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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07-04)


생수의 강으로 초대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7장 37-52절


우리 몸의 갈증을 시원한 물이 해소하듯, 우리 영혼에도 깊은 목마름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이때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는 메마른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는 시원하고 놀라운 능력이 됩니다. 혹시 지금 채워지지 않는 영적 갈증으로 고민하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진정한 만족을 찾지 못하고 계시다면, 그것이 영혼의 갈증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진정한 평안과 소생의 능력을 경험해 보시길 권합니다.

 

  • 초막절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성령을 약속하셨고, 이로 인해 군중은 그분을 ‘선지자’나 ‘그리스도’로 믿는 이들과 갈릴리 출신이라며 반대하는 이들로 나뉘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경비병을 파견했으나, 경비병들은 예수님의 비범한 말씀에 압도되어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진 강력한 권위와 그분에 대한 사람들의 엇갈린 인식이 당시 사회에 일으킨 큰 파장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초청(37-39)

우리의 깊은 영적 갈증은 오직 주님께 나아가 믿음을 가질 때 진정으로 해소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믿음을 통해 주님을 영접한 자에게는 약속된 성령이 임하여, 마음에 솟아나는 생수와 같은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만족시키며 우리의 삶을 온전히 변화시키십니다. 더 나아가, 성령으로 충만한 우리의 존재는 이 생수를 주변으로 흘려보내어 다른 이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얻은 영적 생명과 충만함을 세상과 나누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강조하는 귀한 교훈입니다.

 

37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37-38)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초막절을 지내고 계셨습니다. 초막절의 마지막 날에는 큰 축제가 열렸는데, 그 절정의 의식은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와 성전 제단에 붓는 행위였습니다. 이는 광야 생활 동안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장차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 위에 폭포수처럼 생수가 부어질 것을 소망하는 예식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바로 그 생수이심을 밝히시며,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자신에게 와서 마시라고 크게 외치셨습니다.

 

(1) 예수님의 생수 약속(37-38)

 

예수님의 선포는 당대 사람들에게 마치 강력한 파장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분의 외침은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에게까지 예수님에 대한 견해 차이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한 가르침을 넘어, 당시 사회와 신앙 체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요한복음 7장 37절은 “만일 누구든지 목마르면 나를 믿는 그 사람은 내게로 오게 하라 그리고 마시게 하라”로, 38절은 “성경에서 말한 대로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올 것이기 때문이다”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의 배”가 믿는 자의 배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배를 의미한다는 해석입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볼 때,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성령의 진정한 근원이십니다. 믿는 자는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성령의 근원은 아닙니다. 이러한 이해는 본문이 성경을 인용하여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생수가 흘러나올 것이라는 약속으로 읽혀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복음 4장 13-14절의 말씀, 즉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부분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생수의 근원으로 제시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8절에 인용된 성경은 특정 구약 성경 구절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사야 12장 3절, 에스겔 47장 1-11절, 그리고 스가랴 14장 8절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암시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새 시대에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는 사상은 당대의 보편적인 기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구약 성경의 의미를 온전히 성취하시는 분으로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2) 요한복음 저자의 주석(39)

 

요한복음의 기록자 요한은 예수님의 ‘생수’에 대한 예언을 주석하면서, 이 생수가 ‘그분을 믿는 자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명확히 설명합니다(39). 이로써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생수’의 의미가 곧 ‘성령’임이 분명해집니다. 이 ‘생명의 물’은 성령을 상징하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요한복음 4:13-14)을 의미하는 깊은 상징성을 지닙니다.

 

더욱이 본문은 중요한 신학적 설명을 덧붙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다”(39). 이 구절은 성령의 임재 시점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완성되는 ‘영광’ 사건과 연결 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성령이 신자들에게 임하실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리라는 약속은 요한복음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나는 핵심적인 신학적 사상입니다(요한복음 14:16, 26; 15:26; 16:7). 요한복음의 관점에서, 성령의 진정한 근원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믿는 자는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있지만, 그 기원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다양한 반응(40-49)

한 중심 인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깊은 공감부터 자신들의 배경이나 편견에 따른 무시까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사회적 권위를 지닌 이들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무지하다고 치부하며 자신들의 시각에 갇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대상을 판단할 때 성급히 결론 내리기보다 공정한 절차를 따르고 충분히 경청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동시에 대중적인 흐름 속에서도 소신껏 의문을 제기하는 용기 있는 태도가 불의를 방지하는 데 필수적임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이 구절들은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사회적 위치가 진실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성찰하게 합니다.

