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05-01)

베데스다 연못에 임한 자비의 은총
요한복음 5장 1-18절
진정한 치유와 회복은 오랜 관습이나 외부 조건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서 비롯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무력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질문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영적 변화의 시작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의 표면적인 문제 해결을 넘어 죄로부터의 온전한 자유와 깊은 영적 깨달음을 추구하는 신앙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 사역은 인간이 세운 어떠한 규율이나 제약에도 얽매이지 않으심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오랜 무기력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주님의 능력 안에서 담대하게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명절을 맞아 베데스다 연못가에 가셨고, 그곳에서 38년 된 병자를 만나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그 병자가 대답하자, 예수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고, 그 즉시 그는 치유되어 자리를 들고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이 안식일이었기에 유대인들은 자리를 들고 가는 그를 보고 문제를 삼았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성전에서 그를 다시 만나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자신을 고쳐준 분이 예수님이심을 유대인들에게 알렸고,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길을 여는 믿음(1-4)
사람은 누구나 삶에서 어려움과 한계를 경험하지만, 단순한 기다림이나 환경의 변화로는 온전한 해결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복과 변화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더 큰 능력과 은혜에 의지할 때 가능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그분을 향한 기대와 신뢰를 가질 때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분께 마음을 열고 나아가는 적극적인 태도를 요구합니다.
1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1-4)
예수님께서는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셨으나, 종교가 희망을 주지 못하여 자신만의 신화에 기대어 살아가는 이들의 현실을 마주하셨습니다. 특히 ‘자비의 집’이라 불리는 벳새다 연못에는 물이 동할 때 치유된다는 신화를 믿고 수많은 병자들이 비참하게 모여 있었습니다. 그곳은 은혜가 아닌 치열한 경쟁의 장소였으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절망적이고 비정한 현장에 임하셨습니다.
(1)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가신 예수님(1)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 사역하셨음을 소개합니다(1). 이 시기, 예수님께서는 명절을 지키기 위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지요. 유대인의 명절로는 유월절, 초막절, 칠칠절, 부림절, 나팔절 등이 있습니다. 그중 유월절, 초막절, 칠칠절에는 모든 유대인이 매년 예루살렘 성전에 나아가 예배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 언급된 이 명절이 구체적으로 어느 명절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명절’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명절은 특정한 일들을 기념하며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기리는 날로,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많은 인파가 모여 즐거운 술렁임과 축제의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뒤편에는 이러한 명절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현장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는 어쩌면 예루살렘 성전, 곧 유대교가 숨기고 싶었던 현실의 민낯이기도 합니다. 유대교는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지요.
현실의 종교가 이들을 외면하고,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할 때, 사람들은 절망 속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죽음을 기다리지만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자신들만의 희망을 만들어내는데, 우리는 이것을 ‘신화(神話)’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2) 벳새다 연못과 치유를 기다리는 병자들(2-4)
예수님께서 표적 사건을 행하신 장소는 예루살렘 동북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양의 문'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성전에 바칠 양들을 씻기 위해 사용되었던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죠. 이 연못가에는 벽 없이 기둥만으로 이루어진 다섯 개의 행랑이 있었는데, 병자들이 그곳에서 비나 이슬을 피해 머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하는 것은 사건의 역사성을 강조하며, 독자들이 이 표적의 역사적 신뢰성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에도 신화가 존재했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지만, 정작 이곳에는 자비와는 거리가 먼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는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마치 종합병원을 방불케 할 만큼 온갖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이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명절의 화려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처절한 현장이 바로 이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휴양이 아닌 치료를 갈망하며 하나의 전설에 매달려 모여들었습니다.
