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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09-02)

 


환상을 설명하는 가브리엘

다니엘 9장 20-27절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간절하게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또한, 기도는 힘이 있어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 다니엘은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자이기에 그가 기도를 시작하자 하나님께서 가브리엘에게 명령을 내리십니다.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하나님의 응답이 가브리엘을 통해 전달됩니다. 다니엘이 기도를 통해 알기 원했던 예레미야의 칠십년이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와 한 이레의 세 시기로 나뉘는 일흔 이레로 해석됩니다. 칠십이나 칠십의 일곱 배수인 일흔 이레 모두 완전수에 해당합니다.

 

다니엘에게 오는 가브리엘(20-21)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의 기본으로, 우리의 마음과 필요를 그분께 드러내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는 핵심적인 수단입니다.

 

20○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21곧 내가 기도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20-21)

 

본문에서 다니엘은 기도하는 중에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기도가 도달했음을 알리고, 하나님이 그를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다니엘의 기도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응답을 강조합니다.

 

(1) 가브리엘의 등장 배경 (20-21a)

 

20절은 4a절과 함께 다니엘이 드린 기도(4b-19)의 바깥 틀의 역할을 합니다. 4절에 사용된 세 개의 동사 가운데 ‘기도하다’와 ‘자복하다’의 두 동사가 여기에도 나오고, 세 번째 동사 ‘이르다’는 같은 의미의 ‘말하다’로 바뀌어 나옵니다. ‘자복하다’의 목적어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는 5-14절의 요약이고, ‘간구하다’에 연결된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는 15-19절의 요약입니다. 4a절과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동사의 시제입니다. 4절은 세 동사를 ‘와우 미완료’로 사용하면서 다니엘이 기도하고 간구한 사실(일어난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데, 여기서는 네 동사가 모두 현재분사로서 ‘말하고 기도하고 자복하고 간구하는 중에’(동시성)가 강조됩니다. 다니엘이 아직 기도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벌써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가브리엘에 의해 다니엘에게 계시되는 역사의 진행 과정이 그의 기도와 상관없이 결정된 하나님의 계획임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확정된 의지에 속하기에 지체되거나 변경되지 않고 반드시 이뤄집니다.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은 “황폐한 성소”(17)가 재건되고 시온 산이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산이 되길 바라는 다니엘의 소망이 담긴 표현입니다.

 

(2) 가브리엘의 도착(21b)

 

가브리엘의 도착 시간으로 제시된 “저녁 제사를 드릴 때”는 매일 드리는 제사(8:12,13)의 중요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전에 본 환상이 7장 또는 8장의 환상을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가브리엘의 고지(22-27)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그의 뜻을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가 필요하며,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첫걸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정해진 시간 안에 이루시므로, 우리는 그의 신실함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깊은 신앙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22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이르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느니라 23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알리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 24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26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22-27)

 

본문에서 다니엘은 간절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합니다. 70주 동안의 기간이 정해져 있으며, 그 중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끊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마지막에는 황폐한 것이 임하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것임을 알립니다.

 

(1) 가브리엘이 온 목적(22-23)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죄를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9:1-21). 이에 하나님은 가브리엘을 보내어 다니엘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칠십 년의 해석에 앞서 가브리엘은 먼저 자신이 다니엘에게 온 목적이 그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곰곰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주체는 다니엘이지만(2), 깨달음은 신적 계시를 통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속하는 예언은 계시의 빛에 의해서만 참된 이해가 가능합니다. 예언 해석이 예언과 한 차원에 놓이면서 해석에도 동등한 신적 권위가 주어집니다. 다시금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음을 강조합니다. 다니엘은 특별히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기에 그가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말씀이 내렸습니다. “명령”과 “일”을 가리키는 단어 ‘다바르’는 둘 다 ‘말씀’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말씀은 24-27절의 계시를 가리킵니다.

 

(2) 예레미야의 칠십 년 해석(24-27)

 

가브리엘이 예레미야가 선포한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2)의 의미를 풀어줍니다. 한 해가 ‘주간(週間)의 해’로 계산돼 칠십 년이 일흔이레, 곧 사백구십 년으로 확장됩니다. 여섯 동사를 사용해 일흔 이레의 마지막에 성취될 일들을 간략히 기술합니다. 처음 세 동사는 부정적이고, 뒤의 세 동사는 긍정적입니다. 허물과 죄와 죄악은 동의어로, 죄악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옵니다. ‘영원한 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움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7,14,16). 이스라엘에 행하신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8:12-14과 관련해서는 성전의 회복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환상과 예언은 일차적으로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가리키지만, 폭넓게는 종말에 관한 모든 예언을 포함합니다. 환상과 예언이 그대로 실현돼 진실이었음이 확증됩니다. “지극히 거룩한 이”는 ‘가장 거룩한 곳’으로 옮겨야 합니다. 원래는 지성소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성소를 가리킵니다. 성소의 기름부음은 성소의 봉헌을 의미합니다. 안티오코스 4세에 의해 더러워진 성소가 유다 저항군의 지도자 마카비에 의해 회복돼 다시 여호와께 봉헌됩니다.

