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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3-03)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신 예수님

누가복음 23장 26-43절


 

찬송가 중에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 오리 저들 대답하였다’(519)라고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라고 물으시면, 언제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언제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랑과 충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억지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마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질 수 있도록 자신을 내놓아야 합니다.

 

  •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 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의 사형 방법 중에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저주의 공포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상징으로 바꾸셨습니다.

 

끌려가시는 예수님(26-31)

예수님께서는 고난 중에도 희망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힘든 상황에서도 회복의 가능성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고통 속에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어려운 순간에도 희망을 품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고통은 새로운 시작과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26-31)

 

본문에는 유대인들은 승리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최종 판결에 따라 처형 장소로 끌려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의 길을 올라 가시면서도 잃어버린 영혼들을 만나십니다.

 

(1) 구레네 시몬을 만나심(26)

 

본문은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언급합니다. 그가 예루살렘 거주자인지 유월절 순례자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당시 북아프리카의 북부 연안 도시 구레네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여 유대인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오순절에 구레네에서 온 순례자들을 언급하고(행 2:10), 또한 구레네인의 회당을 언급합니다(행 6:9). 그리고 본 절에서 시몬을 구레네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하면 시몬은 유월절 순례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시골에서 오는’이라는 구절의 의미도 모호합니다. 시몬을 유월절 순례자로 본다면 이 표현은 예루살렘 성 밖에서부터 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형을 당하는 죄수는 사형장까지 십자가를 메고 갔습니다. 그런데 몸이 지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메고 갈 수 없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리하여 시몬을 강제하여 십자가를 지우고 그를 따라가게 하였습니다(마 27:32: 막 15:21).

 

(2) 통곡하며 뒤따르는 자들(27)

 

본문은 예루살렘에 임할 고난에 대한 예언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예언은 계속적으로 반복됩니다(13:34-35; 19:41-44; 21:5-6,20-24). 27절은 십자가 형장으로 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서술합니다. 백성의 큰 무리가 그를 따랐습니다(7:9; 9:11). 따르는 자들 중에 특히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인들의 큰 무리도 있었습니다.

 

(3) 고난에 대한 예언(28-31)

 

본문은 예루살렘에 임할 고난에 대한 예언입니다. 28절에서 ‘예루살렘의 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들을 대표합니다(사 1:8; 슥 9:9; 요 12:15). 예수님께서 고난을 예견하시며 그녀들과 그녀들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아니라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예루살렘에 임할 고난에 있습니다. 29절은 고난의 혹독함을 역설적으로 서술합니다. ‘날이 이르면’은 예루살렘의 멸망의 날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 21:23과 대조되는데 잉태하지 못하는 것과 자녀가 없는 것이 오히려 복이라고 말하게 될 것을 언급합니다. 자녀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유대인의 통념에 비추어 보면 본 절의 표현은 대단히 역설적입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역설적인 만큼 고난의 혹독함을 드러냅니다. 30절에서 고난의 혹독함은 계속해서 서술됩니다. 고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그 고난이 얼마나 혹독한가를 묘사합니다. ‘그 때에’는 앞구절에서 ‘날이 이르면’과 동일하게 예루살렘 멸망의 때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산들이 무너져 내림과 언덕들이 덮침을 간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호세아 10:8의 인용인데 다가올 진노를 피하여 차라리 죽음을 간절하게 원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31절은 최종적으로 격언적인 말의 인용을 통해 장차 임할 고난의 혹독함을 강조합니다.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가 비교되는데(겔 20:47) 내용상 ‘푸른 나무’는 예수님을, ‘마른 나무’는 ‘예루살렘의 딸들’을 비유합니다. 무죄한 예수님의 고난과 비교하여 유죄한 자들의 고난은 더할 나위가 없을 것임을 강조합니다.

