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03-03)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자세
요한복음 3장 22-36절
우리의 삶과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위대한 드라마를 함께 만들어가는 ‘엑스트라’와 같습니다. ‘엑스트라의 기쁨’이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님을 깨닫고, 오직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빛내는 데서 오는 충만한 환희입니다. 주어진 사명을 겸손히 다하며 창조주를 높이는 삶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맡겨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누리는 순수하고 고귀한 기쁨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가장 값진 만족과 행복을 얻게 됩니다.
-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시자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었고, 이에 요한의 제자들은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며, 오직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자임을 설명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 나라의 ‘엑스트라’로, 예수님을 진정한 ‘주인공’으로 다시금 선포하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명예보다 그리스도를 높이며, 그의 사역에 온전히 헌신하는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의 모습은 성도들이 자신보다 주님이 드러나도록 삶의 중심을 예수님께 두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세례(22-26)
현대 신앙인들은 때로 자신의 봉사나 역할이 다른 이들의 그것과 비교될 때 시기심이나 경쟁심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개인의 주목보다 공동체 전체의 성장과 복음의 확장에 기꺼이 기여하며 기뻐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역할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궁극적인 주인이신 분의 뜻과 영광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낮추고 핵심적인 가치를 더욱 빛내고자 하는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통해 개인의 만족을 넘어선 진정한 기쁨과 공동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22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22-24)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와 유월절을 마치신 후, 갈릴리로 향하시기 전 유대 땅에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시기, 세례 요한 또한 요단강 근처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활발히 세례를 베풀며 큰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아직 요한이 옥에 갇히기 전이었기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사역이 독자적으로 병행되던 특별한 때였습니다. 두 흐름이 함께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고 전파하던 시기였습니다.
⑴ 예수님의 세례(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초기에 유대 땅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말씀 선포에 그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 세례를 베푸는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이 초기 세례 사역은 중요한 신학적,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를 촉구하며 행했던 물세례와 성격적으로 유사성을 지니면서도, 예수님께서 직접 세례를 베푸시기보다는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 이 일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위를 제자들에게 위임하심으로써, 향후 교회를 통한 사역의 기초를 놓으셨음을 시사하는 동시에, 물리적인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의 근원이 되는 예수님의 권능과 메시지에 더 큰 초점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복음서 중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이 초기 세례 사역에 대해 침묵하고 오직 요한복음만이 이 시기 예수님의 세례 사역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습니다. 요한복음 3장과 4장에 걸쳐 언급된 이 기록은, 예수님의 사역이 세례 요한의 사역과 일정 기간 동안 중첩되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익숙했던 세례 요한의 회개 운동과 예수님의 새로운 사역 사이에 교량적 역할을 했던 시기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두 사역의 병행은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요한의 사역을 존중하시고 계승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곧 다가올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예수님임을 점진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이 이 부분을 기록함으로써, 당시 일부 사람들에게 존재했을 세례 요한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예수님의 탁월성과 메시아 되심을 더욱 분명히 증거하려는 신학적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초기 세례 사역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당신의 메시아적 정체성과 앞으로 확장될 하나님 나라 사역의 예표이자 준비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⑵ 요한의 세례(23-24)
역사의 전환점에는 언제나 새로운 빛과 기존의 그림자가 교차하며 미묘한 긴장을 자아내기 마련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중첩되던 시기가 그러했습니다. 요단강 주변에서 광야의 외침으로 백성을 회개에 이르게 했던 세례 요한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으나,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세례를 베푸시며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적인 욕심과 영적인 분별력을 시험하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한 유대인이 다가와 '정결 의식'에 대한 논쟁을 걸었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적인 논의를 가장했지만, 그의 본래 의도는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관계를 이간질하고 그들 사이에 분열의 씨앗을 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백성들 사이에서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었던 터라, 이 악의적인 논쟁은 요한의 제자들 내부에 깊은 불안감을 조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비교 의식과 함께 알 수 없는 불평을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급기야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에게 찾아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현상을 토로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스승의 인기가 시들해지면 자신들의 위상 또한 동반 하락할지도 모른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염려와 욕심이 배어 있었습니다. 경쟁과 비교의식은 자칫 영적인 사명을 왜곡시키고 관계를 파괴하는 무서운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성경은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비교 의식’은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질투와 분열을 조장하는 사탄의 교활한 전략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명에 집중해야 할 이들을 인간적인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려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자들의 나약함과 불안감 속에서도 세례 요한은 흔들림 없이 굳건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을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라고 선포했던 그 정신을 다시 한번 확증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단지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예비하는 신랑의 친구에 불과하며, 진정한 기쁨은 신랑의 음성을 들을 때 온다고 역설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불평하는 제자들에게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불후의 명언을 남기며, 참된 사역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이 고백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데 두었던 그의 겸손과 사명감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기나 위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모든 초점을 맞춘 그의 삶과 고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진정한 겸손과 섬김의 사명을 되새기게 하는 영원한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25-30)
우리에게 개인적 성과보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가치를 일깨우며, 타인의 성공에 대한 비교나 시기심이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함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타인을 돕고 그들이 빛나게 하는 데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과도한 욕심 없이 묵묵히 수행하고, 외부의 이간질이나 시샘에 흔들리지 않으며 변치 않는 가치와 공동의 목표에 집중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25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25-30)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 가르치신 후, 유월절을 마치고 갈릴리로 향하시기 전 유대 땅에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시기, 세례 요한 또한 요단강 근처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며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아직 그가 옥에 갇히기 전이었습니다.
