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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3-01)

 


빌라도 앞의 예수님: 정치적 압박 속의 진리

누가복음 23장 1-12절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이를 겸손하게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인간의 한계와 부족함을 깨닫는 것은 신앙 생활에서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우리는 구원의 필요성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강화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 공회의 심문을 거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빌라도의 심문(22:1-5). 헤롯의 심문(22:8-12)을 받습니다. 당시 공회에 상당한 사법적 집행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형 집행은 로마 황제가 임명한 통치자의 판결이 있어야 했습니다(요 18:31). 예수님께서는 공회의 고소로 로마의 권위자들 앞에서 심문을 받습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1-5)

우리는 일상에서 부정한 방법이나 유혹에 빠지기 쉬움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러한 유혹은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공동체 내에서의 배신과 음모는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가치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더 건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신중하게 행동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1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1-5)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심문 이야기를 간결하게 서술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모색하는 상황이 묘사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반할 유다 이스카리옷과 협력하여 음모를 꾸미기로 결정합니다. 이 장면은 악한 의도가 어떻게 계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1) 공회의 고소(1-2)

 

유대지도자들의 교묘하고 집요한 고소에 대하여 예수님의 무죄를 강조하여 서술합니다. 그들은 총독 빌라도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교묘한 정치적 이유를 내세웁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도모하는 유대의 정치적 지도자라고 고소합니다(23:2,5,14). 그러나 빌라도는 거듭 고소에 대하여 예수님의 무죄를 선고합니다(23:4,14-15). 또한 헤롯도 그의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덧붙여 강조합니다(23:15).

본문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는 내용입니다. 1절은 빌라도에게 이송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한 산헤드린 온 의회는 그를 당시 총독 빌라도에게 인도하였습니다. 2절은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 내용입니다. 이 구절의 문장구조는 동사 ‘발견하다’의 목적어 ‘이 사람’을 세 개의 동사 ‘오도하다’, ‘금하다’, ‘말하다’의 현재분사형이 수식하는 형식입니다. 그리하여 본 절은 “우리가 … 오도하는 … 금하는 말하는 이 사람을 발견하였다”는 형식의 문장입니다. 산헤드린의 고소 내용은 세 가지로 언급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백성을 오도했다는 것입니다. 이 고소 내용은 23:5에 상세하게 언급됩니다. 다음으로 그가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는 것입니다. 이 고소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상반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였습니다(20:25). 끝으로 그가 스스로 그리스도 왕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공회의 심문은 예수님의 정체와 관련된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22:67-7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죽이기 위해 정치적인 이유를 전면에 내세워 고소하였습니다(참조. 요 19:12).

 

(2) 빌라도의 심문(3)

 

빌라도의 심문과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유대인의 왕이냐?” 이 문장에서 주어가 강조 형태로 나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고 있다.” 이 문장 역시 주어가 강조형으로 나옵니다. 이 대답의 의미는 상당히 모호합니다. 질문에 긍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부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문맥상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임을 인정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치적인 의미에서 유대인의 왕을 뜻한 것은 아닙니다.

 

(3) 빌라도의 판결(4)

 

이러한 사실은 거듭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하는 빌라도의 반응을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23:4,14). 더욱이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심문에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증언합니다(요 18:36). 또한 그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고 대답합니다(요 18:37). 4절은 빌라도의 판결 내용입니다. ‘죄’는 고소에 대한 근거를 뜻합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혐의의 근거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고소하는 자들에게 그의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4) 공회의 재고소(5)

 

5절은 빌라도의 선언에 대한 무리의 반응입니다. ‘무리’는 1절과 마찬가지로 공회의 온 무리를 말합니다. 그들은 빌라도의 무죄 선언에 더욱 집요하게 고소하였습니다. 그가 온 유대를 다니며 백성을 오도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 한다고 고소하였습니다. 이러한 고소는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교묘하게 꾸민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메시아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2:14).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으로 말미암는 평화는 세상의 어떤 통치자 아래서 누리는 평화와 다릅니다: “나는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요 14:27).

 

헤롯에게 이송됨(6-7)

 

우리는 환경이나 유혹에 따라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은 유혹이 결국 큰 배신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은 단순한 결정이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매 순간의 선택이 우리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항상 신중해야 합니다.

