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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09-02)


눈을 뜬 맹인의 증거와 바리새인들

요한복음 9장 13-23절


 

‘용기’의 반대말은 ‘두려움’입니다. 따라서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움을 이기는 사람이며, 반대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용기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기 없는 사람은 주변 환경에 지나치게 민감하여, 사람들의 말이나 세상의 소리에 쉽게 흔들리고 작은 소리에도 두려워합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이나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믿음 위에 서 있으며,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평안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앞에서 올바르게 반응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의 자세입니다.

 

  • 본문은 맹인이 치유된 후 유대인 지도자들과의 논쟁을 다룹니다. 그는 눈을 뜬 후 성전으로 끌려가 자신이 치유된 사실을 설명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일어난 치유를 문제 삼아 의문을 제기합니다. 맹인은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증언하며 예수님이 하신 일임을 밝히지만, 지도자들은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논쟁을 계속합니다. 이 과정에서 진리와 경험의 충돌, 사람들의 편견과 불신이 드러나며, 변화된 삶이 언제나 외부의 인정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소경을 추궁하는 바리새인(13-17)

변화와 회복은 종종 주변 사람들의 의심과 질문을 불러옵니다. 삶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질 때, 모든 사람이 이를 즉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변화는 인정받기보다는 놀라움과 의문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주변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지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결국 진정한 변화는 시간이 지나며 그 자체로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13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17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13-17)

 

맹인이 눈을 뜬 사건은 어둠에서 빛으로 인생이 변화된 기쁜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두가 기뻐하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당시에 큰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곳곳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사람들의 관심은 기적을 행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집중되었습니다.

 

(1) 사건의 시작(13-14)

 

치유 받은 맹인이 유대인들과 만나 예수님을 증거하는 단락입니다. 맹인에게 증언을 들은 이웃들은 그를 바리새인, 즉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데려가졌습니다(13). 그가 치유된 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설왕설래가 일어났습니다(14). 그러나 이 치유는 우연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원래 안식일은 해방과 자유의 날로, 세상에 지친 인간에게 참된 안식이 찾아오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왜 세상에 오셨는지를 명확히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9:4-5).

 

하지만,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이 기적은 바리새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요한복음 5:1-18). 예수님은 이를 예상하고 의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더 분명히 드러날수록 어둠은 더욱 자기 정체를 드러내기 마련이며, 예수님께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치유받은 사람의 회복과 기쁨보다 자신의 교리와 권위를 우선시했습니다(요한복음 9:16-17).

 

결국 그들은 고침 받은 맹인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추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의 심문은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원하는 답을 얻으려는 형식적 심문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종교적 권위와 인간의 편견이 참된 기쁨과 정의보다 우선될 때 나타나는 왜곡된 태도를 보여줍니다.

 

(2) 바리새인들과 맹인과의 대화(15-17)

 

바리새인들은 맹인에게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심문했습니다(15). 그러나 사실 그들의 관심은 소경이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가’에만 있었습니다. 심문을 받은 맹인은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며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15)라고 답했습니다. 이 솔직한 고백은 어떤 화려한 수사나 논리보다 더 강력하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진실하고 정직한 대답이야말로 가장 힘 있는 증거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 고백을 들은 바리새인들 사이에는 분열이 일어났습니다(16). 일부는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다”(16)라며 예수님을 부정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겠느냐?”라며 반박했습니다. 서로 논쟁을 벌인 끝에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한 사람을 누구라고 부르는지 묻습니다(17).

 

그는 주저 없이 “선지자이니다”라고 담대하게 대답합니다(17). 이는 매우 위험할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그는 마음에 있는 바를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선지자로 믿었던 것은 아니며,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서 바로 믿음이 생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반복적인 질문과 논쟁 속에서 그는 점점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믿음을 명확히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은 복음 전도의 중요한 교훈을 보여줍니다. 복음을 변명하고 변호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분명히 알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더욱 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과 맹인 부모의 대화(18-23)

때로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진리나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은혜나 변화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기존의 생각이나 관습에 얽매여 그 진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부정하려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상 너머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려는 영적인 통찰력이라는 교훈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새롭게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8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20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18-23)

 

맹인은 자신의 삶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 분명하고 당당하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신앙고백은 더욱 빛을 발했는데요. 그는 단지 육신의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까지 열리는 참된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눈앞의 분명한 증거조차 무시하며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 바리새인들의 질문(18-19)

 

바리새인들은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이 눈을 떴다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 그 기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 기적이 예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자신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신앙과 신학적 권위가 송두리째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이 기적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배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맹인이 눈을 떴다는 명백한 사실과 맹인 자신의 확신에 찬 고백은 바리새인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무모한 시도까지 했습니다. 이에 맹인의 부모를 불러 심문하면서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19)라고 물었습니다.

 

이는 이미 맹인에게 들은 내용을 다시 부모에게 캐물어, 그들의 진술이 다를 경우 조작으로 몰아가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증거를 들이대도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기적적으로 눈을 뜨지 않았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진실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신념만을 고집하는 완고함을 보여주었습니다.

 

(2) 부모의 대답과 이유(20-23)

 

맹인의 부모는 아들이 예수님에게서 치유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떠넘깁니다. 그들은 아들이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는 사실만 인정하고, 누가 눈을 뜨게 했는지는 모른다고 대답하며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태도의 이유는 그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한 유대인들을 무서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2). 평생 맹인인 자식 때문에 고통받았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다가 출교까지 당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눈을 뜬 아들은 이제 유대교뿐만 아니라 부모에게까지 경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맹인이었을 때는 천형을 받았다고 서러움을 겪었고, 눈을 뜨고 나서는 관계들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맹인의 부모는 아들의 치유를 기뻐해야 할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에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갇혔습니다. 반면 맹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났기에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실을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맹인의 부모를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두려움에 찬 증언을 통해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입증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침묵은 오히려 예수님의 기적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었습니다.


본문은 진실 앞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맹인은 예수님의 기적을 믿고 담대하게 고백했지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외면했습니다. 맹인의 부모는 사람들의 두려움에 갇혀 침묵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매일 믿음의 선택이 요구됩니다. 세상의 시선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믿고 담대한 믿음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인 눈을 뜨고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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