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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7-02)


열 명의 문둥병자와 한 사람의 감사

누가복음 17장 11-19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항상 응답하십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이러한 요청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변의 소외된 이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필요를 살펴야 합니다. 결국,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 누가복음 17:1-19은 믿음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믿음은 용서로 표현되고, 감사로 표현됩니다. 누가복음 17:11-19은 믿음의 표현인 감사에 관하여 다릅니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께 치유를 요청하였습니다(12-13).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제사장들에게 가는 길에 치유함을 받았습니다(14). 그중 한 사람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는데 그는 유대인들에 의해 이방인 취급당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16).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19).

 

나병환자들의 간구(11-14)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주께 부르짖는 것이 진정한 믿음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 만큼, 들은 만큼 실행해야 하며, 이러한 실행은 두렵고 떨리는 믿음의 첫 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첫 걸음은 우리를 더 나은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시작점이 됩니다. 믿음의 실천은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합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11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1-14)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중에 한 마을에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은 규례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예수님께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되고, 얼마나 예수님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쳐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 나병환자들의 간구(11-13)

 

예수님께 나아온 나병환자들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사는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에는 사마리아인도 있었던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율법에 따라 마을 밖에서 살아야 합니다. “병이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 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레 13:46). 그러므로 그들은 마을 입구에 있다가 마을로 들어가는 예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들이 마을 안에 있다가 예수님을 만났다면 이 마을은 나환자촌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마을에 들어가셨다고 기록하기 때문입니다(12). 만일 그렇다면 본문은 나환자촌에 들어가신 예수님의 사역 이야기인 셈입니다. 사람들의 세상에서 격리되어 살아가는 소외된 나병환자들이 외롭게 살아가는 열악한 땅에 예수님께서 찾아가신 이야기인 셈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세상에서도 영광스러운 곳을 향해 올라가지 않으시고 나환자촌을 향해 내려가신 것은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는 행보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들을 만난 곳이 마을 안인지 아니면 입구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오지 않고 멀리 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나병환자와 관련된 율법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레 13:45). 이 율법은 나병이 전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이 율법의 정신에 따라 멀리 서서 예수님께 치유를 요청합니다. 그들은 마가복음 1:40에 나오는 나병환자처럼 예수님께 다가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들은 예수님께서 나병을 치유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요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병 치유능력이 있는데도 나병에 전염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다가오지 않고 멀리 서서 소리친 이유는 단지 율법에 순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이유를 달지 않고 순종하며 그 말씀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사는 세상에서 이 나병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육체는 나병으로 썩어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건강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율법을 지키는 모습은 그들이 보인 믿음의 한 측면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을 부를 때 ‘에삐스따따’(예수 선생님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만 사용된 표현입니다(5:5; 8:24,45; 9:33.49). 예수님을 부른 칭호 속에 나병환자들의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간주했고, 자신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제자들만이 사용하는 칭호를 사용하여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격리된 나병환자들이 감히 예수님을 자신들의 스승으로 모신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러나 그들에게는 나병환자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이 ‘스승님’이라는 칭호 속에 담겨 표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칭호 속에 담긴 믿음을 놓쳤을 리가 없습니다. 유대인 사회가 죄인 취급하는 나병환자들이 어떻게 이런 자존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나병환자들의 마을에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그들은 이러한 자존감을 가지게 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에게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변두리에 소외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며, 그들이 선 땅은 이제 역사의 무대입니다.

 

(2) 나병환자들의 순종(14)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명령하신다. 레위기 법에 의하면 나병환자가 나병으로부터 나았을 때 이를 확인하여 사회로 복귀하려면 제사장을 찾아가야 했습니다(레 14:2-8).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치유가 이루어진 것을 확신하고 치유검증을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들에게 찾아갑니다. 아직도 나병이 낫지 않은 상태에서 제사장에게 찾아가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지만, 그들은 명령에 순종합니다. 이러한 순종은 그들 믿음의 한 측면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소망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간주하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율법을 존중하여 순종하는 자들이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에 순종할 이유는 충분했지만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 이유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는 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나병이 나을 것이므로 제사장에게 가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나병이 나은 후에 제사장에게 가는 것은 율법의 원리였지만, 제사장에게 가는 중에 나병이 낫는 것은 예수님의 원리였습니다. 율법은 나병환자가 회복된 후에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데 그치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존중하면서도 나병환자를 회복시키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회복 사역은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사역이며, 나병 전염을 방지하는 율법의 목적을 넘어서 그 의도를 달성하는 사역입니다.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나병환자들의 모습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말씀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 계승됩니다. 우리가 만약 율법이 폐지되었다면서 구약성경의 의도와 정신까지 적용하기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말씀은 지킬 수 없다면서 적용하지 않는다면 영적인 나병에 걸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어찌 믿음이라고 하겠습니까?

 

한 나병환자의 감사(15-16)

신앙 생활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순한 생각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반드시 결과를 가져오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며, 그에 따른 결과를 책임감 있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충성과 노력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인이라(15-16)

 

한 나병환자는 나병이 치유된 후 예수님께 돌아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합니다. 이것은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하나님처럼 경배한 것입니다. 이 모습은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겼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믿음으로 발전합니다. 이것이 다른 아홉 명의 나병환자와 다른 측면이었습니다. 아홉 명에게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칭찬(17-19)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재능과 자원을 통해 믿음을 실천하고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잘 관리해야 하며, 맡겨진 것에 충실하게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충성스럽게 일한 종들은 칭찬과 상을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17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17-19)

 

이러한 믿음을 보인 나병환자는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16). 예수님께서는 그를 ‘이방인’이라고 부르시면서 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18). 이방인이 예수님의 신적 정체를 깨닫고 경배할 때 유대인들은 건강 회복만을 기뻐하며 떠나갔습니다. 이방인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서 더 나아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반면에, 유대인들은 순종하는 신앙 속에서 일어난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고 유대인들은 믿지 않는 역설이 나병환자 치유기사 속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믿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역설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참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건강을 회복한 것을 기뻐하고, 물질의 복을 받게 되는 것에는 감사하면서도 예수님께 경배하는 믿음의 가치는 소홀히 여기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치유 받고 가버린 아홉 나병환자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치유와 영생의 근원인 예수님께 나와 감사를 드린 이방인 나병환자의 위대한 신앙을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십니다(19). 모두 치유 자체를 기뻐하고 제 길로 갈 때 우리는 돌이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치유는 그 자체로 의미 있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는 궁극적 구원이 약속됩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어떻게 사용할지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받은 은혜를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행함은 반드시 결과로 이어지며, 우리의 충성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맡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삶을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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