25절은 다음과 같이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는 (이것을)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재건하라는 말씀이 내린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지도자가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가 흐르리라. 또 예순두 이레 동안 (예루살렘이) 다시 광장과 해자를 갖춰 재건되겠지만, 어려운 때가 되리라.’ 두 주기의 기간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는 일곱 이레로,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말씀)이 내린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입니다. 사람의 말(영)일 경우에는 유배민의 귀환과 성전의 재건을 허락한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스 1:1-4)을, 하나님의 말씀일 경우에는 예레미야의 칠십 년 예언 또는 23절의 말씀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의 문맥에서는 세 번째 가능성, 곧 다리오 왕 원년에 가브리엘을 통해 다니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기름 부음” 의식은 왕과 제사장에게 적용되기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누구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아마도 스룹바벨과 함께 성전 재건을 주도한 대제사장 여호수아일 수 있습니다(슥 4:14). 일곱 이레 다음에 올 시대에는 예순두 이레의 기간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기간은 시작과 마지막에 초점을 맞추는데, 두 번째 기간은 전체를 뭉뚱그려 요약적으로 기술합니다. 재건된 예루살렘에 많은 주민이 정착해 살면서 광장도 마련하고 적의 침입으로부터성을 보호할 수 있게 성 주변에 해자도 세웁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나 사회적·경제적으로 활발하게 살아가지만, 평안이 보이지 않는 “곤란한” 시대입니다.

26-27절은 악이 기승을 부리고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마지막 한 이레에 관한 언급입니다. 예순두 이레가 지난 후에 잘려나갈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주전 170년 대제사장 메넬라오스의 술수에 빠져 살해당한 오니아스 3세를 가리킵니다(참조. 11:22; 마카비하 4:23-28).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릴 “한 왕(지도자)의 백성”은 대제사장 야손이나 메넬라오스를 지도자로 하는 유대의 헬라주의자들보다는 안티오코스 4세가 예루살렘에 주둔시켜놓은 셀류코스 왕조의 병사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에 주둔한 안티오코스의 용병들이 예루살렘과 성소를 허물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상주하는 이방인들로 인해 성읍과 성소가 더러워졌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이 그곳에 주둔한 이방 병사들의 통제를 받고, 예루살렘 성소의 제단 위에는 이 이방인들이 자기 신에게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가증한 것”이 세워집니다. 여호와의 성소가 올림포스의 신 제우스에게 돌려집니다. “그의 마지막”은 안티오코스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자주 전쟁의 표상으로 사용되는(참조. 11:10,22,26,40) 홍수는 안티오코스가 전쟁의 패배로 죽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 죄악이 끝나고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마지막 때는 전쟁의 황폐함이 지배하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12:1)의 때입니다. 마지막 한 이레 동안 안티오코스가 저지를 악행이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안티오코스가 동맹(“언약”)을 맺을 “많은 사람들”은 유대의 삶과 종교를 헬라화하려는 유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안티오코스는 헬라주의적 유대인들을 정치적으로 지원하면서 이들의 도움을 받아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한 유대의 지배권을 강화합니다. 심지어는 “그 이레의 절반”이 지나서는 제사와 예물을 금지시킵니다. “그 이레의 절반”은 7:25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에 상응하는 표현입니다.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는 문자적으로는 ‘가증한 것의 날개를 타고 황폐하게 하는 자가 오리라’ 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황폐하게 하는 자’는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이고, “가증한 것”은 여호와의 제단 위에 세운 이교의 제단입니다(참조. 마카비상 1:54). 예루살렘 성소가 더러워지는 기간은 황폐하게 하는 자가 예정된 멸망에 떨어지기까지입니다. 곧 한 이레의 남은 반 동안 제사가 중단되다가, 가증한 것을 세워 성소를 황폐하게 만든 “황폐하게 하는 자”가 멸망하고 성소가 다시 회복됩니다. 역사적으로, 주전 167년에 중단된 예루살렘 성소의 제사가 대략 3년이 지나 주전 164년에 재개됩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계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진정한 회개와 간구의 모범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세우십니다. 70주라는 기간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을 상징하며,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사역을 예고하며, 우리에게 희망과 믿음을 줍니다. 결국,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고, 그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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