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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05-03)


메시야인 예수님에 대한 증언들

요한복음 5장 30-47절


 

우리의 삶과 행위의 진정한 권위는 외부의 인정이나 시선이 아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나옵니다. 삶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증거들은 우리가 믿는 진리가 참됨을 확증해 주지만, 인간적인 영광 추구나 타인의 평가에 얽매이는 것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형식적인 종교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나아가,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믿음의 유산과 기록들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신앙생활에 귀한 통찰과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행위와 판단이 오직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임을 밝히시며, 이를 통해 자신의 판단이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자신의 권위를 증명하기 위해 세례 요한의 증언, 행하신 이적,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직접 증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참 생명이신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았고, 서로에게서 영광을 취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영광을 구하지 않았기에 믿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의지하던 모세의 율법이 오히려 자신들을 고발할 것이며, 모세의 기록을 참으로 믿었다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른 삶과 판단(30)

삶의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성찰하고 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타인의 인정이나 외적인 시선에 얽매이기보다, 오직 올바른 목적과 변치 않는 영적인 기준에 따라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견해만을 고집하는 오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태도로 관계 속에서 조화로운 행동을 추구해야 합니다. 결국, 이는 삶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중심에 두고, 우리의 모든 판단과 선택을 조율해 나가는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를 요구합니다.

 

30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30)

 

베다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이후에 유대인들은 안식일 논쟁으로 예수님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치유 받는 38년 된 병자가 낫은 채 있습니다. 이 일은 사람들은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하시길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병을 고쳐주셨던데,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하나님께서 다시 분노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 사탄이 귀신의 힘을 빌려서 예수님께서 하신 치유 사역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 율법을 만드신 로고스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으니라.’ 그 말씀이신 예수님입니다.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두고, 율법을 어겼다고 하니, 그들이 얼마나 율법과 먼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근거가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노라”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선 이 땅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사역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려고 사역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되심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가야 했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이 감당한 사명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것들(31-40)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이미 충분히 주어졌기에 믿지 않는 것은 그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성도들 중에서도 미혹을 받아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역사가 아닌 신화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수호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명백한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31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32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33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4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35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36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37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38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31-40)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만 이 세상에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증언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증언하는 것은 법적으로 효력이 없어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증언하다’를 통해 정체성과 사역에 대한 예수님의 변호가 신뢰성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1) 예수님 사역에 대한 증인들(31-32)

 

먼저, 예수님의 사역에는 분명한 증인들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31-32).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한 증언을 언급하시며 ‘참되다’고 하신 것은, 단순한 사실을 넘어 법률적으로 ‘유효하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증인의 효력은 그 진실함에 있으며(31), 이 진실함은 객관성과 합리성이 담보될 때 그 능력이 극대화됩니다. 구약 율법에서도 법정 증언의 효력을 위해 두세 증인을 요구했듯이(신명기 19:15), 예수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분의 사역에 대한 변호가 혼자만의 증언이었다면 신빙성을 얻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32)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을 지지하는 다른 증인들이 있음을 밝히시고, 그들의 증언이 확실히 참됨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2) 세례 요한의 증거(33-35)

 

첫 번째로 등장하는 증인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예수님과 논쟁하고 있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과거 요한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을 때, 요한은 자신의 본분인 진리, 곧 예수님에 대해 명확히 증언했었습니다(33, 요한복음 1:19-27 참조). 그는 스스로 참 빛은 아니었으나, 참 빛이신 예수님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 어둠을 불꽃처럼 밝히는 ‘등불’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 즉 ‘너희’도 잠시나마 그의 빛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기뻐하기를 원했습니다(35). 실제로 유대인들은 한때 요한이 혹 메시아가 아닐까 기대하기도 했었지요.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는 그의 증언에 연연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34). 이는 요한의 증거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적인 증거보다 훨씬 더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하신 증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을 당신의 증인 중 하나로 언급하신 것은 전적으로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한때 메시아로까지 기대했던 요한이 소개한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깨달아, 바른 믿음을 통해 구원 얻을 귀한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34절).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성을 변호하시는 궁극적인 사랑의 목적을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이 없어도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참된 증인 되시는 하나님의 증언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세상의 지지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분명한 원칙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3) 요한보다 뛰어난 증거들(36-40)

 

3-1. 예수님의 사역 자체(36)

두 번째 증거는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사역들입니다(36절).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라고 말씀하시듯, 이 사역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 직접 행하신 일들이기에, 세례 요한의 간접적인 증언보다 훨씬 강력하고 직접적인 증거가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보이신 기적들은 당시 그 어떤 사람도 감히 행할 수 없었던 것이었기에, 예수님의 사역과 그분의 정체성이 명백히 신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표적(sign)’이 됩니다.

 

3-2. 하나님 자신이 증인(37-38)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가장 확실하고 궁극적인 증인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십니다(37-38).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스스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그분을 인식할 수 없지요. 그런데 그분께서 예수님을 계시자로 이 땅에 보내셔서 자신의 뜻과 마음을 알게 하셨고, 심지어는 예수님에 대해 직접 증언하셨습니다. 공관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나오실 때,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음성을 통해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로 확증하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3:17; 마가복음 1:11).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종교 지도자들은 이 분명하신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그분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계시자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3-3. 구약 성경이 증인(39-40)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이야말로 당신에 대한 증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39-40). 종교 지도자들은 약속된 메시아를 통한 영생, 즉 종말에 있을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 관계(예레미야 31:31-34 참조)를 포함하는 구원을 얻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성경을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1차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이 아닌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연구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볼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표적)들도 메시아의 능력이라기보다는 마술사나 무당의 능력처럼 곡해할 여지가 있다고 여겼습니다(마가복음 3:22 참조).

