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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06-04)


생명의 떡에 대한 논쟁

요한복음 6장 41-59절


 

우리 앞에는 영원한 운명을 엇갈리게 할 두 가지 중대한 선택지가 놓여 있습니다.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을 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생명의 떡’ 삼아 먹고 마심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다른 한쪽은 의심과 불신, 그리고 완고한 거부로 인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어두운 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로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선언’은 무엇이며, 그분을 믿고 따르기로 ‘선택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심오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까?

 

 

  •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선언하시자,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수군거리며 논쟁을 벌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분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만이 생명의 떡을 취할 수 있고, 참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본문 말씀을 통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깊이 맛보려 나아가겠습니다.

 

가버다움 회당에 사람들과 대화1(41-51)

우리나라 속담에 “생무살인(生巫殺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돌팔이 무당이 사람을 죽인다는 의미로, 어설프게 아는 지식이 오히려 큰 해를 끼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본질적이고 진실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오직 눈에 보이는 겉모습과 피상적인 정보에만 매몰되었습니다.

 

41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42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4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41-51)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후에도, 무리들은 육신적인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계속해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양식을 공급받기를 원했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육체적인 갈망을 넘어 영적인 양식에 대한 심오한 가르침을 제시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러한 구원의 사역을 이루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셨다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1) 생명의 떡을 거부한 유대인들(41-42)

 

가버나움 회당(요한복음 6:59)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논쟁 상대들과 마주합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하며 빵을 구했던 무리가 이전 대화의 중심에 있었다면, 이번에는 가버나움 지역의 유대인들이 그 대상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자(41), 그 말씀에 크게 불쾌해하며 못마땅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는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이라는 표현은 종종 예수님을 대적하거나 종교적 기득권을 대표하는 이들을 지칭할 때 사용됩니다. 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한 핵심적인 이유는 바로 그분의 인간적인 가족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들의 시선은 곧바로 예수님의 육신적인 배경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말하느냐?”(42)라고 수군거리며 서로 논쟁했습니다.

 

그들은 믿지 못할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아내려 했으며, 이는 믿어야 할 이유를 탐색하기보다 믿지 않아야 할 근거를 먼저 찾는 인간의 보편적인 경향을 반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목수 요셉의 아들이며 그의 가족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신적 기원에 대한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앞서 무리가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이 '빵'이라는 물리적인 필요를 중심으로 한 욕심 때문이었다면, 가버나움 유대인들의 경우는 예수님에 대한 뿌리 깊은 선입견과 편견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대한 예수의 응답(43-51)

 

예수님의 부모를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불신과 깊은 갈등 속에서 진리이신 그분께 겸손히 묻기보다는 서로 수군거리며 의혹을 토로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43)고 단호히 말씀하시며, 앞서 무리에게 제시했던 생명의 떡에 대한 가르침을 역순으로 다시 풀어 설명하셨습니다. 그 설명에는 세 가지 핵심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구원 과정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예수님께 이끌지 않으시면 누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44). 둘째,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그 결과는 분명합니다. 믿음은 곧 예수님께 나아가는 행위이며, 그 결과는 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45). 셋째, 예수님의 정체성은 세상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46).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요소들을 하나씩 부연 설명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하며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는 이사야 54장 13절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께 듣고 배운 모든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온다고 선언하셨습니다(45). 여기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첫째,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었을까?’입니다. 오순절 성령 임재 이전에는 일반인이 하나님을 직접 보거나 배우는 일이 극히 드물었고, 당시에는 성령의 선지자 또한 드물어 선지자를 통한 가르침도 거의 없었습니다. 율법만이 유일한 통로로 여겨졌으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방식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구약 인용은 하나님의 미래 회복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이는 예수님을 통해 시작된 약속의 성취, 곧 구원의 회복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배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를 본 자는 오직 그분에게서 온 예수님밖에 없다는 요한복음 1장 18절의 첨언(46)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한 존재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계시하여 그분을 알게 하는 통로가 되십니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배울 수 있으며, 그 과정을 통해 예수님께 나아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질문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배웠는데, 왜 예수님에게 가는가?’입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가는 것이 두 단계를 가짐을 이해하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 단계는 단순히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을 보고 듣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믿음으로 반응하고 예수님께 삶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첫 단계가 반드시 두 번째 단계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표적과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 자들 중, 진정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참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는 자들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둘째, 믿음의 결과는 명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하십니다(47). 이는 하나님과의 현재적 관계 연결과 더불어 부활을 통한 미래적 관계 완성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포괄적인 표현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정체성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 선포하시며(48; 참조 35), 자신의 하늘 기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나아가 광야의 만나와 대조하여 자신의 탁월성을 강조하시는데, 과거 광야에서 먹은 만나가 사람의 생명을 잠시 유지시켰을 뿐이라면, 자신이 주는 것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49-50).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충격적인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 하시면서, 자신이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당신의 살(육체)이며, 그것을 먹어야 영생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51). 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상상 이상의 파격적인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가버다움 회당에 사람들과 대화2(52-59)

