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06-03)

생명의 떡이라 가르치신 예수님
요한복음 6장 30-40절
우리는 모두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육신의 건강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양식을 찾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양식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며, 우리는 이 당연한 진리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육신의 굶주림보다 훨씬 더 깊고 본질적인 굶주림이 존재합니다. 바로 우리 영혼의 갈증과 공허함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단순히 흙으로 지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영적인 존재임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식을 책임지실 분이라고 생각하여 계속적으로 따랐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것이 가장 큰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모세가 만나를 주었던 것처럼 표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무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만나보다 더 완전한 떡을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만나 같은 표적을 구함(30-33)
존재의 경이로움과 우주 만물의 질서 등, 하나님을 증명하는 표적은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증거가 부족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왕노릇’하고자 하는 본성을 포기하기를 꺼려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면 그분의 통치에 순종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면의 저항으로 인해 명백한 증거들마저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하나님을 거절하게 됩니다.
30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0-35)
오병이어 기적을 직접 목도한 무리는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 곧 모세가 예언했던 그 선지자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들은 이미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기적들을 보고 그분을 따르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병이어라는 엄청난 표적까지 직접 경험하자, 그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모든 의심을 거두었습니다.
(1) 만나 표적을 구하는 무리(30-31)
표적의 진정한 기능은 표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본질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놀라운 표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가버나움에서 만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30)라고 재차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이미 성전 정화 사건 이후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겠느냐?”(요한복음 2:18)라고 질문했던 것과 궤를 같이합니다. 무리들은 수많은 표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족하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들은 모세 시대의 만나처럼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과 같은 표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임을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이러한 불신앙은 그 뿌리가 깊었습니다. 유대 정통에는 메시아 시대에 하늘에서 만나가 내릴 것이라는 기록이 있었는데, 성경이 명확히 약속하지 않은 내용을 그들은 전통적인 믿음으로 굳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가령 만나를 내려준다 한들, 과연 그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었을까요? 그들은 기적 자체에 놀랄지언정, 이는 단지 자신들이 원하는 '육신적이고 정치적인 왕'으로서의 메시아를 믿으려 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 그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믿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계속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표적을 요구했습니다(요한복음 2:18; 4:47-48).
무리들은 “기록된 바”(31)라는 표현을 인용하며 구약 성경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그들이 정확히 어떤 본문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출애굽기 16장 4, 15절, 시편 78편 24절, 105편 40절, 혹은 느헤미야 9장 25절 등이 그 배경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로 여기에 그들의 깊은 영적 무지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표적을 보았지만, 그 표적이 지시하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직 당장의 육체적인 만족, 곧 배부를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예수님께 계속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식의 표적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떡을 제시하시는 예수님(32-33)
이러한 영적 무지는 비단 요한복음 6장에 등장하는 무리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을 말씀하실 때, 그는 어머니의 태에 다시 들어가야 하느냐고 되물으며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요한복음 3:4). 또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약속받았던 사마리아 여인 역시, 우물물을 다시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될 육체적 편리함만을 구하며 본질에서 벗어난 질문을 던졌습니다(요한복음 4:15). 이처럼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지는 참된 믿음의 결핍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했던 무리 또한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지엽적인 요구에 매달렸으며, 심지어는 구약 성경을 인용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표적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구약 성경이 항상 바른 의도로 사용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사탄마저도 구약을 인용하며 오용했던 것처럼(시편 91:11-12), 성경 말씀이 개인의 인위적인 목적이나 그릇된 믿음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의 이러한 어리석은 질문과 그릇된 인식을 들으시고, 두 가지 핵심적인 사항을 단호하게 교정하십니다. 첫째,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십니다(32). 출애굽기 16장 4절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만나를 주신다는 말씀이 있으며, 모세 또한 16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다고 이스라엘에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구약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모세는 단지 하나님의 도구이자 중재자였을 뿐이며, 무리가 하나님 자신께 주목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추구하는 분임을 밝히시며,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일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구한다는 삼위일체의 역동적인 관계를 보여주십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구약 시대의 만나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육체의 배를 불리는 것을 넘어선 ‘참된 하나님의 양식’이 온다고 선언하십니다(33). 이 하나님의 양식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양식은 세 가지 결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이는 더 이상 육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입니다. 광야의 만나가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영원한 양식이 되십니다. (2) 단순히 육신을 배부르게 하는 것을 넘어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양식은 영생으로 이끄는 생명의 근원이 됩니다. (3)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이 필요한 대상이 유대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놀라운 특성을 지닌 양식을 세상에 주시기 위해 독생자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결코 주리지 않는 생명의 떡(34-37)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중심으로 하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 역시 그분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사랑의 표현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만을 고집하며 하나님을 심부름시키듯 하는 기도는 참된 신앙이라 볼 수 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이기적인 욕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헌신에 있습니다. 결국, 참된 사랑과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겸손한 순종 속에서 완성됩니다.
