 위해 부르심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중 정체성을 가진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어 세상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제사장 역할입니다. 더 나아가 그런 삶을 충실하게 살면서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고난 자체가 의미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고난이 신자가 세상 백성이 아니라는 점과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신실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장차 복을 상속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백성’과 ‘아버지-자녀’의 삶을 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자의 기대는 예수님께서 그랬던 것처럼 독자들이 모든 것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환경과 상관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에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의도는 시편 34:12-15 인용을 통해 부연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를 원하는 자는 말의 차원에서악한 것과 거짓을 떠나야 하고, 행위 차원에서 악을 떠나 선과 화평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용에 의하면, 저자의 가르침은 1) 신자의 이중 정체성과 2) 언약 백성으로서의 제사장 소명을 기억하고 3)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 소명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선을 행하고 화평을 추구해야 합니다. 무엇이 선입니까? 무엇이 타협이 아닌 화평입니까? 우리의 눈이 의인의 편을 들어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늘 조율하며 결정해나가야 합니다. 단숨에 되지 않더라도 점점 그분과 같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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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02-02)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베드로전서 2장 11-10절


종종 주위에서 ‘나이가 들어 늙으면 습관을 고치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정말로 나이가 들면, 과거의 습관에 매어서 변화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님들을 볼 때, 그것은 절대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습관을 고칠 수 없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모든 잘못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은 받아 드린다고 확신합니다.

 

새 언약 백성이 세상에서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그 내용은 4:11까지 진행됩니다. 이 부분은 3:12까지 첫 주제로서 사회 구성원 역할에 대해서입니다. 2:11-25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11-12절은 권면의 도입부입니다. 나그네와 이방인으로서 세상과 다르게 살라고 합니다. 둘째 13-17절과 셋째 18-25절은 구체적 권면들입니다. 각각 인간 제도의 권세자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가정 섬김이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권면의 도입 : 세상 속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11-12)

우리는 세상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제 성도들은 세상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동안에 자신의 시선대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11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1-12)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와 ‘내가 권한다’ 표현으로 권면을 시작합니다. 특별히 세상 속에 사는 신자의 삶을 다룹니다.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표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지만, 남의 나라, 곧 세상 어둠의 영역에 잠시 거주하거나 여행자와 같은 신자의 이중 정체성을 전제합니다(참조. 1:1).

11-12절은 도입 부분입니다. 두 가지를 주문합니다. 첫째, 개인 차원의 권면입니다(11).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반역의 나라의 충돌을 배경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거절하는 세상 요소들을 따르지 말라는 말입니다. 둘째, 사회적 차원의 권면입니다(12). 이방인, 곧 하나님 백성이 아닌 사람들 속에 살면서 세상을 따르지 말라는 것은 은둔자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선한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향하여 제사장으로서 언약 백성 의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 목적은 비방하는 세상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주의 재림과 심판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목적에는 몇 가지 함의가 있습니다. 첫째, 신자가 이 땅에서 선한 삶을 살아도 비방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주의 재림 때라야 비방하는 자의태도가 바뀔 것입니다. 신자나 교회가 선한 일을 하면 세상이 회개하고 전적으로 새롭게 될 거라는 믿음은 순진한 착각입니다. 죄악 세상은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둘째, 주님이 계획하신 끝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모든 자들=]-\\ 정하고 믿지 않는 자들도 신자가 옳았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자는 1) 끈질긴 세상 죄의 속성을 인식하고 2) 구원의 미래를 기대하며 3) 사람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기대하고, 오늘 세상에 대한 제사장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인간 제도의 권세자들에 대해 (13-17)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막고 선을 장려하기 위해 세우신 권세자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지만, 그 자유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용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하는 자들이기에 결코 악에 굴복하여 악에 동조하는 사람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13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13-17)

베드로는 선을 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합니다. 그는 성도들이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어떻게 하는지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이 세상의 제도와 권세를 존중해야 합니다.