 

십자가형을 당하신 예수님(32-38)

어느 누구도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앞에 있는 고통이라면 피해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고통 없는 세상, 고통 없는 인생이 되길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통은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도 이러한 원리입니다.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32-38)

 

본문은 예수님께서 두 범죄자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서술합니다. 그 내용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23:32-34), 관리들과 군인들의 조롱(23:35-38)으로 구성됩니다.

 

(1) 행악자처럼 취급당하신 예수님(32-34)

 

본문은 다른 두 범죄자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누가는 그들을 ‘범죄자’, ‘악행자’로 언급하는데 마태와 마가는 ‘도적들’, ‘강도들’(마 27:38; 막 15:27)로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기 전에 말씀하신 대로(22:37) 이제 그가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으리라는 예언이 성취됩니다(사 53:12).

34절에 서술된 예수님의 기도는 일부 사본에 없습니다. 그 내용이 문맥의 흐름을 매끄럽게 이어주지 못하므로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 기도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의 기도에 반영됩니다(행 7:60).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새”는 시편 22:18의 성취로 봅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의 관습에 따르면 집행관들은 옷을 비롯한 사형수들의 소지품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2) 관리들과 군인들의 조롱(35-38)

 

본문은 관리들의 조롱 장면입니다. ‘관리들’은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입니다(23:13; 24:20).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의 원문 직역은 ‘하나님의 그리스도, 택하신 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라는 예수님의 정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러한 조롱은 그들의 종교적 관심을 드러내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정체를 부인한 사탄의 시험을 상기시킵니다(4:3,9).

36-38절은 군인들의 조롱 장면입니다. 그들은 신포도주를 주고 유대인의 왕이냐고 반문하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의 조롱은 다분히 정치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 섰을 때에도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가 말한 대로라고 대답하셨습니다(23:3). ‘신 포도주’는 군인들이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였습니다. 공관복음의 병행구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쓸개 탄 포도주(마 27:34), 혹은 몰약을 탄 포도주(막 15:23)를 주었다고 서술합니다. 쓸개나 몰약을 탄 포도주는 진통 작용이 있는 마취제로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의 고통을 감하기 위하여 제공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신포도주를 주었다고 언급합니다(요 19:29).

 

같이 처형당한 강도들(39-43)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회개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 우리는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39-43)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신 후, 유대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로 끌려가시고, 그곳에서 두 강도와 함께 처형당하십니다. 강도 중 한 명이 예수님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1) 두 행악자와의 대화(39-41)

 

다른 성경에는 행악자들에 대한 소개를 하지만, 예수님과 두 행악자와의 대화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 중 한 행악자는 예수님을 ‘비방(신성모독)’했는데, 그 내용은 관리들과 군인들이 조롱한 내용과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쪽에 매달린 죄수는 그 죄수를 꾸짖으며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한다. 이제 예수님은 그에게 구원을 허락하신다. 인생의 끝자락, 문이 바로 닫히기 직전에도 이와 같은 구원의 기회와 역사는 일어난다.

 

(2) 낙원에 임할 행악자(42-43)

 

마지막으로 그 행악자는 예수님께서 그의 나라에 임하실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죄인에게 즉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물하셨습니다. 유죄를 선고받은 행악자가 ‘오늘’이라는 날에 의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낙원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악자에게 말씀하신 ‘낙원(παραδεισος)’은 신약에서 세 번 사용합니다. 그 단어는 ‘음부(陰府)’의 반대말로, 영원히 ‘더할 수 없는 행복(至福)’을 누리는 하나님 백성의 처소를 의미합니다(고후 12:4; 계 2:7). 모든 세상에서 더 할 수 없는 행복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선들 중에 오직 한 행악자만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사건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한 쪽 강도에게 낙원을 허락하십니다. 예수님 곁에 달린 한 강도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자신을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아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도 다른 이들을 걱정하셨고, 그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강도 중 한 명이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했을 때, 예수님은 즉시 그를 받아주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회개와 믿음을 통해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결국, 누구든지 진심으로 돌아오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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