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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0-04)

 


하나님과 관계를 증명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10장 31-42절


 

우리는 종종 뉴스나 신문에서 거액을 기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합니다. 이런 소식은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이기적인 시대 속에서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주인공이 내 가족이라면, 칭찬하기보다 오히려 만류하거나 막으려 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곧 나의 이익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바라본 태도도 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선한 일을 하신 것을 보았지만, 자신들의 권익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 결국 그분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돌로 치려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행한 선한 일들 때문에 왜 돌을 던지려 하는지 물으셨으나, 유대인들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됨을 주장하는 신성모독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분을 잡으려 했지만 실패하였고, 예수님은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신성모독이라 주장하는 유대인들(31-33)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지만, 때로는 그 친밀함에 익숙해져 막연히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잊고, 영적인 교제가 끊어진 줄도 모른 채 지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경외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1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33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31-33)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로 소개하시고, 그로 인해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분노하면서 그분을 죽리려고 돌로 치려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행한 많은 선한 일 가운데 어떤 일 때문에 그렇게 하려는 것인지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선한 일이 아니라, 그분이 자신을 하나님이라 칭한 것을 문제 삼아 신성모독으로 여겼습니다.

 

(1)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들(31)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30)고 하신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이 화가 나서 공격적인 반응으로 시작합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들었던 유대인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향해 돌로 치려했습니다. 유대인들은 8장 59절에 이어 또다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고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선한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하나님을 누가 모독하고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신과 하나님이 하나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신성모독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신성(神性)을 주장하기 때문에 돌을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대한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 당사자는 반드시 죽이되 돌로 쳐서 죽인다”(레위기 24:16)라는 율법을 적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수단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정죄하는 수단으로 삼아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돌을 들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향해서는 인생을 추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해서는 너무나 거룩한 존재로 예수님의 존재가 부각되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반문(32)

 

요한복음 8장에서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할 때는 예수님이 숨어 성전에서 나가셨지만(8:59), 이번에는 그들에게 반문하십니다. 그래서 위기감이 고조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공격적으로 나온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신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이 공격하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반문하신 것은, 그분이 행하신 선한 일들, 곧 여러 가지 표적이 곧 그분의 신분을 증거하고 있음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참조, 25). 37-38절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상호 내주 관계도 당신이 행하신 아버지의 일로 입증하십니다(참조, 14:11).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반문은 당신이 하신 일을 보면 하나님과 당신이 하나라는 말씀이 틀리지 않음을 알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3) 유대인들의 대답(33)

 

사람들이 돌을 드는 이유는 단순히 ‘거룩함 때문’도 아니고 ‘추함 때문’도 아닙니다. 실상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틀과 색깔에서 벗어난 것을 불편해하며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자기 기준과 다르면 거부하고 심지어 방해하기까지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과 지나치게 가까우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경건보다 더한 거룩을 보며 시기와 배척의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그들의 근본적인 실수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실 때 그것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살펴보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요한복음 7:24)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 말씀대로 살았다면,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위기 19:18; 마태복음 22:39)는 계명을 기억했다면, 함부로 정죄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믿음을 지킨다’고 자부했지만, 사실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적 신앙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신앙이란 본래 하나님께 드려야 할 헌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분으로 전도(顚倒)시켜 버렸습니다. 이런 신앙은 매우 위험한 신앙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단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잘못을 범합니다. 자기와 색깔이 다르면 하나님조차 거부하고, 자기 생각과 다르면 예수님조차 거절하는 자기중심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두 가지 답변하신 예수님(34-39)

사람들은 흔히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새로운 주장을 들을 때 본능적으로 거부하거나 심지어 공격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언제나 인간이 세운 기준이나 틀 속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한계 있는 틀로는 진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기에,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며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분별하며,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34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37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39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34-39)

 

신성모독이라는 정죄에 대해 예수님은 당신과 하나님의 관게를 말씀하시며 변론하십니다. 성경 말씀을 근거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이 잘못이 아님을 설명하셨습니다. 또한 말이 아니라 자신이 행한 일을 보고 하나님과 하나 됨을 깨달으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 말씀을 근거로 한 변증(34-36)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단정하며 돌로 치려 하였습니다(신명기 13:5). 예수님은 시편을 인용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합니다. 시편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시 82:6)라고 말씀하십니다. 82편은 구약의 사사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속에서 사사들을 ‘신들’이라고 부른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사람인 사사들을 ‘신들’이라고 불렀다면, 자신에게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고, 믿지 않았습니다(참조, 10:20). 이들이 제기한 신성모독의 고발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다는 이유로 그분을 정죄했던 요한복음 5장 18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2) 행위를 통한 증거 제시(37-38)

 

예수님께서는 자신 외모를 보지 말고 자신이 행하는 일을 보라고 하십니다(37). 분명 예수님의 외모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넘어진 것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제대로만 보았어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았을 것입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만 알았어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사역과 말씀(율법)이 무엇을 제시하는가가 아닙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3) 유대인들의 반응(39)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도 여전히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아니기 때문에 잡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요단 강 동편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믿음이란 머리로 이해되지 않아도 진리를 바르게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유대인들은 외형적인 모습을 너무 집착했습니다.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같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에 성령의 조명하심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당신은 말씀을 읽을 때 깨닫는 것이 적다할지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요한의 증거를 인정하는 사람들(40-42)

오늘날 우리도 진리와 말씀을 대할 때,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나 일시적인 성공에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꾸준하고 진실된 삶과 일관된 증언입니다.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일관되고 신실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진리의 힘을 깨닫고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 생활 속에서도 겉모습이나 순간적 결과에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결국 열린 마음과 신뢰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에게 참된 믿음과 삶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40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40-42)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다시 위협을 피하여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은 한때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자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증언한 예수님의 진실성을 기억하고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1) 장소 이동(40)

 

예수님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위협과 반대 속에서 잠시 예루살렘을 떠나 요단 강 건너편으로 이동하셨습니다. 그곳은 한때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지역으로, 비교적 안전하고 말씀을 전하기에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이동은 단순한 피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또한 요한의 세례 사역과 연결되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믿음의 삶에서도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환경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사명을 이어가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2) 사람들의 평가(41)

 

예수님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반대와 위협을 피하여 요단 강 건너편으로 이동하셨습니다. 이곳은 이전에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지역으로, 비교적 안전하고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기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동은 단순한 피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사명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또한 요한의 세례 사역과 연결됨으로써, 사람들은 요한이 증언했던 예수님의 진실성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고, 이를 통해 예수님의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믿음의 삶에서도 때와 장소를 지혜롭게 선택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사명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3) 믿음의 열매(42)

 

예수님이 요단 강 건너편에서 가르치신 후,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화려한 행위보다, 예수님이 일관되게 보여준 삶과 진실된 증언을 통해 그의 신뢰성을 깨달았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했던 내용이 사람들의 마음에 다시 떠오르면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진리는 강한 권위나 외적 힘에 의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삶과 증언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믿는 자들이 마음을 열고 진리를 받아들일 때, 참된 믿음과 변화를 경험하게 됨을 교훈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과 사명을 분명히 밝히셨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거부하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묵묵히 사역을 이어가셨습니다. 요한의 증언과 예수님의 진실된 삶을 기억한 사람들은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사건은 진리가 눈에 보이는 힘이나 권위로만 증명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에게 참된 믿음과 변화가 찾아온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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