(1) 인간 제도의 권세자들에 대한 명령: 순종하라(13-15)

이 세상 속 신자 삶에 대한 첫 번째 구체적 명령입니다. 왕이나 왕이 임명한 총독 등 인간 제도의 권세자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지만, 본문 정보와 관련해 몇 가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본문은 보편적 상황을 전제합니다. 악한 권세자 같은 특별 상황이 담긴 교리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순종의 삶이 초점입니다. 둘째, 사람은 사회 구조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구조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사람은 관계로 인해 태어나고 관계 속에서 살고 죽습니다. 셋째, 사회 구조 속 위아래 관계도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작은 부모와 자식 또는 형제자매 구조입니다. 이렇듯 위계질서 역시 필연적입니다. 넷째, 사회 구조 속 통치자 역시 필연적입니다. 원래 창조명령에는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는 것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피조물을 잘 다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거절한 이후 모든 관계가 망가졌고,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권세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반역의 세상 영역에서도 여전히 그분의 뜻이 세워지기를 기대하고 일하십니다.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하는 통로로 권세자들을 사용하십니다.

저자는 이런 권선징악 기능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15). 구약에서 이방 왕을 들어 죄악의 나라들을 징벌하는 것이 그 한 예입니다. 이런 면에서 권세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그들 을 통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를 위해’ 순종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세상 관계나 구조를 깨지 않는 것 혹은 그 안에 있는 권세자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선한 삶을 통해 세상에 대해 제사장 역할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대이며 성도들 소명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2)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16-17)

권세자에게 순종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순종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자유도 있지만, 하나님께 속한 노예처럼 악이 아니라 선을 위해 그 자유를 사용해야 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사람을 존중하고, 동료 신자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해야 합니다. 

 

가정 섬김이(종)에 대해(18-25)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당한 고난을 받아 돌아가심으로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있기에 그런 고난을 감내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처럼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 사는 사람으로 살도록 말입니다.

18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18-25)

베드로는 당시 종(노예)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연결합니다. 이들이 비록 한 인간의 종일지라도 동시에 하나님의 종이기에, 기꺼이 선을 행하고 고난을 받으며 인내하면서 다르게 살아가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1) 가정 종(노예)에 대한 명령: 순종하라(18) 

가정에서 섬기는 사람들에게 모든 일에 두려움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참조, 1:17)으로 인간 제도 속 또 다른 권세자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순종은 그 대상의 성품과 상관없이 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노예제도가 없기에 이 명령을 보편적 원리로 직접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일터를 비롯한 인간 제도에 대한 일반 원리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2) 순종의 이유 1: 선행으로 고난 받는 것은 은혜다(19-20)

가정 섬김이(종)들이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특히 까다로운 주인에게 억울하게 어려움 당하는 상황을 전제합니다. 한마디로 선행으로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고 참는 것이 그분 앞에서 은혜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 내용을 19-20절에서 반복합니다. 선을 행하기에 고난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칭찬’이란 표현은 보상이 있음을 의미하지만(20), 그 보상이나 고난 상황이 극적으로 반전되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란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에도 참고 계속 선을 행하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오늘날 일반 성도나 교회의 생각과 많이 다릅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승리입니다. 상황을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바꾸어주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 자녀의 모습을 계속 견지해가는 것이 복이며, 그 일을 통해 고난 받더라도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승리입니다(마태복음 5:10-12). 하나님을 향해 신실함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며,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순종의 이유 2: 예수 메시아의 예(21-25)

가정 종(노예)들이 순종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를 제시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고 견디기 위해 부르심 받았기 때문입니다(21a). 첫 번째 이유처럼 예수 믿어 미래를 보장받고 이 땅에서도 복(?) 받고 사는 것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충격적 내용입니다. 부르심의 이유를 고난과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이중 정체성과 제사장 역할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을 아는 자들에게는 놀랍지 않다. 오히려 그런 소명 맡기신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저자는 예수를 예로 들어 이 내용을 부연합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면에서 신자에게 중요합니다. 첫째, 예수의 고난은 그를 따라가는 신자들에게 귀한 모본입니다(21-23). 세상에서 선을 행하다가 겪는 신자의 고난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가 겪고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가 없었고 입에 거짓도 없었습니다. 세상을 따라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않았습니다(참조. 11). 그럼에도 욕을 먹고 고난당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분은 끝까지 버티고 견뎠습니다. 고난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믿고 그분에게 주어진 구원의 통로로서의 소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속 죄인을 연결하는 온전한 대제사장의 일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 이 땅에서 언약 백성으로서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하는 신자에게 최고의 모본입니다. 둘째, 예수는 신자에게 구원의 새로움을 주신 분입니다(24-25). 그분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세상 어둠의 영역에 속해 있던 자들의 죄를 대신 담당함으로 그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독자들은 예수로 인한 하나님 구원의 산 증인들입니다. 그렇기에 그 예수를 따라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선한 삶을 꿋꿋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처럼 살면 됩니다. 그분이 보여주고 가셨습니다. 세상을 존중하되 세상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잘 분별하여 살아가셨습니다. 우리도 나그네와 거류민의 정체성을 기억하면서 영원히 살려고 하지도 말고, 무책임하게 관광하듯 살지도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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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02-01)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베드로전서 2장 1-10절


