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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2-01)


은혜를 대하는 자세

이사야 12장 1-6절


 

징벌의 시간을 보낸 백성들이 돌아와서 부를 감사와 찬양을 담고 있습니다. 출애굽 때처럼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찬미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진노보다 훨씬 더 큽니다. 진노 중에도 자리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진노로 응답하셨던 여호와께서 진노를 돌이키시고 위로해주실 것을 미리 감사합니다. 그분 진노의 심판이 그에게는 구원의 출발점이 됩니다. 심판선포가 경험적 현실로 분명해졌듯이, 앝으로 있을 구원 역사도 마찬가지로 확실합니다. 심찬의 시대를 사는 자들은 역사를 경영하시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미래의 구원을 내다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1-3)

심판의 다른 얼굴은 구원입니다. 죄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우리가 구원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죄를 못 본 척하시다가 우리들이 곤경에 처할 때만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가상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실존하시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아닙니다. 심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대가 있고 계획이 있다는 뜻입니다.

 

1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2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1-3)

 

이사야 선지자는 아직 오지도 않은 구원을 노래합니다. 비록 심판하시더라도 자신은 심판의 도구인 앗수르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겠다고 합니다.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게 물을 길어 하나님께 제사하겠노라고 다짐합니다.

 

(1)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1)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진노를 돌이키고 위로해주실 것을 미리 감사합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진노로부터 그분의 구원과 위로를 기대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더러움을 씻기고 정결하게 하는 과정이기에(1:25;5:4) 구원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심판이 경험적 현실로 분명하듯이 앞으로 있을 구원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심판의 시대를 살면서도 하나님의 구원 약속에 의존하여 두려움 없이 미래를 내다봅니다. 그는 청중도 자신의 기쁨에 동참하도록 초대합니다. 감사 기도가 특이하게도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문자적으로, ‘그리고 그 날에 너는 말하리라’)로 시작합니다. 흩어진 자들의 귀환을 선포하는 앞 단락(11:11-16)에 연결해 읽도록 이끌어줍니다. 현재 문맥에서 보자면, 12장은 흩어진 하나님 백성이 귀환하여 다윗 왕국을 재건하면서 부르게 될 감사 기도가 됩니다. 화자와 청자 ‘너’가 누구인지 불분명하지만, 하나님과 이사야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왕이 사신을 파견하면서 전할 메시지를 알려주듯이,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감사 노래를 가르쳐주십니다. 2절까지가 ‘나’가 불러야 할 감사 노래의 내용입니다. 1절의 ‘나’는 여호와를 2인칭으로 부르며 심판의 시대가 끝나고 구원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감사드립니다. 돌아서지 않았던 여호와의 진노가(5:25; 9:12, 17, 21; 10:4) 마침내 돌아섰습니다. 징벌의 하나님께서 위로의 하나님으로 돌아오셨습니다(40:1).

 

(2) ‘하나님은 나의 구원’(2)

 

2절의 ‘나’는 청자를 자신의 구원 경험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여호와를 3인칭으로 언급합니다. 감사와 찬양의 주제는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도움을 주시는 분일 뿐 아니라 구원 도움 그 자체가 되십니다. 보통 ‘구원’으로 번역하는 ‘여슈아’는 ‘도움’, ‘보호’, ‘구조’, ‘원조’를 의미하는 단어로, 내적(영적, 정신적)인 것은 물론 외적(물질적)인 것까지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실존적 공간을 마련해주시기에 그분은 ‘구원’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미리) 경험한 ‘나’는 그분께 대한 무한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나는 (그분을) 신뢰하며 두려워하지 않으리라’(사역).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현재의 곤경과 미래의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해줍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는 출애굽기 15:2a의 인용입니다. ‘나’는 조상들의 증언을 자신의 고백으로 현재화합니다. ‘나’는 첫 번째 출애굽 사건을 통해 앞으로 있을 새로운 출애굽을 확신합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존이 새로운 출애굽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나’는 ‘너희에게 자신이 선험적으로 맛본 구원의 기쁨에 동참할 것을 권면합니다.

 

(3) ‘구원의 우물들’(3)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3). 이사야의 선포에서 지금까지 파괴적 부정적 역할을 맡았던 물(1:30; 8:6-7)이 구원과 생명의 표상으로 사용됩니다(41:17-18; 43:20; 44:3-4; 49:10). 구원을 장소인 우물(샘)에 위치시킴으로써 누구나 구원의 물을 길어 마실 수 있게 됩니다(55:1). 목마른 자가 갈증을 달래려고 샘에 와서 물을 마시듯이, 구원을 원하는 자는 누구나 구원의 우물로 나오면 됩니다(요한복음 4:14). 구원이 누구에게나 ‘열린 가능성’으로 주어집니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4-6)

찬양은 하나님만이 참 신임을 선언하는 것이요, 그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거룩한 백성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가장 유쾌한 변증입니다. 찬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스런 통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자기 백성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신의 찬양에 동참하도록 초대합니다.

 

4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5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6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4-6)

 

형식상 4-6절은 공동체의 감사시와 유사하지만, 현재 문맥에서는 상이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보통 감사시의 경우 시인은 청자를 자신의 감사 찬양으로 초대합니다. ‘너희’에게 자신이 경험한 구원에 참여할 것을 권하는 3절은 이러한 구조에 일치합니다.

 

(1) ‘여호와께 감사하라’(4)

 

‘그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로 시작하는 4-5절에서는 청자 ‘너희’가 감사 찬양을 드리지 않습니다. 청자 ‘너희’가 화자가 되어 명령형을 다섯 번 사용하면서 또 다른 청자 ‘너희’에게 말합니다. ‘나’는 2-3절의 청자 ‘너희’를 자신의 감사 찬양으로 초대하지 않고, 이들을 격려하여 또 다른 청자 ‘너희’에게 여호와를 찬양하며 그분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게 합니다. ‘나’는 자신의 청자 ‘너희’에게 선포자의 역할을 맡기고, 이들은 또 다른 청자 ‘너희’에게 구원의 하나님께서 하신(하실) 일을 민족들에게 널리 알리도록 권면합니다. ‘나’에서 시작한 구원 경험이 ‘너희’에 의해서 더 넓은 ‘너희-공동체’로 확대되고, 확장된 ‘너희 공동체’에 의해서 모든 민족에게 알려집니다. 온 땅이 ‘그 날에’ 있을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을 목도하게 됩니다(40:5).

 

(2)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5)

 

2-3절의 청자 ‘너희’가 화자가 되어 다른 청자 ‘너희’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도록 권면합니다. ‘그 날에 너희는 말하리라.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드려라. 그분의 이름을 불러라. 그분의 하신 일을 민족들에게 알려라. 그분의 이름이 높여졌음을 선포하여라. 여호와를 찬송하여라. 그분께서 위업을 이루셨도다. 이 일이 온 땅에 알려질지어다’(4-5절의 사역),

‘너희’가 경험하는 구원의 기쁨이 더 넓은 ‘너희’ (이스라엘)에게 전해지고, 다시 이들에 의해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 민족들에게도 알려집니다. 다섯 개의 명령 가운데 처음 두 개(여호와께 감사드려라. 그분의 이름을 불러라)는 이스라엘을 예배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그분과의 개인적 관계에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예배를 통하여 구원과 축복을 허락해주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드렸습니다. 다음의 두 명령(‘그분의 하신 일을 민족들에게 알려라. 그분의 이름이 높여졌음을 선포하여라’)은 시선을 민족들에게로 돌립니다. ‘너희-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과 그분의 높여진 이름을 민족들 가운데 널리 전해 이들이 알게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경험한 여호와를 민족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심판과 구원의 계시 사건을 통해 높여진 그분의 이름을 전파해야 합니다. 구원 경험을 민족들에게 전파할 사명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집니다. 다섯 번째 명령(‘여호와를 찬송하여라’)은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찬송하도록 권면합니다.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그분께서 위업을 이루셨도다)의 ‘게우트 아사’는 특이한 표현입니다. 이사야는 인간의 교만을 심판하는 여호와의 날 사람들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여 바위굴과 땅굴을 찾아 몸을 숨기게 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2:10, 19, 21). 모든 교만한 자를 심판하셨던 ‘그분의 위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음을 온 땅이 알게 됩니다. [‘광대하심’의 ‘가온’과 ‘극히 아름다운 일’(위업)의 ‘게우트’는 ‘높다’를 의미하는 동사 ‘가아’에서 파생된 명사다.] 여호와의 행위가 온 땅에 알려져야 한다는 주장은 내용상 11:10 또는 2:2-4에 가깝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파렴치한 배반을 목격한 증인이었던 땅(1:2)이 이제는 역사 가운데 계시된 여호와의 위업, 그분의 높여진 이름의 증인이 됩니다.

 

(3)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6)

 

이사야는 ‘시온의 주민’에게 소리 높여 환호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6). 시온의 더러움을 심판하셨던(1:8,27; 5:3; 8:14; 10:24,32)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제 시온을 깨끗이 정화하고 그곳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단절됐던 여호와와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고, 시온은 다시 여호와의 거룩함이 현존하는 곳이 됩니다. 전에 그분의 능력과 약속을 의심했던 시온의 주민이 그분의 위대하심을 소리 높여 찬양할 것입니다. 시온에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는 넓은 문맥에서 이사야가 경험한 거룩한 하나님에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6장). 입술이 더러운 백성(6:5)을 심판하셨던 거룩하신 분께서, 이사야의 더러움을 씻어 살려주셨던 것처럼, 이들의 죄악을 깨끗하게 제거해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됩니다(4:3).


그날, 백성들은 주께서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리자며 찬양을 독려할 것입니다. 이 예언된 구원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구원 받았던 그날의 감사와 감격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기쁨과 감사로 영혼이 가득 찰 수 있도록 이 구원을 되짚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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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1-01)


남은 자들을 위한 희망

이사야 11장 1-16절


 

 

부모가 매를 드는 것은 자신이 그릇된 길에서 떠나 올바른 삶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매로는 부족해 몽둥이를 들어야 할 만큼 악행과 패역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백성을 어떻게 다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는 어떻게 들어나겠습니까?

 

  • 구원 시대에는 여호와의 영으로 무장한 새로운 통치자가 다스립니다. 그는 공의와 성실로 통치하기에 쳥화의 질서가 회복됩니다. 다양한 특권과 불평등과 억압과 착취의 구조가 극복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통치가 인간 사회를 넘어 동물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피조물이 적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롭게 공존합니다.

 

구원 시대(1-9)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전쟁과 대립이 사라지고 공의와 평화가 가득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해달라고(마태복음 6:10),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귀해 기도하라고(마태복음 6:33)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얼마나 품으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1-9)

 

이사야는 메시아가 이새의 아들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을 예언합니다. 그는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6-9), 이스라엘과 열방 가운데 어떤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지 설명합니다.

 

(1) 구원 시대의 통치자(1-5)

 

다윗 왕조가 파국적인 심판에 떨어지지만, 뿌리째 뽑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새의 줄기(그루터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돋아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1). 나무는 잘렸지만, 그루터기에는 생명력이 남아 있어 햇순이 돋아납니다. 다윗의 원뿌리에서 새로운 통치자가 나옵니다(미가 5:2). 그는 여호와의 택함을 받아 왕위에 올라 그분께 의존해 통치한 다윗과 같은 인물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에게 여호와의 영이 계속 함께했던 것처럼(사무엘상 16:13),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새로운 통치자에게도 그분의 영이 주어져 그 위에 머뭅니다(2). 그는 예루살렘의 통치 이데올로기나 왕 홀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주시는 신적 능력에 의존하여 통치합니다. 세 쌍으로 기술된 영의 능력은 통치자의 기본 덕목에 속합니다. ‘지혜와 총명’은 성공적인 통치의 전제 조건입니다. ‘듣는 마음’을 구한 솔로몬에게(열왕기상 3:9) 여호와께서는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 (3:12)을 주십니다. ‘모략과 재능’은 ‘기획과 용맹’(9:6)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기획하고 실천해나가는 능력(모략)과 정치적 용기(재능)는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보장해주는 통치자의 자질입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함’은 여호와 신앙의 핵심입니다. 여호와를 왕궁의 정치에서 배제했던 이전의 왕들과 달리 미래의 통치자는 그분을 경외하고 그분의 의지에 따라 다스립니다.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한 통치자에 의해 정의와 공의의 질서가 회복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재판하지 않습니다(3). 여호와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에 의존하여 겉으로 드러난 것 배후를 살펴서 바르게 판결합니다. 그는 강자와 부자의 불법을 징계하고, 약자와 가난한 자의 권리를 회복시켜줍니다(4).