 

이처럼 허다하고 분명한 증거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38)고 말씀하셨듯이, 아무리 명백한 증거가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마음속에 자리 잡지 않으면 진정으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토대가 됩니다.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던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기록된 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 그분을 만나고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음에 대한 비판(41-47)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거나 개인적 이익을 좇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근원적인 진리로부터 오는 영광만을 갈망해야 합니다. 신앙은 외적인 형식이나 행위에 앞서, 진정으로 영원한 존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며, 내면에 그 사랑이 부족하다면 겉모습이 경건해도 그 신앙은 본질적으로 비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기대나 세상적인 기준에 맞지 않으면 참된 진리를 외면하고 편협한 생각에 갇히는 위험 또한 경고합니다. 결국, 시대를 초월한 참된 가르침과 그 근원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러한 깨달음만이 참된 영적 생명으로 이끌 수 있음을 이 본문은 강력히 상기시켜 줍니다.

 

41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5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41-47)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병자를 고치신 후 유대인들과 안식일 문제로 논쟁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단순히 표면적인 논쟁을 넘어, 그들의 깊은 불신을 지적하며 대화의 방향을 바꾸십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영적 상태를 꿰뚫어 보신 예수님의 통찰이자, 그들을 향한 사랑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1)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비판(41)

 

예수님께서는 먼저,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41)하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지금 그들을 향해 던지는 비판이 결코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송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순전히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며, 그들이 처한 영적 실상을 일깨우려는 거룩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시작점은 우리가 예수님의 비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초가 됩니다.

 

(2)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부재와 신앙의 모순(42)

 

예수님께서는 곧이어 유대인들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음을 내가 아노라”(42)는 실로 충격적인 말씀으로 그들의 핵심을 꿰뚫으십니다.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히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는 가장 경건하며 율법을 잘 지키는 자로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신앙의 근간이자 뿌리인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발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명기 6장 4-5절, 즉 쉐마 이스라엘은 율법 중 가장 우선되는 계명을 하나님과의 수직적 사랑의 관계로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이는 단순히 율법을 어기는 것을 넘어 우상숭배의 삶을 살고 있음을 의미하게 됩니다. 신앙적 자긍심이 높았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실로 엄청난 모욕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3) 자기 이익을 좇는 영광 추구의 문제점(43-44)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부재한 구체적인 모습을 부연 설명하십니다(43-44). 그분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그 사람은 영접하리라”(43) 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참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기대와 이익에 부합하는 가짜 메시아에게는 열광할 수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주후 132-135년 유대인이 로마에 저항할 당시, 당시 최고의 랍비 아키바는 반란군 지도자 바 코세바를 ‘별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 코크바라 부르며 메시아로 인정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하자 이후 랍비 문서는 그를 거짓의 아들인 바 코시바라 폄하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메시아의 인정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조건과 이익에 부합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기적이나, 예루살렘과 갈릴리에서 보여주신 수많은 표적들조차도 도리어 그들의 의심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고 묘사하십니다. 결국, 그들의 마음 중심에는 ‘자기 이익’이라는 변수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것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의 핵심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는 상황에서는 예수님을 통해 증거 되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가 결코 그들의 귀에 들릴 리 만무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에서 믿는다는 것이 더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4) 모세의 증언을 통한 정죄와 회개의 촉구(45-47)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45)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그들을 비판하고 계시지만, 그분의 궁극적인 의도는 최후 심판 때처럼 그들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일깨우려는 사랑의 촉구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불신을 간과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고, 그 심판의 기준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그토록 숭상하고 자랑으로 여기는 모세의 율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고 다른 이에게 ‘일’을 시켰다고 정죄했지만, 실상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거절하는 더욱 심각한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되 그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라고 하는지 확인하고(신명기 13:1-3), 말과 일의 증험이나 성취 여부로 분별하라고 가르쳤습니다(신명기 18:21-22).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고 그것을 확인하려 했던 태도 자체는 옳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기준에 의한다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은 참 선지자의 명확한 증거였기에, 그분이야말로 모세가 약속했던 '그 선지자', 즉 메시아이셨습니다(신명기 18: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는 모세보다 자기들의 평가가 더 옳다고 생각하는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모세를 존경하고 그가 준 율법을 중시한다고 입으로는 말했지만, 실제로는 모세나 하나님보다 자신들의 관심사와 이익을 더 우선시했던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 당신의 사역,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구약 성경을 통해 자신의 신성한 정체성을 분명히 확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대인들이 왜 그분을 믿지 못했는지를 깊이 탐색한 내용입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 사랑의 부재와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는 자기중심성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따른다고 자부하면서도 그가 증언한 예수님을 거부한 그들은 결국 비극적인 모순에 빠졌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형식적인 신앙을 넘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믿음의 본질을 되새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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