아프리카 소망을 준 리빙스톤은 영국에서 태어나 선교사를 꿈꾸며 자랐습니다. 그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사가 되었고, 아프리카에 가서 작은 희망의 빛을 전해 주었고 그의 사역은 아름답지만 그곳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곳에 영원히 살아계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고 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리지널 리빙스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는 당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성전에 모퉁잇돌이 되신 예수님처럼, 성도들도 고난 중에 자신의 정체성을 잘 깨달아서 구원에 이르도록 말씀으로 자라가라고 권면합니다. 항상 살아있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듭난 성도들이 주님 오실 때까지 힘써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은혜를 살펴가겠습니다.

 

다섯 번째 명령 : 신령하고 순전한 젖을 사모하라(1-3)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은 우리 삶을 변화시킵니다. 영적으로 건강하고 온전하게 합니다. 거듭나게 합니다. 영적으로 건강하고 온전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적을 거듭난 이후로도 계속해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이 마치 갓난아기가 어머니 젖을 먹고 자라가는 것처럼, 구권에 이르도록 자라가라고 권면합니다.

1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1-3)

베드로로는 1:13에서 시작된 일련의 명령 중 다섯 번째입니다. 그 명령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 성도로 잘 살아가기 위해 말씀을 포함한 하나님의 포괄적 은혜를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이 명령도 앞의 명령들처럼 ‘왜’와 ‘어떻게’ 차원을 수반합니다. ‘왜’ 차원은 두 가지로 전달합니다. 첫째, ‘그러므로’는 1:23-25 성명을 전제로 명령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독자들은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통해 세상 어둠의 영역에 대해 죽고 그의 부활로 빛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그의 자녀로 마치 갓난아이들(2)처럼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아이가 젖을 찾듯이 영적 아이인 독자들도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둘째, 조건문 구조입니다. 1-3절은 전체적으로 ‘만일’(에이)이란 조건절(3)과 그에 대한 주절(2)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는 조건절 내용 역시 독자가 거듭나는 과정에서 경험한 것을 말합니다. 시작 과정에서 그분의 인자하심을 경험했기에 이후 과정에서도 계속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한편, ‘어떻게’ 차원은 주절을 꾸미는 분사절(1)에서 설명됩니다. 세상 삶의 모습을 버리는 방식입니다. 앞선 명령들처럼 구원 이전과 이후의 대조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외에 주목할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목적절(히나)을 통해 명령의 목적을 기술한 것입니다(2). 앞 명령들에서는 없었습니다. 다섯째 명령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왜’와 ‘어떻게’를 통해 주의 은혜를 추구함으로써 구원, 곧 구원의 미래 완성을 향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는 것과 이 땅에서 다른 모습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성경의 구원은 완성을 향해 가는 ‘구원 과정’이고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관계에는 끝이 없습니다. 영원히 그분을 알아가고 사랑하는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구원이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저자는 거듭난 신자에게 세상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함으로써 구원의 삶을 계속 귀하게 만들어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소명(4-10)

이 세상에 생명을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점점 싱싱하게 성장하던지 아니면 점점 노쇠화 되든지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날마다 싱싱하게 성장해야 합니다. 성도는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집인 교회의 일부가 된 존재며,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4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4-10)

베드로는 구약성경(이사야 28:16; 시편 118:22)을 인용해 돌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분인지를 증언합니다.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에게 사람들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지만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께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며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합니다.

