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9-01)
구원 받은 삭개오
누가복음 19장 1-10절
어거스틴은 사람에게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그 공간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입니다. 세상의 사람이나 환경으로는 진정한 변화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으로 그 빈 공간을 가득 채울 때,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만족한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인격으로 채우시길 바랍니다.
-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지만 키가 작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갑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습을 보고 그 집에 유하겠다고 하시고, 삭개오는 기뻐하며 영접합니다. 그는 소유의 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속여 빼앗은 것을 4배로 갚겠다고 회개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도 구원이 임했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아니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변화는 첫 번째로 기쁨을 누립니다. 이전에 세상적인 것으로는 누릴 수 없는 영적 기쁨이 충만합니다.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1-7)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무화과나무에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고 그 집에 유하겠다고 하시고, 삭개오는 기뻐하며 영접합니다. 사람들이 그의 회개와 변화된 결단에 놀라며, 예수님이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1) 사모하는 세리장 삭개오(1-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여리고에서 또 다른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는 바로 세리장이며 부자인 ‘삭개오’였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결’, ‘정의’라는 의미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삭개오’는 그의 이름답게 순결하고 정의롭게 살고 싶었지만, 그의 삶은 순결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했습니다.
그는 ‘세리’ 중에서도 ‘세리장’이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동족(同族) 유대인들은 세리를 ‘허가받은 도둑’이라 부르며, 민족의 반역자요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미움을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힘만 믿고 동족에게서 세금을 과하게 거둬들여서 자신들의 부를 축적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부는 누리고 살았을지 모르겠지만, 한편에는 세상의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굉장히 공허함과 허무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살고 있는 지역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간절히 보기라도 원했습니다. 그런 마음은 삭개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간절함만큼 보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동족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소외되었고, 키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상당히 깊었습니다. 이런 장애물들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간절한 마음에 ‘예수님은 누구신가?’하는 관심이 더 켰습니다.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있을지도 궁금했습니다. 이 점에서부터 바로 믿음의 시작이며, 신앙 여정의 시작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으로부터 믿음 생활은 시작합니다.
(2) 돌무화과나무에 오른 삭개오(3-4)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관심이 예수님과 접촉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믿음과 신앙을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삭개오는 궁금증을 넘어 간절히 예수님을 만나길 원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교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로 달려가지만, 많은 사람들로 가로막혀 나갈 수 없었습니다. 더욱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나가는데 너무나 많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간절히 예수님을 만나길 원했던 삭개오에게는 장애물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무 위에라도 올라가서 예수님의 모습이라도 보고자 원했습니다. 그래서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에게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부자이며 세리장이며 중년의 사람이 어린 아이들처럼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세리장이라는 사회적 신분이나 나이와 체면을 고려할 때, 무화과나무에 오른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주를 찾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가는 수모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남다른 부와 지위가 있지만 남모를 죄인의 굴레 아래 살던 그에겐 이렇게 찾지 않으면 안 될 영적인 갈증이 있었습니다. 자기 삶에 대한 불만과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삭개오 같이 예수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알고 싶은 마음과 삭개오가 행동으로 옮긴 것처럼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주께서 말씀과 상황을 통해 다가오실 때 감추거나 피하지 말고 대면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현실과 마주 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3) 삭개오를 부르신 예수님(5-7)
예수님께서는 나무 위에 올라선 삭개오를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가 간절히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놓치지 않으신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발길을 멈추어 서서,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5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
사람들은 삭개오를 외면만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면을 보셨습니다. 그의 갈망을 아시고 인격적인 관계로 초청하십니다. 주님과 일대일 인격적인 만남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전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삭개오가 찾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를 찾으셨고 목자가 양을 아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사람들이 ‘죄인의 친구’라는 조소하는 것을 무릅쓰고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유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유(留)하시겠다.’고 하신 단어인 ‘μενω(메노)’는 일시적인 의미보다 영구적인 거주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의 유하심은 영원토록 임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임재하신 것은 바로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오늘’이란 단어를 통해 구원의 현재성(現在性)을 드러낸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속히 내려오라는 주의 말씀에, ‘급히’ 내려와 예수님의 일행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삶이 변합니다. 점점 세리장이 삭개오는 기쁨으로 변해갔습니다. 과거에 세상적인 것들(물질을 얻음, 부자로서 삶, 세리장으로서 직책)로 얻어지는 기쁨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이 기쁨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자신의 모든 공허한 문제를 해결해줄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삭개오의 삶이 변화되어 갔던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자신을 부인하게 된 것은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 그분의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궁금해 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삭개오처럼 많은 단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공허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삭개오처럼 ‘○○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마음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 문밖에서 노크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의 비난과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부르시는 주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작은 응답과 결심만으로도 주님은 기뻐하시고 우리 심령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구원받은 삭개오(8-10)
예수님께서는 흠 없는 완벽한 사람을 찾으려 오신 것이 아닌, 죄인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구원 받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특징은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 억매는 삶에서 자유케 되는 삶으로 변합니다.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8-10)
삭개오는 예수님께 자신이 소유의 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속여 빼앗은 것을 4배로 갚겠다고 고백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집에 구원이 임했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잃은 자를 찾고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1) 회개하는 삭개오(8)
삭개오의 간절한 마음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집에 임재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 삭개오는 근본부터 삶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겠다고 두 가지 결단합니다.
