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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4-02)


제사장 엘리에 닥친 죽음들

사무엘상 4장 12-22절


 

‘성전(聖殿)’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3:16)라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더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우리 자신들이 거룩하지 않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 전쟁에 나간 두 아들의 소식을 엘리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도망나온 베냐민 사람은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군사들이 3만이나 죽고, 엘리의 두 아들들도 죽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까지 빼앗겼다는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진 것처럼 비운(悲運)은 없습니다. 엘리는 나쁜 소식을 듣는 순간 넘어져 죽습니다.

 

엘리의 최후(12-18)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자신만을 섬기는 일입니다. 영안이 어두워지면 방향과 목표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을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를 위해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면 눈이 밝아지고 활동적인 그리스도인 될 것입니다.

 

12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나와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13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읍에 들어오며 알리매 온 성읍이 부르짖는지라 14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이 떠드는 소리는 어찌 됨이냐 그 사람이 빨리 가서 엘리에게 말하니 15그 때에 엘리의 나이가 구십팔 세라 그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16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이르되 내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17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18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12-18)

 

이스라엘은 최후의 수단으로 언약궤를 선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4:3). 전쟁터에 하나님의 언약궤와 제사장들은 앞세워 나갔습니다.

 

(1) 울부짖는 실로 주민들(12-13)

 

전쟁터에서 도망지자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 베냐민 사람이 전쟁터에서 도망해 달려와 실로에 도착했습니다. 이 사람의 모습은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덮어쓴 상태였습니다(12). 이 모습만 보더라도 성읍 사람들은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사람이라는 점은 이제 베냐민 지파 사울의 시대가 열리게 됨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베냐민 지파이므로 실로에 자기 집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최고 사령부 역할을 하는 실로에 와서, 전쟁 소식을 기다리는 엘리와 다른 지도자들에게 보고하려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의 옷은 찢어져 있었고 그의 머리에는 흙이 묻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의 패배와 그로 인한 그의 비통한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에벤에셀에서 출발했다면 실로까지 대략 30킬로미터 이상을 달려온 것입니다.

그 베냐민 사람이 성읍에 들어올 때, 엘리는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의자가 성전 문설주 옆 의자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그 의자가 문 곁에 있었다는 설명을 고려할 때 아마도 같은 의자일 것입니다(1:9; 4:18). 엘리는 의자에 앉아서 길 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이 98세로 비록 늙어 거의 움직이지 않는 눈이지만, 그 눈을 움직이려 애쓰면서 전령이 올 수 있는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를 걱정하면서 크게 떨렸습니다. 엘리에게 중요한 것은 두 아들보다도 법궤의 안위였습니다. 엘리는 법궤를 가져가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언약궤를 실로에서 가지고 나오면서 대단한 행사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니깐,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다 승리할 것처럼 기세등등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성전 문 앞에 의자에 앉아서 전쟁의 결과에 대한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13).

전쟁터에서 도망 나온 베냐민 사람이 실로에 도착했습니다(12). 이스라엘에 최고 사령부 역할을 하는 실로에 와서, 전쟁 소식을 기다리는 엘리와 다른 지도자들에게 보고하려고 달려온 것입니다.

 

(2) 엘리의 기다림(14-15)

 

엘리는 성읍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식을 듣고 더욱 불안하였습니다. 그때 전령이 엘리에게 빨리 와서 소식을 전했습니다(14). 엘리는 이때 98세이므로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습니다(15). 하지만 엘리의 이러한 상태가 그의 영적 침제를 가리킨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단지 신체적 현상일 뿐입니다.

 

(3) 전쟁의 결과를 알게 된 엘리(16-17)

 

베냐민 사람이 엘리에게 자신은 진중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자신을 먼저 소개합니다. 그는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쟁처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보고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전쟁의 과정과 결과에 관해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한 번 더 자신이 오늘 전장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말합니다. 두 번 말하는 것은 늙은 엘리가 귀조차 어두워 못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또 자신의 보고가 정확하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행동입니다.

엘리는 그를 “내 아들아”라고 부릅니다(16). 이는 그가 많은 고생을 하고 죽을 뻔한 위기도 넘기면서 여기까지 왔음을 알기 때문에 엘리가 그를 위로하고 칭찬하는 마음을 담아 부르는 칭호입니다. 엘리는 그에게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라고 마음에 가득한 불안을 감추고 침착한 태도를 가장하면서 전쟁의 결과에 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 전령이 대답했습니다. 그 전령은 세 가지 내용을 전했습니다. 첫째, 전쟁에 져서 이스라엘이 도망하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엘리의 두 아들이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4) 엘리의 죽음(18)

 

전령이 하나님의 궤에 관해 언급할 때, 엘리는 큰 충격을 받고서 실신하였습니다. 정신을 잃은 그가 의자에서 뒤로 쓰러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의자는 흔히 그 의자에 앉는 사람의 신분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가 의자로부터 떨어진 것은 엘리 가문의 통치가 끝났음을 암시합니다.

엘리는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사사로서 다스렸습니다. 엘리에 관하여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의 눈이 어둡고 몸이 비대한 것을 영적 타락 혹은 침체의 증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무엘서가 말하는 엘리의 잘못은 두 아들의 죄를 바로잡지 못한 것입니다. 부모이며 사사로서 자기 아들의 죄를 징계하지 못함은 분명히 큰 죄입니다. 하지만 자녀 교육에 실패하는 훌륭한 신앙의 인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무엘 역시 자녀 교육에 실패한 사람입니다(8:3). 엘리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는 40년 동안 사사로서 백성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그는 사무엘을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교육했습니다. 한나를 위한 그의 축복 기도가 한나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법궤를 위한 열심이 지극하였으므로 법궤에 대한 염려로 불안에 떨었습니다. 연로한 몸의로 길가 의자에 앉아 보이지도 않는 눈에 힘을 주면서 전령을 그토록 기다렸고, 마침내 법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듣고서 그 충격으로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아마도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요 훌륭한 인품과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 자신과 가문은 여호와로부터 버림받았으나 엘리는 분명 이스라엘 역사의 한 시대를 책임지는 사사였으며,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사무엘을 남겨서 이스라엘의 미래에 소망이 있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 감독해야 할 제사장 엘리의 가정이 백성들보다 더 타락해 심판을 자초(自招)합니다. 그 결과 이렇게 하루아침에 세 부자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비느하스의 아내(19-22)

오늘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것들이 곳곳에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다른 사람들부터 존귀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자신의 업적이나 과업 성취를 위해 자기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해야 합니다.

 

19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20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21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22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19-22)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립니다. 아니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이 그 영광으로부터 떠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곳이 이가봇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됩니다.

 

(1) 비느하스의 아내 해산(19)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습니다(19). 그러나 남편의 전사 소식과 시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한꺼번에 듣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나쁜 소식에 갑작스러운 진통과 함께 해산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고, 시부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2) 비느하스 아내의 죽음(20)

 

비느하스의 아내 또한 충격을 받아 출산 중에 죽습니다. 그녀가 죽어갈 때, 주변에 섰던 여인들이 그녀에게 아들이 태어났음을 알리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했습니다. 왜냐하면 여인들은 그녀가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영광이 이스라엘로부터 떠난 이후 이스라엘이 겪어야 할 비참한 미래를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충격과 고통에 사로잡힌 그녀는 여인들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고 신경 쓰지도 않았습니다.

 

(3) 이가봇(21-22)

 

태어난 아기는 히브리어로 ‘나아르’라 불립니다. 이러한 표현은 독자들에게 이 아이를 아이 사무엘과 비교하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합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죽어가면서 자기 아기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고 시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전자가 더 중요한 이유이므로, 그녀는 영광이 이스라엘로부터 떠난 이유가 법궤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한 번 더 설명합니다(22).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법궤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며 왕이신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빼앗김은 여호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한편 아들의 이름을 정하는 사람은 아버지거나 어머니입니다. 이 둘 중 누가 정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남편이 죽었으므로 그녀 자신이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 성령의 충만함을 풍성히 이루어 가야 합니다. 성령이 가장 슬퍼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죄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성전에 더러운 것이 자리를 잡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축복된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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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4-01)


하나님의 임재와 우리의 순종

사무엘상 4장 1-11절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언약궤를 소유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이 없이는 언약궤의 존재가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다음으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진영으로 가져옵니다. 다시 전투해 보지만, 또 패배하고 엘리의 두 아들은 죽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는 빼앗기고 맙니다. 그 이유는 언약궤를 우상화한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결과였습니다. 그들의 실패 원인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블레셋과 전투에 패함(1-2)

패배와도 같은 상실 가운데 있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 원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 크고 치명적인 패배로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상처럼 이용한 이스라엘을 언약의 외인처럼 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대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1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2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1-2)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전투를 합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4천명의 군사들을 잃었습니다. 블레셋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위해 내용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블레셋을 통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전쟁이었던 것을 가르쳐줍니다.

 

(1) 사무엘의 선지자 사역(1a)

 

본문은 여호와의 말씀이 실로에서 사무엘에게 나타났다는 3:21의 기록과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집에 말하였다고 기록하는 7:3의 기록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1b-7:2이 4:la와 7:3 사이에 삽입되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에 전파된 사무엘의 말(1a)이 블레셋과의 1차 전쟁(1b-2)을 초래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전쟁은 여호와의 도움으로 승리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2) 블레셋과의 1차 전쟁(1b-2)

 

1차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불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자기들 영토의 경계선에 위치한 에벤에셀(도움의 돌)에 진을 치자, 블레셋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아벡에 진 쳤습니다. 에벤에셀의 정확한 위치는 불확실합니다. 아벡은 현대의 텔 라스 엘 아인인데, 텔아비브 동쪽에 있으며 야르콘 강의 수원지 근처에 있습니다.