(1) 산 돌 예수로 인한 신자의 상태: 제사장 일을 위한 지어지는 신령한 집(4-5)

‘주의 인자하심’이란 3절 표현과 연결해 주 예수님으로 얻게 된 독자 상태를 설명합니다. 몇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에 대한 설명입니다. 시편 118:22을 인용해 예수님을 살아 있는 돌로 묘사합니다(4). 사람들은 예수님이라는 돌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고 거절하지만, 예수님은 그 위에 집을 세울 수 있는 하나님이 택하는 신 보배롭고 살아 있는 돌입니다(5). 둘째, 예수님에 대한 독자의 반응과 결과입니다. 두 동사를 사용해 묘사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에게 ‘간다’는 표현입니다. 중간태 분사형(프로세르코메노이/προσερχομενοι)을 사용합니다. 주동사 내용의 전제 혹은 선행 과정으로 독자의 능동적 행위를 부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건물로 세워지다’라 게는 표현입니다. 현재 직설법 수동태(오이코도메이스테/οἰκοδομεισθε)입니다. 문장 주동사로서 분사를 통한 과 은정의 결과입니다. 독자는 예수를 향해 긍정 반응을 하고 있고, 그 결과 신적 도움으로 인한 긍정 결과를 경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셋째, 건물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신자를 살아 있는 돌같이 건축되는 건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다는 말입니다. 넷째, 성전이 되어가는 목적입니다. 신자를 성전으로 소개한 것은 고린도전서(3:9)나 에베소서(2:20-22)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초점이 다릅니다. 고린도전서는 분열된 교회를 회복시키려는 내용이고, 에베소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하나 됨을 다룹니다. 베드로전서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 일을 위한 성전입니다. 그 신령한 제물은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즉 신자들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예물처럼 하나님께 드릴 목적으로 존재하는 성전입니다. 9절에서 말할 ‘왕 같은 제사장’ 개념입니다. 정리하면, 독자는 예수께 긍정적으로 반응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져갑니다. 예수님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제사장 일을 위해 세상에 존재합니다.

(2) 산돌 예수님으로 인한 두 가지 결과(6-8)

살아 있는 돌 예수에 대한 설명입니다. 심판과 구원을 가르는 시금석으로 소개합니다. 독자(‘너희’)와 세상(‘그들’)의 상태가 대조되며, 구약 인용과 적용의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먼저, 독자들 상황입니다(6-7a). 이사야 28:16 인용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었는데,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독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믿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 그대로 보배로운 돌입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다릅니다(7b-8). 예수님을 믿지 않기에 그들에게 예수님은 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마치 건물이 잘 세워지게 하는 초석인데도 눈먼 건축자들에게는 쓸모없는 돌로 여겨지는 것과 같습니다(시편 118: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돌이 다른 기능을 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부딪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됩니다(이사야 8:14). 믿지 않는 세상은 그들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이런 설명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는 듯합니다. 첫째, 세상에 거하고 있는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판단이 옳은 듯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힘이 있고 잘사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면적 진실은 다릅니다. 독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험하고 있지만, 세상은 멸망 길로 가고 있습니다. 단지 그 결말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독자들 선택이 더 옳습니다. 저자는 진실을 확증시켜 독자들이 잘 견디도록 돕고 싶은 것입니다. 둘째, 보다 구체적으로 세상 속 신자 삶에 대한 권면의 토대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체적 권면들은 11절부터 시작됩니다. 그전에 신자와 세상에 대한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저자 권면을 따라 바른 삶을 잘 살도록 돕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의도는 9-10절을 통해 한 번 더 강조됩니다.

(3) 새 언약 백성으로서의 성도들(9-10)

6-7절에서 말한 예수님과 관련한 신자와 세상 간의 대조를 연장하고, 4-5절에서 말한 신자 모습을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

독자의 모습을 네 가지 호칭으로 묘사합니다. 택하신 족속과 왕 같은 제사장과 거룩한 나라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모두 언약 관계를 배경으로 하며, 과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출애굽 백성을 묘사한 것과 동일합니다(출애굽기 19:5-6). 독자들 역시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새 언약 관계 안에 있음을 전달합니다. 구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세상을 하나님과 연결해주는 통로 역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분이기에 그분을 드러내는 계시의 통로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지에 대해서는 그 관계를 실제로 경험하는 사람들 예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역할을 하도록 선택되었습니다. 새 언약 백성도 율법의 뜻인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5). 저자는 목적절(히나)을 통해 독자들 역시 동일한 소명으로 부름 받았음을 부연합니다(9b).

