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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09-01)


맹인을 치료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9장 1-12절


 

우리는 삶에서 때때로 납득하기 어려운 고통과 아픔,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환난에 부딪히곤 합니다. 이러한 시련 앞에서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바라보며 ‘왜 이런 고난이 저에게 임해야 합니까?’라고 원망의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하지만 긴 세월이 흐른 뒤, 그 고난 속에 담긴 깊은 뜻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많은 이들이 이때,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시려고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게 하셨구나!’라고 고백하며 감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만나셨는데, 제자들이 그의 맹인 됨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 맹인의 눈에 바르신 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맹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가서 눈을 씻었고, 그 즉시 눈을 뜨게 되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이웃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이전의 맹인이 정말 눈을 뜨게 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는지 그에게 끊임없이 질문하였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1-5)

사람들은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이나 불행의 상황을 마주할 때, 그 원인을 단순히 특정한 사람에게 돌리거나 누군가의 잘못으로만 치부하며 책임을 전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서로 간의 관계를 더 멀어지게 하며 새로운 해결책을 찾는 데에도 방해가 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불행이나 고난 자체를 누가 만들었는가에 집착하기보다, 그 상황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그리고 장차 더 성숙하고 가치 있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입니다.

 

1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1-5)

 

요한복음 9장은 7-8장의 주제를 이어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장막절)을 지키려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로 계시하셨습니다. 첫째는 ‘나를 믿는 자에게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주겠다’고 하셨고, 다른 하나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빛을 얻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7-8장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많은 질물을 던지면서 예수님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도록 요구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을 보시고 제자들이 그 고난의 원인에 대해 묻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개인이나 부모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더 큰 목적과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빛으로 오셨음을 밝히시며 주어진 때에 맡겨진 일을 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1) 맹인을 만나신 예수님(1)

 

요한복음 8장 59절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돌 세례 위협을 받으시지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그 위기에서 벗어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단순한 도피가 아닌, 그분의 신성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우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분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9장 1절에서 예수님은 길을 가시는 도중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만나십니다. 여기서 맹인은 단순히 육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을 넘어,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진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절망적인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한계와 결핍이 예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고,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구원의 통로가 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기적을 통해, 육체적 구원뿐만 아니라 영적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맹인에게 향한 예수님의 시선은 죄와 절망 속에 있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죄와 질병의 관계(2-3)

 

당시 유대인들은 질병이나 고통, 불행의 원인을 개인이나 부모의 죄의 결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보고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라고 물었던 질문에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이 맹인의 불행이 어떤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생각을 단호히 부정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원인을 죄의 결과로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일’은 요한복음 6장 29절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명확히 밝히셨습니다. 즉, 맹인의 고통은 그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불행과 고통을 단순히 죄의 결과로만 도식화하여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며, 모든 것을 죄와 연결 짓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요한복음 4:34-38). 이 본문은 우리에게 고난의 원인을 따지기보다, 그 고난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주목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3)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4-5)

 

예수님께서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때가 아직 낮이매’라는 표현은 단순한 시간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명의 기간, 곧 공생애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낮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분의 사역이 드러나는 때를 의미하며, 밤은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주님께서 떠나가심으로써 도래할 어둠의 시기를 암시합니다. 따라서 ‘낮’과 ‘밤’의 대비는 시간의 흐름을 넘어, 구원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는 기회의 유한함을 보여 줍니다.

 

또한 ‘세상에 있는 동안’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한된 사역의 기간 동안 주어진 사명을 반드시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이 무기한으로 주어지지 않고, 정해진 때 안에서 충실히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오늘이라는 시간은 하나님의 일을 실천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이며, 이를 소홀히 하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밤이 찾아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 것은 요한복음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빛은 단순히 물리적인 밝음이 아니라, 진리와 생명을 상징합니다. 세상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는 어둠 속에 있으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적 소경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시각을 잃은 자뿐 아니라, 영적으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모든 사람에게 참된 빛을 주시려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신 것입니다. 맹인의 존재는 바로 그 사명을 드러내는 표적이 되었으며, 절망과 어둠 속에 있는 인생들이 예수님을 통해 새 생명과 소망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어둠은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빛 앞에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새로운 삶과 참된 희망을 누리게 됩니다.