 

“그 둘이 싸우다가.”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전쟁이 벌어졌을 때’가 됩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하면서 블레셋 군대에 의해 사천 명가량 죽임을 당했습니다. 큰 피해를 보았으나, 이 피해 규모가 전쟁을 포기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원래 진영으로 돌아와 다음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2차 전쟁을 위한 준비(3-5)

우리의 생활 속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신앙의 성장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합니다.

 

3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4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5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3-5)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던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보다는 자신들의 힘을 믿고 전쟁에 나가서 실패했던 것입니다. 이런 패배의 모습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가나안 땅을 정보하려고 들어올 때, 여리고와 아이 성 전투를 기억합니다. 여리고 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해서 정복되었지만, 아이 성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전투했다가 패배를 한 적이 있습니다.

 

(1) 대책 회의(3)

 

백성이 후퇴하여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 장로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패하게 하셨는고” 이 문장의 원문은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치셨는가’로 번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친 주체가 여호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와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가져다가 이스라엘 잔영 안에 있게 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지 않고 같은 편이 되어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원수들의 수중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법궤가 언약궤로 불립니다. 이는 이스라엘과 여호와 사이에 체결된 시내산 언약을 상징하는 십계명의 두 돌판이 법궤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언약궤를 가져온 홉니와 비느하스(4)

 

“그룹 사이에 계신(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 언약궤의 뚜껑에는 그룹이라 불리는 두 천사의 형상이 서로 한쪽 날개를 맞대고 다른 쪽 날개는 반대 방향으로 펼친 모양으로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만군의 여호와(많은 군대의 여호와)라 부르는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생각하면서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시는 여호와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한편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수행하면서 전쟁터에 나아왔습니다. 언약궤를 메는 자는 반드시 제사장이어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이 직접 언약궤를 메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연로한 엘리를 대신하여 그들이 언약궤의 책임자로서 따라왔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여호와의 섭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사기충천한 이스라엘(5)

 

여호와의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오자 온 이스라엘이 큰소리로 외치니, 땅이 진동할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진영으로 들어오는 언약궤를 보면서 전쟁의 승리를 예감하고 사기충천했습니다. 여리고 이 언약궤를 앞세운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소리”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루’는 흔히 전쟁 함성을 가리킵니다(겔 21:22).

 

블레셋의 전쟁 준비(6-9)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두려워할 때, 모든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세상을 두려워할 때, 세상은 우리를 심판하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과거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해서 인도하신 전능하신 신이요,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능력의 신이라고 알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서로 어리석은 독려(督勵)합니다.

 

6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7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6-9)

 

만군의 여호와를 언약궤 안에 가두다니 어이없스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경배와 순종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부리고 사용할 수 있는 우상일 뿐이었습니다.

 

(1) 지켜보는 블레셋(6)

 

이스라열 진영에서 큰 함성이 있었으므로, 아벡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놀랐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히브리 진영”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인이라는 칭호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를 때 흔히 사용됩니다(출 2:6; 3:18).

 

(2) 블례셋의 두려움(7-8)

 

두려움에 사로잡힌 블레셋 사람들이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히브리인의 하나님께서 진정에 참여했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했습니다. “우리에게 화로다.” ‘화’는 ‘오이’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흔히 신의 심판과 형벌로 임하는 재앙을 가리킵니다(사 3:11; 렘 4:13). 이 단어를 7절과 8절에 반복하여 사용한 것은 그들의 두려움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이들의 두려움은 여호와께서 출애굽의 과정 중에 바로와 애굽 군대를 재앙으로 치셨다는 기억에서 나옵니다. 블레셋은 그 재앙들이 광야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블레셋 사람들의 생각에 애굽조차 사막과 광야에 둘러싸인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3) 블레셋의 각오(9)

 

“강하게 되며” 여기서 히브리어 동사 ‘하자크’(강하다)가 사용되었는데, 이때 ‘용기를 내다’(스스로를 강하게 하다)를 의미하게 됩니다. “대장부가 되라”는 문자적으로 남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이 두 번 사용됨은 전쟁에 패배할 것만 같다는 블레셋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이 애초에 블레셋을 종처럼 섬기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은 여호와의 법궤를 보는 순간 이제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이 블레셋을 좌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장부로 만들어 더욱 힘껏 전쟁에 임하게 하였습니다.

 

2차 전쟁(10-11)

종종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일까지도 인위적인 방법으로 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 결과는 커다란 승리가 아니라 완전한 패배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언약궤가 전쟁터 앞에 나갔으니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10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10-11)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전투가 벌어지며,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언약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큰 슬픔에 빠지게 되며, 언약궤의 상실이 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전투에서의 패배는 이스라엘의 신앙적 위기를 나타냅니다.

 

(1) 이스라엘의 패배(10)

 

블레셋이 큰 두려움 속에서 결사 각오를 다지며 자신들과 달리 사기충천해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는데, 법궤를 모시고 크게 함성을 지르던 이스라엘이 힘을 쓰지도 못하고 패배하였습니다. 이 두 번째 패배는 이스라엘에게 첫 번째 패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줬으니, 죽은 자만 삼만 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 전쟁터에 남아 있지 못하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각자 뿔뿔이 흩어져 자기 집에까지 달려 도망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이렇게 쉽게 무너진 것은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뿌리 깊은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 언약궤와 엘리의 두 아들(11)

 

11절에는 두 번째 전쟁의 참혹한 결과가 담담한 어조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사로잡혔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면서 하나님의 법궤를 내버렸습니다. 이 법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영원한 언약의 상징이며 하나님 임재의 상징입니다. 또 하나의 비참한 결과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제물을 모욕했던 두 제사장의 죽음은 당연한 결과이면서, 이스라엘 역사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전쟁에 능하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도 하지만, 패배를 주기도 하십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출세나 성공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면 실패하게 하신 것입니다. 내 유익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 뜻을 내려놓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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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3-02)


사적인 감정을 버리면 살아나는 사명

사무엘상 3장 11-21절


‘설교자(說敎者)’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달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설교자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뉴로 설교를 준비합니다. 이런 것을 비유하면, 어머니가 음식을 준비할 때, 설탕을 많이 집어넣은 음식과 같습니다. 음식은 단맛에 맛있게 먹지만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많아집니다. 설교자가 사람들의 듣지 못은 설교만 전하면 믿음은 연약하지고 영적인 질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진정한 사명자는 사적인 감정에 메이지 않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의 가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어린 사무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최고 영적 지도자이고 자신의 스승인 엘리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히 임할 것을 알립니다. 힘들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갑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은 제사장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오늘날 사명자들이 어떤 감당하는 자세로 나가야 합니까?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내용(10-14)

사람이 눈을 감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귀를 막으면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닫아버리면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눈과 귀를 막고 마음을 닫아버린 사람들을 보면 안타 깝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서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열어서 계시를 들어야 합니다.

 

10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11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2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13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10-14)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은 완악한 시대를 기쁘게 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불순종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듣고 그대로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엘리의 집에 임할 심판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어린 사무엘이 처음으로 들어야할 하나님의 음성은 자신을 양육해준 엘리 제사장의 몰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엘리의 집에 관한 말씀하셨던 모든 것을 다 이루시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저주를 자청하는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엘리 역시 경고를 듣고서도 자기 아들들의 악행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14)고 결정하셨습니다. 엘리의 집은 어떤 것으로도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려도, 소제를 드려도 결코 죄사함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엘리 아들들은 배교 죄와 다름없는 죄였습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습니다. 다시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돌이킬 수 없고 용서의 길을 넘어서버린 것입니다.

 

삶에 있어 습관적인 악행 있다면 그곳으로부터 과감히 돌아서길 바랍니다. 뼈를 깎는 아픔이 동반해도 죄악의 행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기 시키면 멸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사무엘의 태도(15-18)

하나님의 말씀은 가감 없이 전해야 하며,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은 회개와 순종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부모이자 스승에게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15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16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이르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17이르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8사무엘이 그것을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15-18)

 

사무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때에 나이가 약 12살 정도 추정됩니다. 약 10년 동안 여호와의 집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가르쳐준 스승인 엘리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뜻을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그 심판의 말씀을 엘리에게 전하기가 상당히 어렸습니다. 매우 망설이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머뭇거리자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지 말고 말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사무엘은 선지자적 소명으로 모든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하게 그대로 전해 주었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든 거부하지 않고 듣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합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의 실수는 하나님께 회개와 금식으로 나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히스기야처럼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였으면 그의 가정은 회복이 되었을 것입니다(열왕기하 20:2-3).

 

성도들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질책과 심판 메시지 앞에 겸손히 회개하며 죄의 길에서 떠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도들은 자신들이 듣기 좋은 설교만 들으려고 합니다. 목회자로부터 나오는 싫은 소리는 막으려고 합니다.

