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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0-02)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0장 11-21절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은 수많은 소리와 길 앞에 서게 됩니다. 세상의 유혹, 잘못된 가르침, 사람의 욕심에서 비롯된 목소리들이 신앙의 방향을 흐리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자신의 영혼을 바르게 인도할 수 있는 참된 지도자와 그렇지 못한 거짓된 지도자를 지혜롭게 분별해야 합니다. 영혼의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므로, 누구를 따라가고 누구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결말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 본문은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후, 또 ‘선한 목자’라고 소개하고 계십니다. ‘선한 목자’이기 때문에 친히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목자라고 소개합니다. 이 선한 목자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도 긍정인 태도와 부정적인 태도로 나누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 반응은 때로는 영원한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양을 위해 죽으실 목자(11-15)

세상에는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거나, 쉬운 길만을 제시하는 목소리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참된 인도자는 우리를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이끌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며, 때로는 불편하고 어려운 진리도 전합니다. 우리가 수많은 가르침과 목소리 속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분별력을 구하며, 예수님의 말씀과 삶의 방식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를 이끄는 이들이 참된 인도자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1-15)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제시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양을 보호하는 수준을 넘어, 양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궁극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이러한 목자로서, 인류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실 것을 예표하셨습니다.

 

(1) 선한 목자 예수님(11)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분으로, 이는 삯꾼이 위험에 처했을 때 양을 버리고 도망치는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됩니다(11-12).

 

구약성경에서도 이러한 목자의 희생은 여러 차례 예표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양 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사자와 곰을 물리쳤으며(사무엘상 17:34-37), 훗날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골리앗과 맞서 싸웠습니다(사무엘상 17:45-49).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처럼 목숨을 걸고 새 이스라엘을 인도할 새로운 다윗, 즉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에스겔 34:23-24; 37:24).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 역시 메시아의 희생을 예언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많은 사람의 죄를 용서받는 길로 인도합니다(이사야 53:12). 스가랴서의 목자 희생에 대한 예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스가랴 13:7; 마태복음 26:31; 마가복음 14:27). 그 외에도 성경 곳곳에서 메시아의 희생은 꾸준히 언급되고 있습니다(스가랴 12:10; 요한계시록 1:7).

 

(2) 삯꾼(12-13)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는 선한 목자와 달리, 삯꾼은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우선시하여 양들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그는 양들에게 진정한 책임을 지지 않으며, 위기에 처한 양들을 보호할 마음도 없습니다. 이는 그 양들이 자기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12).

 

그렇다면 ‘이리’의 행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위협하고 괴롭히는 세상을 이리에 비유합니다(마태복음 10:16). 예수님께서 칠십 명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누가복음 10:3). 세상 사람들은 제자들을 법정에 넘기고, 회당에서 매질하며(마태복음 10:17), 그들의 신앙을 핍박할 것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뿐 아니라 로마인들도 포함됩니다. 또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사람들을 미혹하고 혼란케 할 것을 경고하며, 그들을 ‘사나운 이리’로 표현하였습니다(사도행전 20:28-30). 따라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리’는 세상의 위협과 더불어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거짓 가르침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위험 속에서도 자신의 양들을 끝까지 지켜내시는 참된 목자이시며, 제자들을 위협과 거짓으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3)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14-15)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로 소개하시며, 양들을 위한 목자의 희생적인 사랑과 양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시는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특별히 14-15절은 이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의 핵심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4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여기서 ‘선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칼로스(καλός)’는 단순히 착하다는 의미를 넘어 ‘아름답고 고결하며 완전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양들에게 필요한 것을 완벽히 공급하시고, 위험에서 보호하며, 궁극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가장 온전한 목자이심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는 표현은 단순한 지식의 차원을 넘어 구약적 의미의 ‘야다(יָדַע)’, 곧 깊고 친밀한 관계적 앎을 가리킵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과 상태를 세밀히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와 아픔까지 돌보시며 사랑으로 지키십니다. 반대로 양들이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듯, 성도들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인격적 교제를 누리는 삶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15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양들 사이의 관계는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완전한 사랑과 연합에 비견될 만큼 깊고도 신비합니다. 성도는 이 거룩한 관계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며, 그 안에서 안전과 보호를 경험합니다. 이 모든 관계의 절정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는 선언에서 드러납니다. 이는 단순한 순교가 아니라, 죄와 사망에서 양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의도적이고 자발적인 대속 사역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참된 목자이심을 가장 분명히 드러내는 사건이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완성된 표현입니다.