 

40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40-44)

 

성경 후반에는 재미난 내용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초청하신 말씀에 대해 반응이 다양한 반응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자신의 하속들을 성전으로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속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열을 받은 지도자들이 ‘왜 예수를 체포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느냐?’고 책망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속들의 대답이 가관입니다.

 

(1) 예수님을 그 선지자(40)

 

예수님의 예언자적인 말씀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그분의 정체성에 대한 첫 번째 반응으로 그분을 ‘그 선지자’라고 고백했습니다(40). 여기서 언급되는 ‘그 선지자’에 대한 기대는 구약 성경, 특히 신명기 18장 15-18절에 명확히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적 메시아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오랜 기다림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여전히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했던 이들조차도 초막절 마지막 날 성전에서 선포된 요한복음 7장 37-38절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그분을 ‘그 선지자’로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예언자적인 말씀 한마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는 예수님께서 그동안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예: 요한복음 20:30-31)과 그분의 말씀이 축적되어 얻어진 종합적인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요한복음 5:39)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그분의 참된 정체성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그리스도(41-42)

 

요한복음 7장에서는 예수님을 둘러싼 다양한 반응과 복잡한 이해관계가 섬세하게 묘사됩니다. 이 구절들 속에서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 선지자’로 인식하며 그의 가르침과 권능에 깊이 공감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그분을 단순한 선지자를 넘어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확신하고 따르는 이들도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고백은 필연적으로 반대 의견과 강한 부딪힘을 야기했습니다. 반대자들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정체성을 부인하며, 주로 그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성경적 근거(미가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내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를 제시하며 갈릴리 출신인 예수님이 그리스도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지닌 메시아에 대한 고정관념과 성경 해석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상적 논쟁과 출신 성분에 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기원을 세상적인 관점이 아닌, 더 높은 차원에서 조명하려는 일관된 신학적 의도를 드러냅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하여 예수님의 근원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음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그분의 참된 정체성과 권위가 인간적인 시비나 지역적 한계를 초월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구절들은 예수님을 둘러싼 믿음과 불신, 예언과 현실 사이의 긴장감 속에서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다양한 신앙적, 인문학적 고민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43-44)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둘러싼 세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은 당시 사회에 첨예한 갈등 상황을 야기했습니다. 일부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선지자’로 인식하며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였고, 또 다른 이들은 그분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새 시대의 도래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그분이 ‘갈릴리 출신이기에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완강한 반대 주장을 펼쳤고, 이러한 상이한 관점들은 유대 공동체 내부에 깊은 분열과 긴장을 초래했습니다.

 

생수를 충만히 마시는 사람(45-52)

진정으로 마음을 울리는 메시지는 강제적인 권위보다 더 강력하게 사람의 내면을 움직입니다. 하지만 확고한 편견과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새로운 진실을 외면하고, 이를 알아본 사람들을 비난하며 자신들의 견해를 고수하려 합니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도 일부 양심적인 사람들은 공정한 절차와 충분한 경청 없이는 성급한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고 용기 있게 주장합니다. 결국 진정한 깨달음과 영적인 만족은 사람의 배경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닌, 본질적인 가치와 깊은 이해를 향한 열린 자세에서 나옵니다. 이는 마치 목마른 영혼이 참된 진리라는 ‘생수’를 마시며 진정한 충만함과 만족을 경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45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46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7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50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51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52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45-52)

 

예루살렘 성전 축제의 한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은혜로운 초청을 전하셨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구원의 잔치에 가장 먼저 응답해야 할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그 부름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은 영적 충만함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단 한 가지 목적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권력과 편견이 어떻게 진정한 진리를 외면하고 생명의 기회를 잃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비극적인 상황입니다.