여호와의 영이 주는 능력에 힘입어 ‘공의와 정직’으로 사회경제적 약자를 공정하게 재판합니다. ‘입의 막대기’와 ‘입술의 기운(영)’은 판결이나 법령의 선포를 가리킵니다. 구원시대의 통치자는 여호와의 영이 함께하는 자이기에, 그의 입이 선포하는 말에는 신적 권위가 주어집니다. 사람들이 겉옷 안에 속옷을 입듯이, 그는 ‘공의와 성실’로 옷을 입고 통치합니다(5). ‘성실’은 여호와의 왕권을 배경으로 하는 개념으로 구원 시대의 통치자와 여호와의 일치를 읽을 수 있습니다.

 

(2) 회복된 창조 질서(6-8)

 

여호와를 대신하여 의로운 평화의 왕이 통치하는 시대는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과 동물, 동물과 동물까지도 평화롭게 공존합니다(6-8). 그의 공의와 성실이 자연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 사회에서 불의와 불법이 사라지고 평화가 회복되듯이, 자연계에도 평화로운 공존의 질서가 회복됩니다. 구원 시대에는 모든 피조물이 화목하게 더불어 삽니다. 들짐승과 집짐승이 적대 관계를 청산합니다. 가축을 잡아먹던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이 되어 함께 평화롭게 삽니다. 늑대가 어린 양의 손님으로 환대를 받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더불어 우정을 나누고, 젊은 사자는 송아지와 함께 놉니다.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가축을 지키지 않아도 되기에 어린아이가 짐승들을 몰고 다니며 풀을 먹입니다. ‘젖 먹는 아이’와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 굴에서 장난치며 놀아도 해가 없음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적대적 관계(창세기 3:15)가 완전히 해소될 것을 시사합니다. 파괴된 창조 질서가 회복되고, 모든 피조물이 함께 평화롭게 삽니다. 땅 위에서 이루어질 샬롬의 전제 조건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입니다. 물이 바다를 가득 채운 것처럼 땅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차기에(2:3) 여호와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입니다(9; 65:25). 여호와의 영이 함께하는 통치자가 그분을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고 그분을 아는 지식으로 다스리기에 모든 사람이 여호와를 알고 경외하게 되고, 온 땅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기에 불법과 다툼과 싸움이 사라집니다(2:4).

 

이스라엘의 회복(10-16)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무능력했던 사람들도 강력해집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주께서 거하시는 곳이 영광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곳을 향해 열방으로 흩어진 당신의 백성이 나아올 것입니다. 남북이스라엘이 서로 하나가 되어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강대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10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11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12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 13에브라임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14그들이 서쪽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 15여호와께서 애굽 해만을 말리시고 그의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그 하수를 쳐 일곱 갈래로 나누어 신을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16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10-16)

 

그날에는 모든 열방 가운데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또 전 세계에 흩어진 이스라엘의 남은 자도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1) 이새의 뿌리(10)

 

‘그 날에’ 모든 민족이 높이 세워진 ‘기치’를 보고 예루살렘으로 나아옵니다(10).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메시아의 통치에 민족들이 참여합니다. 기치로 세워진 ‘이새의 뿌리’(메시아)를 찾아와서 구하는 것은 제의나 율법에 관한 문제보다 공정한 판결일 것입니다(3-5).

민족들은 분쟁을 갖고 예루살렘으로 찾아와서 ‘이새의 뿌리’에게 판단을 구합니다. 민족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문제의 본질을 살펴 판단하는 ‘이새의 뿌리’의 왕적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서 분쟁의 공정한 중재자를 찾습니다(2:4).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는 메시아가 거주하며 통치하는 곳이 여호와의 영광으로 충만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민족들은 구원의 왕이 통치하는 곳에서 광채를 발하는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거한 곳’은 원래 ‘양떼의 쉼터’를 의미하는데, 신학적으로는 하나님 백성의 안식처인 가나안(신명기 12:9; 28:65; 열왕기상 8:56; 이사야 32:18; 시편 95:11)이나 여호와의 안식처인 시온(역대상 28:2)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2) 흩어진 자들의 귀환(11-12)

 

‘그 날에’와 ‘깃발’에 의해 10절에 연결되는 11-12절은 세상에 흩어진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의 귀환을 내다봅니다.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날 여호와께서 깃발을 세우시고, 사방으로 쫓겨났던 이스라엘과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다시 모으십니다. 반역한 유다를 심판하도록 먼 곳에서 민족(앗수르)을 부르기 위해 깃발을 세우셨던(5:26)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을 위해 깃발을 세우십니다.

‘바드로스’(남쪽 나라)는 상(上) 애굽을 가리키고, ‘구스’는 고대 누비아로 오늘의 수단 근처에 있었습니다. 수사를 수도로 하는 ‘엘람’은 티그리스 강하류 북동쪽에 있는 나라로 오래전부터 유대인들이 거주하였습니다. ‘시날’(창세기 10:10-11; 11:2-3)은 앗수르와 구분하여 바벨론을 지칭하는 고대 이름으로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가리킵니다. ‘하맛’은 중부 시리아에 있는 도시국가였고, ‘바다 섬들’은 현재 문맥에서는 페니키아-시리아의 해안 지방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3) 에브라임과 유다의 화해(13-14)

 

흩어진 자들이 고토로 돌아올 뿐만 아니라 분열됐던 하나님 백성이 화해하고 다시 하나가 됩니다(13). 에브라임과 유다 사이의 오랜 갈등과 대립이 극복됩니다. ‘에브라임의 질투’는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질투를 말합니다. 에브라임은 뒤늦게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 안에 들어온 예루살렘 성전의 우월성과 특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에브라임이 유다에 대하여 다시는 질투하지 않듯이, 유다도 에브라임에 대하여 적대적 태도를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유다는 함께 산지 서쪽의 블레셋 땅과 요단 동편의 에돔과 모압과 암몬으로 진격합니다(14). 약탈의 대상으로 언급된 ‘동방 백성’은 아람인들을 가리킵니다. 에브라임과 유다가 함께 정복하는 나라들은 모두 전에 다윗이 정복했던 나라들입니다(사무엘하 8:1-2, 13-14; 10:1-14). 아람은 약탈 행위를 중지하고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며 화친했습니다(삼하 8:3-12; 10:15-19).

 

(4) 두 번째 출애굽(15-16)

 

에브라임과 유다가 화해하고 다시 다윗 왕국의 영화를 되찾습니다. 흩어진 자들의 귀환이 제2의 출애굽으로 선언됩니다(15-16). 바다와 강이 귀향을 막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해만’(홍해)을 말리시고, ‘하수’(유브라데/티그리스)를 손으로 쳐서 일곱 개울로 쪼개시고, 뜨거운 바람으로 말려 신을 신은 채 건너가게 하십니다.

‘바람’과 2절의 ‘영’은 번역입니다. 미래의 구원자에게 당신의 영을 주어 의로 통치하게 하시는 여호와께서 당신 바람(입김)의 위력으로 흩어진 자들을 구해내십니다.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릴 때 이스라엘을 위해 길을 만드셨던 것처럼, 당신 백성의 남은 자들을 앗수르(바벨론)에서 해방하실 때도 ‘큰 길’(포장된 길)을 만들어 안전하게 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왕은 만민이 따르는 이정표가 되어 우뚝 세월질 것이고, 열방이 모여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로 세상의 영화를 재로 만드실 것입니다. 공의를 저버린 권력은 결국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됩니다. 주권자 하나님을 믿고, 세상의 번영보다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시선을 두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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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0-03)


남은 자들을 위한 희망

이사야 10장 20-34절


 

부모가 매를 드는 것은 자신이 그릇된 길에서 떠나 올바른 삶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매로는 부족해 몽둥이를 들어야 할 만큼 악행과 패역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백성을 어떻게 다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는 어떻게 들어나겠습니까?

 

  • 지상의 권력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의 고구로, 그분께서 맡긴 역할을 담당할 뿐입니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는 자기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절대 권력의 자리에 오르려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교만한 권력을 징계하시고, 누가 역사의 결정권자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남은 자와 시온의 구원(20-26)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을 심판하십니다. 택하신 백성일지라도 공의로 판단하시고 불순종을 심판하십니다. 전쟁의 참회뿐 아니라 포로로 잡혀 이방 땅에 끌려가게 하십니다. 열매 없이 안녕을 장담하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모르고 근거 없이 미래를 낙관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안일함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20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24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 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25내가 오래지 아니하여 네게는 분을 그치고 그들은 내 진노로 멸하리라 하시도다 26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바위에서 미디안 사람을 쳐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서 하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20-26)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와중에도 살아남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비록 소수이지만, 하나님의 공의가 집행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유질될 것입니다. 돌아온 자들은 앗수르가 아니라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할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남은 자(20-23)

 

이제 처음 두 절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관하여’ 말하고, 다음 두 절은 ‘남은 자에게’ 말합니다. 이 내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약속(21,22)으로 서로 연결됩니다.

이사야의 시선이 심판 이후를 내다봅니다.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여호와께로 돌아옵니다.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은 일차적으로는 북왕국의 남은 자들을 가리키지만, 유다도 유사한 운명을 경험하기에 이차적으로 포함됩니다. 앗수르에 멸망당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회개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께로 돌아옵니다.

‘자기를 친 자’는 앗수르를 가리킵니다. ‘진실하게’는 이들의 신앙적 성실성을 보여줍니다. 과거와 달리 입술로만 여호와를 찾지 않고 전심으로 그분만 의지합니다. 이스라엘을 파멸시키기로 한 그분의 결정은 공의로운 결정으로 어떤 경우에도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심판 선포 가운데 특이하게 족장들에게 준 후손의 약속이 배경으로 언급됩니다.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들아오리라.’ 일부만 파멸을 모면할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소수만 돌아온다는 말이 족장들에게 준 약속, ‘내가 네게 큰 복음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창세기 22:17; 출애굽 32:13)의 파기를 뜻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이 씨가 됭 ㅓ다시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고 갱신됩니다.

 

(2) 시온의 구원(24-26)

 

앗수르는 여호와의 진노의 막대기에 불과하기에 예루살렘을 침략하는 앗수르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오래지 않아 예루살렘에 대한 진노를 그치시고, 당신의 의도를 무시한 채 절대 권력을 주장하며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행동하는 앗수르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앗수르에 의한 압제가 애굽 종살이에 비교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자유를 빼앗기고 강제노역을 했던 것처럼(애굽이 한 것처럼) 유다가 앗수르에 주권을 빼앗기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수탈을 당합니다.

앗수르로부터의 해방이 제2의 출애굽 사건이 될 것입니다.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은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남다른 관계를 시사해준다.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서(8:18)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의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배반하고 당신을 떠난 이스라엘을 변함없이 당신과 함께하는 당신 백성으로 불러주십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그분의 분노가 ‘오래지 아니하여’ 그치고, 예루살렘을 파괴하는 자들에게로 향할 것입니다. 앗수르가 휘두르는 몽둥이는 예루살렘에서 더러움을 씻어내는 정화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합니다. 동이 트기 직전에 어둠이 가장 짙은 것처럼 구원의 도래도 그러합니다. 사사 시대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을 택하여 미디안을 진멸하고 그 방백 오렙을 오렙 바위에서 죽이신 것처럼(사사기 7:25), 추격하던 바로의 기병대를 홍해에서 몰살하고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것처럼, 예루살렘을 위협하는 앗수르 군대를 진멸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진노하여 앗수르의 손에 붙이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여호와와 그분 백성 이스라엘의 관계가 처음처럼 회복됩니다(이사야 1:24-27).

 

앗수르 군대의 진격과 패배(27-34)

하나님께서는 힘들 때 격려하십니다. 불순종에 대한 징계는 잠시일 뿐이고 인애는 영원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시련의 시간을 두려움 없이 견뎌가야 합니다. 공의를 넘어 인애를 원하시는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앗수르가 몽둥이를 들어 칠지라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미디안을 꺾었듯이 앗수르의 손에서 건지겠다고 약속하십니다.

 

27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28그가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그의 장비를 두고 29산을 넘어 게바에서 유숙하매 라마는 떨고 사울의 기브아는 도망하도다 30딸 갈림아 큰 소리로 외칠지어다 라이사야 자세히 들을지어다 가련하다 너 아나돗이여 31맛메나는 피난하며 게빔 주민은 도망하도다 32아직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딸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33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34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27-34)

 

하나님께서는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치고 예루살렘까지 내려오는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그 동안 주로 사용했던 침공 경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앗수르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내려와서 예루살렘을 위협할 것입니다.

