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03-02)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요한복음 3장 16-21절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나무는 소년의 평생에 걸쳐 모든 것을 조건 없이 내어주었습니다. 어린 시절 놀이 친구부터 열매, 가지, 몸통을 주었으며, 결국 밑동만 남아 노년의 소년에게 쉼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나무의 모습은 변함없는 사랑과 희생의 본질을 깊이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나무가 소년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인류를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조건 없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떠한 대가나 자격도 요구하지 않는, 절대적인 희생과 은혜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무한하고 변함없는 사랑의 모범으로서, 우리에게 진정한 나눔과 희생의 가치를 일깨워 줍니다.
- 본문은 니고데모와 예수님께서 나누신 대화 중 후반부를 다룹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그 핵심에는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진리가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가 질문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그 설명의 요지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으며,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여부에 따라 영생(永生)을 얻거나 멸망(滅亡)을 당하게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16-17)
어떠한 어려움과 혼돈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깊은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사랑은 단순히 관념적인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내어주는 구체적인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가 중요하며, 이것이 우리의 삶에 영원한 소망과 진정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메시지는 정죄하려 함이 아닌, 모든 이에게 구원과 새로운 생명을 선물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랑을 본받아 세상 속에서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희망을 나누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6-17)
영적인 진리에 갈급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이스라엘의 선생,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종교적인 의식과 율법 준수를 최우선으로 여겼던 니고데모에게는 실로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듭난다’는 말씀을 육체적인 재탄생으로 오해했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라고 명확히 구분하셨습니다. 곧이어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놋뱀 사건을 언급하시며, 광야에서 들려 올려진 놋뱀을 바라본 자가 구원받았듯이, 인자이신 당신도 십자가에 들려 올려져야 하며, 그분을 구원자로 믿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보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니고데모는 이러한 하늘의 깊은 이치를 깨달을 만한 믿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들림’이 갖는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며,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요한복음 3장 16절과 17절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죄악 된 인간이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며, 영생을 얻게 되는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능합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심으로써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남’과 ‘인자를 믿음’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지극하신 사랑을 깨달아 믿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처럼 사랑한다”는 표현은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방식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독생자’는 하나님께 유일한 아들, 곧 하나님의 분신과도 같은 가장 소중한 존재를 뜻합니다.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감당하신 희생이나 다름없는 지고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이 사랑만이 악하고 이기적이며 하나님께 배은망덕했던 우리가 비로소 그분을 향한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만듭니다. 사랑만이 또 다른 사랑을 낳듯이,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참여하고자 할 때, 우리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생은 죽음 이후에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예수님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죄악 된 온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려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통해 세상이 구원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지고한 사랑과 구속 사역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확증되었습니다.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까지 베푸신 이 무조건적인 사랑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을 통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호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악인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독생자에 대한 두 반응(18-21)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밝고 선한 진리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외면하는가에 따라 이미 결정됩니다.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밝은 진실보다는 익숙한 어둠 속에 머물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길을 거부하고 감추려 하는 태도는 결국 내면의 불투명성을 심화시키고 영적 성숙을 저해합니다. 반대로 순수하고 올바른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은 기꺼이 빛 가운데로 나아가며, 그들의 삶은 투명하게 드러나며 선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진정 의미 있는 삶은 어둠 속에 숨기보다, 모든 것을 비추는 빛 앞에 기꺼이 서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18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18-21)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지고한 사랑을 설명하신 후(3:16-17), 그 사랑의 절정인 독생자를 믿는 믿음이 각 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어떻게 가르는지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미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을 넘어, 현재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인 ‘분별’ 또는 ‘위기(crisis)’를 조명합니다.
(1) 믿음의 유무에 따른 즉각적인 심판(18)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야말로 인류가 구원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임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다른 어떤 길이나 방법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천명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구원의 관문임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그 믿음을 갖지 않을 때 인간이 맞이하게 되는 비극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이는 믿음의 선택이 단순한 종교적 결심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심판이라는 중대한 갈림길임을 보여줍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라는 선언에서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은 단순히 미래의 정죄를 면하게 된다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섭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를 믿는 행위가 그분과의 살아있는 인격적인 관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관계 안에서 신자는 이미 심판이라는 영역으로부터 생명의 자리로 전이되었음을 뜻합니다. 특히 히브리적 사고에서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동의를 넘어선, 전인격적인 신뢰와 의존, 그리고 순종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자는 구원의 완벽한 자리에 서게 되므로 더 이상 정죄받을 근거가 없어지며, 이는 우리의 어떤 행위와도 무관하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은혜로운 사실, 곧 복음의 핵심입니다.
반면,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는 말씀은 더욱 준엄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벌써(ἤδη)’라는 헬라어 부사는 심판이 미래에 유보된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곧 믿지 않는 그 시점에서 이미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단순히 미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심판의 상태 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인류의 유일한 구원의 통로이자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의도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빛을 등지고 어둠 속에 머물기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적극적으로 멸하시려는 복수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생명의 길을 거부한 이들이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영적 단절의 결과입니다. 이는 마치 생명을 공급하는 수도꼭지를 스스로 잠가 더 이상 물을 얻지 못하는 상황과 유사하며,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 얼마나 지대한 영원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2) 심판의 이유: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선택(19-20)
본문은 ‘심판’(헬라어: 크리스마,κρίσις)이 법정의 최종 선고라기보다는, 빛이 도래함으로 인해 모든 것이 명확히 드러나고 분리되는 ‘분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통해, 그 본질적인 이유를 심도 있게 설명합니다.
19절은 빛이 세상에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여전히 어둠을 선택하는 실존적 문제를 지적합니다.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진리이자 빛으로 세상에 임하셨을 때 감추어져 있던 인간의 본성이 그분 앞에서 낱낱이 드러났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이 생명의 빛을 환영하기보다 거부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분명하다. 곧 그들의 ‘행위가 악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죄악 된 행위를 은폐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며, 인간에게는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뿌리 깊은 성향이 존재합니다.
20절은 이어서 행위가 악한 자들의 특성을 한층 심화하여 드러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는 말씀은, 빛이 임하면 감추어진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됨을 상기시킵니다. 양심의 가책이나 외부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인간의 죄성은 빛 앞에서 움츠러들고, 결국 빛 자체를 미워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는 단순히 빛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문제가 아니라, 죄악 된 행위가 폭로될 것을 알기에 의도적으로 빛을 거부하고 스스로 어둠 속에 머무는 선택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이나 양심의 법정에서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이 빛을 거부하는 주된 동기가 됩니다. 이로써 인간의 깊은 내면에 자리한 반역적 의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3) 진리 가운데 행하는 자의 빛을 향한 나아감(21)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과 달리,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빛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숨기지 않고 하나님의 눈앞에 드러내며, 선과 진리를 따르기를 힘씁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감사로 고백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삶을 삽니다.
성경은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따르다(ποιῶν)’라는 표현은 단순히 진리를 아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실제로 행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가운데 사는 사람은 빛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빛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들의 행위는 어둠 속에 감출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빛과 어둠에 대한 영적 구분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모습입니다. 빛 가운데로 나온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자신의 삶을 그분 앞에 투명하게 공개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들의 선한 행위는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공로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ἐν θεῷ)’ 이루어졌음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삶과 모든 선한 행동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령의 인도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결과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인정하며, 모든 행위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우리 앞에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을 미워하여 어둠 속에 머무는 길을 버리고, 진리를 향해 용기 있는 발걸음으로 빛 가운데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안에서 행해졌음을 드러내며, 빛의 자녀로서 그분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이미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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