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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1-02)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1장 17-27절


모든 운동선수에게 올림픽 출전과 금메달 획득은 한결같은 소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영광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는 일일 것입니다. 모든 운동 종목에는 최고의 기록이 존재하며, 이 기록은 동시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선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운동선수들은 이 한계선을 뛰어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이처럼 한계선은 비단 운동선수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영적인 한계선이 분명히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겪는 어려움은 바로 이러한 신앙의 한계선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주저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 본문은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 후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베다니에 살고 있는 나사로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위로하기 위해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베다니 근처까지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가 마중하러 나왔습니다. 그녀에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부활을 약속하며 위로하십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보여주십니다. 부활이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 나아가 가겠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의 위문(17-19)

우리는 살면서 종종 간절히 바라는 것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어려움이 예상보다 길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조급해하거나 좌절하기 쉽지요. 하지만 모든 일에는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때가 있다는 지혜를 묵상하게 됩니다. 때로는 기다림 그 자체가 중요한 과정이며, 그 안에서 더 깊은 의미와 해결책이 발견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17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18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19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17-19)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는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이미 그들의 오빠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지난 상황이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오빠를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 많은 유대인들이 찾아와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있었습니다.

 

(1) 죽은 후 나흘 만에 도착하신 예수님(17)

 

나사로가 이미 죽어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지났음을 명확히 밝히며, 그의 죽음이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함을 증명합니다(17). 이는 나사로가 잠시 의식을 잃었거나 죽음을 위장했다는 어떤 이견도 강력히 반박하는 근거가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죽은 당일에 시신을 매장하는 관습이 있었기에, 그가 나흘 동안 무덤에 있었다는 것은 실제 죽은 지 나흘이 지났음을 의미합니다. 탈무드(b. Moed Qat. 27b)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7일간 깊은 애도 기간을 가진 후 30일간은 가벼운 애도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2) 위문하러 온 유대인들(18-19)

 

예루살렘으로부터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조문하러 왔다는 19절의 기록은 나사로의 가정이 당시 유대 사회에서 상당히 알려져 있었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결과적으로 수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한편, ‘무덤’(μνημεῖον, 므네메이온)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세 가지 주요 용례로 사용됩니다. 나사로의 무덤 외에 예수님의 무덤(요한복음 19-20장)이 있어, 요한복음 독자들은 나사로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연관 지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써 자신의 부활을 예표하신 것입니다. 이외에 ‘무덤’이 사용된 또 다른 중요한 용례는 종말론적 부활을 언급하는 요한복음 5장 28절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마지막 날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시면서, 동시에 당신을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질 궁극적인 부활의 소망 또한 계시하고 계십니다.

 

마르다의 하소연(20-22)

우리는 삶에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나 상실을 겪을 때,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때 누군가가 옆에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후회를 느끼곤 합니다. 이러한 감정은 매우 인간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지나간 과거에 머무르기보다는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아쉬움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태도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20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0-22)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에 마르다는 서둘러 그분께 나아갔지만, 마리아는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21)라며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러나 이제라도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실 줄 압니다”(22)라고 자신의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⑴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르다(20)

 

예수님께서 집에 찾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는 서둘러 예수님을 맞이하러 집 밖으로 나섰지만, 마리아는 여전히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20). 당시 유대 관습에 따르면, 장례 중인 유가족은 집안에서 조문객을 맞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이러한 행동은 전통적인 유대인의 장례 관습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반면,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이는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특별한 존대와 환대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오심을 알았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도 계속 집에 있었을 수도 있고, 미처 듣지 못해 계속 조문객을 맞이했을 수도 있습니다.

