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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02-02)

 


새로운 성전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2장 13-25절


 

세상에서 가장 거룩해야 할 교회의 타락한 비리가 뉴스거리가 되는 현실을 보며 깊은 탄식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하나님 앞에 죄악됨을 인지하고 변화가 절실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의로운 개혁을 꿈꾸며 스스로 흑기사가 되어 나서려는 이들도 있지만, 막상 개혁을 시도하면 그 과정이 얼마나 녹록지 않은지 깨닫게 됩니다. 거대한 풍차 앞에 선 돈키호테처럼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는 순간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진정한 변화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이루어낼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깊은 개입과 더불어 본인이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변화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 비로소 참된 개혁이 시작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찾으신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로 가득 찬 성전의 타락한 모습을 보시고 의로운 분노를 느끼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직접 성전을 정화하시며 상인들을 내쫓으시고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일의 권위를 묻자 예수님께서는 답하셨는데, 이는 훗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건물이 아닌 예수님 자신이 바로 참된 성전이심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집이 나아가야 할 본질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성전을 깨끗게 하시는 예수님(13-17)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 혹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은 본래 순수한 헌신과 경외심으로 채워져야 하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세상적인 가치나 물질적인 욕망, 혹은 편리함을 추구하는 마음이 이러한 신성한 영역을 침범하여 그 본질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각자의 영적인 삶과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 모두에게 해당되는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결국 이 사건은 우리 스스로가 세속적인 요소들로부터 끊임없이 정결케 되고, 오직 진정한 사랑과 봉사라는 순수한 동기로 우리의 신앙을 지켜나가야 함을 엄중히 일깨워 줍니다.

 

13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13-17)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성전을 방문하셨다가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이에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내쫓으시고 상들을 엎으시며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말라는 거룩한 열정의 표현이었습니다.

 

(1) 절기의 본질이 상실된 성전의 변질(13-14)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가장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신명기 16장 16-17절은 모든 남자들이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와 하나님을 뵙고 힘닿는 대로 예물을 드리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성전은 어디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주하신 성전은 더 이상 거룩한 만남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성전 뜰 안은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제물로 바칠 짐승과 환전을 위한 상인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멀리서 오는 이들을 돕는다는 명분 뒤에는 과도한 이득을 취하는 탐욕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돈벌이의 소굴로 변질된 성전은 마치 부모님이 안 계신 동안 낯선 사람들이 허락도 없이 들어와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것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집이 사람들의 경제적 이득과 편리함을 위한 시장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는 훌륭한 종교 행위처럼 보였으나, 그 속은 탐욕과 거짓으로 채워진 위선에 불과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교회의 타락한 모습처럼, 본질을 잃고 세속화된 종교의 비극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거대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개혁을 시도하다 좌절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이루어낼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2) 주님의 의로운 분노와 성전 정화(15-17)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의로운 분노를 터뜨리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과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격노를 표출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대한 지극한 열정과 그 본질을 회복하고자 하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도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이사야 56:7)라고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성전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집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기능은 사라지고, 사람을 사귀는 사교장, 혹은 사업을 위한 비즈니스 장으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성전에 나가지 않으면 예루살렘에서 왕따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성전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일은 이방 군대에 의해 성전이 더럽혀지는 것이었습니다. 주전 170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 피를 뿌려 성전을 모독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목숨을 걸고 성전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외부의 힘이 아닌, 바로 자신들 스스로가 성전을 더럽히고 있었다는 비극적인 현실, 심지어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이 만연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바로 이러한 부패한 종교 권력과 마비된 영성에 대한 하늘의 재판장으로서 내리는 최후 선고와도 같았습니다. 단순한 청소를 넘어, 변질된 성전 시스템의 종말을 고하는 무언의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3) 참된 성전의 의미와 현대적 교훈(18-25)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이 일의 권한을 묻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이 말씀이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더 이상 돌로 지어진 건물이 아닌,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참된 성전이 되심을 선포하는 예언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해야 할 교회의 타락한 모습에 한숨이 나오는 현실이지만, 이 모든 상황들은 하나님 앞에 죄악된 것들이 분명히 변화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의로운 흑기사가 되어 변화와 개혁을 시도하지만, 그 과정의 어려움 앞에서 돈키호테처럼 자신의 한계를 깨닫습니다. 참된 변화는 사람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만져주셔야만 일어나는 역사임을 믿습니다. 본인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으로 변하려 할 때 비로소 개혁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성전이신 예수님(18-22)