그 신화는 이러했습니다. 천사가 물을 휘저어 움직이는 동안, 가장 먼저 연못에 들어가는 병자는 어떤 병이든 치유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죠. 누가 이 이야기를 만들었는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어떤 근거가 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은 그 신화가 깨지지 않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어쩌다가 한 번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누구도 그것을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말했다가는 그 신화 하나에 삶의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모든 희망을 빼앗는 잔인한 사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치유받는 일은 분명 기적이었고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치유 과정은 결코 ‘베데스다’, 곧 ‘은혜의 집’이라는 이름처럼 은혜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참된 안식이 없었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짓된 안식만이 존재했습니다. 겉으로는 서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치열한 경쟁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들은 물이 동하기만 하면 ‘누가 먼저 뛰어 들어갈 것인가?’하는 긴장감 속에 놓인 경쟁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물에 먼저 뛰어 들어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번번이 씁쓸한 패배감을 맛보아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이러한 신화는 참된 진리와 신비가 아닌, 오직 인간의 탐욕이 자리 잡은 곳에서 늘 발견됩니다. 만약 교회가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 굳건히 서 있지 못한다면, 세속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장소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소수만이 특별한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포기도 할 수 없게 만들고 그렇다고 희망을 걸 수도 없게 만드는 매우 비정하고 냉정한 곳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곳에 예수님께서 임하시는 것입니다.
병자를 찾아오신 예수님(5-9)
약육강식의 세상은 지금도 경쟁 속에서 승리하면 쉼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참된 안식은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모두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마음에 진정한 만족이 찾아듭니다. 그로 인해 진정한 안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5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5-9)
예수님께서 38년 동안 병을 앓던 사람을 고치신 사건은 그분의 능력이 세상의 가장 절박한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이 병자는 오랜 고통 속에서 희망을 잃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셨고, 그의 절망적인 상황을 단번에 바꾸셨습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이 단순히 병을 고치는 분을 넘어, 인간의 깊은 고통과 절망까지도 해결해주시는 분임을 증명합니다.
(1) 38년 된 병자(5)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기적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시선은 그중에서도 가장 절망적인 사람에게 머물렀습니다. 바로 3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병으로 고통받아 온 병자였습니다(5).
많은 사람들은 아마 그를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의 병은 너무 오래되어 가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직접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이 행동은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군중 속에 섞인 한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가장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절망과 고통을 아시고, 가장 소외되고 가망 없어 보이는 이들을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2) 병자의 절망과 고백(6-7)
38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 연못 옆에서 천사가 물을 움직이기를 기다리며, 다른 사람이 먼저 물에 들어가기를 바라며 앉아 있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라는 표현은 그의 병이 오랫동안 치유되지 않은 불치의 고질병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스스로 연못에 들어갈 수 없는 앉은뱅이였지만, 예수님은 그의 병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6).
이 사건은 가나에서 일어난 두 표적과 달리, 병자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 “내가 낫고자 하느냐?”(6)라고 물으신 점이 특징입니다. 병자는 예수님께 “주여,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치유자로 인식하기보다 단지 연못에 먼저 들어갈 수 있는 누군가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정확한 답은 아니지만, 병자의 절망적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연못 옆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3) 치유하신 예수님(8-9)
예수님은 병자의 믿음과 상관없이 기적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수혜자의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병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언제나 안식을 주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병자는 곧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에게 안식이 찾아온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참된 성전이심을 보여주는 동시에,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치유와 안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38년 동안 고통받던 병자가 치유된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셨다는 이유로 비난했습니다. 병자를 다음 날 치유해도 되는데, 굳이 안식일에 고쳤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안식일’ 언급은 치유의 목적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가 됩니다.
예수님은 병자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오랜 시간 질병 속에 있으면 소망이 사라지고 쉽게 낙심하게 됩니다. 때로는 이를 마치 운명처럼 체념하며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심으로, 병자에게 치유를 향한 새로운 동기를 불러일으키십니다. 즉, ‘이 삶이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길 원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병자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병자를 성전에서 다시 만나신 예수님(10-15)
회복된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책임이 따릅니다. 건강을 되찾은 후에도 과거의 잘못된 습관이나 태도를 반복하면 다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거나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를 계속한다면, 회복은 일시적인 것에 그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받은 기회와 새로운 시작을 어떻게 책임감 있게 가꿔나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매 순간 바른 선택을 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합니다.