 

(1) 당국자들의 반응(45-49)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던 중, 유대 사회의 지도층인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그분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체포하기 위해 성전 경비병들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붙잡지 않고 빈손으로 돌아왔고, 이 예상치 못한 결과에 종교 지도자들은 격앙된 어조로 그 이유를 추궁했습니다. 이에 경비병들은 뜻밖의 고백을 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46)

 

이 경비병들의 증언은 단순한 감탄을 넘어선 깊은 체험적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며 그 내용이 일반적인 가르침과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름을 온몸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비범한 권위와 진정성 앞에서, 경비병들은 차마 그분을 체포할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확고한 체험적 믿음을 형성하게 된 결정적인 순간이었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압도적인 권위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경비병들의 진실된 고백을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고 돌아온 경비병들을 향해 “너희도 미혹되었느냐?”(47)라고 비난하며, 자신들은 이미 예수님을 ‘사람을 미혹하는 자’로 단정하고 있음을 명백히 드러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굳히고 정당화하기 위해 “율법을 아는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48)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경비병들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향해 “이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9)라고 선언하며 그들을 ‘율법을 모르는 무지하고 저주받은 자들’로 매도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정으로 율법의 정신을 알지 못하고 왜곡하고 있었던 쪽은 바로 바리새인들 자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세부 조항과 형식적인 규칙에만 집착하여, 율법의 진정한 본질인 사랑, 공의, 자비를 간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의 참된 의미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편견과 교만에 사로잡혀 그 진리를 완강히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권위를 지닌 예수님의 말씀과, 진리를 외면하는 바리새인들의 오만한 태도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2) 니고데모의 반응(50-52)

 

예수님을 향한 유대 지도자들의 태도가 점점 더 적대적으로 변해갈 때,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니고데모가 용기 있는 항변을 시작합니다. 본문은 이 인물이 앞서 요한복음 3장 1-15절에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그 니고데모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요한복음에서 그의 두 번째 등장이자, 마지막으로는 요한복음 19장 38-42절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는 데 일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니고데모의 항의는 명백했습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는가?” 그는 이 발언으로 자신도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율법의 참된 정신을 언급하며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 비록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옹호하는 그의 태도에서는 깊어진 신뢰와 변화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자기희생을 각오한 실천적 믿음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어떤 일을 판결하기 전에 허망한 소문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양측의 말을 먼저 들어보아야 합니다(신명기 1:16-17, 17:2-5, 19:15-19). 재판관은 최종 판단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니고데모의 항변을 듣고 그를 예수님과 같은 부류로 엮어 폄하하려 했습니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52)라고 말한 것은 갈릴리 출신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발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호세아, 나훔과 같은 선지자들이 갈릴리 지방 출신이었으며, 특히 요나는 갈릴리 지방 가드 헤벨 사람으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바벨론 탈무드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어떤 고을이나 지파에서도 선지자가 나지 않은 곳은 없다고 합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주장이 사실과 다름을 보여줍니다.

 

니고데모는 이미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바리새인들 앞에서 변호의 발언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가 범법자라는 분명한 증거도 없는데, 벌써부터 말로 판결을 하느냐? 이렇게 행동하는 자체가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냐?"고 의의를 제기했습니다. 자신의 신변에 불이익이 닥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옹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의 용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이러한 믿음의 용기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시대의 영적인 위기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영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세상에 묻혀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에서는 성도로서의 자세를 갖추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죄악을 함께 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니고데모와 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변호해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담대하게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 우리도 정직하게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은 사실 예수님 자체를 비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우리 성도들이 성도답게 살지 않는 모습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수의 근원이시며, 그분을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의 논리와 종교적 전통 속에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갈등합니다. 진리의 말씀 앞에서는 누구도 중립적일 수 없으며, 각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자에게는 성령의 생수가 흘러넘쳐 다른 사람에게도 생명을 전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단순한 교사나 선지자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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