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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2-02)


새 언약으로 세울 하나님 나라

누가복음 22장 14-23절


신뢰와 배신은 인간 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의 선택은 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배신이 가져오는 고통은 신뢰의 소중함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더 깊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전받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인간성과 공동체의 가치를 배우게 됩니다.

 

  •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식사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셨습니다(14-16). 유월절 식사 전통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잔과 빵을 나누셨습니다(17-20). 유월절 식사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가장 친밀한 식사를 나누는 자 중에서 배반자가 나올 것을 예고하십니다(21-23).

 

유월절 마지막 만찬(14-16)

오늘날 세계는 분열과 파괴 그리고 갈등이 가득합니다. 사단은 자신의 때가 다 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찬을 참여함으로 통해, 분열되고 갈등된 상황을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파괴는 사단이 하지만, 회복은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14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14-16)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마지막 성만찬을 이루어 갑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때를 이루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14절에 “때가 이르매”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계획과 시간표에 따라 이루어갑니다. 그 동안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오신 예수님의 순종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누가는 1절과 7절에서 유월절과 무교절이 가까이 왔고, 무교절이 왔다고 서술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월절 식사(토 파스카)를 준비하러 가서(8) 유월절 식사를 먹을 객실을 마련했습니다(11). 이제 유월절 식사 시간이 됐습니다(14).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앉으셨습니다(14). ‘앉다’는 당시 유대문화와 로마 문화에서 만찬을 위해 비스듬히 앉는 자세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누는 식사는 베드로와 요한이 준비한 유월절 식사입니다(1,7,8,11,13,14).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받기 전에 사도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 나누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15).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성취될 때까지는 유월절 식사를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6). ‘성취하다’의 수동태형이 사용된 것은 유월절 또는 유월절 식사를 성취하는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완성될 나라입니다. 교회가 예식으로 지키는 주의 만찬은 유대인의 유월절 식사에 근거합니다(1,7,8,11,13,14).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과거 이스라엘이 경험한 해방과 연결하기 위함입니다. 유월절의 완성을 가리키는 완전한 해방과 자유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다시 완성된 유월절 만찬을 가지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누고 지금까지 교회가 의례로 지키는 식사가 유월절 식사인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주의 만찬은 유월절의 해방을 기억하게 합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것처럼, 속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오직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교회는 유월절 식사가 혼자 먹는 식사가 아니라 가족의 식사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앉아 만찬을 가졌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도 공동체의 식사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성도들을 태어나게 할 뿐 아니라 교회의 결속력을 강화합니다. 셋째, 주의 만찬은 ‘과거’에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동시에 ‘미래’(재림)의 식사를 소망하는 식사입니다(참조. 고전 11:26). 그러므로 교회는 주의 만찬을 통해 기억하고(19) 기대해야 합니다(16,18). 성도들은 ‘이미’ 실현됐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서 주의 희생을 기억하는 동시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환희를 소망해야 합니다.

 

빵과 잔을 나누시는 예수님(17-20)

오늘날 성찬식을 통해 떡과 포도주에 동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성도는 주님과 하나 됩니다. 이것이 주님과 하나 되는 예표입니다. 성찬예식을 하는 것은 주님과 하나 되는 것, 주님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17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17-20)

 

예수님께서는 잔을 잡고 감사의 기도를 한 후에 잔을 나누도록 지시하십니다(17). 예수님의 잔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또는 대속의 ‘형벌’을 내포하는 은유입니다. “너희끼리 나누라”(17)는 제자들이 현재는 깨닫지 못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공유하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8).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유월절 식사가 완성되는 것과 같은 시간을 말합니다. 15-16절처럼 이번에도 예수님은 그의 초림으로 하나님 나라가 왔으나 그의 재림으로 그 나라가 완성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한 후에 빵을 뜯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잡고 감사하고 뜯어 나눠주시는 모습은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떠올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내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빵이 상징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예수님의 몸이라는 뜻입니다(참조. 고전 11:26-29). 제자들은 빵을 나누면서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념’, 곧 기억하기 위해 빵을 나누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참조. 고전 11:24). ‘너희를 위해’ 주는 것은 예수님의 목숨과 죽음이 대속적인 선물임을 의미합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잔을 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해 부어지는 이 잔’은 ‘나의 피’로 맺어진 ‘새 언약’입니다(20). 제자들을 위해 부어지는 잔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합니다(참조. 창 9:6; 겔 18:10; 사 59:7). 예수님의 죽음은 새 언약을 제정하고,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집니다. ‘너희를 위해’ 피를 붓는 표현은 고난의 종이 많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그의 목숨을 죽음에 부었고 범죄자들로 여김 받았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졌다”(사 53:12, 70인역). ‘새 언약’은 예레미야 31:31의 언어입니다. 새 언약을 통해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렘 31:33-34)라는 약속이 성취됩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를 용서받습니다(23:34; 24:47). 피로 맺어지는 언약의 개념은 출애굽기 24:8의 인유입니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24:8).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희생제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나 이제는 희생제물로 죽으신 예수님의 피로 새 언약을 맺습니다.

빵과 잔을 나누는 모습에서 두 가지 목적이 드러납니다. 첫째, 빵과 잔을 나누는 목적은 기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유월절을 반복하고 유월절 식사를 반복함으로써 과거의 해방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노예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해방을 얻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빵과 잔을 나누는 것은 과거 사건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주의 만찬으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해방된 사실을 기억하고 완성될 나라에서 만찬을 누릴 것이라는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너희를 위해’(19,20)는 예수님의 죽음이 제자들을 위한 대리적 희생임을 의미합니다. 유월절 사건에서 어린 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 죽었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죄 용서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구약에서 언약의 목적은 아버지와 자녀, 왕과 백성과 같은 관계를 하나님과 맺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게 할 목적으로 새 언약의 피를 부어주셨습니다.

 

배신자에 대한 예고(21-23)

우리의 행동과 선택은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배신은 신뢰를 무너뜨리며, 이는 인간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신뢰가 깨지면 관계가 어렵게 됩니다. 따라서, 삶의 각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른 선택을 통해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21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21-23)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위에 있도다”라고 예고하십니다(21). ‘손’은 유다 또는 유다의 의지를 대변하는 환유입니다. 유월절 식사는 가장 친밀한 사람, 가장 신뢰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나누는 자리입니다. 같은 식탁에 앉아 같은 그릇에 손을 넣는 사람이 배반한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가장 친밀한 관계의 사람에 의해 팔리는 비극을 뜻합니다. 인자는 이미 예정된 대로 갑니다(22). ‘정하다’, ‘예정하다’를 뜻하는 ‘호리조’(행 2:23; 10:42; 11:29; 17:26,31; 롬 1:4; 히 4:7)의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 즉 섭리에 따른 사건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를 파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며 탄식하십니다. ‘유다’라는 특정 인물이 배반할 것으로 예정되지는 않았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고 결국 사탄의 뜻에 동조하다가(22:3)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행 1:18). 예수님의 예고를 들은 제자들은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라며 서로 묻습니다(23).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며, 서로 신뢰 관계를 유지한다고 믿었던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통해 신뢰와 배신의 깊은 의미를 드러냅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희생이 인류를 위한 사랑임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배신의 아픔을 통해 신뢰의 소중함을 깨닫고, 관계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선택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살아갈 것을 도전합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서로를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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