가장 중요한 교훈은 거룩함이 더 이상 물리적인 공간이나 특정 의식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각자의 존재와 삶 자체가 신성한 만남의 통로가 되며, 영적인 진리를 통해 온전히 신을 경험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개개인의 내면을 정결하게 하고, 외부적인 형식보다는 진실된 마음과 행실로 신앙을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일깨워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일상이 곧 신과 소통하는 경건한 장소가 됩니다.

 

18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18-22)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단순한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잘못된 예배 문화를 바로잡고 성전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가 되는 ‘새로운 성전’이 될 것을 예표하며, 이제 건물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이 완전히 드러나는 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합니다.

 

(1) 표적을 요구하는 불신과 예수님의 역설적 선포(18-19)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유대인들이 의문을 제기하며 표적을 요구한 것은, 인간적인 시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가늠하려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곧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은 당시 사람들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문자적인 건물 재건이 아닌,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예고하시는 역설적 선포였으며, 구원의 통로가 물리적 공간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옮겨지는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합니다.

 

(2) 돌 성전을 넘어선 예수님의 몸 된 성전의 계시(20-21)

 

유대인들이 46년이나 걸린 성전을 3일 만에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물리적 성전 재건으로 오해한 것은, 그들이 건물의 웅장함에 갇혀 진정한 하나님의 임재의 의미를 간과했음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이는 구약의 성전이 지향했던 하나님의 임재와 죄 사함의 궁극적인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계시하며, 구약의 성전 제사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완성되고,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더 이상 특정 장소에 국한되지 않게 됨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3) 죽음과 부활로 완성된 참된 성전의 실현(22)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부활 후에야 비로소 그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이 진리가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으며, 성령의 조명과 믿음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전 개념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제 성전은 돌과 건물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건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중심을 아시는 예수님(23-25)

우리가 주변 사람들의 평가나 반응에 지나치게 휩쓸리거나 그들을 절대적으로 의지할 때, 우리의 신앙적 중심은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시선과 의견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순간, 신앙은 연약해지고 좌절에 부딪히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외적인 모습이나 그들의 판단이 아닌, 언제나 그들의 진실된 마음과 중심을 보셨듯이, 우리 또한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견고히 뿌리를 내려야 할 것입니다.

 

23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3-25)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내면과 숨은 동기까지 아시는 분으로, 유월절 기간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표적을 보고 믿었으나, 주님께서는 그 믿음의 진실성과 마음의 상태를 모두 꿰뚫어 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을 드려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1) 유월절 예루살렘의 흥분과 표적(23)

 

유월절은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 중 하나로, 수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유월절에는 수십만 명, 심지어 2백만 명 이상이 모였다고도 추정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인파 속에서 여러 표적(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성전 정화 사건 이후, 예수님의 이적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믿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는 것은 긍정적인 반응처럼 보입니다.

 

(2) 모든 사람의 속을 아시는 주님(24-25)

 

겉으로 보기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놀라웠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의탁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신뢰를 주거나, 자신의 사명을 맡기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본문은 명확히 답합니다.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므로”,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친히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외적인 행동이나 고백 너머에 있는 인간의 깊은 내면, 곧 마음의 동기와 본성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통해 이득을 얻거나, 육적인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랐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나 대단한 기적가로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즉,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자신을 헌신하려는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이기적인 이유로 인해 표면적인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

 

모든 표적과 기적을 보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지라도, 사람은 결코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지 않고, 맡기지 않으며, 신뢰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적나라한 ‘진상’을 보셨고, 도저히 그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쉽게 변하며,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본질적인 한계를 정확히 아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겉모습이나 말이 아닌, 가장 깊은 마음의 동기와 진실된 중심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진정한 믿음이란 단순히 기적을 보고 놀라거나 일시적인 유익을 바라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 전체를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심을 인정하며 겸손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믿음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신뢰가 되어 그분의 귀한 사명에 기꺼이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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