더 나아가 구원 이전과 이후를 하나님의 긍휼과 백성의 관점에서 대조하여(10) 독자들의 정체성과 소명의 중요성을 확인시킵니다. 이 모든 것은 왜 세상 속에서 다르게 살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권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새 언약 백성인 편지의 독자에게 이런 소명이 있다면, 동일하게 예수님으로 인해 새 언약 백성이 된 우리 역시 같은 소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그분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드러내고, 예수를 통해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통로입니다.


어두움에서 불러내서 빛으로 인도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선포하기 위함을 깨달았습니다. 한 번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살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잘못된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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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01-02)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

베드로전서 1장 13-25절


우리는 항상 변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었고, 새로운 시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예전의 우리가 아닙니다. 소속이 달라졌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신분이 달라지면 생활도 그 신분에 걸맞게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된 삶,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르는 거룩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키고 있는 독자를 칭찬한 저자는 이제 일련의 명령법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삶을 권면합니다. 2:3까지 진행됩니다. 1:13-25은 첫 네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장차 주님이 오실 때 주실 은혜를 바라라고 합니다(13). 둘째,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라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합니다(14-16). 셋째,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이전과 다르게 살라고 합니다(17-21). 넷째, 성도끼리 서로 사랑하라고 권합니다(22-25).

 

첫 번째 명령 : 미래 소망을 놓치지 말라(13)

구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누릴 구원이 남아 있습니다. 아니 그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에 주실 은혜와 구원입니다. 값없이 주신 것이지만 값진 것이니, 오늘 그 은혜를 받을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자녀가 된 성도는 자신을 불러 주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13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13)

베드로는 ‘그러므로’라고 3-12절에서 언급한 내용, 곧 하나님을 향한 송영과 독자의 상태와 구약에서 약속된 구원이 실현되었음을 전제로 일련의 명령을 전할 것임을 말해줍니다. 새 언약 백성의 기본 삶을 전할 것이며, 이것이 2:3까지 진행될 것입니다.

13절은 첫 명령입니다. 예수 재림 때 가져 올 은혜를 온전히 소망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구원의 미래 상태입니다.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기업을 누리는 것이 포함됩니다(3-5).

편지 몸말의 시작(3)과 마찬가지로 첫 명령을 미래와 관련해 제시한 것은 고난 중에 있는 신자에게 미래를 기대하고 오늘을 굳건하게 살라고 권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자는 독자들의 이런 삶을 위해 두 가지를 첨가합니다. 모두 분사로 표현되어 주절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둘은 미래를 소망하라는 주된 명령의 전제 조건입니다. 첫째, 독자들 생각의 허리를 동여매라고 합니다. 허리를 동여매는 것은 어떤 행동을 잘 하기 위한 준비를 말합니다. ‘생각의 허리’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삶을 위해 먼저 생각을 잘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둘째, 술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단순히 술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생각의 상태를 유지하라고 합니다. 주목할 것은 둘 다 행위가 아닌 생각 차원에 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미래를 잘 소망하기 위해서 생각의 영역에서부터 잘 준비되어야 합니다.

이 권면은 바울의 로마서 12:1-2 표현과 유사합니다. 롬 1-11장까지 구원의 커다란 그림을 소개한 바울은 세상과 구별된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말로 신자 삶에 대한 권면을 시작합니다. 베드로나 바울 모두 사고 영역에서의 새로움을 신자 삶의 시작으로 소개하는데, 이는 행위 변화를 더 우선시하는 우리의 교회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 지를 보여줍니다. 복음으로 인한 가치관의 변화가 우선해야 합니다. 행위는 그 것에 근지한 삶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언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으로 준비해야 합니까? 구체적인 전을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앞뒤 내용에 의하면 두 가지와 관련 있는 듯합니다. 현재, 복음의 내용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과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독자 소개(2)와 하나님을 송영하는 내용(3-12)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신자인 독자들은 이 내용들을 기억하고 그전에 근거해 생각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둘째, 세상에서의 삶입니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 속에 있지만 세상에 발붙이고 사는 이중 정체성을 기억하고 세상의 소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는 행동에 앞서 다른 기준으로 다르게 사고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세상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 속에 있는 신자 자신과 공동체에 대한 이해가 포함됩니다. 이는 신자의 이중 정체성을 말한 1-2절과 고난 중에도 예수를 사랑함으로 기뻐한다는 6-8절에서 추론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명령 :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라 거룩한 자가 되라(14-16)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되었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4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14-16)