10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10-15)
치유된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리를 들고 걸어갔지만, 사람들은 안식일에 짐을 지고 가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병자는 자신을 고쳐준 분이 예수님이라고 밝혔지만,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를 박해했습니다. 후에 예수님은 그를 다시 만나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안식일 치유를 둘러싼 논쟁(10-13)
예수님께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신 것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행위를 넘어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물건을 옮기는 것을 금하는 자신들의 규정(미쉬나)을 근거로, 치유받은 병자를 비난합니다. 처음에는 병자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가, 병자가 자신을 고쳐준 이의 명령을 따랐다고 말하자, 그들의 비난은 예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그들은 병자의 회복이나 안식일의 본래 의미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들이 만든 규칙을 어긴 사람을 찾아내 비난하는 데만 몰두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율법의 참된 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는 무관심한 채, 형식적인 규율에만 얽매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편, 치유받은 병자는 예수님께서 이미 자리를 떠나신 후라 그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는 그의 믿음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간절히 간청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육체적인 건강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전적인 자비로 치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고쳐주신 분의 정체성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의 영적인 무지와 이기심을 드러냅니다.
(2) 성전에서의 경고와 배신(14-15)
예수님은 성전에서 그 병자를 다시 만나셨고,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14). 이는 그의 오랜 질병이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치유가 영적인 구원을 보장하지 않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육체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근원적인 문제인 죄를 해결하러 오셨음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심으로써, 자신이 진정한 안식을 주시는 메시아임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치유를 받은 병자는 감사와 경배를 드려야 마땅했지만, 그는 정반대의 행동을 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을 고쳐준 사람이 예수라고 고발합니다. 이 사람은 몸의 자유는 얻었지만, 영혼의 자유는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생을 얻을 기회를 놓쳤으며, 오히려 자신을 구원한 분을 박해의 대상으로 넘겨주게 됩니다. 이는 육체적 치유보다 영적 구원이 훨씬 더 중요함을 강조하는 교훈을 남깁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16-18)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율법이나 교회의 전통, 규율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그 형식에 갇혀 본질적인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놓칠 수 있습니다. 예배나 봉사 등 신앙 행위의 겉모습을 넘어,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이웃 사랑의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얽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생명을 살리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돕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16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16-18)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셨고, 그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행위가 안식일 규례에 저촉되었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의 ‘글자’에 매여 율법의 ‘정신’을 놓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안식일은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것을 기념하며, 인간 또한 노동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고 생명을 누리도록 제정된 복된 날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유대 지도자들은 안식일에 허용되는 행위와 금지되는 행위를 수많은 세부 규정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안식일은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고 생명을 제한하는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의 핍박에 대해 예수님은 놀랍고도 도발적인 답변을 주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 말씀은 단순히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선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 6일째에 모든 일을 마치시고 7일째에 쉬셨다고 믿었기에, 안식일에는 하나님께서도 쉬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후에도 여전히 세상을 돌보시고, 생명을 유지하며, 구원의 역사를 끊임없이 이루어가시는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이 18절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17절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규례를 어겼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다”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친근하게 부른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유대인들의 시각에서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부르고, 더 나아가 아버지의 일에 ‘나도 동참한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신성 모독이었습니다.
본문은 38년간 질병으로 고통받던 이에게 예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치유를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영적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황과 가장 깊은 필요를 아시고 친히 찾아오셔서, ‘낫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으로 참된 회복에 대한 갈망을 일깨우십니다. 안식일 논쟁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형식적인 율법 준수를 넘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본질을 강조하시며, 그분의 치유와 변화의 능력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침을 보여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만이 우리의 짐을 벗고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게 하시는 유일한 분임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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