 

⑵ 예수님께 하소연하는 마르다(21-22)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라고 말하며 깊은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이미 죽은 나사로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면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러한 기대는 마르다가 ‘마지막 날의 부활’만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후의 진술(24)이나, 예수님께서 무덤의 돌을 옮기라고 하셨을 때 당장의 부활을 주저하는 모습 (39)과는 다소 배치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22절의 고백은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믿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비록 지금 당장의 기적적인 부활을 명확히 기대하기보다는, 예수님의 능력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신뢰하는 일반적인 신앙고백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즉, 마르다는 가족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방법으로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깊은 믿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23-27)

우리는 흔히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이나 희망을 막연히 먼 미래에나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거나, 제한적인 관점으로만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나 회복의 원천이 바로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 자신과 연결된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더 넓은 관점으로 삶의 문제와 가능성을 바라볼 때, 우리는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생명력과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3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3-27)

 

예수님은 나사로의 부활을 말씀하셨으나, 마르다는 이를 마지막 날의 부활로 이해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는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25-26)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 놀라운 선포에 마르다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합니다.

 

(1)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23-26)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부활을 말씀하시자(23), 마르다는 이를 마지막 날에 일어날 부활로 이해했습니다(24). 마르다는 아마도 종말론적 부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때 “나는 ...이다”(ἐγὼ εἰμί)라는 독특한 관용어구를 사용하시어 부활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주십니다.

 

‘나는...이다’라는 요한복음 특유의 예수님 자기 계시 표현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술어가 없는 절대적 용법의 ‘나는 ...이다’라는 말씀입니다(4:26; 6:20; 8:24,28,58; 13:19; 18:5,6,8). 예를 들어, 메시아를 기대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때(4:26)나,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6:20), 예수님은 이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또한, ‘나는...이다’는 믿음의 내용이 되며(8:28; 13:19),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8:58; 18:5,6,8). 이 ‘나는 ...이다’는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계시 표현이었습니다(예: 출애굽기 3:14; 이사야 43:10). 따라서 요한복음에 나타난 ‘나는 ...이다’ 말씀은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이 이 표현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단순히 아버지를 드러내는 아들에 그치지 않고,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십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이 새 언약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술어가 분명한 ‘나는...이다’ 말씀입니다. 이는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양의 문(10:7), 선한 목자(10:11), 부활이요 생명(11:25길과 진리와 생명(14:6), 참 포도나무(15:5) 등 일곱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일곱 가지 술어가 있는 ‘나는 ...이다’ 말씀에서도 예수님의 모습은 구약의 하나님 정체성을 반영합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목자이시며(에스겔 34:11-16; 이사야 40:11), 여호와 하나님이 빛이 되십니다(시편 18:29). 결국 예수님은 ‘나는...이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하나님으로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던 역할들을 이제 새 언약 안에서 아들 예수님이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버지의 사역을 감당하시고, 그분 자신의 신성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나는...이다’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나타내시는 자기 계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23-27절에서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구약에서 사람을 살리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사람을 살리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를 사용하셔서 마르다가 부활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하도록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 선언하십니다(25).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육신적으로 죽더라도 다시 부활합니다. 육신적인 죽음이 곧 영원한 죽음이 아닌 것은, 이 땅에서 지금부터 영생을 누리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26). 이러한 현재적 영생의 개념은 요한복음 종말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입니다. 부활이라는 내세의 개념이 현재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예: 5:24).

 

(2) 믿음을 고백하는 마르다(27)

 

이 단락은 마르다의 감동적인 신앙고백으로 마무리됩니다(27). 그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라는 요한복음이 밝히는 예수님의 두 가지 중요한 정체성이 마르다의 고백에 함께 나타납니다(20:30-31). 앞서 안드레 (1:41)와 사마리아 여인(4:29)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했으며,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1:49). 이제 두 가지 중요한 호칭이 마르다의 신앙고백에서 한데 어우러져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그녀의 믿음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편,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시편 118편 26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메시아가 주의 이름으로 올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참고: 마태복음 11:3; 요한복음 12:13). 마르다의 신앙고백에서는 바로 이러한 메시아의 구원에 관한 깊은 신앙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한계를 넘어선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죽음은 끝을 의미하지만, 성도들에게는 잠시 동안의 잠에 불과합니다. 이제는 당신의 부활을 믿으면서 믿음의 한계를 뛰어넘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은 임마누엘 하셔서 전능하신 손길로 도우실 것입니다. 당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시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부활의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에 부활의 역사,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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