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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07-02)


성전에서 참된 공의를 가르치신 예수님

요한복음 7장 14-24절


 

우리가 흔히 ‘색안경을 끼고 본다’는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갇혀 모든 것을 주관적으로 판단하곤 합니다. 이러한 편협한 시각은 본질을 놓치고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하며, 당사자는 물론 주변에도 불필요한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은 겉모습이 아닌 그 본질과 진실을 바라보고,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줍니다. 진정으로 깨어있는 시각은 편견을 벗어나 참된 모습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 예수님께서 초막절 성전에서 권위 있게 가르치시자 많은 이들이 놀랐고,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과 다른 방식으로 인해 그분을 귀신 들렸다며 매도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편견 어린 시선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재단하지 말고, 그 본질을 보고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진정한 지혜와 사랑은 편견을 넘어선 열린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성전에서 가르치는 예수님(14-18)

우리의 말과 행동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늘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나 영향력이 자신의 명성이나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참된 진리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더 큰 존재의 뜻을 온전히 전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합니다. 따라서, 스스로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렵지만, 근원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거짓됨이 없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진리를 행하려는 열망을 가진 사람만이 진정한 가르침을 분별하고 따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4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4-18)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에 제자들의 예상과 달리,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몰래 예루살렘에 오르셨습니다. 그곳에는 자신을 오해하고 죽이려 하거나 흥밋거리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려는 목적을 굳건히 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사명 완수를 향한 흔들림 없는 결단과 인내를 보여줍니다.

 

(1) 성전에서 가르치는 예수님(14-15)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의 한가운데, 수많은 인파가 모인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14).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었기에,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쉽게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듣는 모든 이들이 경탄을 금치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15) 하며 의아해했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예수님의 교훈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탁월한 통찰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당시의 일반적인 가르침 방식과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의 체계적인 교육 방식에 따르면, 랍비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승에게 배워야 했으며, 가르칠 때는 반드시 유명한 랍비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스승 랍비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우지 않은 자”로 단정했으며, 그가 어떻게 그토록 깊이 있는 율법과 랍비적 교훈(여기서 ‘글’은 구약 성경을 넘어 미쉬나, 게마라 등 율법 해석 전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을 알고 가르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심문하려 한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어떤 정규 교육 과정을 받으셨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가르침은 보통 랍비들의 가르침을 훨씬 뛰어넘는 권위와 깊이를 가졌습니다(마태복음 7:28-29). 유대인 아이들은 보통 6세부터 율법 교육을 시작하여, 더 높은 교육을 위해 예루살렘의 전문 교육기관에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교육기관이 아닌, 오직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아 사람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에(7:16), 그분의 말씀은 근원부터 달랐고 참된 권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2) 예수님의 교훈(16-17)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놀라워하는 무리는 그분의 가르침의 출처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직접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고 답변하시며, 당신의 모든 가르침이 자신의 뜻이나 사상이 아닌,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교훈이 곧 하나님의 가르침이며, 완전한 신적 권위를 가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신명기 18장 18절의 예언과 맞닿아 있습니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신명기 18:18)라는 구절처럼, 예수님께서는 마치 마지막 시대에 보내심을 받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자신이 가르치는 모든 교훈이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께서 그 입에 두신 말씀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명한 랍비들에게 배운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기에 논란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온전히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17). 이러한 순수한 의도를 가진 이들은 예수님의 교훈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행하려는 의도가 없었기에, 예수님의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혹은 예수님 스스로의 말인지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오늘날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사명과 책임을 부여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자신의 생각이나 사상을 덧붙이거나 왜곡하지 않고, 오직 주어진 복음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전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항상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려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말씀을 전하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며, 철저히 겸손한 자세로 주님의 메시지를 대언해야 할 것입니다.

 

(3) 영광을 구하는 자(18)

 

예수님께서는 잠시도 당신 스스로의 영광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41). 오직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만을 드러내시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18, 요한복음 8:50). 예수님의 가르침이 참될 수 있었던 것은 그분께서 당신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기 때문입니다(18).

 

반면, 자신의 뜻과 사상을 내세워 자기 영광만을 드러내려 하는 이들은 결코 진정으로 높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18). 그러나 자신을 보내신 분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고, 그분이 주신 메시지를 성실히 전하는 사람은 그 어떤 불의함도 없이 정당하고 온전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오늘날 말씀을 묵상하거나 연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성실히 준행하기 위한 묵상과 연구가 결코 개인의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10:31).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자신이 과연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애쓰고 있는지 항상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고린도후서 4:5). 참된 신앙의 길은 언제나 자기 부인과 하나님 영광을 향한 온전한 헌신에 있습니다(베드로전서 4:11).

 

안식일 율법과 예수님의 치유(19-24)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갇혀 그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늘 성찰해야 합니다. 단순히 영적인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을 넘어, 배운 진리를 삶 속에서 겸손하게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성장입니다. 지식만으로 자칫 교만해질 수 있으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과 사랑이 더욱 중요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나 엄격한 규정만을 앞세워 타인을 판단하기보다, 사랑과 은혜의 정신으로 신앙의 참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높이는 율법주의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19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24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19-24)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안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에게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이는 말씀을 많이 아는 것보다 단 한 말씀이라도 순종하여 지키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성경 지식만으로는 참된 거룩함에 이르지 못하며, 오히려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성숙은 말씀을 삶 속에서 살아낼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결국, 순종만이 우리를 믿음의 참된 자리로 이끄는 유일한 길입니다.