목회자들은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거북스런 말을 전하지 않습니다. 설교 속에서 ‘성공학’이나 ‘행복학’들을 풍성히 전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어떻게 성공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기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잠시 아픔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 아픔을 전하지 않고 성공하라고 말합니다. 점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사라져 갑니다. 말씀은 점점 기갈(飢渴) 되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명인은 인간의 이해관계나 육정을 초월해서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도들도 살고 교회에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죄와 심판에 대한 지적을 분명하게 경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설교자가 되려면,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실 방법은 모두 동원에 찾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그리고 성경에 대한 자료들을 검토해야 합니다. 선명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대상에 관계없이 분명하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듣기 좋은 말만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죽이는 일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전하는 것은 그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 질병에 걸려 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를 정확히 알고 그대로 전하는 사명자들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이상 중에 들은 것을 말하는 사무엘(19-21)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말씀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무익하게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 뜻을 성취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사무엘이 점점 자라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19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20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21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19-21)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성장하면서 함께 하시고, 그의 말씀의 능력이 단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임으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무엘이 전한 말씀이 권능 있게 하시고, 온 이스라엘 앞에 그를 권위 있는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사무엘이 전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의 동행’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전하는 말씀은 누구도 의심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렸던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사무엘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어두웠던 시대에 말씀이 빛이 서서히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꽉 막혔던 곳에 숨통이 트인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의 참된 권위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로부터 나옵니다. 성도는 살아 있는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며 말씀에 지배받는 삶을 살아야 하고, 말씀 사역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참다운 설교자로 믿고 따릅니다. 그 설교자는 사무엘처럼 국민과 지역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리고 국가를 변화시켜 하나님을 축복을 받는 나라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를 위한 기도가 강력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통해 그가 선지자로서의 소명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실 것이며, 그의 사역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이 사건은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나타냅니다. 결국,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에 기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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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3-01)


성전에서 성장해 가는 사무엘

사무엘상 3장 1-10절


 

다른 사람에게 열심히 말하는데, 들어야할 사람이 듣지 않고 다른 행동하면 말하는 사람은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다시는 그 사람에게 어떤 말도 싶지 않을 것입니다. 사사기의 특징은 하나님의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없으니 결국에 계시와 말씀 그리고 환상도 없었습니다. 사사시대를 ‘영적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활동하기 전인 엘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가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찾지 못하고 고통하고 괴로운 장면을 봅니다.

 

  • 당시 이스라엘 상황은 영적인 지도자 대제사장 엘리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들을 만큼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여 바른 훈육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매우 혹독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어두운 시대에 사무엘(1-3)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십니다. 그 사람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비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1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1-3)

 

이제 초점은 이스라엘 전체에서 사무엘 개인에게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어린 시절에 이스라엘의 영적인 시대 배경을 설명합니다. 이 시대는 여호와의 말씀이 드물었고, 환상을 통한 여호와의 계시도 거의 나타나지 않은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제시해 줄 영적 지도자도 없었습니다. 종교적으로 타락하고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방황하던 시대였습니다.

 

사무엘서를 기록한 분은 이 어두운 시대를 엘리 제사장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엘리는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보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성전에서 기도하는 한나를 술취한 여인으로 알아보지 못하거나, 자식이며 제사장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잘못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등 그의 영적인 눈이 어두운 것을 상징으로 설명합니다. 일상적인 표현인 것 같지만, 엘리의 모습을 사역하는 모습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영적 나태를 표현하기 위해 자기의 처소에서 누어 자고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이 없이,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을 부추긴 것과 같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편한 대로 방탕한 삶을 살아갑니다.

 

반면에, 어두움 속에서도 영적인 새싹이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어린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등불이 밝게 켜져 있는 여호와의 전, 즉 성막에서 불침번을 서면서 성전 안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성막에서 밝은 등불 아래 있던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어두운 가정에서 육신의 편안하게 쉬고 있던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부름 받는 사무엘(4-7)

항상 하나님의 부르심에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역사를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영적인 눈과 귀가 밝아야 하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도 반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4-7)

 

다시 말하지만, 어두워진 엘리의 눈만큼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감각은 어둡던 시대입니다. 어린 사무엘은 어두운 제사장이지만 엘리를 하나님의 종으로서 섬기고 있었습니다. 또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성막 안에 자고 있었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마음으로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계시가 없던 시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을 직접 찾아와 부르신 것입니다. 항상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름에 즉각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달려갑니다. 그는 아직까지 한 번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었기 때문에 대제사장 엘리가 부른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즉시 그는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무엘을 보고 엘리는 부르지 않았으니 가서 가라고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지 않은 시대에 사무엘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계속해 부르십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7)고 소개합니다. 정확히 하나님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부르십니다.

 

이 시대는 사무엘과 같은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도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세상의 소리를 듣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세상의 소음이나 잡음 정도로 생각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은 세상적인 강연이나 강의를 들을 기회가 많습니다. 그런 연장선(延長線) 상에서 설교도 강의나 강연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것을 듣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해야만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원한다면 예수님처럼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길 바랍니다. 사역에 바쁜 가운데서도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누가복음 5:1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한 사람은 늘 말씀에 귀를 기울이므로 말씀을 놓치지 않고 잘 듣게 됩니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말씀이 들려지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으며 지루하게 생각되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들어야만 하나님께서 이루실 장차 일에 비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승 엘리의 조언(8-9)

‘듣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큰일을 행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8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8-9)

 

똑같은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된 후에 엘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엘리는 사무엘에게 자기가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 주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준비를 하면서 두근거리면서 침대에 누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또 다시 사무엘에게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십니다. 어린 사무엘에는 즉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10)라고 대답합니다.

이사야에게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이사야 6:8)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성도들은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할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말씀에 들을 준비(stand by)되어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은 시끄럽고 복잡한 곳이 아닙니다. 매우 고독할 정도로 조용한 곳입니다. 현대인들은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일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이러한 코스를 거치도록 합니다. 모세와 세례 요한의 광야와 같은 조용한 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지나고 있다면 감사하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 행하실 비밀을 다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말씀을 들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조용하고 한적한 다락방과 같은 곳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놀라운 축복의 비밀을 말씀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 속에서 비전을 품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놀라운 큰 사역을 이루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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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2-03)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

사무엘상 2장 22-36절


 

요즘 자동차를 아주 잘 만들고 도로도 매우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좋은 승용차와 좋은 길에서 제동장치가 없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그것은 사고를 목표로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고 나기 전까지는 즐거움을 느낄지 모르지만, 사고 순간부터는 고통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수많은 쾌락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거룩함을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영적 스승을 통한 통제가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실수가 있는데도 책망해줄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신실하지 못함과 그로 인해 그 집안의 내려진 저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의 악행과 이를 방관한 그의 잘못을 보시고, 무명의 선지자를 엘리에게 보내, 두 아들이 죽고 가문은 멸망할 것이라고 엄히 경고하십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우주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엘리의 집에 대한 심판은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악행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유기(22-25)

자녀를 바르게 키우려면 때로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합니다. 부모들이 도덕적인 바른 교육을 할 때 제대로 교육하지 않으면 자녀들은 제대로 선악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실수를 제어할 수 없으면 그 때부터 자녀에게는 방치의 재앙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는 악행을 행하는 사람들을 유기해서 방치해 버립니다.

 

22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23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25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22-25)

 

엘리 제사장이 그의 아들들이 성전에서 부도덕한 행동을 하고 있음을 듣고 그들에게 경고하지만, 그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엘리는 아들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들을 중재하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경고를 전달합니다.

 

(1) 아들들의 죄(22)

 

엘리에 대한 소개가 시작됩니다. 그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나이가 93세였으므로, 이 당시는 적게는 잡아도 80세는 넘는 나이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의 나이를 언급한 것은 그가 나이가 많아서 아들들을 험하게 훈육하고 징계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엘리는 두 아들이 행한 일, 즉 악한 행동에 곤한 소문이 온 이스라엘에 퍼졌습니다. 결국 엘리의 귀에도 소문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 두 아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제물을 강탈한 것도 부족하여, 성전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에게까지 간음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여인들과 간통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의하고 경고했던 이방 종교들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의 죄가 점점 심각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은 분명히 간음죄에 해당합니다. 간음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심각한 범죄였습니다. 이런 범죄를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엄격한 거룩성이 요구되는 제사장들이 공공연하게 저질렀다는 것은, 이들의 타락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과, 이러한 모습은 당시 사사기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2) 엘리의 책망(23-25)

 

늙은 엘리 제사장은 아들들의 간음 소식을 듣고 엄히 책망하였지만, 아들들은 무시합니다. 이런 완악한 아들들은 아비의 질책을 들릴 리 없습니다. 엘리는 그들이 어렸을 때 제대로 영적인 교육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녀들을 귀하게 여겨 바른 교육을 제대로 하질 못했습니다(26).

 

엘리의 권고에도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께 대한 권위에 대해 두려움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의 질책이라고 들릴 리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범죄하고 게으르면 자신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쳐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헤이로까지 이어집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영적인 모습에 일반 성도들에게 보여 주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더 성숙해야 합니다.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살아갑니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명자가 되길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저주는 자신을 바르게 인도해 줄 사람이 없을 때입니다. 이렇게 망령된 자녀들을 성경에서는

 

18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명기 21:18-21)

 

망령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 안에 악인들을 포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권고하신 것입니다. 더 나가서 악인들이 형통하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보고 답습합니다. 아주 망령된 행동하는 자녀들에게는 단호하고 따끔한 징계의 교육이 필요합니다.