 

맹인을 고치시는 예수님(6-12)

작은 실천과 순종은 개인의 변화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사회 전체에도 파급효과를 일으킵니다. 한 사람의 삶의 전환은 주변의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사회적 대화의 장을 열어 줍니다. 변화는 언제나 의심과 저항을 동반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질서와 기준을 만들어 갑니다. 결국 진정한 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증거를 통해 사회 전체를 새롭게 비추는 힘이 됩니다.

 

6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6-12)

 

예수님께서는 먼저 찾아오셔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셨습니다. 자신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맹인의 삶은 어두운 밤과 같았지만, 예수님을 통해 이제 그의 삶 속에 영광의 빛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맹인에게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보니깐, 그 암흑과 같은 생활이 축복의 통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 예수님의 치유 기적(6-7)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치유하신 독특한 방법을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신 행위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흙을 사용하여 맹인의 눈을 만드신 행위는 마치 창조 행위를 연상시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2장 7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진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빚으셨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님은 진흙을 사용해 새로운 눈을 만드심으로써,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한 권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질병을 고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을 상징합니다.

 

맹인의 눈에 진흙을 바르신 후, 예수님은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맹인의 순종을 요구하는 행위였습니다. 맹인은 예수님의 기이한 행동과 명령에도 불구하고 즉시 순종했고, 그 결과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구원의 통로가 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안식일(14)에 일어났기 때문에, 당시 유대교의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유대교의 미쉬나에 따르면, 안식일에 치료 행위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금지되었습니다. 안식일에 금지한 행위 39개 조항 가운데 하나를 위반한 것이 됩니다. 특히,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물질(침을 섞은 진흙)을 이용한 치료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이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을 비판하고, 자신이 율법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회복하러 오셨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그분이 ‘세상의 빛’으로서 율법보다 위에 있는 신적 권위를 가지고 계심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2) 맹인의 증언과 무리의 반응(8-9)

 

맹인이 시력을 회복하자, 이웃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맹인으로 앉아 구걸하던 사람이 아니냐?”(8)는 질문과 “맞다”, “아니다”라는 혼란스러운 반응이 교차합니다. 이는 그의 삶에 얼마나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과거의 맹인과 지금 눈을 뜬 그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웃들의 이러한 혼란은 곧 주변 사람들과의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구절은 맹인이 이전에는 걸인(구걸하는 사람)이었다고 언급하며, 당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소외되었는지를 암시합니다. 눈을 뜨기 전 그는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구걸에 의존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예수님의 치유 기적이 단순히 시력을 회복시켜준 것을 넘어,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결국 이웃들은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스러워합니다. 이들의 반응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이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사건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그들은 눈앞에 일어난 놀라운 현실보다 자신들의 익숙한 생각과 편견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불신하거나 혼란스러워하는 현실과 유사합니다.

 

(3) 이웃의 질문과 맹인의 대답(10-11)

 

맹인의 이웃들은 그 맹인을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정체성은 곧 ‘구걸하는 맹인’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오랜 시간 동안 보아온 현실, 즉 장애를 가진 사람의 삶이 갑자기 바뀌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익숙한 현실이 너무나 급작스럽게 변하자, 그들은 혼란과 불신에 휩싸였습니다. 이러한 편견은 기적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이웃들에게는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맹인이 예수의 이름을 말했지만, 그들에게 예수는 그저 낯선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기적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으므로, 맹인의 증언만으로는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눈앞에서 일어난 결과(시력 회복)는 보았지만, 그 원인(예수의 능력)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인정하기보다 부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맹인의 시력 회복은 그들에게 과학적,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적의 한계는 그들의 이성적 판단 능력을 마비시켰고, 결국 기쁨보다는 의심과 혼란을 선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놀라운 소식을 들었을 때 “진짜야?”라고 되묻는 우리의 반응과도 유사합니다.

 

(4) 예수님을 찾은 이웃(12)

 

맹인의 이웃들이 “그가 어디 있느냐?”(12)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미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고 난 후 자주 그 자리를 떠나셨는데, 이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 영광을 얻거나 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려는 목적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병이어 기적 후에도 군중을 떠나 홀로 산으로 가신 것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의 주목을 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사역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거나 개인적인 명예를 얻기 위해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 묵묵히 섬기는 실천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기적 그 자체나 그것으로 인한 인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사명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고, 이를 조용하고 겸손하게 수행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문의 기적은 단순히 맹인이 눈을 뜬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서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한계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로 삼으셨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인간적인 불신과 편견에 갇힌 채 진정한 기쁨을 놓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삶의 고통과 문제 앞에서 그 원인만을 따지기보다,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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