생명의 양식을 취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불신 가운데 수군거리는 이들이 아니라, 오직 말씀으로 교훈을 받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읽고 듣는 그 말씀이 곧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생명력을 담은 귀한 양식임을 깊이 인식한다면, 우리는 결코 이를 소홀히 하거나 성급히 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땅히 경외하는 마음으로 깊이 묵상하며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52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52-59)

 

생명의 양식은 누구나 취할 수 있지만,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을 때에만 진정으로 가능합니다. 이 생명의 양식을 진정으로 먹는 자라면,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이들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을 친히 인도하시며, 마지막 날에는 그들 모두를 영원한 생명으로 살리실 것입니다.

 

(1) 살과 피에 관한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52)

 

예상했던 대로, 유대인들의 영적인 무지는 계속해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사람의 살을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서로 논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영적인 의미, 즉 그분의 살과 피가 상징하는 대속적인 죽음을 깨닫지 못한 채 문자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인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죽음을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또 다른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메시아 사상과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강한 힘으로 싸워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 왕이 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줄곧 자신의 죽음을 언급하셨으니, 이는 승리만을 고대하던 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이나 다른 유대 고대 문헌들이 메시아의 고난을 전혀 암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으로,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게 될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구약의 다양한 제사들, 특히 대속죄일에 드려지는 희생 제물들은 메시아의 대속적 고난을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중요한 그림자였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 가야바조차도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온 민족이 구원을 받는다는 원리를 역설적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눈이 영적으로 가려져 있었기에, 구약의 이러한 계시들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스승의 고난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비로소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이후에야 구약의 다양한 본문들이 메시아의 고난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었는지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살과 피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53-59)

 

예수님의 “사람의 살을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는 유대인들의 반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심지어 ‘피까지 마셔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시며(53), 이는 구약 율법에서 ‘피째 먹지 말라’는 엄격한 규례(창세기 9:4; 레위기 17:11, 14)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문자 그대로 ‘설상가상’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이러한 난해한 가르침을 고집하신 이유를 몇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상징적인 표현의 필연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함을 네 번이나 반복 강조하시고(53-56), 심지어 57절에서는 “나를 먹는 자”라는 직접적인 표현까지 사용하십니다. 이처럼 오해의 소지가 다분함에도 불구하고 상징적 언어를 고집하신 것은, 구원 과정의 요소들이 본래 추상적 개념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역사, 믿음과 영생과 같은 영적인 실재는 구체적인 언어로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기에 상징이나 비유적 언어의 사용은 불가피합니다.

 

둘째, 유대인들의 깊은 불신 때문입니다. 당시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들을 마음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했던 무리는 이득에 눈이 멀어 있었고, 가버나움 회당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육신적인 배경에 대한 뿌리 깊은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하나님의 구원 과정을 그들의 익숙한 용어로 설명하더라도, 그들의 불신은 여전했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사고의 틀을 깨뜨리는 ‘충격 요법’을 사용하셨을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 과정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오만과 무지를 깨뜨리고 진지하게 예수님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그 의미를 고민하고 질문하게 만들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그 누구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담긴 이면의 의미를 묻지 않았으니, 이는 그들의 영적인 무관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살과 피’의 상징을 사용하셨겠습니까? 몇 가지 단초를 통해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음식과 생명의 연결성입니다. 현재의 논의는 오병이어라는 육체적인 음식에서 시작하여, 만나를 통한 일시적 생명 유지와 하늘에서 온 참된 빵을 통한 영생의 대조로 확장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음식(빵)’과 ‘생명’을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피’에 대한 이해입니다. 피는 음료가 아니기에 음식으로 직접 연결하기는 어렵지만, 이 또한 ‘생명’과의 깊은 관련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피는 곧 생명 자체를 의미했으며(창세기 9:4; 레위기 17:11, 14), 피를 먹는 것은 곧 생명을 취하는 행위이기에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는, 그분의 피를 마시는 것이 또 다른 ‘생명’, 즉 영적인 새 생명을 얻는 상징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56)라는 설명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마치 물리적인 빵이 우리 몸에 들어가 생명을 유지시키고, 피를 통해 또 다른 생명이 몸 안에 자리하듯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생명(살과 피)’을 취하는 자 안에 예수님께서 거하시고, 예수님 역시 그 사람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생명이기에, 그를 통해 새 생명을 얻는 자는 곧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이 됩니다(57). 이런 관점에서 ‘살과 피’의 상징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유지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하고 강력한 상징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셋째, ‘살과 피’가 의미하는 궁극적인 실제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로 인한 구원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이루어질 생명 부여를 예고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존재가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어 다른 존재의 양식이 됨으로써 그 존재를 살리듯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심으로써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57).


예수님께서 참된 생명의 양식이심을 밝히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불신앙으로 수군거렸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할 때만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양식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구원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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