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요한복음(06-02)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6장 16-29절


 

우리는 종종 눈앞의 이득이나 임시적 만족에 매몰되어 삶의 본질을 잊곤 합니다. 진정한 평화와 성숙은 물질적 풍요를 넘어선 깊은 내면의 가치를 추구할 때 비로소 시작되지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겉모습에 흔들리지 않고 진실된 관계와 신뢰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한순간의 위안이 아닌 영원한 유익을 주는 근본적인 믿음과 지혜를 붙잡을 때 삶은 진정으로 풍요로워집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우리를 끊임없이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것입니다.

 

  •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 기적 후에도 군중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산으로 떠나신 예수님은, 폭풍우 속에서 고난받던 제자들의 배에 물 위를 걸어오심으로써 자신의 신적 권능과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적을 넘어선 강력한 계시였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당신이 육체의 ‘썩을 양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심을 강조하시며, 그분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임을 가르치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16-21)

군인의 훈련소가 병사를 단련시켜 참된 군인으로 만드는 과정이듯, 성도들의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로 빚어지는 훈련입니다. 따라서 고난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물어야 합니다. 첫째, 자신의 삶에 하나님 자녀답지 못한 모습은 없는지 겸허히 돌아보고 회개하며, 둘째, 이 고난이 제자로 변화되기 위한 훈련임을 깨닫고 더 깊은 제자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16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16-21)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직후, 예수님께서는 홀로 산에 오르사 기도하셨습니다(요한복음 6:15). 당시 제자들은 기적을 통해 수많은 군중의 열광적인 기대와 환호를 직접 목격했을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자신들의 결정이 옳았음을 확신하며 깊은 만족감과 함께 성공에 도취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또 다른 훈련의 장으로 인도하시며, 일시적인 성공이나 군중의 환호에 좌우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온전히 빚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1) 풍랑과 제자들의 고생(16-18)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 이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홀로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15). 당시 제자들은 기적을 통해 맛본 성공과 군중의 환호에 도취되어, 예수님의 홀로 계신 시간을 심각한 계획 수립이나 중대한 결정의 과정으로 이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달랐습니다. 이미 어둠이 시작된 저녁(16),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디베랴 갈릴리 바다로 내려가 가버나움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17). 이 장면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과 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을 처음으로 묘사하는데, 어둠 속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영적인 이해와 시야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암시하기도 합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시지 않았다”는 본문의 표현은, 제자들이 처한 상황과 예수님의 때가 이르기 전까지의 기다림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바다를 건너던 제자들은 강한 바람과 거친 파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18). 잔뼈 굵은 어부들까지 포함된 그들은 힘겹게 노를 저으며 필사적으로 상황을 벗어나려 했지만,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요동치는 바다를 잠잠케 할 수 없었습니다. 밤 사경(새벽 3-6시)까지 10여 리나 나아갔음에도 바다 한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이 캄캄한 터널과 같은 고난은 그들의 한계를 드러내었으나, 동시에 모든 인간적인 기대를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왔습니다.

 

(2) 물 위를 걸어온 예수님(19-21)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거친 파도와 씨름하며 고통받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그들이 탄 배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19). 이는 인간의 이성과 이해를 초월하는 사건이었기에 제자들은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참 인간이시며 동시에 만유를 다스리시는 참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보여주는 신적 계시의 순간이었습니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내니 두려워 말라!”(20)고 선포하시며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셨습니다. 여기서 “내니(에고 에이미, ἐγὼ εἰμί)”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3장 14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신적 계시와 그 맥을 같이하며, 예수님께서 당신이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친히 알리신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임재하신 하나님을 인식하도록 이끄는 놀라운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들이 그분을 배 안으로 기쁨으로 모시자(21), 놀랍게도 그들이 탄 배는 즉시 목적지인 가버나움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임재로 인해 자연의 물리적인 제약까지 초월하는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인 줄 알지 못해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그분을 인식하고 영접하자, 그들의 두려움은 기쁨과 평안으로 바뀌었으며(21), 마태복음의 기록처럼 풍랑까지도 즉시 잠잠해졌습니다(마태복음 14:32).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광풍 속에서 물 위로 걸어오셨던 그분이 지금도 혼돈과 절망으로 가득 찬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당신의 삶을 잠식하려는 폭풍 같은 문제와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만물을 다스리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때, 우리의 모든 삶의 폭풍은 잔잔해지고 참된 해결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22-29)