⑴ 예수님의 세례(3:22)
예수님께서는 유대 땅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사역은 세례 요한이 행했던 ‘회개를 위한 세례’와 그 성격에 있어서 유사한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직접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 이 사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복음서 중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초기 세례 사역을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복음서는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은 예수님의 세례 사역이 세례 요한의 사역과 일정 기간 동안 중첩되었음을 시사하며, 이는 당시 두 사역이 동시에 진행되었음을 보여줍니다.
⑵ 요한의 세례(23-24)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사역이 한창 중첩되던 시기, 한 유대인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접근하여 '정결 의식'과 관련한 논쟁을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의도는 예수님과 세례 요한 사이에 불화의 씨앗을 뿌리고 분열을 조장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 사이에서 예수님에 대한 비교 의식을 싹트게 했고, 결국 불평으로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스승인 요한에게 찾아가 당시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음을 토로했습니다. 이들의 불평 속에는 세례 요한의 인기가 줄어들면 자신들의 위상 또한 함께 하락할 것이라는 인간적인 염려와 욕심이 은연중에 드러나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사역자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쟁과 인정 욕구라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세례 요한의 세 가지 확고한 답변(25-30)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의 사역이 중첩되는 상황 속에서, 인간적인 비교 의식과 경쟁심을 초월하는 믿음과 겸손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의 고백은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어떠한 자세로 사역에 임해야 하는지에 대한 핵심적인 지침을 제공합니다.
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27)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이 자신과의 경쟁 구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명확히 선언했습니다. 그는 모든 권세와 사역의 근원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확증하며 (참고: 다니엘 4:17, 25, 32; 요한복음 19:11), 예수님께서 받으신 능력 또한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주어졌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당시 예수님과 요한 사이의 분열을 획책하려는 사탄의 책동에 맞서는 강력한 영적 선포이자,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인지하는 참된 자세를 보여줍니다.
②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오직 예수님을 증언하는 자(28)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28)고 선언하며, 자신의 정체성이 메시아가 아닌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임을 다시금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과의 경쟁 구도에 휘말리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명확한 사명, 즉 예수님을 증언하는 자로서의 역할에 전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이는 사역자가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정확히 인지하고, 진정한 주인을 섬기는 겸손하고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③ 자신의 역할은 신랑이 아닌 신랑의 들러리(29-30)
세례 요한은 자신의 기쁨을 결혼식에서 신랑의 음성을 듣고 크게 기뻐하는 ‘신랑의 친구(들러리)’에 비유하며 깊은 신앙 고백을 남겼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29-30).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신랑과 신부에 비유하는 전통을 고려할 때, 세례 요한의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를 넘어, 하나님의 신성과 깊이 연결된 분임을 암시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사역의 주인공이 아닌, 오직 신랑이신 예수님의 성공과 영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는 ‘엑스트라’의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그의 고백은 참된 사역의 본질이 자기 부인과 그리스도의 높임에 있음을 분명히 하며, 예수님의 흥함에서 자신의 기쁨과 존재 가치를 찾았던 세례 요한의 위대한 영성을 드러냅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31-36)
우리의 신앙생활은 인간적인 판단이나 시대적 흐름에 좌우되지 않고, 초월적인 근원에서 오는 말씀에 굳건히 뿌리내려야 합니다. 사역과 삶의 진정한 동력은 개인의 역량이나 노력이 아닌, 무한히 주어지는 거룩한 힘에 있음을 기억하며 의존해야 합니다. 모든 주권과 소유가 궁극적으로 한 분께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최우선에 두는 겸손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삶의 만족과 영원한 소망은 오직 그분을 향한 온전한 신뢰와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31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5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1-36)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이 끝났음을 알고,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립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이는 구원의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선언입니다.