 

(1) 벗겨지는 앗수르의 멍에(27)

 

‘그 날에’로 시작하는 27절은 앗수르 군대의 진격(28-32)에 관한 도입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앗수르의 예루살렘 진격과 더불어 예루살렘의 해방에 관한 약속이 주어집니다. 앗수르의 예루살렘 침략이 하나님을 배반한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정점이자 구원의 출발점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무거운 짐과 멍에에서 예루살렘을 구해주기로 하셨기에, 앗수르의 위협은 겉보기와 달리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 뿐이다.

‘무거운 짐’은 경제적 수탈을 포함한 잔혹한 억압을, ‘멍에’는 이방 통치자에 의한 자유의 박탈을 상징합니다(9:4). 아람과 에브라임이 예루살렘을 군사적으로 위협할 때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지불한 정치적 종속과 막대한 조공의 굴레에서 벗어납니다.

 

(2) 진격하는 앗수르 군대(28-32)

 

하나의 문장에 하나의 지명을 언급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하는 침략군의 루트를 아주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28-32). 북왕국에서 남왕국으로 가는 간선도로는 사마리아에서 벧엘과 미스바와 라마와 기브아를 지나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입니다.

28-29절에 따르면 침략군은 간선도로가 아니라 벧엘에서 동쪽으로 우회해서 아이와 믹마스를 지나 남서쪽의 협곡을 거쳐 게바로 내려갑니다. 게바에서 어디로 향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침략군은 다시 북쪽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진격합니다.

29b-31절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베냐민 지파에 속한 성읍 주민들의 반응을 묘사합니다. 기브아와 맛메나와 게빔의 주민들은 벌써 도망쳤고, 다른 지역의 주민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공황에 빠집니다. 군사 원정은 3일을 전제합니다. 침략군의 계획에 따르면, 진군 첫째 날은 게바에서, 둘째 날은 예루살렘을 시야에 두고 바라볼 수 있는 놉에서 야영하고, 셋째 날에 예루살렘을 공격합니다. 침략군이 예루살렘을 공략할 만한 거리까지 왔지만, 싸움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37:33-34).

 

모두 열세 곳의 지명이 나옵니다. ‘아얏’은 아이의 여성형으로 벧엘에서 남동쪽으로 대략 2km 떨어진 곳에 있었고, ‘믹마스’는 예루살렘에서 12km 북동쪽에 위치했다. 북왕국이 멸망한 후에 믹마스는 앗수르 지방의 국경도시로 유다를 공격하기 위한 후방 기지로 활용됐습니다. ‘산’은 믹마스와 게바 사이에 있는 와디를 가로지르는 협곡의 통로로 사무엘상 13:23에는 ‘믹마스 어귀’로 나옵니다. ‘게바’는 협곡을 중심으로 믹마스 맞은편, 대략 2km 남서쪽에 위치했습니다. ‘라마’는 게바에서 서쪽으로 3km,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곳으로 예루살렘에서 벧엘로 올라가는 간선도로에서 약간 동쪽에 위치했습니다. ‘사울의 기브아’는 라마에서 남쪽으로 4km,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5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5km 떨어진 곳으로 솔로몬에 의해 쫓겨난 제사장 아비아달이 추방된 곳(열왕기상 2:26)이자 예언자 예레미야의 고향(예레미야 1:1)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근교에 속하는 ‘놉’은 사울의 기브아에서 남동쪽으로 1.5km 떨어진 곳으로, 아마도 올리브 산의 북쪽 산봉우리 가운데 하나에 위치했던 것 같습니다.

 

(3) 대적의 패배(33-34)

 

갑자기 여호와께서 등장해 침략자에게 맞서십니다(33-34). 여호와께서 나무꾼이 되셔서 ‘혁혁한 위력으로’ 가지를 잘라내십니다. 드높이 솟은 나무들이 잘려나가 낮아집니다. 그분께서 쇠도끼를 들고 레바논의 화려한 아름드리나무들을 잘라내십니다. 레바논의 산림은 고대 근동에서 유명하였습니다. 특히 레바논 산지에서 자라는 백향목은 재질이 뛰어난 최고의 목재로 왕궁과 성전을 건축하는 데 사용됐습니다(열왕기상 6:15-32;7:2; 이사야 40:16).

여호와께서 잘라버리시는 가지와 레바논 백향목의 비유가 가리키는 대상은 문맥을 통해 결정할 수 있습니다. 10장의 문맥과 유사한 비유가 사용된 10:17-20에 따르면 앗수르일 수도 있고, 나무가 잘리고 그루터기만 남은 것을 전제하는 11:1의 문맥에 따르면 예루살렘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에 따르면, 하늘 왕께서 정해놓은 한계를 넘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는 앗수르의 교만이 심판을 받고, 후자에 따르면 여호와께 의존하기를 거절한 예루살렘 왕궁의 통치자들이 징벌을 받습니다. 양자의 해석은 모두 이사야의 선포와 일치합니다.


앗수르 군대가 코앞까지 몰려와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 선지자는 우뚝 솟은 나무를 찍어 쓰러뜨리시는 하나님을 전하며 전능하신 분의 존재를 알립니다. 앗수르는 진군하지 못하고 물러갑니다. 위기 상황에서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두려움이 없이 주를 의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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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0-02)


오만과 착각으로 가득한 앗수르

이사야 10장 5-19절


 

앗수르는 오만해져 전쟁의 승리가 자신의 힘과 지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낱 도구에 불과한 자신들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를 탐합니다. 성공과 성취에 취하면 자칫 교만해져 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주권자 하나님 앞에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 앗수르는 여호와의 손에 들린 진노의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여호와께서는 앗수르를 불러 반역한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고 또 시온 산의 여호와를 찾지 않는 예루살렘과 유다를 징벌하십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여호와의 의도를 모른 채 자기 힘만 믿고 주변 나라들을 침략하고 파괴할 생각뿐입니다.

여호와의 진노의 막대기(5-14)

지나친 자신감은 자칫 자만과 교만과 오만함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고전 10:12)해야 합니다. 교만함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잘 나가고, 형통하고 만족스러울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세상의 뛰어난 지식과 능력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5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6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 7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8그가 이르기를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 9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10내 손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에 미쳤나니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들보다 뛰어났느니라 11내가 사마리아와 그의 우상들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의 우상들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하는도다 12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13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주한 자들을 낮추었으며 14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5-14)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나라들을 복속시키는 앗수르가 세상의 주권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심판하려고 세우신 몸통이요 막대기일 뿐입니다. 세상의 주권자와 경영자는 하나님뿐입니다.

 

(1) 앗수르에 대한 화 선언(5-7)

 

앗수르는 쉬지 않고 원정에 나서 민족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합니다. 이 앗수르에 여호와께서 직접 화를 선포하십니다. 앗수르는 자신의 한계와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절대 권력을 주장하며 신의 자리에 오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역사의 종속변수로, 홀로 땅의 역사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진노의 막대기’였고, 그 손의 몽둥이'는 그분의 ‘분노’였습니다(5).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통해 진노를 풀기로 하셨기에 앗수르가 휘두르는 몽둥이는 하나님의 분노의 구체적인 발현입니다. 막대기와 몽둥이는 통치자의 권력을 상징하는 홀을 가리키는데, 이 경우 앗수르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6:1) 여호와의 손에 들린 홀이 됩니다. 당신 백성의 불순종에 진노하신 여호와께서 앗수르를 심판의 집행자로 택하셔서 이들을 마음껏 약탈하고 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셨습니다(6).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와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은 일차적으로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키지만, 여호와를 배반하고 노엽게 했다는 점에서 유다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자신이 여호와의 도구로 선택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민족들을 멸망시켰습니다(7).

 

(2) 앗수르의 교만(8-14)

 

앗수르의 유일한 관심사는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약탈하는 것이었습니다. 앗수르는 자신을 역사의 주인으로 내세우고 민족들의 운명을 자의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이사야가 앗수르왕의 말을 직접 인용해 그의 교만과 방자함을 고발합니다(8-11).

압도적인 군사력과 잔혹함으로 주변 나라들을 두려움에 빠뜨렸기에 앗수르 왕의 주장은 허풍이 아니었습니다. 무섭게 진격하는 앗수르 군대 앞에 많은 나라가 성문을 열고 항복했습니다. 앗수르 왕은 항복한 왕들에게는 계속 왕의 지위를 허락했습니다. 이들은 앗수르 왕의 제후가 되어 이전의 영토를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끝까지 저항한 나라들은 참혹하게 보복하였고 앗수르의 한 지방으로 편입됐습니다. 시리아 북쪽 지역에 있던 갈로는 주전 738년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 정복됐고, 유브라데 강 중류에 위치한 헷 족속의 성읍이었던 갈그미스는 주전 717년에 함락되어 앗수르의 한 지방으로 편입됐습니다. 오론테스 강가에 위치한 하맛은 앗수르에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주전 720년 반기를 들었다가 정복당했습니다. 아르밧은 주전 720년 하맛이 주도한 봉기에 가담했다가 같은 운명에 떨어졌습니다. 반앗수르 연합의 주도 세력이었던 다메섹은 주전 732년 디글랏 빌레셀에 정복당하고 폐허가 됐습니다. 주전 733년 영토의 상당 부분을 빼앗겼던 에브라임은 주전 722년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한 사마리아의 함락으로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앗수르의 승리는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들이 섬기던 신들의 실체를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이사야는 앗수르왕의 교만한 입을 빌려 민족들의 신을 헛것으로 고발합니다. 민족들의 신들은 앗수르의 막강한 군대 앞에서 자신들의 무능력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숭배자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앗수르에 의한 민족들의 점령은 우상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교육적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우상을 숭배합니다. 멸망한 사마리아를 포함한 주변 나라들의 비극적 운명을 타산지석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의 멸망에서 우상숭배의 필연적 결과를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예루살렘은 사마리아의 길을 갔습니다. 교만한 앗수르 왕의 눈에는 예루살렘의 여호와도 우상들 가운데 하나로 보였습니다. ‘내가 사마리아와 그의 우상들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의 우상들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11). 앗수르의 교만이 여호와를 역사의 무대 안으로 불러들입니다. 여호와께서 갈림길에 놓이십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앗수르에 정복당한 우상들과 전혀 다른 존재임을 보여주기로 하십니다. 시온과 예루살렘의 징계가 끝나면, 제 역할을 부정하고 교만에 사로잡혀 절대 권력을 주장한 앗수르 왕을 여호와께서 징벌하실 것입니다(12). 앗수르의 심판이 여호와의 계획으로 확정됩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함 때문에 앗수르가 벌을 받습니다.

 

다시금 직접 인용을 통해 앗수르의 교만을 고발합니다(13-14). 8-9절에서 정복 전쟁의 승리를 떠벌린 앗수르 왕은 제 능력을 노골적으로 과시합니다. 그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민족들을 정복했다고 자랑합니다. 열국의 경계를 걷어치웠고는 앗수르의 강제이주 정책과 관련한 언급입니다. 앗수르는 정복한 민족들을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그곳에 다른 피정복 민족들을 옮겨 정착시켰습니다. 민족들이 서로 뒤섞여 살면서 고유성과 정체성을 상실했습니다. 앗수르는 정복한 민족의 약탈과 경제적 착취로도 유명했습니다. 앗수르는 새 둥지에서 알을 거두어들이는 자처럼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마치 버려진 알을 줍듯이 온 세상의 나라들을 정복하고 성읍들을 마음껏 약탈했습니다. 힘이 압도적이고 잔혹해서 감히 누구도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놀란 새가 날개를 치지도, 주둥이를 벌려 지저귀지도 못하듯이, 앗수르의 침략 앞에 모든 나라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망연자실할 뿐이었습니다.

 

앗수르의 심판(15-19)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높일 때, 그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반항이고, 하나님에 대해 대적하는 행위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이 다른 이에게 돌아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교만과 오만에 대해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 내가 이때까지 자랑했던 나의 힘과 영광은 모두 소멸 되어질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15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16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진 자를 파리하게 하시며 그의 영화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17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는 불꽃이 되실 것이니라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18그의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자가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19그의 숲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수할 수 있으리라(15-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실 것입니다. 누가 진정한 주권자인지 드러내실 것입니다. 도끼가 도끼 쥔 자를, 톱이 톱 쥔 자를 향하여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 소리를 해왔는지 알게 될 만큼 철저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1) 앗수르의 오만(15)

 

이사야는 잘 알려진 격언 또는 비유를 사용해 앗수르 왕의 한계를 훨씬 넘은 오만함을 고발합니다. 그의 교만과 자랑은 마치 도끼가 그 도끼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톱이 그 톱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뽐내며 으스대는 것과 같습니다(15). 도끼와 톱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의 의지에 종속된 도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앗수르의 행태는 사람의 손에 들린 도구에 불과한 막대기나 몽둥이가 이를 사용하는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습니다. 도구가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의 의지를 거슬러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권력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도구로, 그분께서 맡긴 역할을 담당할 뿐입니다. 그분께서 자족할 줄 모르고 절대 권력에 도취해 신의 자리에 오르려는 앗수르의 교만에 종지부를 찍으십니다.

