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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8-02)


로마에서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행전 28장 16-31절


 

“우리 교회에서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성도들은 아마 사도행전의 결론부를 보고 실망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이 성도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그 마지막 부분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 바울은 로마에 도착한 후, 가택연금 형태로 갇히게 되었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로마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을 만나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였습니다. 바울은 두 번째 만난 회동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강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서두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던 것처럼, 마지막도 바울이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거침없이’ 전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만남(16-28)

전도는 사역자 혼자 짊어지는 짐이 아니라 하나님과 펼치는 협동 작전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할 기회를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끊임없는 영적 전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디고 어리석은 마음을 다스리셔서 은혜를 주셔서 복음을 듣도록 하십니다.

 

16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7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8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9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20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1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23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4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16-28)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23:11)라는 사명을 따라 우여곡절 끝에 그는 로마에 도착하였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재판을 받기 위해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지냈습니다. 비록 갇혀 있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들 향해 비교적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1) 로마에서 감금된 상태로 복음 전파(16-22)

 

드디어 바울은 긴 여정 끝에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한 군인과 함께 개인 주택에 머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16). 이것은 감금의 한 형태지만, 군부대 안이 아니었으므로 훨씬 가벼워진 감금이었습니다. 21-27장까지 바울의 재판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던 저자는 바울이 로마에 와서 받은 재판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로마의 숙소에 정착하자마자, 하루를 쉬고 삼일 째 되는 날 바울은 가장 먼저 로마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과 면담하는 것이었습니다(17). 표면적으로 그들에게 지금 상황과 과정을 설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이 항상 잊지 않았던 것은 어디서나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롬 1:16).

바울은 그들을 만나 자기는 유대인의 관습을 어긴 적이 없는데,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넘겨졌다고 설명합니다(17). 누가는 여기서 복음서에서 예수님에게 사용한 표현(눅 18:32)과 비슷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어쩌면 누가는 사도행전을 읽는 독자가 예수님의 운명과 바울의 운명이 서로 중첩되는 것을 느끼기를 의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여기서 누가가 앞에서 기록한 것과 상충하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즉, 앞에서는 바울이 로마인을 통해 유대인의 손에서 구원받았다고 기록했는데, 여기서는 유대인에 의해 로마인의 손에 넘겨졌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여기서 이 사건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그 내용의 골자만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유대인들이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앞에서 바울을 고발한 것을 보면 이 말이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로마인들은 자기를 석방하려 했지만 그것을 유대인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라며, 바울은 자기가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한 이유를 밝힙니다(17-18). 바울의 이 말에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20절의 ‘이스라엘의 소망’은 메시아의 오심과 부활에 관한 소망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자신이 신실한 유대인 신자이기 때문에 지금 로마인의 죄수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유대 지도자들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교는 로마가 합법적으로 인정한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의 설명에 대해 대답합니다. 그들은 먼저 유대로부터 바울에 대해 편지를 받은 일도 없고, 로마에 도착한 형제들 중에 누구도 바울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나 말을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21). 아마 바울이 로마 당국자들의 손에 넘어간 이후에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이 기소 건을 이길 승산이 거의 없기 때문에 포기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이어서 도처에서 반대를 받고 있는 ‘이 파’(복음)에 대해 바울의 견해를 듣고 싶어 했습니다(22). 그들은 바울이 대변하는 이 파, 곧 나사렛 사람 예수의 복음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의 견해를 경청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로써 유대인 지도자들과 바울 사이의 첫 번째 만남은 긍정적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다시 만날 약속을 잡고 헤어졌습니다.

 

(2) 유대인들과 2차 회동(23-28)

 

로마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의 말을 직접 듣기 위해 바울과 만날 약속된 날에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바울이 구금된 숙소로 찾아왔습니다(23).

