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7-01)
섬김으로 세워진 하나님 나라
누가복음 17장 1-10절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인정받으려는 욕구보다는 진정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자세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신앙생활을 이끄는 길이 됩니다.
- 본 단락은 13:10부터 시작된 긴 흐름의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소자들을 실족시키지 말고 형제들을 용서하도록 경고하십니다(1-4). 그들이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1-4절의 명령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5-6).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이 그런 선한 일을 실천했다고 해서 자랑하거나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7-10).
제자들의 자세(1-4)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죄를 짓습니다. 그 죄들이 알고 짓고 모르고 짓는 죄가 있습니다. 모르고 짓는 죄 중에 하나가 실족케 하는 죄입니다. 고의로도 실족하게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형제를 실족케 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예수님께서는 공동체 안에서 행해야할 일들을 설명하셨습니다.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1-4)
본문에서는 실족하게 하는 일과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타인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경고하시며, 우리 각자가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상대방이 잘못했을 때에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가르침을 통해 무한한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이는 우리 믿음의 본질이 사랑과 용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1) 하나님 나라의 개인 윤리(1-2)
예수님께서는 16장에서 예수님 안에서 임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초청에 자신의 전 생애를 드려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치명적 결과들을 비유로 제시하셨습니다. 이제 17장에서는 그 하나님 나라의 개인 윤리를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이 구절에 등장하는 ‘실족하게 하다’라는 표현은 특정한 죄를 언급하기보다는 제자로 살아갈 때 생기는 모든 종류의 방해물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이 구절은 제자의 삶에서 이러한 방해가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한 사람의 책임을 결코 경감해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실족하게 하는 일이 야기하는 심각한 결과를 예수님께서는 비유적 이미지를 통해 2절에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일을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 주위에 두르고 바다 속으로 빠져드는 이미지가 낫다는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통상 이 연자맷돌은 중앙부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러한 무거운 돌을 목에 두르고 바다에 빠진다면 다음에 일어날 일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미지를 활용해서 작은 자를 실족시키느니 차라리 그 돌을 목에 두르고 물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말함으로써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것이 야기하는 큰 영향력을 암시하십니다. 여기서 ‘작은 자들’이란 약한 자들, 병자들, 또한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이렇듯 1-2절은 주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개인 윤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2)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윤리(3-4)
‘너희는 스스로 경계하라’는 표현은 1-2절과 연관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3-4절에 걸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양자를 둘 다 아우르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2절과 연관될 때는 제자 중 작은 자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는 말씀이 되고, 3-4절과 연관될 때는 공동체적 윤리에 주의하라는 당부가 됩니다. 1-2절이 개인적인 윤리에 해당한다면, 3절에 나오는 ‘에안’ 이하 구절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공동체적 윤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회개’ 개념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구체적인 반응을 염두에 두고 사용되었다기보다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이 잘못 행한 것을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양자는 칼로 무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복음은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반드시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형제의 죄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습니다. 그 형제의 죄를 견책해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그 죄를 회개하면 형제들은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죄를 지은 자들이 회개할 경우 그 회개의 진정성을 증명할 책임이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회개하는 자에게 무한한 용서의 은혜를 베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곱 번이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7회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무한대의 용서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보여주는 특징은 그 나라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자를 받아주는 것입니다. 10절은 이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공동체의 동료인 자들은 자신이 자격 없는 자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료도 자격 없는 자라는 사실을 너그럽게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를 날마다 회개할 때, 그분께서 우리를 너그럽게 받아주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우리의 동료의 죄에 대해서도 관대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요구함(5-6)
믿음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기초입니다. 믿음은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하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줍니다. 또한,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믿음은 우리의 행동과 선택에 영향을 미치며, 주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믿음은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5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5-6)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도들은 예수께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주제는 누가복음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 현장 가운데 발생하는 기적적인 요소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도리어 이곳에 등장하는 사도들의 믿음 요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의 요구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이럴 경우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준행하기에 매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고, 그러한 요구를 준행하기 위해서 추가적인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공관복음서의 맥락 속에서 믿음이란 예수님의 사역 안에 임재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인식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지만, 이 문맥 속에서 믿음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명령을 수행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종의 자세(7-10)
믿음으로 섬기며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의 양이나 크기가 아니라 진정한 믿음, 살아있는 믿음을 강조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7-10)
본문에서는 주인이 종에게 명령을 내리는 비유를 통해, 종이 주인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 당연함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할 때, 그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겸손하게 임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우리는 그저 '무익한 종'으로서 주어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의 자세임을 보여줍니다.
(1) 또 하나의 비유(7-8)
7절은 1-4절까지 요구된 제자들의 개인 윤리와 공동체 윤리에 대한 가르침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사도들에게 노예 소유주의 입장에서도록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입장에 서서 7절에 나오는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합니다. 이 수사학적 질문은 그럴 사람이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주인도 종이 일을 마치고 왔다고 해서 바로 와서 식탁에 앉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주인은 자신의 종이밭에서 돌아왔을 때 적절한 의복을 입고 자신의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명령할 것입니다. 주인이 식사를 마치는 동안 종은 주인이 필요한 것을 수종들어야 합니다. 주인의 식사가 끝났을 때 좋은 식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 속에 등장하는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와 양자 사이에 기대되는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유비적으로 보여줍니다.
(2) 종들의 의무(9)
명령받은 것들을 행했다고 해서 종에게 감사해야 합니까?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1-4절까지 주어졌던 하나님 나라의 개인적이고 또한 공동체적인 윤리 강령들이 그 공동체에 속한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 의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상기시킵니다. 그것을 행했다고 주인이 결코 자신의 종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종들에게 요구된 일종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2) 종들에게 요구되는 바람직한 자세(10)
10절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시각을 가지게 되었을 때 종들은 주인이 기대하는 적절한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있는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 무익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윤리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공동체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당연히 순종해야 하는 것이고, 순종했다고 해서 상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윤리는 의무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근본적으로 무익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생각했을 때, 이 의무는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것과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그럴 때마다 사랑과 용서로 대해야 합니다. 또한, 믿음이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통해 큰 일을 이루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단순히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여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신의 역할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실천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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