 

(2) 심판 선포(16-19)

 

여호와께서 기름진 것에 병을 보내어 파리하게 만드시고, 자랑스러운 영화를 맹렬한 불로 태워 없애실 것입니다(16). ‘살진 자’(기름진 것)는 멸망한 민족들의 재물로 기름진 삶을 사는 앗수르 사람들을, ‘영화’는 앗수르의 군사적 승리가 가져다준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번영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심판의 불을 보내실 뿐 아니라 당신께서 직접 불이 되셔서 앗수르를 한순간에 태워버리십니다(17). ‘이스라엘의 빛’은 여기에만 나오지만, 유사한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됩니다(이사야 2:5; 60:1; 미가 7:8; 시편 27:1).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자 보호자이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진멸하는 불이 되십니다. 병행하는 그의 거룩하신 이도 유사하게 이중적 의미를 갖습니다. 거룩하신 분이 당신 백성을 위해 역사에 개입하실 때 적들에게는 파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분의 심판이 앗수르를 하루 사이에 멸망시킵니다. 모든 나라를 발아래 굴복시키고 무한 권력을 휘두르던 앗수르가 갑자기 잿더미가 됩니다. ‘그의 가시와 찔레’는 의도적으로 선택된 표현 같습니다. 가시와 찔레는 무용한 식물로 불쏘시개로나 사용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의 역할을 거절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존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시와 찔레에 불과합니다. 그분의 의지에 반하여 자신을 주장하는 자는 잘려 불에 던져질 뿐입니다. ‘숲과 기름진 밭’의 비유도 유사합니다(18). 숲과 과수원에 불이 나면 다 타고 꺼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앗수르도 남김없이 멸망에 넘겨집니다. ‘전부’는 문자적으로는 ‘영혼에서 육체까지’로 앗수르는 회복이 불가능하게 파괴된다. 숲이 불타고 나면 듬성듬성 몇 그루의 나무만 운 좋게 살아남는 것처럼 앗수르의 운명도 그러할 것입니다(19). 아직 셈할 줄 모르는 아이도 어렵지 않게 남은 나무를 셀 수 있을 정도로 극히 일부가 심판에서 살아남습니다. 앗수르는 최소한의 흔적만 남고 철저하게 멸망합니다.


앗수르는 무자비한 파괴와 약탈로 몸집을 불렀고, 찔레와 가시의 통치로 그 영화를 재로 만드실 것입니다. 공의를 저버린 권력은 결국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됩니다. 주권자 하나님을 믿고, 세상의 번영보다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시선을 두고, 세상의 번영보다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시선을 두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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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0-01)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이사야 9장 8절-10장 4절


 

하나님께서는 경고의 메시지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태도를 바꾸지 않고, 오히려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더욱 대적했습니다. 이런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경고의 다음 수순을 준비하십니다.

 

  • 한 아이에 의한 구원 시대의 출현을 선포한 이사야의 시선이 북왕국 이스라엘로 향합니다. 여호와께서 에브라임과 사마리아를 치셨지만, 이들은 치신 분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심판의 강도가 높아갈수록 죄악만 더 심해졌습니다. 돌아오게 하려는 여호와의 징벌이 이들을 더욱 완악하게 만들었습니다. 징벌에 익숙해져 그분의 심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제 길을 갔습니다.

 

사마리아의 교만(8-12)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성취로 인해 자만해집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신뢰할 만하다고 확신할 때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함까지 보이게 됩니다. 우리의 지혜나 힘은 창조주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진정한 능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8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9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10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는도다 11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들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의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 12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모두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8-12)

 

여호와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북왕국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고 경고하셨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 모두가 하나님의 의지를 알면서도 불순종하였습니다. 교만과 자만에 빠진 자들은 거듭된 재앙에도 여호와를 찾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힘에 의지했습니다.

 

(1) 내부적 재난(8-10)

 

이사야는 적들에 침략당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이를 여호와의 징벌적 간섭이라고 주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교만을 심판하시려고 원수인 아람과 블레셋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침략하게 하셨습니다. 남북 왕조가 분열된 이후 이스라엘이 경험한 전쟁은 이들의 불순종을 징계하시려는 심판입니다.

 

(2) 외부적 재난(11-12)

 

아람은 특히 주전 9세기에 이스라엘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하였고, 블레셋은 다윗에게 패하고 가나안의 주도권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이후에도 이스라엘에게 여전히 위협적이었습니다(암 1:3-8). 먹이를 집어삼키는 사자처럼 아람과 블레셋이 침략했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완악함 때문에 그분의 진노가 풀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심판(13-17)

지도자의 영적 수준과 상태는 공동체 구성원의 영적 수준과 상태로 직결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위임된 권세를 사용하는 자들에게 복종함과 동시에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권세를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도우며 살펴야 합니다.

 

13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14그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와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15그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그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16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 17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13-17)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를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계속됩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한 데가 하나도 없으면서 하나님께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속되는 심판은 지도자들을 몰락시키는 것으로 실행됩니다.

 

(1) 지도자들의 버림받음(13-16)

 

여호와의 징계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매를 맞아도 이스라엘은 용서와 치료를 위해 그분께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죄의 길에서 떠나게 하려고 주신 징계가 이스라엘을 더 완악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여호와는 이스라엘에서 ‘머리와 꼬리와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하루 만에 잘라버리셨습니다. 신분이 높은 자와 낮은 자가 모두 멸망의 심판에 떨어졌습니다. ‘하루 사이에’는 심판이 엄청난 세력에 의해 갑자기 이뤄졌음을 시사해줍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켰던 14절의 ‘머리와 꼬리’가 15절에서는 파국적 재앙에 1차적 책임이 있는 지배 집단으로 한정됩니다. ‘장로와 존귀한 자’를 머리로,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를 꼬리로 해석해줍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자들입니다. 능력이 없고 무책임한 자들이 백성을 오도하여 백성이 길을 잃고 혼란에 빠져 헤매다가 멸망에 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백성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결국 인도자들의 타락에 가담했습니다.

 

(2) 백성의 버림받음(17)

 

여호와를 찾지 않는 일에 예외 없이 다 참여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 악을 행하고 입으로는 어리석은 것만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는 어떤 경우에도 되돌려지지 않을 여호와의 단호한 심판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분께서 전쟁에 나간 이스라엘의 장정들에게 승리를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침략군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의 패배가 확정됐습니다. 여호와께서 고아와 과부마저 긍휼히 여기지 않으신다면, 이스라엘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전무합니다.

 

파국적 결과(18-21)

불타오르는 불길처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욕망이 불타올라 공동체가 그 욕심에 지배받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온갖 불의한 방법으로 소유를 늘려도 타락한 사람들의 소유욕은 충족되지 않습니다. 결국은 모두가 불살라지듯 서로 먹고 먹히는 끔찍한 사회가 되어 버립니다.

 

18대저 악행은 불 타오르는 것 같으니 곧 찔레와 가시를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19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이 땅이 불타리니 백성은 불에 섶과 같을 것이라 사람이 자기의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20오른쪽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21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18-21)

 

타락한 공동체에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저마다 욕심의 노예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먹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사회가 됩니다. 이런 모습은 찔레가 가시가 불에 삼켜지며 빽빽한 수풀이 불살라져 연기가 치솟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1) 악이 만연함(18-19)

 

여호와께서 굳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악의 세력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신을 파멸시킵니다. 죄가 죄인을 황폐하게 하듯이, 악행이 이스라엘을 폐허로 만듭니다. 찔레와 가시와 같은 잡목들로 우거진 숲에 한번 불이 붙으면 끌 수 없듯이, ‘악행’(사악함)의 불길이 이스라엘을 송두리째 삼켜버립니다(1:31; 5:24; 30:33). 잡목으로 덮인 숲이 하늘 높이 솟는 불길에 연기와 함께 사라지듯, 이스라엘도 죄악의 불길에 사로잡혀 멸망합니다. ‘위로’의 ‘게우트’는 원래 ‘높음’을 뜻하며, 2차적으로 교만(28:1,3)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자랑하고 의지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불에 타서 사라져버리는 연기와 같은 것들입니다. 여호와의 진노로 땅은 바싹 타버렸고, 이스라엘 백성은 불꽃의 먹이가 됐습니다. 죄악의 불길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은 그 불길에 몸을 내맡겼습니다. 이웃을 아끼지 않고 서로에게 적이 됐습니다. 죄악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에게 이웃은 탐욕을 채우기 위한 물건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굶주린 짐승처럼 서로를 잡아먹었습니다. 이웃을 적으로 삼는 행위는 제 팔의 살 점을 뜯어먹는 자살 행위인데도 당장의 이익과 채울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공동체를 파괴하고 멸망으로 내달렸습니다.

 

(2) 민족/형제 공동체의 사라짐(20-21)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뜯어먹고, 또 힘을 합하여 유다를 쳤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로 출발해 하나님 백성으로 하나가 됐지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왕정이 도입된 이후 지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지파 간의 분쟁과 북왕국과 남왕국의 싸움으로 여호와께서 이들을 징벌하셨지만, 그분의 진노가 다 풀린 것은 아닙니다.

 

불의한 법령을 만드는 자들(10:1-4)

책임과 함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가 하나님 말씀을 떠나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죄악의 길을 걷게 되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대단한 권위와 힘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유한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2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3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의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 4포로 된 자 아래에 구푸리며 죽임을 당한 자 아래에 엎드러질 따름이니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1-4)

 

유다의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가 다시 주어집니다. 선지자는 또다시 지도자들의 죄와 타락을 맹렬하게 지적합니다. 이들은 불의한 법령을 만들어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공의와 정의를 이루어야 하는 법령을 가지고 억울한 이들을 만들고 연약한 자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1) 불의한 지도자들(1-2)

 

넷째 단락은 한편으로는 서두의 ‘화 있을진저’에 의해 5:8-24에, 다른 한편으로는 4절의 후렴구에 의해 앞 단락들에 연결됩니다. 고발의 주제도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의 정치를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며 심판을 선포하는 앞 단락들과 달리, 여기서는 5:8-24의 경우처럼 사회적 불법, 특히 사법적 정의를 유린하는 자들에게 화를 선포합니다. 화의 대상이 북왕국 이스라엘에 속한 자들인지는 불분명합니다. 고발 내용을 보면 유다의 지도자들까지 포함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사법 체계를 책임진 자들이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키기 위해 열심히 규정을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법 제정의 전권을 가진 자들이 만든 규정들이 하나님 백성에게 재앙만 가져다줍니다. ‘법령을 만드는 자들’은 왕의 고위 관료로, 정치적·경제적 형편에 맞게 법과 규정을 새로이 정하는 자들입니다(창 47:26;삿 5:9,14;삼상 30:25).

 

(2) 나라의 패망, 포로가 되어 흩어짐(3-4)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는 원문에 따르면 ‘줄 곧 고통을 써 내려가는 글 쓰는 자들’입니다. 법을 통해 사회에 정의와 공의를 구체적으로 세워야 할 자들이 ‘불의한 법령’을 만들어 공동체에 수고와 고난을 끼칩니다. 이들이 열심히 만들어 내는 법령 때문에 하나님의 남다른 관심의 대상인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의 권리(1:17; 11:4)가 짓밟힙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할 사법 체계가 강자들의 권리만 더 강화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이들이 언약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율법을 주셨지만, 실제로 법을 책임진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법도 하나님의 백성도 없었습니다. 만연한 사법적 불의에 법의 근원이자 마지막 보루이신 여호와께서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벌하시는 날이 몰아치는 비바람을 동반한 폭풍처럼 이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징벌의 날에 이들은 누구에게서도 도움을 구하지 못하고, 어디에서도 피할 곳을 찾지 못합니다. 불법으로 착취하여 모은 재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집니다. 이들은 포로가 되어 땅바닥에 쭈그려 앉거나 칼에 맞아 쓰러져 시체들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수치와 멸망이 이들의 운명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여호와의 진노가 다 풀린 것은 아닙니다. 그분 진노의 손은 여전히 이스라엘 위에 뻗쳐 있습니다. ‘벌하시는 날’(호 9:7; 암 3:14)은 책임을 묻는 심판의 날입니다. 법을 담당한 자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임무를 공정하게 수행하였는지를 살펴보고 책임을 추궁당하는 날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타이르십니다. 백성이 말씀을 듣지 않으면 막대기를 드십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지도자를 징계하십니다.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은 지도자, 선지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마지막에는 나라 전체가 진노의 불길에 휩싸입니다. 이처럼 징계를 키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속히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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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9-01)


흑암의 땅에 빛으로 오신 메시아

이사야 9장 1-7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던 죄를 사하시고, 빛의 백성으로 새롭게 지으셨습니다. 공평과 의로 다스리는 평강의 왕의 백성이 되었다면, 우리는 세상 중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까?