 

생명의 주권자이신 예수님(16-18)

우리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교회나 공동체 안에만 국한하지 않고,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열린 마음과 선교적 사명을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보편적인 구원의 진리를 늘 기억하며,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그분의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16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6-18)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구속 사역으로 이방 민족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의 양이 되어 생명과 풍성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를 따르듯이, 성도는 그리스도의 양으로서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1)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16)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로서 양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설명하신 후에, 16절에서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며 구원의 범위를 확장하십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다른 양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키며, 이는 곧 이방인 선교를 암시하는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구원이 처음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이미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듯이(요한복음 4:39), 이제 이방인들까지도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양 떼에 속하게 될 것임을 나타냅니다(요한복음 11:49-52 참조). 이방인들 역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께 인도되어, 유대인 양 떼와 이방인 양 떼가 한 목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의 무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한 무리’와 ‘한 목자’라는 개념은 구약 성경, 특히 에스겔서(에스겔 34:23; 37:24)의 깊은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스겔 34:15-23이 유대와 이스라엘의 통일을 예언하며 단순한 민족적 하나 됨을 넘어 새로운 다윗, 즉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하나 됨’의 역사를 가리켰듯이, 요한복음 10장에서 양들이 하나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약적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공동체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하는 우주적 공동체, 곧 교회(에베소서 2:14-16 참조)가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다른 구절들 또한 교회의 ‘하나 됨’을 강조합니다. 11장 49-52절에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예언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하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고별 강화 후에 드린 마지막 기도(17:20-26)에서도 교회의 하나 됨을 매우 강조하십니다.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하나 됨을 본받아 일치를 이루기를 간절히 기도하시며, 이러한 일치가 궁극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중요한 선교적 역할을 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17:21, 23).

 

(2) 스스로 목숨을 버린 선한 목자(17-18)

 

17절의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까닭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나는 다시 얻을 것임이라”라는 말씀은 성부와 성자 간의 본질적인 사랑이 예수님의 자발적인 순종과 희생, 즉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행위 속에서 절정으로 드러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끝이 아니라, 당신에게 내재된 부활의 권능으로 다시 생명을 얻으실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어지는 18절에서 예수님은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외부 강압이나 우연이 아닌, 당신 자신의 의지와 신적인 권세에 따른 자발적인 선택이었음을 명확히 합니다. 그분은 생명을 내어줄 뿐만 아니라 다시 얻을 권세까지 가지신 분으로, 이는 생명의 주인이시자 죽음을 초월하는 신적인 권능을 가지셨음을 증명합니다. 또한, 이 모든 희생과 권능은 성부 하나님의 지시와 계획 아래 이루어진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완벽한 일치와 조화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당신의 자발적인 사랑과 신적인 권세,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순종의 결과임을 분명히 하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합니다.

 

엇갈리는 반응: 예수님을 향한 논란(19-21)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성도들은 불신자들로부터 많은 조소와 핍박을 받습니다. 그들과 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 이유가 바로 생명과 심판의 이중성을 띠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영향력에 의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난과 핍박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한 마음으로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19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19-21)

 

앞서 예수님은 양들을 하나 되게 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16). 예수님의 교훈을 통해 사람들은 두 가지로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을 합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삶 속에 역사하신 예수님을 행해 당연히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1) 유대인들의 부정적 반응(19-20)

 

이 단락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분쟁’이 있다고 합니다(19). ‘분쟁’이 있다는 것은 곧 ‘분리’(division)가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분리’가 있다고 기록합니다(7:43; 9:16). 예수님께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도 있고, 적대적인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은 교회 안의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합니다. 그러나 교회 밖의 사람들을 분리시킵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분쟁’이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하나 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합니다(고전 1:10; 11:18; 12:25).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귀신 들려 미쳤다고 합니다. 이는 처음 나온 말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계속되는 부정적 반응입니다(7:20; 8:48). ‘미친 것’과 ‘귀신 들린 것’의 연관은 고대 사회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막 3:21-22).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로 두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바울도 미쳤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을 전하자, 베스도는 그를 미쳤다고 합니다(행 26:24).

 

예수님과 예수님의 진리는 세상의 그릇으로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진리이고,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거룩입니다. 그들은 어둠 가운데 있어서 빛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거짓에 속하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을 향하여 미쳤다고 합니다.

 

(2) 유대인들의 긍정적 반응(21)

 

반면에 다른 유대인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예수님의 기적을 근거로, 그가 미쳤을 리가 없다 합니다. 이는 마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막3:23)고 반문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믿지 못하겠거든, 예수님께서 행하는 그 사역을 통해 믿음을 가지라고 권고하십니다(10:37-38; 14:11). 부정적 유대인들은 선입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했습니다. 자기들의 전통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안식일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대했습니다. 유일신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난 분명한 계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성에 조금씩 눈을 떠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인 당신을 자장 잘 알고 계십니다. 당신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더 나가서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버리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당신의 목자임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면서 온전히 주님만 따르길 바랍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돌아오도록 찾고 부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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