첫 번째가 생각에 근거한 소망에 대한 것이라면 두 번째는 존재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존재가 되라는 명령이 주동사로 나옵니다. 믿지 않을 때와 대조하며 등장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욕심을 따라 사는 자, 즉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의 살(참조, 4:2)을 사는 존재였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그분께 순종하는 자녀, 곧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예수의 희생을 중심으로 한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입니다. 세상에 대해 다른 소속과 신분을 받았기에 새로운 존재가 되라고 명합니다. 이 명령의 핵심 근거는 새로운 기준과 모본입니다. 전에는 자기 욕심이 기준이고 세상이 모본이었다면, 회개와 믿음으로 새로운 존재가 된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삶의 기준이고 모본이 됩니다. 그분은 거룩한 분입니다. 신자들을 거룩하게 해서 자기 백성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16; 참조. 레위기 11:44,45; 19:2;20:7). 따라서 신자는 모든 삶의 모습(아나스트로페)을 그분의 기대와 말씀에 맞춰 살아야 합니다. 그분 닮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세 번째 명령 :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다른 모습으로 살라(17-21)

이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따라 살던 무가치하고 잘못된 생활 방식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닮아가는 새로운 생활 방식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7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17-21)

15절에 언급한 아나스트로페를 명령법 동사(아나스트라페테)로 제시합니다. 특정 행위가 아니라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은 ‘지내라’로 번역했습니다.

특별히 ‘나그네로 있을 때’라는 표현을 통해 세상 속 그리스도인으로서 어찌 살 것인지에 집중합니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도 명령의 근거를 제시하여 독자의 확신과 순종을 돕습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입니다. 두 번째 명령도 하나님을 근거로 하지만, 이 부분의 초점은 다릅니다. 앞부분은 삶의 기준과 모본으로서의 하나님이지만, 여기서는 심판자 모습에 집중합니다. 그분은 신자를 포함한 모든 자들을 최후 심판대 앞에서 행위대로 공평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17; 요한계시록 20:12-15). 신자는 예수의 피 때문에 진노에서 건짐은 받겠지만(참조. 로마서 5:9), 믿지 않는 자들은 망할 것입니다. 바로 이 심판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라고 합니다. 멸망당할 세상에서 건짐 받았지만, 신자는 그곳에 발붙이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께 믿음과 소망을 두고 살게 된 신자(18-21)가 다시 세상에 동화되어 심판 아래 있으면 안 됩니다.

 

네 번째 명령 : 성도끼리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22-25)

진리에 순종함으로 깨끗한 영혼을 소유한 성도는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는 삶으로 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기에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복음)에 의해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따라 믿음의 형제들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22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22-25)

마음으로부터 뜨겁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앞 세 명령이 삶 전반에 대한 것이라면, 네 번째는 특별히 동료 신자에 대한 것입니다. 이 부분 역시 명령 자체보다 그에 대한 근거가 더 깁니다.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거듭난 신자 상태입니다. 사랑하라는 주동사 앞 뒤에서 분사 형태로 제시합니다. 앞(22)에서는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했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말하고, 뒤(23)에서는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난 상태임을 부연합니다. 주목할 것은 영혼을 깨끗하게 한 목적을 형제 사랑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즉, 구원 얻어 새로운 상태가 된 목적 중 하나가 형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언약 백성의 의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출애굽기 20:1-17; 마태복음 22:37-40). 저자가 거듭난 신자의 상태를 형제 사랑과 연결시키고 실제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명령한 것은 고난 받는 교회 상황과 관련 있는 듯합니다. 외적인 고난을 함께 받고 있는 동료 신자를 사랑하여 서로 격려하고 버티게 하려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하라’는 명령의 또 다른 근거는 진리(22), 곧 하나님 말씀입니다(23-25). 진리는 독자들을 거듭나게 하고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게 하는 동력입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과 그에 속한 것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살아 있고 영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서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지만 주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말한 이사야 40:6-8을 통해 그 차이를 강조합니다(24-25).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형제 사랑의 근거 중 하나로 설명한 것은 그들이 얻은 구원이 변함없고 확실하다는 것을 인식시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함인 듯합니다.