 

  •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에게 구원의 빛이 비칩니다. 특별한 이름이 주어진 한 아이가 태어나 절망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구원 시대를 열 것입니다. 구원 시대의 통치자는 왕의 홀의 권위에 의지하여 나라를 다스렸던 지금까지의 왕들과 달리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구현합니다. 흔들리던 다윗 왕조의 토대가 그를 통해 다시 굳건하게 세워집니다.

 

역사적 배경(1)

 

역사에는 역설과 아이러니가 가득합니다. 초라한 나라가 어느 순간 강대국이 되고, 패권을 쥐고 있던 나라도 한순간에 패망의 길로 접어듭니다. 예측할 수 없는 역사를 하나님께서는 예언하시고 때가 되면 성취하십니다. 역사는 방향 없이 표류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사적 목적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1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1)

 

짙은 어둠 속에서 고통 받던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집니다. 흑암이 사라지고 구원의 빛이 동터 옵니다. 전에 이스라엘로 멸시를 당하게 하셨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옛적에 멸시를 당한지역은 갈릴리 북쪽에 정착한 이스라엘 두 지파의 땅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었습니다. 사사 시대에 용맹을 떨쳤던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사사기 4:6-10;5:18; 6:35)는 주전 9세기 이후 시리아 남쪽에 정착한 아람의 팽창과 더불어 세력이 급격히 약화했습니다. 하사엘과 벤하닷 시대에는 거의 다메섹의 지배 아래 놓였습니다. ‘후에’ 영화롭게 되는 지역은 북왕국의 심장부에 속하는 에브라임 산지를 서쪽과 동쪽과 북쪽에서 에워싸고 있는 지역입니다. 해변 길은 애굽과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이어주는 통상로가 지나는 갈멜 산 남쪽에서 욥바까지의 해안 평야 지대를, ‘요단 저쪽’은 요단 동편의 길르앗 지방을, ‘이방의 갈릴리’(이방 민족들의 지역)는 이방 민족들이 뒤섞여 사는 남부 갈릴리 지역을 가리킵니다. 열왕기하 15:29에 의하면 다메섹과 에브라임을 징계하기 위해 원정을 떠난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은 이스라엘에서 ‘이윤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빼앗아 앗수르의 영토에 병합시켰는데, ‘후에’ 영화롭게 될 지역과 대체로 일치합니다. 북 왕국의 영토 가운데서 주전 733년 앗수르에 빼앗긴 지역의 회복을 내다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구원을 이미 성취된 사건으로 보을 보았고, 암흑의 땅에 사는 자들에게 빛이 비쳤습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은 ‘흑암’의 동의어로 ‘짙은 어둠’올의 표상이고(욥 10:21-22), 빛은 행복과 구원의 상징입니다(암 5:20; 시 27:1). 환난과 고난 가운데 사는 자들이 생명의 빛을 봅니다. 어둠이 여호와의 부재(심판)라면, 빛은 그분의 현존(구원)을 의미합니다. 떠나셨던 여호와께서 돌아오셔서 빛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구원의 기쁨(2-3)

하나님의 경륜은 사람의 지혜를 뛰어넘습니다. 버려진 땅, 어둡고 소외된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빛을 비추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현재형으로 말씀하시고, 완료형으로 선포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것이 너무나도 확실해서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는 화법입니다.

 

2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2-3)

 

이사야는 여호와의 구원을 이미 성취된 사건으로 보고 감사하며 노래합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암흑의 땅에 사는 자들에게 빛이 비쳤습니다.

 

(1) 큰 빛을 보는 백성(2)

 

‘사망의 그늘진 땅’은 ‘흑암’의 동의어로 ‘짙은 어둠’을 의미합니다. 흑암과 짙은 어둠은 저주와 죽음과 스올의 표상이고(욥기 10:21-22), 빛은 행복과 구원의 상징입니다(아모스 5:20; 시편 27:1). 환난과 고난 가운데 사는 자들이 생명의 빛을 봅니다. 어둠이 여호와의 부재(심판)라면, 빛은 그분의 현존(구원)을 의미합니다. 떠나셨던 여호와께서 돌아오셔서 빛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2) 주 앞에서의 기쁨(3)

 

그분의 빛이 어둠을 쫓아내고 환히 비추기에 나라가 번성하고 즐거움이 많아집니다. 이방 민족들에 짓밟혔던 지역이 다시 회복되고 삶이 생기와 즐거움을 되찾습니다. 빛 가운데 살게 된 자들은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처럼 그분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한 해 동안 애써 수고하고 땀 흘린 후 풍성한 수확을 거둬들이며 기뻐하듯이, 죽음의 위험을 이겨내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전리품을 나누며 기뻐하듯이 여호와의 구원을 기뻐합니다.

 

기쁨의 내용(4-7)

성경은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사랑의 대상이며 경외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역사의 모호함과 아이러니를 타파하고 명징한 하나님의 계획이 설 것입니다. 성도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성도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4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4-7)

 

아하스의 시대에 대안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능을 펄쳐 보이실 당신의 방법은 ‘한 아이’의 출생입니다. 그가 지혜롭고 강하고 영원하고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 나라를 기어이 이루실 것입니다.

 

(1) 압제에서 해방(4)

 

첫째는 이방 민족의 압제에서의 해방입니다. 여호와께서 백성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나무와 압제자의 막대기를 미디안의 날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4). 여호와께서 사사 시대에 기드온을 도와 미디안을 쳐서 진멸하셨던 것처럼(사사기 6-7장), 이방의 탄압과 폭력에 신음하며 고통당하는 백성을 해방하십니다. ‘무겁게 멘 멍에’는 외부 세력에 의해 강제된 자유의 상실을 상징합니다. ‘압제자’는 원래 부역 감독관을 의미합니다(출애굽기 3:7; 5:6,10,13,14). 애굽의 강제 노역에서 이스라엘의 조상을 구해내신 여호와께서 다시 그 후손을 앗수르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되찾아 주십니다.

‘미디안의 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을 이방민족의 손에서 구출하시는 날로, 사람들의 눈에 불가능해 보이는 구원과 승리가 그분의 간섭과 도움으로 주어질 것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약소국 이스라엘이 초강대국 앗수르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정치적 시각에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만, 민족들을 ‘통의 한 방울’ 같이, ‘저울의 작은 티끌’ 같이 여기시는(40:15) 분의 입장에서는 아주 쉬운 일입니다.

 

(2) 전쟁에서 해방(5)

 

둘째는 전쟁의 승리 또는 폐지입니다. 땅을 흔들 듯이 요란하게 내딛는 군화와 피로 뒤범벅이 된 겉옷이 모두 불꽃의 먹이가 되기 때문입니다(5). 이방 압제에서 해방된 백성이 다시는 전쟁에 휩쓸리지 않고 평화롭게 살게 됩니다. 고대 세계는 거듭 파멸적인 크고 작은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앗수르는 수시로 군사 원정을 떠났고, 이들의 출정 소식만 듣고도 주변 나라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앗수르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은 폐허가 됐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사로 잡혀갔습니다. 이사야는 2:4에서 싸울 일이 없어져 무기가 불필요해지는 평화의 시대를, 11:6-9에서는 사람과 동물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를 내다봅니다.

 

(3) 한 아이의 출생(6)

 

셋째는 한 왕적 인물의 출생입니다. 통치권이 그의 어깨에 있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6). 여호와께서 주신 정치적 자유와 평화가 한 아기에 의해 지속적으로 보장됩니다. 왕위 계승권자의 출생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굳건한 왕권은 땅 위의 질서와 평화를 보장하는 전제 조건으로, 이를 보여주는 왕위 계승권자의 출생은 백성에게 복된 소식이 됩니다.

이사야는 특이하게 아이가 거듭 ‘우리에게’ 태어나고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의도적으로 사용했다면, 아이에 대한 이사야의 기대를 읽어내는 것도 가능합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앗수르를 선택한 아하스의 과오가 이 아이에 의해 극복될 것입니다. 아하스와 달리 이 아이는 여호와께 의지하는 통치자가 될 것입니다. 아이의 신분은 그가 왕적 인물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호하게 남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네 개의 이름은 그의 통치권의 특별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이름 ‘놀라운 기획자’는 통치자의 자질과 능력이 담긴 이름입니다. 기획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능력은 왕에게 필수적입니다. 물론 놀라운 일의 계획과 실행은 궁극적으로는 여호와께 속한 일입니다(이사야 29:14; 시편 77:14). 두 번째 이름 ‘전능하신 하나님’은 ‘용맹한 하나님’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왕은 최고의 용사로 백성 앞에서 적과 싸웁니다(사무엘상 8:20). ‘용사’는 하나님께 적용되기도 합니다(신명기 10:17; 이사야 10:21). 왕을 ‘하나님’으로 부르는 경우는 시편 45:6이 유일합니다. 세 번째 이름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왕과 백성의 관계를 보여주는 이름입니다. 하나님과 왕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표현하듯이(사무엘하 7:14; 시편 2:7; 89:26) 왕은 백성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합니다(이사야 22:21). 왕은 아버지로서 백성을 보호하고 이들의 안녕을 염려하고, 백성은 왕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길 기도합니다(시편 72:5, 17). 그러나 원칙상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하나님께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네 번째 이름 ‘평강의 왕’은 ‘평강의 통치자’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평강(샬롬)은 좁게는 전쟁의 대립 개념이고, 넓게는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실존을 가리킵니다. 현재 문맥에서는 정의와 공의에 따른 통치의 결실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통치자는 왕이신 여호와의 통치를 땅에서 대신합니다. 정리하자면, 처음 세 이름은 원칙상 여호와께 속한 것들이고, 네 번째는 땅의 통치자에게 사용되는 이름입니다. 이 네 이름은 구원 시대의 통치자로 태어난 아이와 여호와 사이에 내재하는 특별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아이를 통해 여호와의 통치가 구현됩니다.

 

(4) 영원한 통치(7)

 

특별한 이름이 주어진 아이는 다윗의 보좌에 앉아 그의 나라를 영원히 평화롭게 통치할 것입니다(7; 사무엘하 7:16).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기에 그의 나라는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지속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여호와께서 열어주신 구원 시대가 아이에 의해 결실을 봅니다.


빛은 비추었고, 우리는 어둠에서 해방되어 빛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의 통치 아래 사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죄에 종노릇 한다면 영원한 사망이 있을 거라고 경고합니다. 의로우신 왕의 진리를 따라 의의 종이 되어 세상을 밝게 비추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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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8-02)


성도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

이사야 8장 9-22절


 

자크 엘륄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에서,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세상 속에 있더라도 세상에 속하거나 의존하는 자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으며 그 주인에 의하여 세상 속으로 보내진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보여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 예루살렘이 아람과 에브라임의 위협을 받을 때, 이사야는 거듭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끝까지 자기 길을 갔습니다. 이사의 선포가 결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사야는 실망했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그분의 마지막 답변이 아닌 것을 알기에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얼굴을 가리신 분께서 다시 얼굴을 드러내실 때를 기다립니다.

 

민족들의 심판(9-10)

열방은 힘을 합쳐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백성을 대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적들의 위협이 외형적으로 두려움의 대상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어떤 나라의 힘도 하나님을 능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사탄과 세상 나라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끊임없이 공격하겠지만 이기지 못하고 끝내 패망할 것입니다.

 

9너희 민족들아 함성을 질러 보아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10너희는 함께 계획하라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해 보아라 끝내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9-10)

 

다윗 왕조를 위협하던 아람과 에브라임과 여호와께 의지하기를 거절한 유다에 심판을 선포한 예언자는, 이제 민족들에게도 멸망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민족들은 여호와께서 아람과 에브라임과 유다를 침략하도록 불러오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7)입니다. 심판의 도구가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를 사용하여 예루살렘을 치시지만, 아람과 에브라임처럼 앗수르도 심판에 떨어집니다.

