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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7-03)

 


광풍 속에서도 인도하시는 하나님

사도행전 27장 27-44절


 

모든 게 정상일 때는 굳이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차지한 위치와 갖고 있는 것들이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나의 한계 앞에 설 때 비로소 생깁니다. 하나님을 알 때 생깁니다. 바울이 탄 배 안에서 믿음의 진가는 어떻게 드러납니까?

 

  • 광풍으로 인해 아드리아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던 배는 미항을 떠난 지 14일 만에 기적적으로 육지에 근접하게 됩니다. 이에 선원들이 배를 버리고 거룻배로 도망가려고 시도하지만, 바울의 조언에 따라 군인들이 거룻배의 줄을 끊어버림으로써 수포로 돌아갑니다. 바울은 또다시 동료 승객들에게 음식을 권하며 위로합니다. 마침내 배에 탔던 276명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육지로 구조됩니다.

 

육지에 접근한 배(27-29)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 현실과 동떨어진 천국만 말한다면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신자들도 어려움에 처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려움과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위로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도록 도와줌으로 복음 전도의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27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27-29)

 

바울은 앞 단락에서 배만 손상될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이제 그 위로의 말이 현실에서 이루어집니다. 27절부터 ‘우리’ 단락이 다시 시작됩니다. ‘열나흘째 되는 날’은 아마도 그들이 미항을 떠난 지 14일째 되었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가 위에서 묘사한 대로 이 기간은 바울이 탄 배가 광풍에 의해 약 885km를 표류해 밀려왔다면 실제로 걸릴 만한 시간으로 추정됩니다. 당연히 이 측정에는 도중에 바람의 방향이 여러 차례 바뀐 것도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아드리아 바다’는 오늘날로 하면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걸프 만)를 가리키지만, 당시의 용례로는 시칠리아 반도와 그레데 섬 사이의 해역까지도 아드리아 바다에 포함되었습니다.

 

멜리데 섬은 시칠리아 반도 남단에 위치한 아주 작은 섬입니다. 이렇게 오랜 기간을 표류하며 오다가 선원들은 배가 육지에 가까이 왔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들은 육지에 가까이 왔음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 일이 낮에 일어났다면 육안으로 알아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일이 자정쯤에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들은 해안을 향해 부딪치는 큰 파도 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이 소리를 통해 배가 육지에 근접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육지에 가까이 온 것을 느낀 선원들은 이제 배 밑의 수심이 얼마나 되는지 수심을 측정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그들은 끈에다 추를 달아 내려 봤을 것입니다. 누가는 처음에 재니 스무 길이었고 조금 더 가서 재니 열다섯 길이라고 기록합니다. 점점 더 육지에 가까워졌다는 의미입니다. 일부 학자는 누가가 수심을 재는 선원 옆에 서서 그 내용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면 누가가 기록한 수심은 누가의 문학적 창작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수심이 점점 낮아지고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백파의 소리에 대비해 선원들은 안전 대책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들은 혹시 배가 암초에 걸리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고물에서 닻 네 개를 내리고 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립니다.

 

선원들이 도망을 시도(30-32)

 

우리는 공동체에서 각자 맡은 역할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감당하는 데 끝까지 충성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공들이 도망하려는 계획을 알아차린 바울은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군인들은 바울의 말대로 거룻줄을 끊어 버립니다.