첫째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하겠다고 고백합니다. 다음으로, 다른 사람의 돈을 빼앗았다면 이것에 대해 네 배로 배상하겠다는 것입니다(출 22:1 참조).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은 여러 차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행동으로 제시되었습니다(11:41;12:33;18:22). 소유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것은, 아마 반절은 속여 빼앗은 것에 대한 배상하는데 나머지를 사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인지 스스로 깨닫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십니다. 삭개오의 정체성도 회복되게 됩니다. 그동안 자기 소유만 채우려고 파괴되었던 삶에서 나누려는 회복된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부르며 자신의 소유를 내려놓습니다. 삭개오의 인생에서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재물 때문에 근심하여 떠난 부자 관원과 다르게, 그는 진정 ‘바늘 귀를 통과한 부자’(18:25)였습니다. 오직 소유가 자신의 것처럼 생각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난 뒤,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회개는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반드시 삶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가난한 사람과 토색했던 일들을 기억하는 것은 자신이 죄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용서받기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삶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처럼 희생의 삶, 무소유의 삶 그리고 나눔의 삶을 사셨던 것처럼, 성도들도 진정 제자로서 억매인 삶이 아니라 나눔의 자유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2) 영적인 선언하신 예수님(9-10)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변화된 삭개오를 보고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9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
진정하게 변화된 삭개오는 진정한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삭개오에 구원이 임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동족 사이에서 소외되었던 삭개오가 참된 믿음을 소유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공개적으로 구원의 백성인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해 주십니다. 세리장이로서 공공연한 지탄과 정죄 가운데 방황하고 있었던 삭개오는,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의미로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그를 하나님께서 다시 찾으셨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참된 인생의 길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잃어버렸던 삭개오를 찾아서 구원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방황하고 있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삭개오는 부자도 세리도 죄인(7)도 아닌, 목숨 다해 끝까지 찾아야 할(15:4,8) ‘잃어버린’ 영혼이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규정하든,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는 큰 사랑을 베푸실 만큼 하나님께 우리는 가장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면 족합니다. 길 잃고 방황했던 자신에게 찾아오신 과분한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기쁘게 예배 드리는 성도들에게 말씀 드립니다. 길 잃고 방황했던 자신에게 찾아오신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공허한 삭개오가 찾아 헤맸던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당신은 이 축복을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어거스틴이 말했던 ‘채울 수 없는 공간’에 하나님으로 가득히 채워집니다. 그러므로 삭개오처럼 세속적인 삶에 천국인의 삶으로 정체성이 변합니다. 그 변화는 자기만 위해 쌓아가던 세상적인 욕심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누는 삶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예수님을 만나기를 위해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 곁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42 누가복음(89)'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64) - 누가복음 19장 28-40절 - 구원의 메시지: 나귀를 타신 예수님 (0) | 2025.01.08 |
---|---|
누가복음(63) - 누가복음 19장 11-27절 - 열 므나 비유로 교훈하신 예수님 (0) | 2025.01.08 |
누가복음(61) - 누가복음 18장 31-43절 - 하나님 나라를 보는 믿음의 눈 (0) | 2025.01.07 |
누가복음(60) - 누가복음 18장 15-30절 - 하나님 나라의 입성에 합당한 사람 (0) | 2025.01.07 |
누가복음(59) - 누가복음 18장 1-14절 -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기도 (0) | 2025.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