이사야는 민족들, ‘먼 나라 백성들’에게 무장을 하고 전쟁에 나서라고 부추기면서, 이들이 전쟁에서 패할 것을 선포합니다. 이들이 계획을 꾸미고 전략을 세운다 해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임마누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 민족들의 침략에서 하나님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나 다윗 왕조 신학이 구원의 보루가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만이 예루살렘의 안전을 보장해주십니다. 예루살렘을 침략해서 아하스를 제거하려는 르신과 베가의 계획이 저들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기에 반드시 실패로 끝나듯이(7:6-9a), 민족들의 계획도 여호와의 결정에 속하지 않는 계획이기에 반드시 실패합니다.

 

진정한 두려움의 대상(11-15)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반석이 되실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들에게는 그가 걸림돌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만 의지하고 기다리고 바라야 합니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곧 닥칠 침공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11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려 주시며 이 백성의 길로 가지 말 것을 내게 깨우쳐 이르시되 12이 백성이 반역자가 있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반역자가 있다고 하지 말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13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14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15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11-15)

 

이 본문은 앞부분에 이스라엘 민족이나 이사야 선지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사야와 그의 제자들과 같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1)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경고(11)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계시를 나타내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강한 손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을 통해서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직접 인도하심을 강조하십니다.

‘너희’에게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이사야는 여호와의 경고가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관해 간략하게 언급합니다. 6장에서 환상 중에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를 본 이사야는 여기서는 그분의 손에 붙잡힙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이사야에게 ‘이 백성의 길’을 따르지 말도록 경고하십니다. 이사야는 다른 길을 선택한 다수에 굴복하지 않고 예언자의 길, 곧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길을 가야 합니다.

 

(2) 이사야가 ‘너희’에게 주는 경고(12-13)

 

12-13절은 이사야가 너희에게 주는 권면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백성’(11)과 구별되는 자들로, 이사야의 선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입니다. 반역의 내용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기에 역사적 상황을 통해 추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하스의 친앗수르 정책을 비판하였던 이사야는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왕의 결정에 반대하는 자가 됐습니다. 당파적 이해에 사로잡힌 자들의 눈에 이사야와 그를 동조하는 자들은 반앗수르 정파를 추종하는 자들로 보였습니다. 이사야와 그의 지지자에게 반역자라는 의심스러운 시선이 쏠렸습니다. 이사야는 한편으로는 자신과 함께 반역자로 의심받는 지지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입장을 잘못 이해하여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반앗수르 노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지지자들에게 분명히 선을 그으면서 그러한 정치적 음모에 가담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만 거룩하다 하고, 그분만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분으로 삼아야 합니다. ‘너희’에게 반역자라는 혐의를 씌우는 자들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정치적 위기와 혼란은 실체 없는 두려움에 불과합니다. 여호와의 거룩함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분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행위이며 그분께 대한 철저한 복종으로 나타납니다. ‘성소’는 ‘여호와를 거룩하다 하는 자’에게만 구원의 장소가 됩니다.

 

(3) 걸림돌이 되신 여호와(14-15)

 

이사야는 14-15절에서 예루살렘 성전신학에 속한 개념과 표상을 사용해 여호와를 거절한 자들에게 심판을 선포합니다. 성소가 되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두 집에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고,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됩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반석으로 믿는 여호와께 걸려서 넘어집니다. 함정과 올무에서 구해주시는 분으로 믿는 여호와께 걸려 함정에 빠지고 올무에 걸립니다. 여호와를 오직 구원자로만 아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믿음이 그분을 심판자로 만듭니다. 여호와의 구원의지가 백성의 마음을 더욱 무디게 하고, 그들의 귀를 더욱 어둡게 하고 눈을 더욱 들러붙게 해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합니다(6:10).

이스라엘과 유다는 반석이신 여호와께 걸려 ‘비틀거리고 넘어져서 깨어지고 걸려들어 사로잡힌다.’ 15절에 사용된 다섯 개의 동사는 완전한 멸망보다는 파국의 심각성과 철저성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이스라엘의 심판자가 되셨기에 어디에서도 도움을 찾지 못합니다.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16-18)

성도들에게는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양 갈래 길 앞에서는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두 길을 동시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돈, 하나님과 사람,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 사이에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16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17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18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16-18)

 

이사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다도 결국 심판을 받습니다. 유다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그들의 실패는 곧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을 입증합니다.

 

(1) 봉합된 말씀(16)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증거의 말씀’을 묶고 ‘율법’(가르침)을 봉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증거(증언)와 율법(가르침)은 아람과 에브라임이 예루살렘을 위협할 때 선포된 예언들이며, 7-8장에 수집된 말씀들을 가리킵니다. 여호와를 무시하고 앗수르를 정치적 구원자로 선택한 아하스에게 말씀을 더 선포한다는 것이 무의미해졌습니다. 아하스와 그의 백성에 의해 거절당한 여호와의 말씀이 미래를 위해 보존됩니다. 다윗 집은 자기 능력을 과신하고 여호와의 약속과 경고를 무시했지만, 역사는 이들의 어리석음과 이사야가 선포한 말씀의 진정성을 입증해줄 것입니다.

 

(2) 여호와를 기다리는 이사야(17)

 

실망스러운 결과이기는 하지만 이사야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기다리기로 합니다. 여호와께서 심판을 집행하시는 것을 기다리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얼굴을 가리신 여호와’는 관계의 단절, 곧 심판을 의미하지만, 사용된 동사 ‘기다. 리다’와 ‘바라보다’는 구원을 기다린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풀어쓰자면, 이사야는 지금 얼굴을 가리신 여호와께서 다시 나타나시길 기다립니다. 그는 여호와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심판 이후에 있을 그분의 구원사적 개입을 내다봅니다.

 

(3) 징조가 된 이사야와 그의 아들(18)

 

이사야는 대담하게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그의 아들들이 징조와 예표로 등장하는 경우는 7:3(스알야숩)과 8:3-4(마헬살랄하스바스)에 나오고, 이사야의 경우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아들 스알야숩과 함께 아하스를 만나러 가는 7:3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름이 구원의 징조라면, 그의 아들들의 이름은 심판의 징조가 됩니다. 이사야는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여호와께서 다시 이사야의 여호와로 나타나시길 기다립니다. 야곱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다른 신탁을 구하는 자들(19-22)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황폐한 현실 속에서도 절망이 아닌 희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속삭임을 듣지 말고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르라 하시며, 말씀으로 세상을 분별하라 하십니다. 말씀에 굶주린 빈약한 자 되지 말고 말씀 안에서 강건할 것입니다.

 

19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20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21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22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16-22)

 

믿음을 상실하면 이성과 논리가 아닌 또 다른 믿음의 형태인 강신술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강신술은 거짓 신과 어둠의 영에 굴복하는 행위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초월적 존재에 기대려는 인간의 심성을 이용해 점집이 유행합니다.

 

(1) 거짓 신탁(19)

 

이스라엘은 당연히 하나님께 물어야 했는데, 혼합주의에 물든 자들은 가나안의 영향을 받아 죽은 자의 영에 의탁하여 점을 쳤습니다. 이들은 죽은 귀신(조상신)을 통해 얻어낸 구원신탁을 선포하면서 이사야를 따르는 자들을 압박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자신과 함께하는 자들에게 이들의 허황된 주장에 흔들리지 말도록 권면하고 경고합니다. 조상신이나 어떤 귀신에게서 도움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2) 이사야의 예언(20)

 

이사야를 통해 선포된 ‘율법과 증거’(가르침과 증언)만이 이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의 선포와 다른 말을 전하는 자들에게는 어둠과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3) 절망적 상황(21-22)

 

고난과 환난이 더해갈수록 이들의 악함도 더 심해집니다. 이들은 굶주릴 때 분노하며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합니다. 환난과 흑암과 고통이 이들의 배교에서 기인했음에도 이들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신다고 원망하고 그분을 저주합니다. 악해져만 가는 자들에게 구원의 빛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들의 완악한 마음이 멸망을 피할 수 없게 합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도, 땅을 내려다보아도 오직 고난과 무서운 어둠뿐입니다.


굶주린 사자 같은 세상에서 어린 양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가혹한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앞서가신 주님은 십자가로 악한 세상을 이기셨고 기쁘고 담대하게 주어진 길을 가셨습니다. 주님처럼,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의 영광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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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8-01)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증조

이사야 8장 1-8절


 

여러 가지 일을 만날 때, 사건을 사건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또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일이 무엇인지 ...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도 사건을 자신의 시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복된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 7장처럼 아람과 에브라임이 연합하여 유다를 침략하려 했을 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큰 서판에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고 하시며, 그의 아들 이름도 그렇게 지으라 하십니다. 이는 다메섹과 사마리아가 앗수르왕에게 노략당할 것임을 뜻합니다. 유다 백성이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의지하니,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위력이 그들을 뒤덮게 하실 것입니다.

 

마헬살랄하스바스(1-4)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것, 귀한 믿음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바로 볼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길 원하고 계십니다.

 

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가지고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2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3내가 내 아내를 가까이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4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1-4)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약속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백성들은 날마다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따르고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표적행위(1-2)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큰 서판’을 취하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그 위에다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쓰라고 명령하시고, 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고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표적행위에 관한 명령만 나오고 실행 보고는 없습니다. 이사야가 여호와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판의 기록 목적은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성전이나 성문 주변의 공개적 장소에 세워놓으려고 큰 서판에 기록한 것 같습니다. 서판에 기록된 ‘마헬살랄하스바스’는 문자적으로 ‘신속히 약탈물-재빨리 – 노획물’입니다. 약탈과 노략을 당하는 대상을 모르기에 여호와께서 해석해주시기 전까지는 그 의미가 모호합니다. ‘통용 문자’로 번역한 단어는 문자적으로 ‘사람의 석필’입니다. 전통적으로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글자체로 이해하지만, 서판에 글자를 기록할 때 사용하는 도구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의 증인은 이스라엘의 사법 전통에 일치합니다(신명기 17:6; 19:15). 예루살렘 왕궁과 성전의 최고위층에 속한 자들이 증인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열왕기하 16:10-16에 의하면 제사장 우리야는 아하스가 통치할 때 예루살렘 성전의 최고 제사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아하스의 지침과 명령에 따라 다메섹의 제단을 모방해서 새 제단을 만들고 이전의 놋제단은 새 제단 북쪽에 옮겨놓았습니다.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가 열왕기하 18:2의 스가리야와 동일 인물이라면 그는 아하스의 장인이 됩니다.

‘진실한 증인’은 이들에 대한 여호와의 평가를 담은 표현이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인물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문맥에 더 가깝습니다. 표적행위와 관련해 증인이 세워지는 경우는 여기가 유일합니다. 일반적으로 표적행위는 공적 장소에서 행해지기에 증인이 필요 없습니다. 표적행위의 실행과 그 해석 사이의 시간적 간격 때문에 진실한 증인이 요청됩니다. 3-4절에 의하면 적어도 10개월이 지나서야 표적행위에 대한 해석이 주어집니다. 서판이 기록된 시점을 확실하게 증언해줄 수 있는 믿을 만한 증인이 필요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남아있을 때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멸망을 선포하시고, 그 말씀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도록 증인을 세우시고 있습니다.

 

(2) 아이의 출생과 이름(3)

 

새로운 사건을 보고해주는 3-4절은 아이의 이름에 의해 앞 단락에 연결되며, 표적행위를 해석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사야의 사적(私的) 사건이 여호와에 의해 공적(公的) 메시지가 됩니다.

이사야가 아내(여선지자)에게서 아들을 낳자 여호와께서 아이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지어주시고 그 의미도 해석해주십니다. 10개월 이상 모호하게 남았던 서판에 기록된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의미가 여호와의 계시로 밝혀집니다. 다메섹과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의해 ‘신속히 약탈물-재빨리 노획물’이 됩니다.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멸망이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전’(7:16)에서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으로 임박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갓 태어난 아이는 보통 1년이 되기 전에 ‘엄마, 아빠’를 부르게 됩니다. 임마누엘의 징조가 2-3년의 기간을 내다본다면, 이사야의 아들 ‘마헬살랄하스바스’에 따르면 1년도 안 돼 유다를 위협하는 아람과 에브라임이 멸망합니다.

‘앗수르 왕 앞에’는 승리의 행진을 전제합니다.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앗수르의 용사들이 다메섹과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약탈한 재물을 가지고 앗수르 왕 앞으로 자랑스럽게 행진할 것입니다.

