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6-0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누가복음 16장 14-31절
세상 사람들은 돈이나 직분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 또는 높으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공 여부를 판단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돈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이 벌고 쌓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베풀고 나누었느냐로 사람들을 평가하십니다.
-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율법의 문자만 지키지 말고 그 온전한 의미를 성취하라고 도전하시며,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그들의 탐욕을 고발하십니다. 돈을 의지하지 않고 이웃을 섬기고 돌보는 것만이 부자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14-18)
물질에 대한 집착은 신앙에 해롭습니다. 재물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할 수 있으며, 이는 영적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영적 우선순위를 먼저 세우는 것이 필요하며, 물질적인 것보다 영혼의 필요를 우선시해야 합니다. 결국, 신앙생활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14-18)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에는 바리새인들은 굉장히 냉소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이 바라본 하나님 나라와 급진적인 윤리를 소개한 후 자신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비유를 하나 소개합니다. 말씀을 듣는 대상이 14절부터 제자들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로 바뀝니다. 이는 10-13절에서 부와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려고 하는 예로 바리새인들을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본문은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두 가지로 지적한다. 첫째,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이 용어는 탐심에 사로잡힌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외적으로 경건한 모습을 보였으나 내면은 탐심으로 가득했습니다. 둘째,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기 의는 교만을 말하며, 교만은 부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와 해설을 듣고 나서 비웃는 표정으로 전달됩니다(14).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지위와 가르침을 조소했습니다. 조롱과 멸시는 오만과 교만에 근거합니다. 특히 그들은 배경도 좋지 않고 가난한 예수를 조롱했을 것입니다. 이런 식의 조소는 경건한 신앙생활의 보상으로 부를 얻게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15절의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라는 표현은 바리새인들의 오만을 지적합니다. 그들의 오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태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십니다(15). 15절에서 ‘가증한 것’(“미움을 받는 것”)은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행위, 즉 우상숭배를 뜻하는 용어로도 사용됩니다(예. 신 9:27;11:31; 마 24:15; 막 13:14). 특히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은 ‘하나님 앞에’ 드려진 가증스런 제물을 떠올립니다.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의 오만은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숭배와 같은 가증한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1:32) 이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으셔야 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치로 올렸으므로 오만은 우상숭배로 이어졌습니다. 역설적으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으나 사실상 부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점에서 우상숭배자들입니다.
16-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웃는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의 행위가 ‘율법과 선지자들’의 관점에서 타당한 사실을 입증하십니다. 이를 위해 율법과 선지자들, 즉 구약의 불연속성(16)과 연속성(17-18)을 전제로 삼으십니다. 구약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고하고 전한 요한의 때까지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16). 요한의 활동 이후부터, 즉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비아제타이’를 수동태로 이해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행위로 기쁜 소식을 강력히 전하시고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자마다 하나님 나라에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이끄는 복음에 해당합니다. 오만과 자기 의로 가득 찬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복음을 조롱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에 처합니다.
예수님의 활동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시작됐다면 구약은 권위와 효력을 상실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의 한 획도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17). 율법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이후에도 권위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과 간음의 규례를 예로 들며 재혼을 반대함으로써 율법의 권위와 효력을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하는지 보여주십니다(신 24:1-4; 참조. 창 2:24). 흥미롭게도 이혼과 재혼을 금한 신명기 24:4의 ‘너의 주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은 15절의 ‘하나님 앞의 가증한 것’과 비슷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바리새인들의 음행을 또 하나의 우상숭배 행위로 의도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참조. 18:9-14).
부자와 거지 나사로(19-3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의로우신 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돈을 더 좋아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존경받기 위해 의로운 척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진정한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특별히 그들을 봐주시지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게서는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시며, 외적인 모습이 아닌 진정한 마음을 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는 모든 이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19-31)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부자와 거지를 옷과 음식과 거처의 대조로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19-21). 이 세 가지는 고대 사회에서 사회적 신분을 알리는 기능을 했습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속옷을 입었습니다. 두로 지역의 자색으로 염색한 옷감은 대단히 사치스런 것이었습니다. 랍비 문헌에는 왕들의 색깔로 언급되고,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의 색깔이었습니다. 흰색 옷은 높은 지위에 속했음을 알립니다. 대문이 있는 집은 대지를 소유했거나 대문을 설치할 정도로 큰 저택에서 지냈음을 내포합니다. 부자는 이런 옷을 입고 저택의 식탁에서 날마다 ‘사치스럽게’ 연회를 즐겼습니다. 반면 나사로에게는 집이 없었고 부자의 대문 밖에 던져졌습니다. 거지는 옷 대신 상처를 입고 있었습니다. 상처투성이라는 묘사는 그가 병을 얻어 버려졌을 가능성을 열어놓습니다. 거지는 사회의 소모품으로, 재산도 없고 병도 생겨 버려졌을 것입니다. 버려진 거지의 상처를 개들이 핥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나사로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개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22-24절은 죽음으로 거지와 부자의 운명이 반전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죽을 때도 거지는 그냥 죽은 것으로, 부자는 매장된 것으로 표현됩니다(22). 그러나 죽은 후 거지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당합니다. 부자는 눈을 들어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봅니다. 아브라함에게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부르지만, 이제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경고대로 궁핍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부자(3:11)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하는 독사의 자식으로 불 가운데서 고통당합니다(3:7-9).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부자는 생전에 나사로에게 절실했던 ‘긍휼’을 간청합니다. 부자는 아직도 나사로를 심부름시키면 명령에 따르는 종으로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부자를 도와줄 수 없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부자는 살아 있을 때 좋은 것을 받았지만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운명이 반전된 상황에서 거지는 위로를 받고 부자는 괴로움을 받습니다. 둘째, 낙원과 음부의 간극 때문에 한 번 운명이 결정되고 나면 서로 다른 영역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회개의 기회는 지상에서의 기회로 끝나는 것이므로 죽어서 두 번째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 곧 다섯 형제에게 보내 고통받는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청합니다(27-28).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 곧 성경이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29-31). 부자는 죽은 자를 가족에게 보내야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가 가서 말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첫째,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따라 죽음 이후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누리는 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궁핍과 억울함으로 고통당합니다. 지상에서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부자의 무관심이 부자의 권리와 같았을 것이지만 부자의 무관심은 가장 심각한 죄입니다. 무관심에 상응하는 결과가 음부에서 고통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부자는 미래를 영민하게 준비하지 못했습니다(16:1-9). 둘째, 긍휼은 구약(모세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입니다. 죽은 부자는 아브라함을 세 차례에 걸쳐 ‘아버지’(24,27,30)로 부르지만, 그는 결코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맺어야 하는 회개의 열매인 긍휼과 환대가 그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사 55:13; 60:17; 겔 17:24; 암 5:12,15). 이런 점에서 부의 위험성을 경고한 예수님을 비웃은 바리새인들은 긍휼에서 멀고 부자의 운명에 가깝습니다(16:15-17). 결론적으로 비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까이 있는 궁핍한 자들을 향한 긍휼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아브라함의 자녀이므로 긍휼을 행하는 것으로 신분을 입증받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물질과 영적 가치의 중요성을 교훈합니다. 부자는 재물에 의존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 결과, 영원한 고통에 처하게 됩니다. 반면 나사로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억받았으며, 이는 하나님이 세상의 기준과 다르게 평가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구원을 위해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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