따라서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중적으로 강론했습니다. 바울은 먼저 하나님 나라에 관해 전파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임하게 하신 참 메시아라고 전파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론한 것은 그 동안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유대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쳤던 메시지와 동일했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로 예수님에 관해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율법과 선지자)이 말하는 오실 메시아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통치(하나님 나라)가 메시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믿는 것만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24). 세계를 상징하던 도시, 즉 로마에서 복음을 배척하였는데, 그것도 바울에 의하여 세계에 선포되는 복음을 배척하였다는 사실은 사건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세계에서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고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지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로 그 사실을 선언하였습니다. 그 사실은 유대인에게는 비극적인 소식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사야가 복음이 유대인에 의하여 배척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고 선언합니다, 26-27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라고 바울이 인용한 말씀은 사실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계속 거부하면,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조차 상실하게 된다는 강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바울의 말은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복음을 거부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은 서신에서 때가 되면 유대인들의 마음이 바뀔 것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참조, 롬 11:25-32). 뿐만 아니라 누가는 바울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초대교회의 사명은 이방인에게로 향합니다. 바울은 더 이상 ‘유대인에게 먼저’라는 책임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누가는 아마도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사도행전의 독자와 초대교회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에 거침없이 전파(30-31)

사도행전은 소수의 믿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영광스러운 복음증거의 위임령을 받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 소수의 믿는 사람들이 그 이후로 복음을 들고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전하였습니다. 이제 사도행전이 마감되는 시점에서, 복음이 세계의 중심부요 수도인 로마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전 세계에서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전파되고 있습니다.

 

30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0-31)

 

바울은 2년 동안 동일한 셋집에 머뭅니다.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지만, 사람들이 바울의 숙소로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자기에게 오는 사람이라면 계속해서 복음 전파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30, 물론 바울이 자유롭게 외부 출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후서 2:9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선파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면서 새롭게 믿는 자들을 믿음의 뿌리 내리게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양육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이 2년간의 세월이 흐른 후의 이야기를 밝히지 않습니다. 2년이 지난 후 바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도행전의 독자들은 이 점을 매우 궁금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30절은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에 관해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누가가 바로 이 시점에 사도행전을 기록했기 때문에 누가는 그 이후의 일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추정은 사도행전의 기록 연대를 상당히 이른 시기로 잡아야 한다는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전체적으로 더 후대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통해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할 때 어느 정도의 시간을 두고 회고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바울을 고발하려는 유대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입니다(참조. 행 28:21).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자동적으로 석방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사도행전 23:11과27:24을 읽어보면, 누가의 글을 통해 바울이 결국 가이사 앞에 서게 되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강하게 받게 될 뿐입니다.

셋째, 바울이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았고, 그 결과 무죄 판결을 받았거나 아니면 로마 당국이 바울의 기소 건을 취하했을 가능성입니다. 후자의 가능성, 곧 로마 당국이 바울과 관련한 사건을 증거불충분으로 취하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둡니다. 둘째와 셋째 추정은 바울이 한 동안 자유의 몸이 되었다가 다시 체포된 후 사형을 당했을 가능성과도 연결됩니다. 이것이 바울의 목회서신을 통해 추측할 만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바울이 이 시점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했지만 누가는 바울의 순교를 사도행전에 기록하고 싶지 않았다는 추정입니다. 누가는 이미 앞에서 바울의 순교를 암시하는 힌트를 충분히 제공했습니다(참조. 20:23-25,38; 21:13; 23:11; 27:24). 다시 말해, 바울이 로마에서 이방인들에게 자유롭게 복음을 선포하는 모습으로 마무리하기를 누가가 원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가 만약 바울의 순교나 로마에서 일어난 네로의 그리스도인 대학살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몇몇 관점들은 쉽게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즉, 누가가 어떻게 로마 정부의 이미지를 이렇게 긍정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으며, 바울에 대한 로마의 태도(참조. 행 23:29)를 긍정적으로 그릴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결론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쉽지 않습니다.

 

바울의 마지막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든지 간에, 어쨌든 바울의 최후 운명은 개인적으로는 중요하겠지만, 그가 전한 복음과 비교하면 부차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남긴 바울의 마지막 모습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지금까지 사도행전에서 지속적으로 선포해 왔던 그 동일한 메시지를 ‘담대하고 거침없이’ 선포하는 모습입니다(31). 이 마지막 표현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바울에 대한 고발이 모두 거짓이고 불의한 것이었으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이제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이 복음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로 끝을 맺습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행전은 세상 끝 날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라고 인정하는 사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의 사명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통해, 어떠한 악조건 가운데서도 복음은 세상을 뒤덮으며 전진합니다. 바울은 갇혀 있었지만, 복음은 땅끝까지 넓게 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에도 바울과 같은 전도자를 찾으시고 계십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지금도 계속 굳건하게 행진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겠고 굳건하게 행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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