 

유다까지 뒤덮는 대홍수 예언(5-8)

재난 영화를 보면 다가오는 재앙의 전조를 무시하다가 순식간에 위기에 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전에 경고하시고 전조를 주십니다. 안일에 빠진 이들이 그 사인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만이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5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7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8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5-8)

 

아람과 에브라임의 위기 때 선포된 네 번째 말씀입니다. 1-4절의 심판은 다메섹(아람)과 사마리아(북이스라엘)에 한정됐는데, 여기서는 심판의 범위가 에브라임을 넘어 유다로 확대됩니다.

 

(1) 고발(5-6)

 

6절의 이해는 ‘이 백성’과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달려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이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한다고 고발하십니다. 이미 이백 몇 십 년 전에 남북이 분열됐기에 이스라엘이 자기 왕을 기뻐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백성’이 유다 백성일 때만 고발은 남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백성’은 르신과 베가가 추진하는 반 앗수르 연합에 동조하는 자들입니다. 유다는 전통적으로 친애굽적이었기에 아하스의 친앗수르 정책에 반발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르신과 베가와 함께 앗수르에 맞설 것을 주장했습니다.

유다 백성이 버린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은 여호와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두 가지 근거에서 다윗 왕조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첫째, ‘실로아 물’과 ‘르신과 르말리아의 아들’이 비교의 대상이기에 둘은 같은 또는 대등한 범주에 속해야 합니다. 후자가 왕이라면 전자도 왕이어야 합니다. 둘째,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이 7절에서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에 대비되고, 8절에 따르면 후자에 의해 전자가 압도당합니다. 후자가 다윗 왕조일 때만 가능합니다. 세차게 넘쳐흐르는 큰 강과 잔잔히 흐르는 실로아 물은 각각 앗수르와 유다의 국력을 반영한 표현입니다.

 

(2) 심판언선(7-8a)

 

정리하자면,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일부가 다윗 왕조에 등을 돌리고 르신과 베가가 추진하던 반 앗수르 연합에 동조했습니다. 물론 친앗수르 노선을 따르는 자들이나 반앗수르 노선을 주장하는 자들이나 모두 여호와께 의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은 물론 유다도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과 그의 군대를 불러 먼저 다윗 왕조를 위협한 아람과 에브라임을 심판하십니다. 앗수르의 침략이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홍수에 비교됩니다(이사야 17:12-14; 예레미야 46:7; 51:42).

여호와께서 르신(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에브라임) 위로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티그리스 또는 유브라데)가 넘쳐흐르게 하십니다. 홍수가 땅을 뒤덮듯이 앗수르 군대가 아람과 에브라임을 뒤덮습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을 덮친 홍수가 계속 유다로 밀려들고 넘쳐흘러 범람하고 목에까지 차게 됩니다. 홍수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 아람과 에브라임과 달리 유다는 죽음 직전까지 내몰리지만, 그래도 목숨은 구합니다.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으로 함락의 위기에 처했던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극적인 간섭으로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습니다(29:1-8;37:36). 여호와께서는 아람과 에브라임을 주고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7:20)을 통해 유다의 불신앙을 혹독하게 징벌하십니다. 아하스의 불신앙 때문에 임마누엘의 징조가 구원(7:16)에서 심판(7:17)으로 옮겨지는 것처럼, 앗수르의 역할도 유다에 이중적입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를 불러 유다를 위협한 아람과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시고(8:4,7), 또 당신께 등을 돌리고 앗수르에 의존한 유다를 징계하십니다. 다윗 왕조와 그의 백성이 굳게 믿지 않기에 굳게 서지 못하고(7:9) 강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위기에 빠집니다.

 

(3) 펼친 날개(8b)

 

8절의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의 해석은 그의 이해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가 앗수르 왕을 가리킨다면, 넘쳐흐르는 홍수의 표상과 온 땅을 뒤덮는 펼쳐진 날개의 표상은 상호보완적입니다. 앗수르의 군대가 한 번은 유다 땅을 밑에서부터 뒤덮는 홍수로, 한 번은 하늘 위에서 먹이를 노리며 덮치는 거대한 새로 묘사됩니다. 날개를 활짝 펼치고 먹이를 노리는 새처럼 앗수르가 먹이를 찾아 유다를 침략합니다. ‘그’가 여호와를 가리킨다면, 유다의 심판이 유다의 구원으로 전환되는 반전을 볼 수 있습니다(29:5). 어미 새가 날개를 펴서 새끼 새들을 보호하듯이 여호와께서 날개를 펼쳐 당신 백성을 지켜주십니다(시편 17:8; 36:7; 57:1; 61:4; 91:4; 룻기 2:12).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에’(임마누엘) 앗수르의 침략은 위협적이지만 제한적입니다.


온 세상을 삼킬 듯 흉용하게 넘실거리며 흐르는 창수도 하나님 나라를 덮칠 수는 없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통제하시고 ‘잔잔하라’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그의 은혜의 날개 아래 거할 때만, 잔잔히 흐르는 맑고 깨끗한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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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7-02)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아하스

이사야 7장 10-25절


 

같은 일, 같은 사람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들의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과부가 드린 동전 두 개는 사람들이 보기에 적은 헌금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가장 많은 헌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바리새인이 참된 신앙인이라고 여겼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세리가 더 바른 신앙인이었습니다. 이사야와 아하스에 대한 평가는 어떠하겠습니까?

 

 

  • 첫 번째 신탁을 거절한 아하스에게 여호와께서 다시 신탁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준 약속을 지키려고 쓰시고 아하스는 여호와를 왕궁의 정치에서 배제 시키려 애씁니다. 아하스는 어떠한 징조라도 구하면 주겠다는 여호와의 제안을 경건으로 포장해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여호와의 구원 의지가 아하스의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만들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합니다.

 

아하스에게 주는 두 번째 예언(10-17)

 

하나님께서는 시험해야 할 대상은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모든 경우에 불경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시험을 명령하기도 합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징조를 구하라고 아하스 왕에게 말했습니다. 이 명령을 하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10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려느냐 14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6대저 이 아기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17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10-17)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징조를 구하게 하여 믿음의 기회를 부여하십니다. 하지만 왕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며 거절합니다. 이는 겸손이 아니라 거역이자 오만입니다. 경건을 가장하여 하나님을 괴롭히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가장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1) 하나님의 제안과 아하스의 거절(10-11)

 

르신과 베가의 계획이 반드시 실패하리라는 예언(7-9)을 주셨지만, 앗수르에 의존해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아하스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하스의 결정에서 다윗 왕조의 멸망까지 이어질 수 있는 위기를 보셨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구원 약속의 확실성을 확인할 수 있는 아무 징조라도 구하면 이를 들어주겠다고 제안하십니다(11).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는 다른 예를 찾을 수 없는 파격적 제안으로, 아하스와의 개인적 관계보다는 다윗 왕조와 유다가 직면한 사태의 심각성과 중요성에서 기인합니다. 확인할 수 있는 징조를 통해 신뢰의 부족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제안을 아하스는 경건을 가장한 위선적 신앙으로 거절합니다(12). 그는 아람과 에브라임의 군사적 위협과 관련해 여호와의 능력과 의지를 시험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간접적이지만, 정치영역에서 여호와의 주권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2) 책망과 징조 (13-14)

 

‘다윗의 집’은 사람들을 괴롭힐 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괴롭힙니다(13). 이들은 백성을 전쟁의 위험에 빠뜨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실 수 없게 만듭니다. 아하스의 거절로 여호와께서 어려운 처지에 빠지십니다. 그분의 약속과 다윗의 집의 불순종이 충돌합니다.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준 약속에 신실하셔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윗 왕조의 불순종에 대해 그분은 눈을 감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라는 제안을 거절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다윗의 집에 징조를 주십니다(14). 불순종을 책망한 다음에 주어진 임마누엘 징조의 해석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3) 징조의 해석 (15-17)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의로운 자에게는 구원으로, 불의한 자에게는 심판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사야의 문맥에서도 임마누엘의 징조는 이중적입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의 멸망을 선포하는 16절에 따르면 구원의 징조가 되고, 유다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파멸적 재앙을 선포하는 17절에 따르면 심판의 징조가 됩니다. 임마누엘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처녀’로 번역한 ‘알마’는 의미상 처녀를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처녀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너희’에게 징조로 주어졌기에 ‘처녀’와 ‘임마누엘’은 아하스가 알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아기 임마누엘은 악을 물리치고 선을 택할 줄 알 때까지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입니다(15). ‘엉긴 젖과 꿀’이 구원의 양식인지 고난의 양식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전자라면 짧은 평안의 시기가 끝나고 긴 고난의 시대가 오고, 후자라면 짧은 고난의 시기가 지난 후에 안정과 번영의 시대가 옵니다. 징조의 이중성은 여호와의 약속과 아하스의 불순종의 충돌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의 멸망(16)은 다윗에게 준 약속을 지키시려는 여호와의 결정이기에 아하스의 선택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7-9a). 그렇다고 여호와께 의지하기를 거절한 다윗 집안의 불순종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9b). 그분은 아하스가 구원자로 선택한 앗수르를 불러 유다를 심판하십니다(17).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임마누엘)은 자기 계획 따라 예루살렘을 침략하려는 북쪽의 두 나라뿐만 아니라, 구원 약속을 거절한 유다에도 심판의 징조가 됩니다. 아하스가 다윗 왕조의 신학적 초석이신 여호와 배반하고 앗수르를 택함으로써 구원의 징조가 될 수 있었던 임마누엘이 심판의 징조가 됩니다.

 

심판의 도구 앗수르와 애굽(18-25)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배신, 패역함, 불순종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약속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번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순종하며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18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곳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19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 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20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 털과 발 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21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22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엉긴 젖을 먹을 것이라 그 땅 가운데 남아 있는 자는 엉긴 젖과 꿀을 먹으리라 23그 날에는 천 그루에 은 천 개의 가치가 있는 포도나무 있던 곳마다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라 24온 땅에 찔레와 가시가 있으므로 화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25보습으로 갈던 모든 산에도 찔레와 가시 때문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풀어 놓으며 양이 밟는 곳이 되리라(18-25)

 

왕이 의지했던 앗수르는 유다의 발목을 잡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황무지가 되고 유다는 큰 수치를 겪을 것입니다. 당장 어려움이 해결되었다고 축복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배가 된 고통이 뒤따를 것입니다. 징조와 은혜를 입었다면, 늦기 전에 돌이켜야 합니다.

 

(1) 심판의 도구 앗수르와 애굽(18-20)

 

18-25절의 ‘그 날에는’으로 시작하는 세 개의 말씀은 17절의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난 때부터 당하여보지 못한 날’의 구체적 설명입니다. 아하스의 불순종이 유다에 파국적 재앙을 가져옵니다. 이사야는 애굽과 앗수르 군대를 파리와 벌에 비유해 유다에 심판을 선언합니다. 벌을 치는 사람이 휘파람을 불어 벌들을 한곳으로 불러 모으듯, 여호와께서 애굽과 앗수르의 군대를 이스라엘 땅으로 불러 모으십니다. 유다가 생존을 위해 조공을 바치고 머리를 숙였던 강대국들이 유다를 침략합니다. 다윗 왕조의 유일한 후원자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앗수르와 애굽에 도움을 구한 유다는 혹독한 수업료를 납부하고 서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깨달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브라데 건너편에서 앗수르를 용병으로 데려와 유다를 치십니다. 사람들은 포로로 사로잡혀 ‘머리 털’과 ‘수염’뿐만 아니라 ‘발 털’(음부의 털)마저 밀리는 수치와 모욕을 당합니다.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세내어 온 삭도’에서 아하스의 결정에 대한 이사야의 신랄한 풍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아하스는 앗수르에 의존하여 다메섹과 에브라임의 위협을 벗어나려 하지만, 구원자로 불러드린 앗수르에 의해 도리어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앗수르는 유다의 아하스를 징계하기 위해 다메섹과 사마리아를 삯으로 주고 불러온 용병이 됩니다.