 

여호와의 은총을 받은 사무엘(26)

세상의 법칙은 수백만 어리석은 사람들보다 깨어있는 한 사람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져 갑니다. 그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줍니다.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서 있는 곳에 사무엘처럼 희망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6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26)

 

이 말씀은 사무엘의 삶을 단편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유능한 지도자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은 결과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면 상처만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사람들이 존경받습니다. 축복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물론이고, 제사를 드리러 온 백성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과 백성을 기쁘게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성경에서는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잠언 29:2)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분노케 하는 사람입니까? 사무엘처럼 희망을 주는 사람입니까?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성장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성장했습니다. 사무엘의 성장은 예수님의 성장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장에 대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복음 2:52)고 소개합니다. 사무엘은 엘리의 아들들과는 달리 하나님과 사람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 때문에 잃었던 이스라엘의 희망을 다시 찾은 것입니다.

 

세상에 죄악들 앞에서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범죄하기 때문에 자신도 그럴 수 있다 라는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할지라도 자신만은 거룩해야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의 태도이겠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어두워져 갈지라도 거룩함이 사라진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씨를 준비하신 것입니다(이사야 6:13).

 

심판을 선고하는 하나님(27-36)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지 않는가?’라고 스스로 위로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범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범죄한 것이 아니라 피 흘리기까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27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28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제사장으로 삼아 그가 내 제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29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30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31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32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33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34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35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36그리고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이르되 청하노니 내게 제사장의 직분 하나를 맡겨 내게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니라(27-36)

 

하나님께서는 엘리는 아들들의 죄악의 소식을 듣고 엄히 책망하였지만 자식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이렇게 죄악으로 물어들어 회개치 않는 엘리의 가정을 하나님께서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회개하고 순종치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멸망당할 때까지 방치해 버리십니다. 이 유기는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가정에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엘리의 집안에 대해 그 동안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영원토록 축복된 제사장의 집안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 남용으로 쓰여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벌이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 축복의 변경입니다(30). 가정에 재앙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 증거로 자손들이 젊어 죽게 될 것이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루아침에 죽게 될 것을 예견합니다. 마지막으로 사역자를 변경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니깐 그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것입니다. 사명을 잃은 엘리 제사장 가족은 구걸이나 할 정도로 어렵게 살아가도록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축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맡겨진 사명을 성경에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더 많이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더욱 풍성한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인간의 감정으로 생각하거나 사역하지 않길 바랍니다. 제사장 엘리의 가정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주는 통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니깐, 빼앗김을 당하고 축복도 사라집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라면 피 흘리기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내리는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성장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즐거움을 압니다. 그런 기쁨 가운데 사역을 감당함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충성스럽게 일하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사람들의 행동을 달아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성스럽게 일하는 사람들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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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2-02)


엘리의 아들, 한나의 아들

사무엘상 2장 11-21절


 

하나님께서는 만복의 근원이시며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를 드리느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 한 사람에게 행해진 올바른 교육은 평생을 좌우합니다. 본문에는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제물을 탈취하는 등 불의를 행하지만, 사무엘은 성전에 맡겨진 후 여호와 앞에서 섬기며 자라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녀들을 교육해야 합니까?

 

여호와 앞에서 자라는 사무엘(11)

지도자는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녀들을 훌륭한 지도자가 되길 원하신다면 사무엘처럼 믿음으로 양육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으로 성장하도록 일찍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 중에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은 자녀들이 나오지 않도록 다시 기도하고, 바르게 믿음으로 양육하길 바랍니다.

 

11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11)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확신합니다. 한나의 부부는 하나님과의 약속대로 사무엘이 젖을 떼자, 사무엘을 성전에서 성장하도록 성전에 위탁한 후에 기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맡아 성소에서 믿음으로 잘 양육합니다. 그리고 한나의 가정을 향해 사무엘을 대신할 자녀를 주시기를 축복하기도 합니다. 사무엘은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 앞에서 자랐습니다. 부모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여 사무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한나의 기도가 끝난 후에 엘가나가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장 24절에서는 엘가나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한나가 사무엘을 실로에 엘리에게로 데려갔을 때, 엘가나도 동행합니다. 한나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그의 이름만 언급되었습니다. 돌아가는 장면에서 엘가나를 같이 언급한 것입니다.

본 절은 집으로 돌아가는 사무엘의 아버지와 엘리에게 남겨진 사을 사무엘의 대조되면서 이제 사무엘은 엘리 아들로 지내게 됨을 암시합니다. 그곳에서 사무엘은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사무엘이 실제로 제사장직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어렸습니다. 레위인은 25세, 므라리와 고핫 자손들은 30세가 되어야 공식적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직도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이기에서는 사무엘이 엘리의 아들로 여겨져 제사장이 되기 위한 겸습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자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엘리 아들들의 악한 행실(12-17)

자녀들의 영적인 실수를 바르게 훈계해야 합니다. 영적인 교육은 철저하게 시켜야 합니다. 일반적인 실수는 성장해 가면서 할 수 있겠지만, 영적인 부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장난처럼 교육하면 결국은 자녀를 방칩니다. 매를 아끼는 것만이 자녀가 바르게 성장한 것은 아닙니다. 징계할 때 제대로 징계하지 않으니깐 홉니와 비느하스가 나온 것입니다. 나중에 성장해서 아버지 엘리의 말도 듣지도 않습니다(2:25). 올바른 교육만이 자녀를 훌륭한 일꾼으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12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13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15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17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12-17)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경외하지도 않았고, 여호와의 제사를 쉽게 생각하고 멸시했습니다. 제사장으로서 백성의 아픔에 참여하여 하늘 위로를 전하지 않았고, 자기 배를 채우고 자기 취향을 만족시키고 자기 야망을 이루는 데 만 급급했습니다.

 

(1) 여호와를 알지 못한 엘리 아들들(12)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고’(11) 있을 때, 엘리의 두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깐 권리를 남용하여 자기가 좋은 대로 행동해 버립니다. 그 행실에 대해 성경은 나쁜 행동을 한 ‘불량자(不良者)’이라고 소개합니다.

제사장 엘리의 아들을 소개하는데, 정말 이상하게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12)라고 소개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엘리가 제사장으로 제사를 집례하는 모습이나 종교적인 행위를 보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행실이 ‘나쁜 사람들(베네 벨리야알)’이라고 평가합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지적한 사람들은 우상 숭배를 선동하는 사람들(신 13:14), 기브아의 불량자들(삿 19:22), 사울의 왕권을 인전하지 않는 자들(삼상 10:27), 다윗의 요청을 거부한 나발(삼상 25:17), 이세벨의 사주를 받아 나봇을 거짓으로 고소한 자들(왕상 20:10, 혹은 여로보암을 좇으며 르호보암을 대적한 자들(대하 13:7)이 ‘쓸모없는 사람들’이라 불렸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여호와를 가장 잘 알아야 할 제사장들이면서도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와 함께 있으며 자라나는 사무엘과 대조됩니다(21).

 

(2) 성소에서 행하는 죄(13-16)

 

엘리의 두 아들의 불량한 행동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제사하려고 고기를 삶고 있으면 사환들을 보냈는데, 그 사환 손에는 세 살 갈고리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환은 고기를 삶고 있는 냄비나 솥 속으로 세 살 갈고리를 찍어 넣어서 그 갈고리에 걸려 올라오는 모든 것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갔습니다(13-14). 또 사람들이 기름을 태우기도 전에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장이 생고기를 원한다고 말하며 고기를 가져갔는데, 혹 사람들이 반대하면 강제로 가져가겠다고 위협하기를 일삼았습니다(15-16). 그들은 배교자와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거역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동합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 살을 찌우는 무정한 사람이 됩니다.

이곳에서 말한 ‘사환’은 원문에 ‘나아르’라고 나타납니다. 이들은 제사장의 아이였습니다(13,15). 한편 이러한 제사장의 악행을 13절 서두에서 ‘관습’이라고 표현합니다. ‘관습’이란 표현은 제사장들의 행위가 일시작인 것이 아니며, 법으로 생각할 만큼 당연시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3) 여호와의 제물을 멸시(17)

 

엘리의 두 아들의 행동을 단편적으로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17)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2:11-21에 세 아이가 등장하는데, 아이 사무엘(11,21)과 아이 사환(13,15) 그리고 아이 제사장(17)입니다.

다양한 아이들 가운데 아이 사무엘의 뛰어남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특히 제사장들을 아이라고 칭한 것은 그들의 미성숙함을 암시하는 한편 또 다른 아이인 사무엘과 그들을 대조하게 만듭니다. 이들의 죄는 여호와의 제물을 멸시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죄를 짓는 것보다 여호와께 죄를 짓는 것이 더 큰 죄입니다(25). 성소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의 죄에 영향을 받아 제사장의 악행을 가로막지 않고 오히려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나의 헌신과 여호와의 축복(18-21)

많은 성도들은 성공을 위해 뜁니다. 그러다 실수하는 것은 자녀들의 신앙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면, 자녀들에게 실패를 치닫게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에 대한 것보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도록 해야합니다. 직분을 이용해서 탐욕을 채우는 자가 아니라 섬기고 경배하는 직분자가 되어야 합니다.