 

30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31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30-32)

 

누가는 30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누가의 이 기록에 따르면 선원들은(어쩌면 그들 중 일부) 배에서 도망하기 위해 뱃머리에서 닻을 내리려는 척하면서 거룻배(16)를 바다에 내려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경주석가들은 이러한 악천후에 배에서 도주하려는 시도는 거의 자살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합니다. 학자들은 선원들이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동이트기 전까지 배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었음을 지적하며 누가의 이 기사에 의구심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은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만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냉철하게 생각하기보다는 논리적으로 볼 때 매우 어리석인 방법을 선택할 때가 많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원들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바울은 선원들이 배에서 도주한다면 승객들에게 닥칠 위험성에 대해 백부장에게 전달합니다.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누가는 왜 선원들이 배에 남아 있어야 모든 승객들이 안전한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배를 안전하게 운행할 전문가들의 손이 없다면 엄청난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이제 백부장이 바울의 조언을 무시하지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군인들은 바울의 조언에 따라 거룻배를 묶고 있던 줄을 모두 끊어버렸습니다. 백부장은 이 방법이 선원들을 배 안에 남게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랜만에 음식을 먹음(33-38)

우리는 누군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함으로 삶의 어떤 위기 속에서도 바울처럼 평안을 잃지 않고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에 참소망을 제시하는 참된 통치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33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35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38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33-38)

 

이제 바울이 다시 한 번 이 이야기에 개입합니다. 배가 닻으로 고정되고 날이 밝아오자 바울은 무려 14일 동안이나 금식을 강요당한 동료 승객들에게 음식 먹을 것을 권합니다. 이제 상황이 많이 안정되어 음식을 조리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육지에 무사히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체력이 필요했기에 음식을 먹고 에너지를 재충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모든 사람이 생명에 지장 없이 안전하게 구출될 것이라며 그들을 안심시킵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참조. 삼상 14:45; 마 10:36; 눅 12:7;21:18).

 

바울은 안심하라는 위로의 말을 전한 후 손수 떡을 떼어 먹으며 동료들을 격려했습니다. ‘하나님께 축사하고’는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이 식사 전에 일상적으로 행했던 감사 기도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능동적으로 음식을 먹는 바울을 본 동료 승객들도 용기를 얻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모습을 그리는 누가의 묘사는 예수가 오천 명을 기적적으로 먹이던 모습(눅 9:16),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던 모습(눅 22:19),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와 식탁교제를 나누던 모습과 흡사합니다. 따라서 많은 성경주석가들은 이 장면에서 초대교회에서 행했던 성찬식을 연상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찬식을 따로 행한 것이 아니라 일반 식사 도중에 행했습니다(고전 11:17-34). 바울이 이 자리에서 누가를 포함한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찬식’을 거행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는 그 배에 탔던 사람의 수가 모두 276명이었다고 덧붙입니다. 꽤 많은 숫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일부 사본에는 76명이라고 되어 있지만, 필사자의 실수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요세푸스도 아드리아 바다에서 600명이 탄 배가 침몰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누가가 이 숫자를 여기서 언급한 이유는 나중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 구원받게 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리라.

 

무사히 육지에 상륙(39-44)

사람들의 현실적 필요를 채워 주는 섬김과 봉사는 그들이 복음에 마음을 열게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의 삶의 문제에 민감하게 대처해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와 교회는 지역 사회 속에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또한 선교지에서 섬김과 봉사가 이어지도록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물질적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39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40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41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42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39-44)

 

모두 배불리 먹고 난 뒤에 사람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곡식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들은 또한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고 키를 묶었던 밧줄을 늦추었습니다. 그리고 전면의 돛을 올려 바람을 타고 해안 쪽으로 배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두 물살이 합쳐지는 곳에 와서 배가 모래톱에 걸려버렸습니다. 이 물은 박혀서 움직이지 않게 되었고 고물은 심한 물결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군인들은 죄수들이 혹시 헤엄쳐 도망갈까 하여 그들을 모두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군인들의 계획을 미리 알아채고 헤엄칠 수 있는 사람들은 먼저 뛰어내려서 육지로 올라가라고 명령했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해서 모두 무사히 육지로 올라오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순풍일 때는 몰랐습니다. 배를 의지했고 선장을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광풍 앞에서 가진 것은 쓸모없었습니다. 배는 사람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절망만 주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광풍보다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희망은 거기서 나왔고, 구원은 거기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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