34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34-3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라와 자기 의를 먼저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도 계속적으로 자기 방식대로 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떡을 구하는 무리(34)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육신적인 배고픔을 해결했던 무리들은 이제 예수님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라고 요청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 ‘빵’이라는 두 번째 핵심 요소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이며, 무리가 여전히 예수님을 자신들의 물리적인 필요를 채워줄 분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무리의 요구를 들으시며, 그들의 육체적인 갈망을 영적인 진리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가르침을 시작하십니다.
이러한 대화의 양상은 약 1년 전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를 여러 면에서 떠올리게 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수가 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의 영적 의미를 즉시 파악하지 못하고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한복음 4:15)라고 말했습니다. 두 상황 모두, 예수님께서 영적인 생명과 영원한 만족을 줄 수 있는 본질적인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지만, 대화를 듣는 이들은 이를 자신들의 즉각적인 육체적 필요와 편의성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차원으로 이해하고 요청하는 유사점을 보입니다.
무리가 육신의 떡을 간구하고, 사마리아 여인이 영원히 길을 필요 없는 물을 구했듯이, 이들은 모두 예수님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시대의 축복을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형태로만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물질적인 갈망을 영적인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교육적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육체적인 만족을 경험한 무리에게는 자신이 바로 그 진정한 ‘하늘로부터 온 떡’이심을, 그리고 수가 성의 여인에게는 자신이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이심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 방식이 늘 그러했듯이, 익숙하고 평범한 일상의 요소들을 사용하여 더 깊고 영원한 진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지혜로운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35-37)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 선언하십니다(35). 이는 단순히 물질적인 양식을 넘어선 상징적인 표현으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는’ 행위는 곧 그분께 ‘오는’ 것이자, 그분을 ‘믿는’ 것임을 명확히 하십니다. 비록 이후에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시지만(요한복음 6:51), 본질적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 믿는 자는 결코 영원히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약속은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며, 이는 구약성경 이사야 55장 1절 등에서 이미 예언된 모습이자, 계시록 7장 14-16절에서 종말에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내내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고(마태복음 5:6; 누가복음 6:21),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그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미리 맛보게 하셨습니다(35).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가 배고픔과 목마름을 겪지 않는 것은(35; 7:37-39),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으로 누리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여정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37)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와 ‘내게 오는 자’가 동일한 대상임을 밝히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자만이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다는 강력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주다’라는 동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인 뜻과 능력을 통해 구속사를 완성하십니다. 그 구속사의 정점에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습니다.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은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사랑에 있으며, 또한 구원받을 자들을 아들에게 맡기시는 데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표현은 요한복음, 특히 오병이어 강화(요한복음 6:44, 65, 70)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라는 분명한 표시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이자 은혜의 신비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원리는 결코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고 더욱 겸손하게 예수님을 찾도록 인도하며, 깊은 감사로 나아가게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오는 자를 “결코 내쫓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십니다(37). 이 ‘내쫓다’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차별 없는 사랑과 세상과 구별되는 그분의 온전한 성품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장사꾼들과 짐승들을 내쫓으심으로써(요한복음 2:15) 옛 언약 제사의 불필요함과 예배의 타락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당신께 나아오는 영혼들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외면하거나 내쫓으시는 법이 없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증언한 맹인이었던 자를 공동체에서 쫓아냈을 때(요한복음 9:34),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를 찾아가 영접하시고 만나주셨습니다(요한복음 9:35).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에게 오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더 나아가 당신이 붙잡은 자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놓치지 않으시는 견고한 붙드심(요한복음 10:28)으로 표현됩니다.
영생을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38-40)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가시적인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나라는 세상의 어떤 체제와도 같지 않은 독특한 영적 왕국이지만, 결코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특정 지역의 왕이 아닌, 온 세상 모든 영역을 다스리는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영적이면서도 실재하며, 보편적인 주권을 가진 왕국입니다.
38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38-40)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이 아닌,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분께 주어진 모든 자를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이는 아들을 보고 믿는 모든 자가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되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1)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예수님(38)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선언하시며, 그분의 신성과 선재성, 그리고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이 땅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나 의지를 행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 아래 있음을 천명하며, 무리가 지상 왕을 원했던 것과 달리 그분이 인간의 필요를 넘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정한 구원자임을 강력히 보여줍니다.
(2) 아들에게 오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39-40)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확고합니다. 아들을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들에게 아들을 통해 생명을 허락하시며, 예수님께서 그 뜻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단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실 것을 확증하십니다(39).
특히 40절에서는 영생과 ‘마지막 날’의 부활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자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적으로 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며(요한복음 5:24), 성도의 영혼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비록 신자의 육체가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마지막 날에 그 육체 또한 다시 살아나 온전한 몸과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온전히 누리게 됩니다(요한복음 5:28-29 참조). 이처럼 영생은 현재적 소유인 동시에 미래적 성취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구원의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는 떡을 구했던 무리의 영적 무지와 달리, 예수님께서 자신을 참된 ‘생명의 떡’이라 선언하심을 보았습니다.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며, 그들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를 결코 내치지 않으시고 온전히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적으로 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며, 부활의 영원한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니 이제, 참된 만족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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