 

(1) 율법을 지키는 자(19)

 

스스로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라 자부했던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충격적인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바로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19)는 준엄한 선포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들이 어떤 계명을 어겼다는 지적을 넘어, 율법을 대하는 그들의 근본적인 태도와 마음가짐을 꿰뚫어 보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신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관습, 즉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는 행위였습니다(22). 안식일에는 어떤 노동도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출애굽기 20:10), 유대인들은 생후 8일 된 남자아이에게 행하는 할례가 그 어떤 율법보다 우선한다는 생각으로 안식일에도 할례를 시행했습니다(22; 레위기 12:3). 이는 그들이 특정 율법은 예외적으로 적용하면서, 정작 생명을 살리는 예수님의 안식일 치유는 정죄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음을 의미합니다 (23; 요한복음 5:16-18).

 

예수님의 지적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형식적 준수에만 얽매여, 그 안에 담긴 사랑과 공의, 그리고 생명 존중이라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마태복음 23:23). 그들의 율법 준수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결의나 생명력 대신, 외식적인 행위만 남아 있었습니다(마태복음 15:7-9). 율법의 완성이자 본질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로마서 10:4), 오히려 그분을 죽이려 했던 그들의 행동은(요한복음 5:18) 이러한 형식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결과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율법주의’에 얽매여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갈라디아서 5:1), 형식적인 율법 준수를 놓고 자신과 타인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교만과 질투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갈라디아서 5:26). 우리는 유대인들의 사례를 통해 율법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고, 형식보다는 사랑과 은혜의 정신으로 신앙의 본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로마서 13:10).

 

(2) 예수님에게 귀신 들렸다고 말하는 유대인(20)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 종교 권력자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심각한 경고를 던지셨을 때(19), 이를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는 의도(요한복음 5:18)를 알지 못했던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마치 “당신은 미쳤다, 도대체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인가?”하는 의문을 담고 있었습니다(20).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정신적으로 이상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하며, 그 말씀을 망상으로 치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께서 직면하셨던 깊은 오해와 그분의 메시지가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생소하게 들렸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율법의 정신을 벗어나 형식주의에 매몰된 권력자들의 실체와, 그들의 은밀한 계획을 알지 못했던 대중 사이의 간극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3) 안식일에 행한 일(21-2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은(요한복음 5:1-9) 당시 유대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곧바로 일어나 자신의 자리를 들고 걸었으나, 안식일에 이러한 행위는(요한복음 5:8) 곧바로 안식일 규정 위반으로 지적받았습니다(요한복음 5:10). 더욱이 이 기적을 행한 이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요한복음 5:15),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큰 관심을 보이게 되었습니다(요한복음 5:16).

 

유대인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며 비난하자 (요한복음 5장 16절),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교의 중요한 관습이었던 안식일 할례를 언급하시며 당신의 행위를 정당화하셨습니다(22-23). 유대인들은 할례를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규례로 철저히 지키고 있었는데, 심지어 남자아이가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일지라도 할례를 시행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22; 레위기 12:3).

 

예수님께서는 할례가 단지 모세의 율법에만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어 조상들을 통해 이어져 온 오랜 언약적 관습이었음을 상기시키셨습니다(22; 창세기 17:9-14). 즉, 유대인들 스스로도 안식일에도 할례를 시행하며 몸의 한 부분을 거룩하게 할 수 있다면, 하물며 사람의 전신을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행위가 어찌 비난받을 수 있느냐는 심오한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23).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형식적인 준수보다는 그 안에 담긴 생명 존중과 사랑이라는 참된 정신이 더욱 중요함을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23:23; 마태복음 22:37-40). 동시에 자신의 편의와 해석에 따라 율법을 적용하고, 다른 이를 쉽게 정죄하는 태도에 대한 준엄한 경고이기도 했습니다(24). 이처럼 외모로 판단하고 본질을 놓치는 태도는(24)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마주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한계이자 교훈이 됩니다.

 

(4) 안식일에 행한 할례와 치유(23-24)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의 율법 해석과 판단의 오류를 명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않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시행하여 신체의 한 부분을 정결하게 하는 것처럼, 안식일에 온전한 사람을 치유하신 행위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논증하셨습니다. 만약 안식일에 신체의 일부분을 정결하게 하는 할례가 허용된다면, 하물며 사람의 전신을 건강하게 회복시킨 치유 행위는 더욱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은 안식일 규정 위반을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려 할 정도로 분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분노와 판단이 공의롭지 못하며, 오직 외적인 모습만 보고 내면의 진실을 헤아리지 못한 결과라고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 이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와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정신보다, 형식적인 율법의 테두리에 갇혀 본질을 놓친 그들의 오류를 날카롭게 꼬집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참된 판단의 중요성을 살펴보았습니다. 형식적인 지식이나 외적인 판단에 갇히는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려는 순수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했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편견의 색안경을 벗고 공의롭게 판단하며, 율법의 참된 정신인 사랑과 생명을 추구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오직 주님께 순종하며 그분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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