(1) 위로부터 오신 예수님의 절대적 우월성(31)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한 시대의 종교적 스승이나 위대한 선지자가 아닌,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창조 사역에 동참하신 분으로, 그 기원과 정체성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지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물 위에 계신’ 창조주로서 모든 권세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시며, 우주의 질서를 다스리고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어둠의 세력까지도 제어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으나, 부활을 통해 그 신적인 권능을 친히 입증하셨습니다.
세례 요한과 같은 인간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의 권위와 온전한 진리를 담고 있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단순한 교리적 인물이 아닌, 온 세상의 주재자이자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로 온전히 인정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삶 전 영역에서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에 기꺼이 순종하며 살아가는 참된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시는 예수님(32-34)
예수님의 가르침은 결코 인간적인 추측이나 사색의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독생자로서 친히 ‘본 것’과 ‘들은 것’을 증언하셨으니, 이는 단순한 지식이 아닌 본질적인 생명의 말씀을 담은 하늘의 권위 있는 진리였습니다(요 1:18 참조). 그러나 세상은 이러한 거룩한 증언을 종종 ‘받지 않는’ 현실을 보였습니다(요 3:32). 이는 세상의 가치관이 하늘의 진리와 근본적인 간극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증언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자는 단순히 그분을 믿는 것을 넘어, ‘하나님이 참되심을 인친 것’이 됩니다(요 3:33). 이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신실하심을 확증하는 행위이자, 하늘의 증언 속에 담긴 신적 진리를 인정하는 깊은 신앙의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으로 그 탁월함이 명확히 드러났습니다(요 3:34, 사 61:1 참조). 이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예수님의 모든 사역 전반에 걸쳐 제한 없이 충만하게 역사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권능으로 병든 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며, 하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무한한 부어주심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의 말씀과 행위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에서 비롯되었음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3) 믿음과 불신앙의 결정적 결과(35-36)
하나님의 사랑은 성부께서 아들 예수님에게 부여하신 전적인 권세를 통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경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다”라고 선포하며, 이는 단순히 부자 관계를 넘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에게 구원과 심판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위임하셨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마 28: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로써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유일한 주님이 되시며,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실 절대적인 주권을 소유하시게 됩니다. 이러한 전적인 위임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무한한 신뢰와 사랑의 표현이며, 동시에 아들을 통한 온전한 구원 계획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영생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고 증언하는데(요 5:24), 이는 단지 죽음 이후의 미래적 소망에 그치지 않습니다. 영생은 곧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그분과의 끊임없는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그분의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 실제적이고 즉각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이고 풍성한 복이며, 세상의 어떠한 가치와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가치를 지닙니다.
반면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초대에 응답하지 않는 불신자의 비극은 성경을 통해 엄중하게 경고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는 말씀은 불신앙의 상태가 결코 단순한 중립적 위치가 아님을 선언합니다. 오히려 이는 이미 심판 아래 놓여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 밖에 존재하는 영적인 위기 상태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불신앙은 단순히 예수님을 모르는 것을 넘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고 그분의 진노 아래 머물기를 선택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따라서 믿지 않는 자는 다가올 종말론적인 심판뿐만 아니라, 이미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평화로부터 단절된 채 영적인 고립 속에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유일한 주님이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절대적인 분이심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자신을 낮추고 오직 예수님의 흥하심을 위해 기쁨으로 헌신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분을 믿고 영접하는 선택만이 참된 영생과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약속하며, 이는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반대로,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을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무는 위험한 선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43 요한복음(73)'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요한복음(13) - 요한복음 4장 15-26절 - 영원한 생수를 주시는 예수님 (0) | 2025.08.20 |
|---|---|
| 요한복음(12) - 요한복음 4장 1-14절 -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님 (0) | 2025.08.20 |
| 요한복음(10) - 요한복음 3장 16-21절 -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6) | 2025.08.14 |
| 요한복음(09) - 요한복음 3장 1-15절 -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 (8) | 2025.08.14 |
| 요한복음(08) - 요한복음 2장 13-25절 - 새로운 성전이신 예수님 (5) | 2025.08.1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