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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8-01)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기도

누가복음 18장 1-14절


 

기도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방편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세상을 살아갈 능력을 얻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삶을 위한 기도가 자칫 자기과시의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경계하십니다. 기도란 자신의 선한 행위를 드러내어 은혜를 얻어 내는 방편이 아닙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께 의존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예고하셨습니다. 이제 주의 날을 기다리는 백성들의 자세를 소개합니다. 두 가지 비유를 통해 기도의 자세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 기도들은 과부처럼 끈질긴 기도와 세리처럼 겸허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1-8)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더디어서 지쳐 있습니까? 그래도 기도를 중단하거나 믿음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하게 부르짖는 택한 백성의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습니다. 바른 기도의 첫 번째 자세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1-8)

 

예수님께서는 집요한 과부의 비유를 통해 기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집요한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집요함을 특징으로 함으로 기도에 적용되면 꾸준히 기도함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가르치십니다(1).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 있었습니다(2).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태도는 신분이 낮은 사람을 무시하고 공의를 실행하지 않는 태도로 나타났습니다. 재판장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위와 권위를 지닌 사람이었다면, 과부는 가장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여성은 가족의 남자와 연결된 지위였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의지하고, 딸은 아버지를 의지하고, 과부는 아들을 의지해야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과부가 직접 재판장을 찾아온 모습은 집안에 남자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부는 재판관을 자주 찾아가서 “나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3). ‘원한’으로 번역되는 ‘에크디케시스’는 ‘정의’와 ‘공의’를 뜻합니다. 과부는 가해자에 대한 공의의 법 집행을 간청합니다(3,5,7,8). 재판장에게 ‘왔다’는 계속해서 찾아왔다는 뜻입니다. 재판장은 오랫동안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끈질김 때문에 겪는 고통을 독백합니다(5).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권이나 정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과부의 요청에는 응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끈질김 때문입니다.

명예를 목숨처럼 생각한 시대에 재판장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고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그는 여자의 원한을 풀어 주기로 합니다(5).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내용을 토대로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십니다(6-8). 불의한 재판장은 공의를 실현할 열정 때문이 아니라 여자의 끈질김 때문에 공의를 실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장과 전혀 다른 성품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운 분이고(6:35-36)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시고(11:1-13; 12:32), 공의를 실행하시는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유는 간청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과부는 재판장의 무시를 받은 신분이지만, ‘택하신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백성입니다. 불의한 재판장도 원한을 풀어 주었는데 공의와 자비의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해결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의지할 대상이 없고 원한을 품은 과부의 절박함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문제를 속히 해결해주십니다(8a). ‘속히’는 ‘확실히’, ‘갑자기’, ‘뜻밖에’ 등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의 눈에는 기도가 늦게 응답 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기도를 잊거나 무관심으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설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b)로 끝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과연 자신의 기도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지 질문을 던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오실 때 과연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성도들은 과부가 보였던 끈질김을 유지할 것입니까? 예수님의 질문은 앞 단락의 가르침을 배경으로 합니다(17:23-37). 이미 왔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여러 어려움과 시련을 만납니다.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빨리 와서 공의를 즉각 실현해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련의 시기일수록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해야 하고 하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고 가장 좋은 것으로 반응하시는 아버지입니다. 곤궁과 역경은 신자들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억하고 확실히 개입하십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자신이 사회-경제-종교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기억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9-14)

바리새인처럼 교만한 태도는 우리 안에서도 쉽게 발견됩니다. 종종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여러 지체와 자신을 비교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봉사와 헌신을 평가하면서 우월의식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의 행위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것 같아도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높이는 자는 결국 하나님께 거절당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9-14)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로 기도의 소재를 이어가십니다. 비유는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이들을 겨냥합니다(9).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10). 기도는 사람의 내면과 실제 모습을 드러내는 거울과 같아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태도인지를 드러넵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 특히 세리와 같은 죄인과 분리된 것으로 자긍심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기도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순간이므로 인간을 가장 겸허하게 만드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업적이나 성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사 8:17; 고후 1:9; 히 2:13). 그러나 바리새인은 자신이 행하는 경건 행위를 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토색, 불의, 간음을 행하는 사람들로 규정함으로써 모두 죄인 취급해버립니다(11). 자신은 남의 것을 탐내거나, 타인에게 불의를 행하거나, 남의 여자를 간음하는 것으로 피해를 준 적이 없다고 자랑합니다. 특히 멀리서 기도하는 세리를 흘깃 쳐다보면서 ‘이 세리’와 같지 않은 것으로 감사합니다.

또한 그는 금식(레 16:29-31; 신 9:9; 삼하 1:12; 12:16-23; 에 4:16; 단 9:3)을 위해 정해 놓은 날에는 물론 한 주에 두 번 금식합니다. 자신이 생산한 소산의 십일조뿐 아니라 시장에서 구입한 것과 같은 모든 생산물의 십일조를 냈습니다(12; 참조. 레 27:30-33; 민 18:21-32; 신 14:22-27). 한 주 두 번의 금식과 모든 생산물의 십일조는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는 기준이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은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것으로 자랑합니다.

세리도 바리새인처럼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기도합니다. 세리는 부정한 자로 공인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떨어져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눈에 세리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강도와 같고 사회를 오염시키는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세리는 로마제국의 권위에 의존해 유대인들의 혈세를 거둬 로마에 바치고 상당한 이윤을 챙긴 사람으로, 매국노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세리가 손을 댄 물건에 닿기만 해도 부정했고, 세리는 법정의 증인으로 인정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합니다(13).

가슴을 치며 죄인인 자신을 용서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그는 죄에 대한 깊은 자각으로 가슴을 치면서 탄식하고 회개합니다. 직업상 다른 사람들에게 끼친 피해를 생각하면서 통곡했을 것입니다. 헬라어 단어 수를 세어보면 바리새인은 29개의 단어로 자랑했고 세리는 6개의 단어로 회개했습니다. 세리는 말보다 눈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는 동작으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특히 제사 용어(출 25:17-22; 37:6-8; 레 16장)인 힐라스코마이(속량하다)를 사용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해주시고 진노하지 않으시길 기도합니다. 세리는 속죄와 긍휼을 구하는 방편으로 기도를 사용합니다. 그의 기도는 시편 기자의 탄식 기도를 떠올립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51:1).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세리를 평가하십니다(14). ‘의롭게 하다’를 사용함으로써 죄 용서와 긍휼을 구한 세리가 의롭게 된 사실을 선언하십니다. 세리는 의인으로 높아지고 바리새인은 죄인으로 낮아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찾으러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죄인으로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끈질기게 기도할 정도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 동시에 긍휼을 구하는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긍휼과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겸손한 태도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성품과 태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종교 생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는 채 이루어지는 종교 관습과 행위는 박제된 신앙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종교 생활이 지속되면 신앙생활이 화석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진짜 교회도, 진짜 그리스도인도, 사라지고 껍데기뿐인 종교만 남을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을 깊이 만나면서 자기를 낮추며 온전한 신앙으로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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