위의 네 명령에 의하면 독자는 1) 바른 생각으로 미래를 소망하고 2) 거룩한 하나님을 삶의 기준과 모본 삼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3)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세상에서 다른 삶을 살고 4) 구체적으로 함께 하나님의 가족이 된 성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의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구원 이전과 이후의 대조를 배경으로 한 예수님을 통한 은혜로운 구원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경험한 구원의 실제, 곧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관계입니다.


 구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누릴 구원이 남아 있습니다. 아니 그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에 주실 은혜의 구원입니다. 값없이 주신 것이지만 값진 것입니다. 오늘 그 은혜를 받을 마음으로 상아야 합니다. 거룩하게 그리고 사랑하면서.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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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01-01)


택하심을 받은 흩어진 나그네

베드로전서 1장 1-12절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과 사역하심에는 결코 우연이나 실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고난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고난에는 깊은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우리의 믿음을 확신하시고 더욱 단련시키십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핍박 받아서 흩어진 성도들에게 편지합니다. 거듭나게 하시고 보호하셔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산 소망을 주시고 하늘의 영원한 기업을 잇도록 보호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성도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인사말(1-2)

성도들은 고난을 받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자기중심인 옛사람에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새사람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입니다. 고난을 통해 믿음이 정금같이, 인격이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하는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과 승리의 통로인 것입니다. 악한 세상의 가치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받은 고난일 수 있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1-2)

사도 베드로는 로마의 극심한 박해로 고향을 떠나 소아시아 북쪽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된 성도,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와 위로의 편지를 합니다.

 당시 편지 양식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의 사도 베드로를 발신자로, 북구 소아시아에 있는 성도들을 수신자로 소개합니다. 서신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기원하며 문안 인사를 합니다. 신약 다른 편지와 마찬가지로 이런 요소에도 저자의 강조가 담겨 있습니다. 초점은 독자들의 상태입니다.

여러 내용을 추가해 수신자 부분을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에 집중합니다. 첫째, 독자의 정체성입니다(1). 그 정체성은 두 가지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첫 번째 정체성은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독자들은 삼위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 구성원으로 택함 받은 자, 곧 구원받은 자들입니다(2). 또 다른 정체성은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독자들은 소아시아 여러 지역에 사는 자들입니다.

이 두 정체성 표현은 신자가 갖고 있는 이중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영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구원과정으로 세상 어둠의 영역에서 빛의 하나님 나라로 옮겨와 그분의 백성이 되었지만, 물리적 차원에서는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런 이중 정체성은 신자인 독자들이 왜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이 땅에 살지만 주류가 아닌 나그네이기에 세상으로부터 외면과 차별과 핍박을 당합니다.

 둘째, 삼위 하나님으로 인한 구원입니다(2). ‘선택 받은 자’에 대한 추가 설명입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영의 거룩케 하심과 진리에 대한 순종과 예수 메시아의 피 뿌림을 위해 택함 받은 자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백성이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계획→성령의 일하심→예수에 대한 진리 증거→믿음으로 진리를 순종하는 과정을 통해 예수의 피로 죄 사함 받음.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서술한 의도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이 담겨 있는 구원을 소개함으로써 고난 받는 신자들이 더 잘 견딜 수 있는 이유와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런 두 초점은 편지 전체 내용이 이중 정체성으로 인한 어려움에 대한 권면과 그에 대한 신학적 근거인 구원을 소개하는 것으로 진행될 것을 암시합니다(참조, 5:12).

 

하나님을 향한 송영과 독자들의 상태(3-12)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소망을 품고 사는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낯선 외국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회에 동화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들의 유업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주어진 산 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3-12)

3-5절은 하나님을 향한 송영으로 편지 몸말을 시작합니다. 송영은 12절까지 이어지며 전체가 한 문장입니다. 관계절과 종속절을 사용해 꼬리 물기 방식으로 서술하는, 다소 복잡한 형태로 진행됩니다. 전체 내용은 1-2절에서 말한 신자의 정체성과 그 근거인 구원과정에 대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을 향한 송영(3-5)