 

18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19그의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20엘리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매 21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18-21)

 

제사장 엘리는 사무엘을 맡아 성소에서 믿음으로 잘 양육하고, 한나의 믿음을 보고서 이 가정에 사무엘을 대신할 자녀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1) 여호와를 섬기는 사무엘(18)

 

이어지는 사무엘과 그 부모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들이 엘리의 가정과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는지 잘 보여줍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고 살았지만, 사무엘이 믿음으로 성장하고 섬기는 모습을 다음과 같습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18)라고 말합니다. 제사장 엘리의 말을 따라 어릴 때부터 세마포 에봇을 입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세마포 에봇이나 베 에봇(삼하 6:14)은 성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기본 복장입니다.

3살(한국나이로 4살)이면 부모를 떨어지지 않으려는 시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에는 떨어져 여호와 앞에 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젖먹이 시절부터 사무엘을 신앙교육을 바르게 시켜왔기 때문입니다.

 

(2) 한나의 축복(19)

 

해마다 한나는 자기 남편과 함께 매년제를 드리러 실로에 올라올 때 미리 지어둔 작은 겉옷을 사무엘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대제사장의 겉옷은 에봇 밑에 입는 옷으로서 청색이며 소매 없는 통옷으로 만들어졌습니다(출 39:22). 한나가 매년 어린 사무엘을 위해 만든 작은 겉옷 역시 이와 비슷한 형태일 것입니다.

 

(3) 엘리의 축복(20-21a)

 

매년마다 제사를 지내려 실로로 온 엘가나와 한나는 사무엘의 작은 겉옷을 지어서 그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엘리 제사장은 영적으로 어두운 가운데서도 사무엘의 부모에게 축복을 합니다. “엘리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매 21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20-21)

 

(4) 자라나는 사무엘(21b)

 

사무엘은 부모의 관심사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었듯이, 사무엘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영적으로 어두운 제사장이라고 한단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합니다. 한나의 믿음이 대단합니다. 부족한 종이 하는 축복이지만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큰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신 일꾼은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들어내려는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한나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부족한 제사장의 축복이지만 의심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드렸을 때, 선포된 축복처럼 그대로 한나의 가정에 임했던 것입니다. 이런 한나의 믿음 가운데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종의 미덕을 배웠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신앙 생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신앙생활을 하면 당연히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나와 같이 신실한 성도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지역사회를 맡겨 주실 것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아름답게 지도함으로 훌륭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받은 자녀들을 영적으로 바르게 가르쳐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의무를 소월하게 되면, 자녀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 2의 홉니와 비느하스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와 말씀으로 자녀들을 잘 성장시키면, 사무엘과 같이 순종하는 일군이요,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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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2-01)


한나의 찬양을 받은 하나님

사무엘상 2장 1-10절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9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생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하고 살았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 “어머니가 가르쳐준 신앙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다”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어머니의 기도에 대해 “어머니의 기도를 나는 기억합니다. 그 기도는 항상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내 평생 그 기도는 나에게 꼭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소개합니다. 그의 삶의 원동력은 어머니의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인물 뒤에는 반드시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 한나는 불임의 고통에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 응답 받아서 사무엘을 출산합니다. 아이 사무엘을 젖 떼고 난 후에, 그를 약속대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들을 드린 후에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찬양하는 한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찬양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녀가 발견한 하나님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찬양받으실 여호와(1-3)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어떤 것보다 비교할 대상이 없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든든하게 의지할 반석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오판한 오만한 자의 말과 악한 행동을 다 알고 그 무게를 달아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이유는 여호와를 대신할 것을 너무 많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한나가 기도하여 이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2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3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1-3)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에는 고통 속에서 울며 기도한 한나입니다. 어렵게 아들 사무엘을 얻었지만, 이제는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삶속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가득답겨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감동적으로 찬양합니다.

 

(1) 찬양(1)

 

한나는 불임으로 암울했던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녀에게 이제 아쉬운 탄식이 아니라 의기양양한 기쁨의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어렵게 얻는 사무엘을 갓 젖을 땐 후 서원대로 하나님께 성전에 드리고, 그녀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내용상 기도라기보다는 찬양 노래의 성격에 가깝습니다.

 

한나는 먼저 여호와로 인해 너무도 즐겁다고 고백합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1) 그 이유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자신의 뿔이 높아졌다고 찬양합니다. ‘뿔’은 짐승의 머리에서 나는 것이지만, 상징적으로 위엄과 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뿔이 높아졌다는 것은 머리를 높이 쳐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나는 불임으로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아이를 못난 저주받은 여인이라고 수군거렸고 멸시받았습니다. 아무런 대항을 하지 못하고 항상 움츠러들어야 했고 죄인처럼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남편 둘째 부인인 브닌나가 분노하는 말에 아무 대답도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기도조차도 당당하게 하지 못하고 중얼거리듯이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연약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이제 태의 문을 열어주심으로 당당하게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비웃던 자들에게 크게 비웃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나의 인생에 자존심을 찾아주셨습니다.

 

(2) 여호와의 속성(2-3)

 

한나는 결코 개인적인 복수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를 비교할 수 없는 분임을 강조하는데, “여호와 같은 분은 없다”(2)고 반복하면서, 오직 여호와만 거룩하시고 여호와만 살아계신 신이시며 반석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여호와만 신이라고 고백하는 한나의 신앙은, 당시 사사시대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가나안에 있는 모든 이방신들을 섬기는 신앙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고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을 기대하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기꺼이 그들을 위해 역사를 만들어내는 분이심을 확인하였기에 더 바랄 것 없는 사람처럼 찬양합니다.

 

한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이 아니라 여호와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고통을 헤아리는 분임을 입증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하나님의 없음’이라고 조롱하던 자들의 입을 막아주신 것입니다. 한나는 자신처럼 미약한 여인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 것처럼,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들어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4-8)

자신을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스스로 대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오만한 사람의 행동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시고 그들을 모두 다 아십니다. 강한 용사처럼 보이는 사람도 꺾어버리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4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5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6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3-8)

 

감사의 기쁨의 고백에 이어 한나는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역전의 기준을 사회적인 지위나 물질만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인 혁명과는 다릅니다. 엘리의 가문처럼 제사장이지만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되심을 부인하였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무시하고 학대하는 오만한 자를 향한 역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며, 사람을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

 

(1) 반전의 하나님(4-5)

 

한나는 운명의 반전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모든 것을 꿰뚫어버리던 뭉족하던 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고, 주리던 자들은 배불리 먹습니다.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가 일곱을 낳고, 많은 아들을 두었던 여자는 쇠약해집니다. 여기서 일곱은 완전수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가 일곱 아들, 즉 자신과 가족이 충분하다고 생각할 만큼 많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이 없던 한나가 사무엘 외에도 3남 2녀를 낳았습니다(2:21). 모든 일을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의 일생에 반전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자가 자랑하지 못하며, 약한 자라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주관자이신 하나님(6-7)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흥망성쇠가 다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죽음과 삶, 가난과 부, 비천과 영화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질 것입니다(신 32:39). “스올(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기서 부활 사상을 찾는 것은 무리입니다. 단지 생명과 사망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죽음 이후의 상태와 세계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 스올은 단지 무덤을 가리키거나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3) 구원자이신 하나님(8)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땅의 기둥을 세워 세상을 보존하시고 운영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빈궁한 자를 비천한 처지에서부터 구원하여 귀족이 되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실 수 있습니다. 기둥을 뜻하는 ‘마추크’는 여기와 14:5(믹마스 앞의 바위산)에서만 나타납니다. 기둥은 땅덩이를 받치는 물리적 개념이면서, 세상이 올바르게 운영되도록 받쳐주는 원리와 질서를 가리킵니다.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9-10)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신 세대는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무제를 말하는 것인 양 거만한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힘 있는 자들이 만든 질서에 순응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만 기대하는 작고 연약한 백성을 위해 역사를 만드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9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9-10)

 

한나의 하나님께서는 땅의 시둥들 위에 세계를 세우신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한나는 그분이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시고 악인들의 발을 잠잠하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1) 성도와 악인(9)

 

“거룩한 자들”은 ‘하시드’의 복수형으로 문자적으로는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며, 따라서 마땅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기에 “거룩한 자들”로 부릅니다. 이들의 반대 개념은 ‘악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의 발, 즉 거룩한 자의 삶과 행실을 지키시지만, 악인들을 어두운 곳에 가두고 벌하십니다. 흑암 속에서 침묵한다는 말은 죽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기부할 수 없습니다.

