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8-03)
하나님 나라를 보는 믿음의 눈
누가복음 18장 31-43절
길거리에서 하얀 지팡이를 든 시각장애인을 보면 그들의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없고, 물건을 더듬어 찾아야 합니다. 드라마도 소리로만 경험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답답함을 겪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것만 바라보며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영적인 시각을 잃은 사람들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세 번째 마지막 십자가에 고난 받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여리고에서 맹인을 만나고 그를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사역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들에게 교훈을 하십니다.
고난과 부활 예고(31-34)
영적인 일은 육적인 시각으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는 영적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깨달음은 믿음과 간절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말씀을 진정으로 대할 때 영적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깨달음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결국, 영적인 통찰은 믿음과 진정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31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31-34)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고난과 죽음에 대해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세 번째로 그 고난과 부활에 대해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여러 번 말씀하신 이유는, 첫째는 예수님의 죽음은 예기치 못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견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선지서의 성취하고 지적하십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31). 선지자들의 기록은 어느 부분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 중에는 아마도 이사야 53장이 포함될 것입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린 하나님의 음성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 여기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이사야 42:1에 나오는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를 연상시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 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이사야 42:1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는 곧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 종이 당하는 고난은 이사야 5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3). 그는 또한 고난을 당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4).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채찍에 맞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눅 18:33), 이것은 이사야 53:5이 언급하는 여호와의 종의 고난과 관련됩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임당할 것을 언급하시는데(눅 18:33), 이사야 53:9은 여호와의 종이 죽임당함을 언급합니다. “그의 무덤이 악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고난을 당하리라 예언하시는데, 이것은 구약성경 어느 곳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까? 아마 시편 22:16일 것입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시편 22:16은 이방인에게 손발이 찔리는 고난을 당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이 바로 그러한 모습입니다.
시편 22편은 예수의 수난 과정 속에서 성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시편 22:1을 인용하시면서 이 점을 강하게 암시하십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22:7은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한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23:35은 이 말씀대로 관리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고 기록합니다.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시편 22:18은 “내 겉옷을 나누며 내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하는데, 누가복음 23:34은 이 말씀의 성취를 기록합니다.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예언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눅 18:34). 그 이유는 그 말씀이 감추어졌기 때문입니다(34). 그들은 구약 어느 구절을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셨는지 파악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예수님께서 왜 수난을 당해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부활이라는 초자연적 현상이 예수님께 발생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영의 눈이 밝은 맹인(35-43)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자, 보이지 않는 실체들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믿음은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더욱 확고히 할 수 있게 합니다. 믿음은 삶의 질을 높이고,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결국, 믿음은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줍니다.
35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35-43)
맹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메시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예수님께 자비를 요청하는 외침으로 표현되었으며, 잠잠히 하라고 요구하는 꾸짖음에 굴하지 않는 모습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 맹인은 여리고 주변의 길가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35). 그는 나사렛 예수님께서 지나가심을 듣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칩니다(37-38).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요청은 결국 눈을 뜨게 해달라는 요청이었음을 41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그는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했기에 눈을 뜨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메시아 칭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에 관하여 들은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들음을 통해 그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는 메시아가 맹인의 눈을 뜨게 하리라 믿었기에 예수님께 자신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할 수 있는 일로 기대된 것 중 하나가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7:22은 이것을 확실히 언급합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지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맹인 치유를 증거로 언급하신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맹인 치유 등을 메시아 표적으로 언급하실 수 있는 이유는 구약성경이 그렇게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35:5-6은 다음처럼 기록합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예수님께 치유를 요청한 맹인에게는 메시아가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러한 요청을 하다가 사람들의 방해를 받았을 때 그는 굴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이러한 모습에는 분명히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믿음을 언급하시며 그 맹인을 칭찬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42).
예수님께서 맹인을 칭찬하신 방식은 독특합니다. 맹인은 자신의 믿음 때문에 예수님께 간구할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맹인이 눈을 뜨게된 직접적인 원인은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맹인의 믿음이 치유의 원인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의 능력과 무관하게 맹인이 자신의 믿음으로 스스로 나았음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능력이 맹인을 치유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맹인의 믿음 속에 이미 담겨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인이 예수님의 메시아 정체와 능력을 믿었다는 점과 사람들의 방해에 굴하지 않은 점을 ‘네 믿음’이라는 표현을 통해 언급하십니다. 만일 그 맹인이 예수님의 메시아 정체를 믿지 않았다면 자신의 치유를 간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 맹인이 처음에는 소리쳐 간구하다가 사람들의 방해에 기가 죽어서 물러섰다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아마도 치유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맹인의 믿음은 치유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을 듣고 맹인이 이것을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자신의 믿음이 옳다는 인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시인하신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의 치유는 그의 믿음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결코 자신의 믿음 자체에 무슨 능력이 있어서 스스로 눈을 뜨게 되었다고 예수께서 가르치신다고 이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도리를 이해할 때에도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도리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믿음 자체로 구원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라는 조건을 보시고 이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인정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있는 사랑과 이 사랑이 표현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보고 이를 구원의 조건으로 여겨야 합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그것을 느끼고 보고 계십니까? 이것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물들이 많습니다. 이 방해물들은 제자들처럼 3년 동안 따라 다녔지만, 진정한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세상적인 성공만 바라보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지만 그 음성을 들을 수 없다면, 영적인 청각장애인입니다. 여러 가지로 많은 일들을 역사하지만 그것을 볼 수 없다면, 영적인 시각장애인입니다. 당신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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