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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1-01)


모든 소유의 주인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20장 41절-21장 4절


 

‘경건(敬虔)’를 정의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행동하는 것이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삶’과 반대되는 것은 ‘외식하는 삶’입니다. ‘외식(外飾)’이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는 다윗의 고백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통해 경건과 외식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 20:41-44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기독론을 강론하신 내용을 소개합니다. 20:45-47은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비판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1:1-4은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적은 헌금을 칭찬하신 내용을 소개합니다. 재산 전체를 헌금한 과부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과 대조됩니다. 과부가 이렇게 행한 기사 뒤에 성전 파괴 예언이 등장하는 것은 과부의 행위에 관한 예수님의 반응이 과부에 관한 칭찬과 감탄만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의 불의에 대한 슬픔의 한탄임을 암시합니다.

 

다윗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41-44)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깊이 개입하시며, 각자의 상황 속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때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며, 그분의 뜻을 신뢰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여정에 순종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의 삶이 더욱 의미 있고 풍요롭게 변화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41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41-44)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기독론을 강론하시며 당시에 메시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를 비판하십니다. 비판의 근거로 예수님께서는 시편 110:1을 사용하십니다. 메시아를 다윗 비슷한 존재로 보는 메시아 사상은 시편 110:1에 어긋납니다.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입니다. 메시아는 다윗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다윗보다 우월한 존재입니다. 메시아는 또한 다윗과 같은 군사적 정복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기관들의 메시아 사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우리는 예수님께서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물리력을 사용하는 해결책을 선호하지는 않습니까?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세상을 구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배우는 제자의 길이 아니라 세상과 힘으로 싸워 이기는 승리주의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과 물리적 힘 대결로 이겨보려는 생각이 은연 중에 그리스도인들의 생각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기독교인을 대통령으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그러합니다. 그렇게 기독교인이 정치권력을 잡음으로써 무언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승리주의이며 십자가의 도와는 거리가 멉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군사적 메시아 사상에 빠져 있었듯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물리적 힘을 추구하는 잘못에 빠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을 힘으로 정복하는 메시아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는 힘으로 세상을 억눌러 무언가 이루려 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상을 대할 때 교회는 패배하는 것 같지만 부활의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비판한 서기관(45-47)

신앙의 본질은 외적인 형식이나 전통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발전시키는 데 있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더 깊은 이해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외부의 규칙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신앙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탐구는 개인의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기여합니다. 결국, 신앙의 진정한 가치는 내면의 변화와 하나님과의 깊은 연결에서 비롯됩니다.

 

45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45-47)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메시아 사상을 비판하신 후에 그들의 행동을 비판하십니다. 우선 서기관들의 복장을 비판하십니다. 서기관들은 서기관들이 입는 하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즐겼습니다. 그들의 신분이 드러나면 좀 더 존중받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서기관을 조심하라고 명하십니다. 왜 조심해야 합니까? 그들은 명예를 좋아하는 자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명예를 좋아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음과 동시에 그러한 종교지도자가 되지 말도록 경고 받습니다. 우리는 혹시 박사 가운이나 목사 가운을 입는 것을 좋아합니까? 그러한 복장으로 설교를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새 명예를 좋아하게 된 것이고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는 교만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장에서 인사받는 것을 즐기는 서기관들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시장에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는 것을 즐기는 것은 마치 연예인이 팬들에게 인기를 얻는 것과 흡사합니다. 팬들은 인기 연예인을 기억하고 알아보고 환호하지만 인기 연예인은 팬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서기관들은 연예인도 아니면서 그렇게 대중들이 알아채고 인사하는 것을 즐깁니다. 못 알아보고 인사하지 않으면 기분이 나쁘기에 서기관 예복을 입고 다닙니다. 이러한 서기관을 예수님께서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종교 지도자들이 없습니까? 만일 있다면 그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기관들처럼 대중의 인기를 갈망하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회개하고 고쳐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방해하며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하는 것도 방해합니다. 대중에게 비친 허상을 자기 자신인 줄 알고 자신의 인생이 아닌 인생을 사는 오류에도 빠집니다. 대중이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 소신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대중이 원하는 것이면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게 되는 비참한 자리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거짓 선지자의 길입니다. 그렇게 하여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자에게는 화가 있음은 예수께서 분명히 선언하신 바입니다(눅6:26).

예수님께서는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조심하라고 명하십니다. 회당에서도 특별한 존재인 양 대중과 구별된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자들의 마음 상태는 참된 경건과 거리가 멉니다. 우리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예배당 강대상 뒤에 놓인 의자들에 앉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들은 조심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자에 앉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 의자에 앉으면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좋아지고, 평범한 의자에 성도들과 함께 앉으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게 되고 있다면 늦기 전에 회개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서기관들처럼 되어선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잔치에 초대받을 때 주인 옆에 앉기를 원하는 사람이 높은 관직은 얼마나 더 원하겠스니까? 우리는 그렇게 높은 직책을 탐내는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높은 직책을 탐내고 있다면 늦기 전에 고쳐야 합니다. 그러한 부류의 사람은 예수님께서 조심하라고 경계하신 유형이므로,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을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재물을 탐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재물을 탐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소문이 들려옵니다. 성도들이 헌금한 돈으로부터 엄청난 돈을 횡령한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때로 오래 기도하는 것을 과시하며 경건을 위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탐욕을 채우기 위한 위선적 경건일 뿐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탐하면서도 동시에 남에게 경건하게 보이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늦기 전에 고쳐야 합니다.

우리는 왜 기도하십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기도하십니까?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기도합니까? 만일 우리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이를 통해 사람들로부터 무언가 혜택을 얻고자 기도를 이용한다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서기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늦기 전에 그 길을 벗어나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은밀히 기도하는 길로 돌이켜야 합니다.

 

두 렙돈 헌금과 부자의 헌금(1-4)

헌신은 단순히 외적인 양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마음의 자세가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 행동의 진정한 의도를 보십니다. 따라서, 작은 헌신이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더 큰 가치를 가집니다. 외적인 모습에 치우치기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자세가 진정한 신앙의 본질임을 깨닫게 합니다.

 

1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1-4)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가장 작은 주화 두 개를 가장 많은 헌금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은 가난한 성도들의 적은 현금을 비판하는 데 사용되기도 해왔고, 가난한 성도들의 재산을 삼키는 도구로 오용되기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초점은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적은 현금을 칭찬하신 데 있습니다. 이 예수를 따라 우리는 가난한 성도의 적은 헌금을 크게 칭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헌금을 많이 하라고 강조하는 본문으로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성도가 내는 적은 현금을 보면서도 그 성도의 헌신에 감탄하며 안타까움을 느낍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본받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현금을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는 본문 바로 앞에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을 비판하는 본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받은 성전이 멸망하게 됨이 이어지는 본문에서 예언됩니다. 이러한 문맥의 흐름 속에서 본문을 적용한다면 우리는 결코 이 본문으로 전 재산을 헌금한 과부처럼 헌신적인 현금을 하라고 설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본문을 그 문맥에서 떼어내어 그렇게 설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과부의 가산을 삼기는 서기관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에 대한 질문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메시아의 정체성을 강조하시며, 진정한 신앙은 외적인 모습이 아닌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됨을 보여주십니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드린 것은 그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헌신의 상징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의도를 보신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따라서, 진정한 헌신은 양보다 질에 있으며,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신뢰가 중요함을 상기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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