 

(2) 대적자와 기름부음 받은 자(10)

 

여기서는 한나의 기도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이스라엘 민족, 더 나아가 인류 역사와 관련을 맺도록 만듭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에서 ‘대적하는 자’(마리브)는 하나님 사역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난하고 반대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대적자들은 마치 용사의 강한 활이 부서지는 것처럼(4) 산산이 부서질 것입니다.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혀서 한나의 마음속에 천둥소리가 나게 하였는데(1:6),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적하는 자를 천둥소리로 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땅 끝까지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땅 끝까지 미치는 심판은 종말에 대한 예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왕에게는 힘을 주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나, 한나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왕에 관해 말합니다. 이 왕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아(마시아흐)입니다. 1절에서 한나는 자신의 뿔을 이야기했으나, 이제 마지막 절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의 뿔에 관해 예언합니다. 한나의 뿔을 높이신 것은 사무엘의 탄생을 가리키며, 사무엘의 탄생은 그가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울 자, 곧 메시아의 뿔을 높이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뜻에 따라 메시아가 승리할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세상의 환경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과 하나님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환경을 적응해 나가려고 할 때는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면 모든 것을 승리케 해주십니다. 한나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환경을 보면서 한탄한 것이 압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고 삶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도 한나처럼 기도하고 응답받아서 축복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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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10-02)


상실된 믿음을 회복하는 에스라

에스라 10장 9-44절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조금만 공부하지 않으면 꾸짖곤 합니다. 그러다 고향집에서 30-40년 전 자신의 성적표를 발견하게 되면, 아이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까요? “보아라! 나는 이렇게 열심히 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본이 되어야 하며, 그로 인해 전체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은 성전 앞 광장에 모여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에스라의 제안을 따를 것을 다짐합니다. 그렇지만 그때가 우리이고 관련된 사람의 숫자가 많음을 감안하여 시간을 두고 시행할 것을 에스라에게 제안합니다. 에스라는 회중의 제안에 따라 책임자를 선임하여 조사에 착수합니다.

 

에스라의 권고와 조치(9-17)

참된 부흥은 죄에 대한 각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현신된 신앙은 공동체 전체로 확산됩니다. 회개의 영께서 새로운 마음을 주셨고 구체적인 죄악으로부터 돌아서기 시작합니다. 죄 고백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고백된 죄악은 순종의 실제적인 결과로 나타나야 합니다.

 

9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이 삼 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아홉째 달 이십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 비 때문에 떨고 있더니 10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11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12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13그러나 백성이 많고 또 큰 비가 내리는 때니 능히 밖에 서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이 일로 크게 범죄하였은즉 하루 이틀에 할 일이 아니오니 14이제 온 회중을 위하여 우리의 방백들을 세우고 우리 모든 성읍에 이방 여자에게 장가든 자는 다 기한에 각 고을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오게 하여 이 일로 인한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나 15오직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그들을 돕더라 16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그대로 한지라 제사장 에스라가 그 종족을 따라 각각 지명된 족장들 몇 사람을 선임하고 열째 달 초하루에 앉아 그 일을 조사하여 17첫째 달 초하루에 이르러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의 일 조사하기를 마치니라(9-17)

 

마지막으로 에스라의 업적을 살펴봅시다.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통혼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에 불순종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이 문제들이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나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다 잘못될 수 있습니다. 성전을 세워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이스라엘에게는 이 범죄 사실을 매우 단호하게 조치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수고하였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때 잠시 회개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통혼을 공동체적인 죄악으로 규정하고 끊어버릴 것을 공적으로 선포했습니다.

 

⑴ 유다와 베냐민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임(9)

 

모든 백성들이 에스라의 요청에 따라 3일 안에 예루살렘 광장에 모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중요한 모임이 이루어지는 장소였고, 성전 동편에 위치한 광장은 수천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의 지시가 공포된 지 3일 후 주전 457년 11-12월 무렵)에 백성들이 성전 앞 광장에 앉았을 때, 큰 비가 내렸습니다. 우기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었지만(13, ‘큰 비가 내리는 때’), 그 자리에 모인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생각하여 두려워합니다(참조, 삼상 12:17-18).

 

⑵ 에스라의 권고와 조치(10-17)

 

에스라는 귀환민들이 이방 여인과의 통혼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조상들이 지은 죄에 또 하나의 죄를 더하였다고 말합니다(10). 이전에 조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제 유다 공동체가 또다시 그런 위기를 자초하였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속히 그 지방 사람들 및 이방 여인들과 단절할 것을 촉구합니다(11). 에스라가 의도한 바는 거룩한 백성으로서 구별된 모습과 율법에 충실한 공동체의 삶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큰 소리로 에스라의 제안을 수락합니다(12). ‘큰 소리로 대답했다’는 것은 이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음을 의미합니다.

 

에스라의 결정을 곧바로 이행하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①이방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고, ②우기로 인한 거친 날씨 때문이었습니다(13). 이로 인해 회중은 에스라에게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14). 그것은 방백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당사자들로 하여금 자진해서 성읍 위원회에 출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방백들이 성읍 장로들 및 재판장과 함께 예루살렘 법정에서 문제를 처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비록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각 지역의 장로들과 재판관들이 상황을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합리적인 제안처럼 보입니다.

그때 ‘이 일’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는데(15), 그들의 이름은 요나단, 야스야, 므술람, 삽브대로 소개됩니다(므술람은 19절에 이방 여인과 통혼한 사람으로 나온다). 이들이 반대한 ‘이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방인 아내를 내보내는 일 자체로 보는 것이고, 둘째는 회중이 제안한 13-14절의 수정안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곧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해결하자는 회중의 제안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속하게 이 일을 처리하자는 주장입니다. 주류 학자들의 견해는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합니다. ‘사로잡힌 자들의 자손’은 시간을 두고 하자는 회중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구제적인 시행에 옮기기로 합니다(16a). 에스라는 이 일을 위해 족장들 몇 사람을 선임하여 책임을 맡깁니다(16b).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들에 대한 조사는 10월 1일에 시작되고 3개월 동안 진행되어 1월 1일에 마치게 됩니다(17). 1년 전 바로 이날은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위해 아하와 강가에 있았던 날입니다(스7:9; 8:15).

 

이방인 아내와 자녀들을 끊으라는 명령에 백성들은 대답합니다. 하지만 신중히 처리하기 위해 이를 맡아 처리할 방백을 세우고 정당한 재판을 거쳐서 결정하게 해달라고 제안합니다. 애매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면서도 철저하게 이행하려고 제안한 듯합니다.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불과 4명에 불과하지만, 공동체 전체가 회개하고 죄를 끊어도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반대였기에, 이것은 소신이 아니라 의와 거룩에 대한 완강한 저항입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한 명단(18-43)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임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으로 믿는 자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드러내고 있는지를 지켜봐야 합니다. 공평과 정의를 구현하려면 리더십의 의지와 공동체의 합의가 필요합니다.

 

18제사장의 무리 중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는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와 엘리에셀과 야립과 그달랴라 19그들이 다 손을 잡아 맹세하여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하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렸으며 20또 임멜 자손 중에서는 하나니와 스바댜요 21하림 자손 중에서는 마아세야와 엘리야와 스마야와 여히엘과 웃시야요 22바스훌 자손 중에서는 엘료에내와 마아세야와 이스마엘과 느다넬과 요사밧과 엘라사였더라 23레위 사람 중에서는 요사밧과 시므이와 글라야라 하는 글리다와 브다히야와 유다와 엘리에셀이었더라 24노래하는 자 중에서는 엘리아십이요 문지기 중에서는 살룸과 델렘과 우리였더라 25이스라엘 중에서는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라먀와 잇시야와 말기야와 미야민과 엘르아살과 말기야와 브나야요 26엘람 자손 중에서는 맛다냐와 스가랴와 여히엘과 압디와 여레못과 엘리야요 27삿두 자손 중에서는 엘료에내와 엘리아십과 맛다냐와 여레못과 사밧과 아시사요 28베배 자손 중에서는 여호하난과 하나냐와 삽배와 아들래요 29바니 자손 중에서는 므술람과 말룩과 아다야와 야숩과 스알과 여레못이요 30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앗나와 글랄과 브나야와 마아세야와 맛다냐와 브살렐과 빈누이와 므낫세요 31하림 자손 중에서는 엘리에셀과 잇시야와 말기야와 스마야와 시므온과 32베냐민과 말룩과 스마랴요 33하숨 자손 중에서는 맛드내와 맛닷다와 사밧과 엘리벨렛과 여레매와 므낫세와 시므이요 34바니 자손 중에서는 마아대와 아므람과 우엘과 35브나야와 베드야와 글루히와 36와냐와 므레못과 에랴십과 37맛다냐와 맛드내와 야아수와 38바니와 빈누이와 시므이와 39셀레먀와 나단과 아다야와 40막나드배와 사새와 사래와 41아사렐과 셀레먀와 스마랴와 42살룸과 아마랴와 요셉이요 43느보 자손 중에서는 여이엘과 맛디디야와 사밧과 스비내와 잇도와 요엘과 브나야더라(18-43)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명단은 가장 먼저 제사장의 무리(18-22), 다음으로 레위인과 노래하는 사람들(23-24), 이어서 일반 백성들(25-44) 순으로 제시됩니다.

 

⑴제사장의 무리(18-22)

 

제사장 가운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으로는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 엘리에셀, 야립, 그달랴입니다(18). 예수아 가문은 스룹바벨과 함께 성전 건축을 주도하기도 했는데(스 3:8), 대제사장 가문으로서 본이 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습니다(레 21:13-15). 그렇지만 그들은 죄를 뉘우치고, 모두 이방 아내들을 내보내기로 맹세한 후에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립니다(19). 속건제는‘마알의 범죄’(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한 행동)에 드리는 제사로, 제물은 숫양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레 5:15-6:7).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행동’, 즉 언약을 어기는 행동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이들이 드린 속건제는 백성 전체의 잘못을 위해 드릴 것으로 보입니다. 대제사장 예수아 자손 외에 제사장 가운데 임멜 자손, 하림 자손, 바스홀 자손들도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20-22).