 

6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6-7)

 

빌라도는 온 공회의 집요한 고소에 예수님을 헤롯 안디바에게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헤롯의 통치 지역인 갈릴리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주전 4주후 29년 갈릴리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누가복음에서 헤롯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을 대적하는 역할로 등장합니다(3:19-20; 9:7-9; 13:31; 23:7-12).

6절에서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빌라도는 그의 선고에 이의를 제기하는 온 공회로부터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소요를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자라난 곳인데 그의 고향으로 언급됩니다(4:16,24). 누가는 그의 복음서 전반부(4:14-9:50)를 갈릴리 중심으로 서술합니다. 7절은 빌라도로부터 헤롯에게 이송되는 장면입니다. ‘보내다’라는 동사는 어원적으로 상급 재판을 위해 보내는 것을 뜻합니다(23:11,15).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에서 재판은 범행의 발생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경우 이례적으로 피고인의 관할 지역으로 이송됩니다. 재판을 담당할 헤롯은 그때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헤롯 앞에 서신 예수님(8-12)

우리는 자신의 희생이 없으면 영혼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희생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도 희생을 통해 더 큰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지역 사회를 위해서도 우리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결국, 우리의 희생이 없다면 지역은 결코 변화하지 않을 것입니다.

 

8○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8-12)

 

예수님의 심문에 관한 누가복음의 기록은 간결한데 그의 무죄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합니다. 빌라도의 무죄 선고(23:4)에 이어 헤롯도 별다른 혐의를 찾지 못합니다(23:15). 누가는 이후에 계속해서 예수님의 무죄를 강조하는데 빌라도의 무죄 선고(23:14,22)는 거듭 반복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범행자(23:41), 십자가의 처형을 담당한 백부장(23:47)도 그의 무죄를 증언합니다.

 

(1) 헤롯의 심문(8-9)

 

8절은 피고인 예수님을 본 헤롯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을 본 그의 큰 기쁨과 그 이유를 밝힙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랫동안 만나길 소원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는 이적을 보기 원하였습니다(9:7). ‘이적’은 표적을 말하는데 누가복음에서 표적을 보기 원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언급됩니다(11:16, 29-30). 9절은 심문에 대한 예수님의 침묵을 서술합니다. 산헤드린과 빌라도의 심문에 답변한 것(22:67-70;23:3)과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헤롯의 심문에 침묵을 지킵니다. 이 구절에서 그의 침묵은 여호와의 종의 침묵을 연상시킵니다(사 53:7).

 

(2) 종교 지도자들의 고소(10)

 

격렬하게 고소하는 온 공회의 모습을 서술합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회원들로 예수님의 고소를 주도한 자들입니다(22:66). 그들은 헤롯의 심문과 예수님의 침묵을 지켜본 후에 더욱 격렬하게 고소하였습니다. ‘힘써’로 번역된 단어는 ‘뻔히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부사로 그들의 격렬한 모습을 잘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3) 빌라도에게 환송됨(11-12)

 

헤롯과 군인들의 조롱을 서술합니다. 본절에서 ‘업신여기다’, ‘조롱하다’, ‘옷을 입히다’라는 세동사의 분사형이 주어인 헤롯과 군사들을 수식합니다. 빌라도와 마찬가지로 헤롯은 예수님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23:15). 그런데 빌라도와 달리 그는 자신의 군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며 빛난 옷을 입혔습니다. ‘빛난 옷’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고소를 반영합니다(23:2). 일반적으로 왕이 입는 옷을 상징하는 빛난 옷을 그에게 입힌 것은 극단적인 조롱의 표현입니다. 왕의 위엄과 영광의 빛난 옷이 극단적인 모욕과 멸시의 표현으로 피고인 예수님에게 입혀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조롱당하면서 빌라도에게 다시 이송되었습니다. 12절은 헤롯과 빌라도의 야합을 서술합니다. ‘원이었으나’는 문자적으로 ‘서로에게 반목의 상태에 있었다’는 표현입니다. 그들이 왜 서로 불화와 반목의 상태에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판과정에서 그들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와 헤롯의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계속 재판을 위해 끌려 다니며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그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가는 여정의 도구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때, 때론 고난을 받고 모욕과 멸시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주 안에서 성도에게 임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이루어가는 통로가 됩니다. 본문을 통해 고난을 묵묵히 감당하신 주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와 그 과정에서 진리와 정의가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구원의 필요성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선택과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우리의 삶에서 진리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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