먼저 3-5절에서는 하나님을 송영하면서 그분으로 인한 구원 과정을 다시 서술합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행해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메시아의 아버지로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이행하는 분입니다. 사람(‘우리’와 ‘너희’)은 그분의 행하심을 믿음으로 경험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구원 과정의 핵심입니다. 이런 등장 인물 역할을 배경으로 3-5절의 구원 과정은 시간에 따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 상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 관련해 하나님께서는 많은 자비로 신자를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 옮겨와 그분과 관계 맺은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주셨기에 아버지 - 자녀의 관계가 만들어지고(‘하나님 아버지’[2]), 자녀로서 기업, 곧 상속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사역은 예수님의 죽음(‘피 뿌림’[2])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현재와 관련해서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신자를 보호하시고(5), 신자는 믿음과 소망으로 삽니다. 미래에는 산 소망이 실현되고 썩거나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 곧 하나님 자녀로서 얻는 관계의 풍성함이 온전히 경험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닌 하늘에 간직된 것들이며, 마지막 때 주의 나타나심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참조. 13).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런 내용으로 편지 몸말을 시작했겠습니까? 앞의 2절과 뒤의 6절과의 연관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2절처럼 하나님의 구원 내용을 담고 있지만, 미래 관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종말의 때와 소망, 즉 ‘~을 위해서’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원 과정에 있는 미래 소망을 확인시켜 이중 정체성 때문에 고난당하고 있는 신자(6-7)를 권면하기 위함입니다.

 (2) 독자들의 상태 1 : 고난과 독자들의 믿음과 기쁨(6-7)

 주절과 양보 조건절과 목적절을 사용해 독자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양보 조건절(비록 ~하지만)로 독자가 처한 부정적 현재 상황을 묘사합니다.

근심하게 하는 여러 시험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의 현재 상태는 긍정적입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미래 또한 긍정적입니다. 주 예수 메시아가 다시 올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장 구조에서 저자의 초점은 주절로 제시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있는 독자의 상태입니다.

저자는 그들을 칭찬하고 미래 소망을 보여줌으로써 더 잘 견디게 하려는 것입니다. 3-5절에서 구원의 미래에 집중한 것도 같은 의도입니다. 또한 그들 근심을 영원한 것과 비교되는 ‘잠깐’의 것으로 묘사한 점 역시 동일한 목적입니다.

(3) 독자들의 상태 2: 예수와 독자들의 사랑과 기쁨(8-9)

독자들의 또 다른 긍정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관련 있습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보지 못했지만, 그를 사랑하고 믿음을 통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합니다.

저자는 예수님을 보지 못함을 반복해서 표현하고 기쁨의 모습도 반복해서 표현합니다. 이는 독자들의 믿음의 진실함과 기쁨의 견딤과 예수 사랑하는 태도가 참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함께 독자들이 왜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이유를 첨언합니다(9). 그들이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현재 과정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고난에도 불구하고 다른 삶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 역시 의도적입니다. 독자들이 받은 구원의 귀함을 인식시키고, 그에 근거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을 놓치지 말라고 권면하고 싶은 것입니다.

(4) 선지자들의 증언과 예수를 통한 구원 실현(10-12)

9절에서 말한 독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구원을 부연합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께서 구약 선지자들에게 예언한 것입니다(10-11). 그들은 자기들에게 임한 성령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메시아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그리고 언제 오게 될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계시를 통해 장차 임할 구원을 선포하고, 궁금함과 기대로 삶을 마감한 자들입니다. 심지어 하늘의 천사도 그 구원 계획을 알지 못하고 궁금해 했습니다(12b).

그러나 독자들은 다릅니다. 예언으로 약속된 그 구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전하는 복음 전도자의 증거, 곧 예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 구원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12a). 이런 설명은 몇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구원의 복음은 하나님의 오랜 계획의 성취입니다. 둘째, 구원 과정의 핵심인 메시아는 고난과 영광을 함께 받으신 분입니다. 셋째, 독자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모두 고난 중에 있는 독자들이 믿음 안에서 계속 버틸 수 있게 하는 이유들입니다. 주목할 것은 저자가 독자들에게 단순히 힘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 과정과 그 안에 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요소를 계속 설명합니다. 고난을 벗어나는 것보다 신자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삶의 근거와 디딤돌을 지속적으로 확인시킨 것입니다. 이중 정체성 때문에 어려움 당할 수도 있는 우리도 들어야 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구원은 여정입니다. 그 구원을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시험이고 시련입니다. 따라서 구원에는 지속적인 믿음과 소망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믿을 만한 근거인 복음이 있습니다. 약속과 성취의 역사가 쌓이고 또 쌓여 더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해진 복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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