 

⑵ 레위인과 노래하는 사람들(23-24)

 

레위인 가운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들은 요사밧, 시므이, 글리다, 브다히야, 유다, 엘리에셀입니다(23). 그 외에 노래하는 자 중에는 엘리아십, 문지기 중에는 살룸, 델렘, 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23).

 

⑶ 일반 백성들(25-44)

 

일반 백성들 가운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들의 명단은‘이스라엘’이라는 명칭 아래 열 개의 가문으로 나뉘어 소개됩니다(25절의‘이스라엘’은 제사장과 레위인을 제외한 포로 귀환민을 가리킨다). 본문 읽기에 따라서 바니 자손과 느본 자손 사이에 빈누이 자손(38-39)과 자카이 자손(40)을 포함하여 열두 가문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전체 인원은 제사장 17명(혹은 18명), 레위인 6명, 노래하는 자와 문지기 4명, 백성들86명, 도합 113명(혹은 114)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는 것은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가 귀환 공동체에 얼마나 깊숙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 땅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이 귀환민들보다 부요한 삶을 누리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비록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지만, 에스라의 개혁 안에 동의하고 이방인 아내와 이혼에 합의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살고 있는 가족과 결별하도록 하는 것은 지나친 결정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타락한 이방 문화와 우상숭배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던 상황에서 공동체의 정체성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맺는말(44)

교회는 재건과 개혁은 항상 같이 갑니다. 교회가 재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지난번에 겪었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게 됩니다. 재건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재건된 공동체는 상대화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개혁이라고 부릅니다.

 

44이상은 모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라 그 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더라(44)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목록은 맺는말로 종결됩니다. 본문은 그들 가운데 자녀를 낳은 사람들도 있었음을 밝힙니다. 가족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고자 하는 결단의 행동입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과거와 결별합니다. 에스라가 내보낸 이방 여인들과 아이들은 아마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로써 앞에서(3) 선포되었던 계약은 성공적으로 종결되고, 에스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 즉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을 마칩니다. 그렇지만 공동체를 바로 세우기 위한 에스라의 개혁은 멈추지 않고 이후에도 지속됩니다(느헤미야서 8-9장).

 

구약 성경에는 이방인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거나 이방 연인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본문들도 존재합니다(예컨대, 민 12:1;수 2장; 요나서; 룻기). 특히 룻기는 다윗의 모압 여인을 조상으로 두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이방 여인에 대한 에스라서의 입장과 대조됩니다. 룻기와 에스라서는 둘 다 언약 백성의 정체성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여호와께 대한 충성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그렇지만 두 책이 이방인을 수용하는 이슈와 관련하여 표현하는 방식은 상반됩니다. 에스라의 결정은 포로 귀환 후 새롭게 시작된 공동체가 주위 민족들의 영향으로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던 당시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 안에 이방인에 대해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본문들과의 적절한 균현 속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순종은 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심히 가슴 아픈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이방여인과의 결별이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신앙을 회복하고 순결한 신앙의 보존을 위해서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성도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신앙적으로 모든 오염시킬 수 있는 원인에의 접근을 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에게 남아 있는 죄가 공동체에 악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도록,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도 깊이 돌아보아 남김없이 제거합시다.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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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10-01)


이스라엘의 죄의 결과와 회개의 필요성

에스라서 10장 1-8절


 

성도들은 대부분 기도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삶을 돌이키며 회개합니다. 얼마 지나지 못해 제자리로 돌아가 있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말로 중얼거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도의 열매는 첫 열매는 바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 생각과 다르거나 대치된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 안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에스라의 기도에 대해 이제 백성들이 반응합니다. 지금까지 일부 지도자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으면는 공동체 전체가 에스라와 마음을 같이하여 회개 운동에 동참합니다. 이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은 스가냐입니다. 그가 에스라에게 나아와 율법에 따라 이 문제를 처리할 것을 제안합니다. 머스크는 금식하며 증한 후에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불러 모읍니다.

 

에스라의 기도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1-8)

본문은 에스라의 기도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소개합니다. 9장에서 에스라의 회고록(Memoir)이 1인칭으로 기록된 것과 달리 본문은 3인칭으로 서술됩니다. 9장에서는 일부 지도자들만이 이방인들과의 통혼에 대해 문제의식이 있었던 반면(참조. 스 9:1-2), 이제부터는 백성들이 에스라와 마음을 같이하여 회개 운동에 동참합니다. 특별히 이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은 스가냐였습니다. 에스라서 본문은 스가냐의 역할을 특별히 강조하는데, 이것은 9-10장 전체 단락이 그의 제안을 중심으로 짜여 있는 구성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A. 타민족과의 결혼 문제(9:1-2)

  B. 에스라의 공개적 탄식(9:3-4)

   C. 에스라의 기도(9:5-10:1)

     X. 스가냐의 고백과 결단(10:2-4)

   C'. 에스라의 권면(10:5)

  B'. 에스라의 공개적 탄식 (10:6)

A'. 타민족과의 결혼 문제 해결 (10:7-44)

 

스가냐는 그 어떤 일보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선순위를 둔 인물로, 백성들의 범죄로 애통하고 있는 에스라에게 율법에 따라 이 문제를 처리할 것을 제안합니다. 스가냐의 제안을 받아들여 에스라는 제사장 여호하난의 방에 들어가 밤새 금식하며 중보기도를 한 후에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읍니다.

 

에스라의 애통과 스가냐의 제안(1-4)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입니다. 개인의 죄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결단은 단순한 감정에 그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진정한 회복과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1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2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3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4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1-4)

 

본문에서는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그는 이방 아내와 결혼한 백성의 범죄를 슬퍼하고 통곡하며, 백성도 그의 말에 감동하여 회개합니다. 마지막으로, 백성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단하고 모여서 행동하기로 약속합니다.

 

(1) 에스라의 애통과 백성들의 동조(1)

 

에스라는 공개된 장소인 예루살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면서 백성들의 죄를 자복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앞은 예루살렘 성전 바깥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문을 들은 백성들은 남녀와 어린아이까지 성전 앞 바깥뜰에 모입니다. 이들은 귀환 후 시간이 흐르면서(약 80여년 동안) 느슨해진 자신들의 신앙을 재정비하기를 열망하였습니다. 결국 에스라가 했던 ‘설교-기도’(sermon-prayer)가 효력을 발한 것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회개가 불씨가 되어 순식간에 공동체 전체의 회개 운동으로 퍼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이 회개 운동이 결코 강요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에스라의 경건과 헌신이 그 어떤 메시지보다 설득력 있는 설교로 백성들에게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에스라는 행동으로 본을 보이는 지도자였습니다.

 

(2) 스가냐의 제안(2-4)

 

백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불러일으킨 인물은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입니다(2). 스가냐는 엘람 자손으로 소개되는데, 엘람 자손은 1차 귀환에 속했던 가문이었습니다(참조. 스 2:7). 그 후 2차 귀환 때에는 엘람 자손 70명이 에스라와 함께합니다(스 8:7). 엘람 가문 중 6명의 사람들은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로 소개되는데(스 10:26),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이 스가냐의 부친 여히엘입니다(두 인물이 동일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동일인이라면, 스가나는 부친의 잘못까지도 지적한 것이 됩니다. 스가나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적인 관계를 떠나 공동체 전체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스가나는 공동체의 죄와 자신이 속한 가문의 죄를 자기의 죄로 동일시하면서 (2: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에스라에게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2절에서 ‘'하나님께 범죄하다’로 번역한 ‘마알’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 행동을 가리킵니다. 즉, 자신들이 이방 여인과 통혼함으로 언약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스가냐는 어쩌면 지금 이 상황을 아간 한 사람의 죄(‘마알’)로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던 과거의 사건과 연관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한 제안은 율법에 따라 이방인 아내들을 다 내보내기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는 것입니다(3: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행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스가냐가 의미하는 ‘내 주의 교훈’과 ‘하나님의 명령’은 아마 가나안 백성과 통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출 23:32: 신 7:15)뿐만 아니라, 이혼에 대한 규정(신 24:1-4). 그리고 언약 체결에 관한 규정(신 29:10-13)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스가냐는 이방 민족과 통혼하는 것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는 행동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가 에스라에게 ‘언약을 세울 것’을 제안하는 것이나 후에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맹세하게 하는 것’(5)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가냐와 에스라의 생각은 일치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가나는 에스라가 공동체의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도운 훌륭한 조력자입니다(4b: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본문은 에스라의 개혁 운동이 스가냐와 같은 훌륭한 조력자들이 함께 함으로 가능하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백성들의 맹세와 에스라의 공적인 선포(5-8)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며, 실천을 통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신속하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도자는 공동체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하나 되어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5○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6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일어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니라 그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들의 죄를 근심하여 음식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7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에게 공포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8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따라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의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리라 하매(5-8)

 

본문에서는 에스라가 백성에게 이방 아내와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이도록 지시합니다. 백성은 이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기로 결의하고, 각 지역의 지도자들에게 이 결정을 알립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이 결단을 실행하기 위한 절차를 정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 백성들의 맹세(5)

 

에스라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생각한 바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깁니다. 먼저 지도자들의 지원과 백성들의 동의를 얻어 언약을 새롭게 하도록 합니다(5). 5절의 ‘맹세’는 언약의 내용을 확고히 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스가냐와 동일하게 에스라도 이방인과의 통혼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위협하는 심각한 죄로 간주한 것입니다. 스가냐와 에스라가 공히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께 신실치 못한 행동'을 가리키는 ‘마알’로 표현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2,6,10).