 

(2) 심판 이후의 삶 (21-22)

 

두 번째 ‘그 날에는’ 말씀이 구원 시대의 축복과 관련된 말씀인지 심판과 관련된 말씀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심판으로 경작지가 황폐해져 농사도 짓지 못하고 최소한의 가축으로 목숨을 연명하게 됩니다.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에서 나오는 젖은 한 가정의 양식으로는 부족한 양입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하며 살게 됩니다. ‘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엉긴 젖을 먹을 것이라’의 해석은 상이합니다. 심판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경우에는 역설 또는 풍자가 됩니다.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어 어린 암소한 마리와 양 두 마리에서 나는 젖으로도 충분히 먹고 남습니다.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심판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진 소박한 구원 약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심판으로 생활 기반이 다 파괴됐지만, 소망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에서 온 가족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많은 양의 젖이 나기 때문입니다. ‘엉긴 젖과 꿀’도 이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상입니다. 경작지와 가축의 소산과 함께 먹는다면 풍요로운 양식이 되고, 수확물이 부족해 야생의 젖과 꿀에 의존해 생존해야 한다면 심판 시대의 척박한 삶을 보여주는 양식이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엉긴 젖과 꿀’은 임마누엘의 양식이기에(7:15) 구원에 대한 암시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심판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절망적 환경이 극복될 수 있습니다.

 

(3) 폐허가 된 땅(23-25)

 

백성의 운명 다음에 땅의 운명이 언급됩니다. 땅도 같은 처지에 놓입니다. 5:1-7의 포도원 노래에서 사용된 단어들과 표상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전쟁으로 거주지와 경작지가 완전히 파괴 됩니다. 은 천 세겔이나 나가는 천 그루의 포도나무가 있던 포도원이 완전히 황폐해져서 찔레와 가시가 자랍니다. 포도나무 한 그루에은 한 개는 매우 높은 가격입니다. ‘은 천 냥 값이나 되는 천그루의 포도나무가 있던 곳’은 최고 품질의 포도나무가 심긴 비옥한 포도밭(5:1-2)을 시사하는 표현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풍요로운 결실이 보장된 기름진 포도밭이 찔레와 가시가 자라는 황무지가 됩니다. 야생 동물이나 살 수 있는 곳이 되었기에, 사람들이 거기로 가려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해야 합니다. 가나안 ‘온 땅’이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가 됩니다. 경작지로 개간한 산들이 폐허가 돼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소와 양이 풀을 뜯어 먹는 곳이 됩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가장 큰 징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징조를 통해 기회를 주기 원하시며,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길 바라십니다. 징조를 무시하면 수치와 심판을 당하겠지만 징조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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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7-01)


임마누엘을 믿기 원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7장 1-9절


 

사탄이 우리를 무너뜨리고자 할 때 전략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서 낙심하게 만듭니다.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낙심하도록 하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어렸습니다. 성도들은 문제를 만나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다스릴 수 있는 주권자 하나님을 바라봐야할 것입니다.

 

  • 유다 왕 아하스가 통치할 때 아람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가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위협했습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주도한 반 앗수르 연합에 가담하기를 거절한 아하스를 징계하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도 반앗수르 정책을 지지하는 정치적 세력이 있었습니다. 아하스는 외부와 내부의 적으로부터 위협을 당했습니다.

 

역사적 배경(1-2)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작은 위기에도 두려움에 빠집니다. 마음을 흔드는 위기 상황에서 우리를 구원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할 때, 상황은 완전히 역전될 수 있습니다. 남 유다 아하스 왕과 백성들이 흔들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1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2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더라(1-2)

 

본문에서 언급된 전쟁은 아람과 북 이스라엘 연합군이 남 유다를 침공한 사건입니다. 앗수르가 제국을 확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아람과 북 이스라엘은 반 앗수르 동맹을 형성하고 친 앗수르 정책을 편 남 유다를 침입합니다.

 

(1) 아람과 이스라엘의 위협(1)

 

먼저 사건의 시작과 결말을 요약적으로 알려줍니다.

신흥 강국인 앗수르 압박 속에서 아람과 북 이스라엘은 반 앗수르 동맹을 맺습니다. 그들은 남 유다의 아하스 왕을 침공해서 패하고 그들의 꼭두각시 왕은 세우려고 남 유다를 침략했습니다. 당시 아람 왕은 다메섹에서 통치하고 있었던 르신이며, 이스라엘 왕은 사마리아에서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들을 통치하고 있었던 베가 왕이었습니다. 그 왕은 이스라엘 시대에 부가하야 왕 시대에 장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찬탈한 자였습니다. 이렇게 이방 왕과 정통성을 가질 수 없는 북 이스라엘 왕은 남 유다왕 아하스가 자신들의 동맹에 참여하도록 압박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를 정복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침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절에서 이 전쟁은 연합군의 실패로 끝이 납니다. 본문은 전쟁의 목적이나 실패로 끝난 배경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고 결말만 간단히 언급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의 침략이 별다른 위협이 아니었던 것처럼 거리를 두고 보고합니다.

 

(2) 흔들리는 왕과 백성(2)

 

아람 왕(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베가)이 유다 왕(아하스)에게 동맹을 제안합니다. 이는 반앗수르 동맹을 맺어 남하해 내려오는 앗수르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을 의지해 친앗수르 정책을 폈기에 반앗수르 동맹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연합해 유다를 먼저 공격해 옵니다(주전 734-733). 두 나라가 예루살렘까지 공격해 들어오자 대항할 힘이 없던 아하스 왕과 백성의 마음은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다윗의 집’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1절의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베가 왕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인정한 다윗 왕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소문, 연합군의 침입이 전 유다에 알려졌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아람과 에브라임이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만으로도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습니다. 남 유다가 당시에 얼마나 많이 동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남 유다의 두려움과 혼란은 나름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유다의 군사력은 이스라엘을 상대하기에도 버거웠기에,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은 유다에 치명적일 수 있었습니다. 마치 따로 노는 듯한 1절과 2절을 함께 읽으면, 두려움에 빠진 왕과 백성의 반응은 부정적 전망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그 배후를 보지 못하기에, 이사야가 환상 중에 본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6:5)을 바라보지 못하며, 위협 같지 않은 위협에도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나무처럼 떱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격려와 경고의 말씀(3-6)

성도는 사람의 계획에 낙심하지 말고, 세상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만이 온전히 이루어짐을 굳게 믿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인간의 모든 도모와 계획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3그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4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5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3-6)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아하스 왕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 베가는 유다를 침략해 아하스 왕을 끌어내리고, 대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울 계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계획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단언하십니다. 오히려 유다를 멸하려는 북 이스라엘이 65년 내에 패망할 것임을 예언하십니다.

 

(1) 이사야와 스알야숩(3)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아하스를 만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만남에는 그의 아들 ‘스알야숩’을 동행하도록 하십니다. ‘스알야숩’은 ‘만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며 반드시 심판이 올 것임을 알리는 역학을 했습니다. ‘스알야숩’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처럼, 이제 이름 자체로서 하나님의 예언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와 그이 아들 ‘스알야숩’이 군사적인 요충지인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길’에서 아하스 왕을 만납니다(3). 예언자가 말씀을 전하거나 선포할 때 자식이나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경우는 이곳이 유일합니다. 또 왕을 만나려면 왕궁을 찾아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두 지침은 특별한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남의 장소로 선택된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은 아하스에게 정치적 표징이, 여호와께는 신학적 표징이 됩니다. 아하스가 그곳에 간 목적은 예루살렘이 포위당할 경우에 대비하여 수로 시설을 점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샘물이나 지하수가 없었기에 물의 확보는 수성의 결정적 요소였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윗못 수도’가 아닌 여호와가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의 생명수임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의 전쟁 위협은 다윗 왕조의 영원한 통치를 약속하신 여호와께 의존해 극복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아들 스알야숩의 동반과 관련해서는 이름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8:18에서 이사야는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라고 말함으로써, ‘이사야’와 ‘스알야숩’의 이름이 징조로 사용됐음을 시사합니다. ‘여호와께서 도움이시다’를 의미하는 이사야는 구원의 징조가 되고, ‘(전쟁에서 패하고) 남은 자가 돌아오다’를 의미하는 스알야숩은 심판 징조가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사야와 스알야숩을 아하스에게 보내 구원과 심판이 그의 결정에 달렸음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아하스는 구원하시는 이사야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정치적 선택을 하면 남은 자만 돌아오게 하시는 스알야숩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2) 격려와 경고(4)

 

아람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위협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하스에게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통해 격려의 말씀을 전하십니다(4). 이사야는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4)고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 침착하게 대처할 것을 주문하십니다. 아하스에게 분노해 전쟁으로 위협하는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의 르말리야의 아들(베가)은 다 타버리고 연기만 나는 장작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에 타버린 장작이 화로나 아궁이에서 꺼내 버려지는 것처럼, 르신과 베가도 이미 세력을 다 상실하고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기에 이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왕 베가를 거듭 ‘르말리야의 아들’로 부르면서 그에 대한 경멸감을 표출합니다. 베가에 대한 경멸은 그의 왕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나오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열왕기하 15:27-31)는 이스라엘 왕 브가히야(주전 737-736년)의 무관으로 있다가 브가히야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인물입니다(열왕기하 15:25).

 

(3) 적들의 계획(5-6)

 

원문에서 접속사 ‘때문에’로 시작하는 5-6절은 문법적으로는 7절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꾸민 계획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계획이 아니기에 악하며 이뤄질 수 없습니다. 이들이 세운 악한 계획은 유다를 침략해 반 앗수르 연합에 참여하길 거절한 아하스를 제거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앉히는 것이었습니다(6). 르신과 베가가 아하스 대신 보좌에 앉히려 했던 다브엘의 아들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아람어 이름이기에 아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임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디글랏빌레셀의 조공 목록에 다메섹의 르신과 사마리아의 므나헴과 함께 언급된 두로 왕 투바일(Tubail)을 자주 다브엘과 일치시키지만, 이런 추측은 유다의 다윗 왕조 전통과 충돌합니다. 모계가 다브엘 집안 출신으로 반앗수르 정책에 동조하는 다윗 가문에 속한 인물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불확실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하스를 제거하려는 아람과 에브라임의 위협이 매우 구체적이고 심각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의 통치는 다윗의 후손에 의해 행해질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7-9)

삶의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두려워하며 마음이 흔들리는 연약함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위태롭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강한 오른팔이 붙잡고 계심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신을 위해 우리와 함께하하시고 싸우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7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8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9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7-9)

 

인간적인 연합군의 계획은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유다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르신의 결정도 사마리아의 결정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생의 서고 넘어짐을 결정하십니다.

 

(1) 무조건적 구원 약속(7-9)

 

7절은 무조건적인 구원 약속입니다. 아하스를 제거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대신 왕으로 세우려는 아람과 에브라임의 계획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8a절과 9절은 이들의 계획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람의 다메섹이 유다를 위협하지만, 이것은 르신의 머리에서 나온 결정일 뿐입니다. 에브라임의 사마리아도 아람의 다메섹과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에브라임이 하나님 백성에 속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와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다윗 왕조와 유다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를 경영하시고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적 약속이 9절에서 조건적 약속으로 옮겨갑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와 유다의 미래가 당신의 약속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 달려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위기의 한복판에 여호와께서 계심을, 그분만이 이 위기로부터 구해주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하스와 그의 백성이 나단을 통해 다윗 집안에 주어진 약속(사무엘하 7:17)에 굳건히 선다면 다윗 왕조는 흔들리지 않겠지만, 다윗 왕조의 신학적 토대를 부정하고 정치적 선택에 의존한다면 다윗 왕조의 미래는 불투명해집니다.

 

(2) 조건적 구원 약속(9b)

 

무조건적 약속과 조건적 약속이 함께 주어져서 언뜻 충돌처럼 보이지만, 이 두 약속은 보충적 관계에 있습니다. 7절의 무조건적 약속은 시리아-에브라임의 위협이라는 특정 사건에 한정된, 아하스 개인에게 주는 구체적인 약속이고, 9b절의 조건적 약속은 지속적인 영향을 갖는 ‘너희’에게 주는 포괄적 약속입니다. 두 약속을 함께 읽으면, 예루살렘을 공격하려는 르신과 베가의 계획은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은 ‘그들만의 결정’이라 아하스의 태도와 상관없이 반드시 실패로 끝나지만, 시리아 에브라임 위기 때 주어진 무조건적인 구원 약속은 아하스의 태도에 따라 지속될 수도 일회적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아하스와 그의 백성이 여호와의 구원 약속에 전적으로 의존할 때만 다윗 왕조의 미래는 흔들리지 않고 굳건해집니다. 뒤따르는 두 번째 말씀(10-17)은 9b절의 약속이 수반된 권면이 아하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일도, 사람도, 서거나 무너지는 것은 다 하나님이 주권에 속하는 일입니다. 사소해 보이는 일도, 열강이 만드는 역사도 하나님께서 주장하십니다. 그분의 주권을 온전히 믿을 때 비로소 평안할 수 있습니다. 주권을 믿는 것은 운명론적 체념이 아닌 약속에 근거한 신뢰요 사랑의 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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