예수님을 통한 은혜의 체험이 참된 믿음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통해 그분이 누구신지 바르게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순한 감정적 체험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주이심을 깊이 이해할 때 신앙이 성장합니다. 또한 모든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와 찬양으로 경배할 때, 우리의 믿음은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이렇게 말씀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바탕으로 은혜를 체험할 때, 우리의 신앙은 삶 속에서 온전한 열매로 나타나는 참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22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22-29)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들의 모습은 단순히 순수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진정으로 믿었다기보다는, 그 표적을 통해 자신들이 얻었던 유익을 다시 누리기 위해 그분을 뒤쫓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진정한 관심은 예수님의 인격이나 구원에 있지 않았고, 오직 자신들에게 돌아올 유익과 편익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1) 배경 상황(22-24)

 

본문에서 무리들은 배부르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22).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장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무리들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궁금증 때문이 아니라, 갈릴리 바다 건너편까지 직접 찾아나섰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는 욕심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자신들의 뜻대로 강권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요한복음 6:14-15).

 

이러한 모습은 사람들의 믿음이 때로 참된 신앙보다 자신의 욕심과 편익에 치우치기 쉽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즉, 사람들은 영적 진리보다 당장의 배부름이나 편리함, 또는 권력과 통제에 더 마음이 끌리기 쉽다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외형적으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듯 보여도, 실제 내면의 동기는 자신의 필요와 욕심에 집중되어 있을 수 있음을 성찰하게 합니다.

 

(2) 두 그룹의 대화(25-29)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의 동기를 꿰뚫어보시며, 그들이 육체적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주님을 찾아왔음을 지적하셨습니다(26). 이어 예수님은 그들을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하시며(27), 잠시 있다 사라질 양식 대신 영생에 이르도록 영원히 지속되는 양식을 추구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썩을 양식’은 세상의 물질적 추구와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줄 왕으로 삼으려 했던 것과 같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행하는 모든 일을 포함합니다. 반면, ‘영생하도록 없어지지 아니할 양식’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헛된 것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친히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시며 동시에 이 양식을 공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인류에게 영생을 주는 양식이 되시며, 동시에 그 양식을 주시는 분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인침’을 받으셨습니다. ‘인치다’는 말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는데, 이는 어떤 비밀을 감추는 것, 소유권을 나타내는 표식, 혹은 진실임을 증명하는 것(요한복음 3:33) 등으로 사용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표시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영생을 주시는 권위를 부여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명백한 증언을 통해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세상에 드러내셨고, 이에 따라 예수님 역시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에 대해 무리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라고 되묻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어떤 특정한 행위를 함으로써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영생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무리가 ‘하나님의 일들’을 복수형으로 표현하며 여러 가지 행위를 기대했던 것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고 단수형으로 말씀하시며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일’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는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오직 ‘믿음’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일회적인 사건이나 정적인 상태로만 해석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은 지속적이고 동적인 특성을 지니며, 구체적인 행위를 수반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첫째, 믿음은 예수님을 단 한 번 영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지속적으로 교제하는 과정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점이지만, 이는 단지 기초를 놓는 일에 불과합니다. 그 기초 위에 믿음의 집을 견고히 세워나가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둘째, 요한복음의 믿음은 반드시 행위를 수반합니다. 말로만 하는 믿음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는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삶의 온전한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계명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셋째, 믿음은 곧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27). ‘썩을 양식’이 나의 세상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일이라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믿음’으로 표현하신 의도는, 단순히 단회적인 혹은 기초적인 믿음에만 국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신자의 모든 삶이 믿음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그 삶 전체가 곧 ‘하나님의 일’이 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단수형으로 표현된 것은, 신앙인의 삶의 각 부분이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고, 한 개인의 모든 신앙적 행위와 태도가 서로 연결되어 온전한 하나의 믿음의 삶을 이루며, 그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일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삶, 그것이 바로 참된 믿음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유일한 일인 것입니다.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육적인 배부름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는 오늘날 사람들도 영적 양식이 풍성함에도 육신적 유익에 마음을 빼앗기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영적 굶주림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참된 만족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참된 주로 모시며, 감사와 찬양으로 삶을 화답해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