 

(2) 에스라의 금식(6)

 

이어서 에스라는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서 홀로 금식하며 중보기도를 드립니다(6). 여호하난을 느헤미야 12:23의 요하난과 동일 인물로 본다면, 그는 대제사장의 아들 혹은 손자입니다(참조, 느 3:1:12:10-11).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개의 방들이 있었고, 그중 일부는 제사장들의 공간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금식하며 중보하는 에스라의 모습은 위기에 빠진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했던 성경의 인물들을 연상케 합니다(출 32:9-14; 렘 14:7-9: 겔 22:30; 암 7:1-6; 롬 9:3).

 

(3) 에스라의 공적인 선포(7-8)

 

에스라는 모든 귀환자들(‘사로 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에게 3일 내에 예루살렘으로 모일 것을 명령하고, 이를 어길 경우 그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고 귀환 공동체에서 축출할 것을 경고합니다(8). 이로써 에스라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총회가 소집됩니다. ‘모임을 소집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공동체로부터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은 에스라가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입니다(참조, 스 7:26). 에스라는 왕의 위임을 받은 페르시아 관료로서 자신이 갖고 있던 법적 권위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참조. 스 7:26). 8b절에서 ‘적하다’로 번역된 ‘하람’은 신명기에서 자주 등장합니다(신 7장: 20:16). 동사 ‘하람’은 거룩한 전쟁 문맥에서 전리품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가리키는데, 명사 ‘헤렘’으로 사용될 때는 ‘지극히 거룩한 것’ 혹은 ‘진멸할 물건’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여호수아서의 아간 이야기에서 ‘훔친 물건’을 가리킵니다(참조, 수 7장) 아간은 ‘진멸할 물건’을 취함으로써 스스로 진멸의 대상이 됩니다. 에스라가 특히 ‘하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간의 경우를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8b절의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리라’는 직역하면 ‘그는 골라의 회중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의 뜻입니다. 즉,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골라’는 회복된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골라’ 공동체로부터의 분리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격 상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에스라가 보여준 회개의 자세와 공동체의 결단에서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복의 시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개인의 잘못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셋째, 신앙의 결단은 감정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각자의 자리에서 믿음을 실천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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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9-02)


이스라엘을 향한 회개기도

에스라 9장 9-15절


‘유구무언(有口無言)’은 변명할 말이 없을 정도로 염치가 없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잊고 불순종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변명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 본문은 6절부터 계속되는 에스라의 기도입니다. 에스라의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품, 즉 긍휼하심과 의로우심에 의지합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근거하여 다시 한 번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기도 가운데 등장하는 출애굽 모티브는 포로지에서의 귀환을 모세 시대에 있었던 출애굽 사건의 재현으로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회고(9)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공동체의 회복과 정체성을 찾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결국, 신앙 공동체의 유대와 회복이 필요함을 일깨워줍니다.

 

9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9)

 

본문은 에스라 회고록(Ezra's Memoir)의 종결 부분으로 에스라가 드린 기도입니다(에스라의 기도는 6절부터 계속). 에스라의 기도는 네 가지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공동체와의 연합(solidarity)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자신의 죄를 동일시합니다(참조, 출 34장의 모세). 둘째, 죄에 대한 고백(confession)입니다. 에스라는 기도를 통해 과거 이스라엘의 죄뿐만 아니라 현재 귀환 공동체의 죄를 낱낱이 고백합니다. 셋째, 변화를 추구하는 결단(readiness to change)입니다. 에스라는 귀환 공동체에게 죄에 대한 회개와 더불어 미래를 향한 결단을 촉구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실한 믿음(faith in God'smercy)입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의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다시 한 번 주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에스라의 기도는 공동체의 지도자가 따라야 할 하나의 모델입니다.

에스라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봅니다(‘우리 하나님이…버려두지 아니하시고…소생하여…성전을 세우게 하시며…수리하게 하시며…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9b절에서 ‘울타리’로 번역한 ‘가데르’의 의미에 대해 주석가들은 세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벽으로 보는 것입니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에 근거하여 에스라서의 활동 연대를 느헤미야보다 늦은 것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예루살렘의 울타리가 아닌 ‘유다와 예루살렘의 울타리’라고 하고 있어 예루살렘 성벽일 가능성은 낮습니다. 둘째, 구약성경의 용레어 근거해서 성벽의 울타리가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 주위에 있는 포도원 울타리로 보는 것입니다(참조. 사 5:1-7; 시 80:12).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셋째, 비유적인 의미로 페르시아 당국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문맥상 세 번째 해석이 가장 적절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귀환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은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포로에서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들(고레스, 다리오. 아닥사스다)의 지원으로 그들은 기적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되었고, 대적들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인데, 백성들이 그만 이러한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문제는 항상 여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백성들의 죄(10-14)

우리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아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며, 하나님은 항상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죄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함께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10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11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12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그들의 딸들을 너희 아들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물려 주어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 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13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14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10-14)

 

에스라는 현재 귀환 공동체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요약한 후에 곧바로 현 세대의 신실하지 못함을 언급합니다. 에스라는 이러한 대조를 통해 백성들의 배은 망덕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에스라는 먼저 이스라엘이 반복적인 범죄로 인해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자격이 없음을 고백합니다(10). 여기서 에스라는 이방 민족들과의 통혼을 울법 규정을 어긴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는 가나안 족속과의 통혼을 금지하는 신명기의 율법규정(7:1-4)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스라는 이어서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방 족속과의 통혼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11).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은 모세를 비롯하여 구약의 예언자들을 가리킵니다. 11절의 내용은 오경과 선지서 말씀의 광범위한 인용입니다(참조. 신 7:1; 레 20:21; 겔 7:19-20; 왕하 16:3; 21:2 등).

 

구약성경에 의하면, 이방 민족들이 거주하는 땅은 더러운(부정한) 땅이며, 그들의 행실은 가증한 행실입니다. ‘더러운’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니다’는 주로 제의적 불결과 그로 인한 오염을 가리키는데(레 20:21; 젤 7:19-20). 일반적인 용어 ‘타메’보다 강렬한 의미를 나타냅니다. ‘가증하다’로 번역한 ‘토예바’는 이방 백성의 우상숭배나 타락한 문화(특히 성적인 타락)와 관련하여 자주 사용됩니다(레 18:22-30; 20:23; 신 13:14;22:5). 에스라에 의하면, 가나안의 족속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방 민족과의 통혼 때문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요컨대, 거룩한 백성으로서 귀환민들은 철저하게 부정한 것과 행실을 멀리해야 합니다(참조, 2절).

 

에스라는 구체적인 죄에 대한 지적에 이어 미래를 위한 귀환민들의 결단을 촉구합니다(12a: ‘그런즉’), 진정한 회개는 행동의 변화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스라가 촉구하는 결단은 두 가지입니다. 곧 이방 민족들과의 통혼을 금하는 것과 그들을 위해 평화와 좋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12). ‘그들을 위해 평화의 행복을 구하지 말라’는 표현은 암몬과 모압 사람들을 향한 신명기의 저주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신 23:6). 에스라는 이어서 율법 규정(통혼 금지)을 지킴으로써 주어지게 될 축복을 약속합니다(12b). 12절의 내용도 11절과 같이 구약성경 여기저기에서 광범위하게 인용한 것들입니다(참조. 레 18:24-26;20:22; 신 7:3; 11:8-9; 왕하 16:3; 21:2; 겔 37:25: 말 2:10-16). 에스라의 구약성경 인용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문성을 보여줍니다. 에스라는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받게 될 축복을 강조하면서, 문제 해결에 있어 귀환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려 합니다.

 

에스라의 기도에 나타난 설교적 어조는 13-14절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납니다. 에스라는 먼저 귀환 공동체가 예루살렘에 정착하게 된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악한 행실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남겨주셨다고 고백합니다(13). 여기서 ‘남겨주셨다’는 표현은 8절의 ‘남은 자’(골라)를 염두에 둔 말입니다. 에스라는 회복된 이스라엘로서 남은 자들에게 이방 민족들로부터 유다 공동체를 거룩하게 구별할 책임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에스라는 그들이 만약 이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하나님의 진노가 모두에게 임하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14). 그러면서 에스라는 ‘남은 자’인 귀환 공동체가 그 땅의 이방 민족들과 통혼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율법에 근거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들은 가증한 민족(암메 하토에봇)으로 그들과 통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명령)을 거역하는 일입니다(참조, 신 7:1-5).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에게 그에 따른 반응(책임)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맡김(15)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공정하고 의로운 심판을 하시는 분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한, 저지른 잘못을 인식하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며, 변화의 가능성을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비록 우리의 죄가 크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정의를 기억하며 올바른 삶을 살도록 격려합니다.

 

15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15)

 

에스라는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공동체의 문제를 맡깁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먼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에스라의 찬양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에스라의 고백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변론적인 의미입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시 멸망시킨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기대를 나타낸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때로 그의 백성을 향한 구원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누가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지금까지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다시 한번 자비를 내리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15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다시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은 너그러우셔서 우리를 이렇게 살아남게 하셨습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주께 자백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새번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 그리고 회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민하며,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함을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며, 우리의 죄가 크더라도 그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신뢰와 회개를 통해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임을 믿고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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