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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7-02)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하실 하나님

이사야 57장 14-21절


 

인간의 뿌리 깊은 절망스럽습니다. 문명은 발전해도 야만의 시대는 지속되고, 오랜 신앙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회개를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비와 위로와 평강으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위로부터 내리시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 왕정시대나 심판을 경험한 포로기 이후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형편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산과 골짜기와 성읍에는 우상이 마치 제 집인 양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어 보였지만, 역설적이기도 이스라엘의 한계와 무능력이 그분의 긍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하시는 분께서 자기 마음의 길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절망적 현실을 인정하고 그 고질병을 고쳐주기로 하십니다.

 

내적 영적 정화(14)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그들을 치시는 까닭은 그들을 없애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백성들의 욕망에 영합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오도록 인도하라고 명합니다.

 

14그가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14)

 

바벨론의 압제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얻게 된 이스라엘은 그들의 범죄로 인해 또 다시 심각한 영적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죄악의 삶으로 다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내 백성”으로 부르고, 그들 가운데 일부에 속한 너희에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라는 대상은 문맥상 ‘내 백성의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이 56:9-12에서 고발당한 지도자들과 같은 집단인지는 불분명하지만, 56:9-57:21의 넓은 문맥에서는 가능합니다.

여호와께서 지도자들에게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돌을 깔고 길을 평탄하게 닦아 걸림돌을 들어내는 사명이 맡겨집니다. 이 길은 유배민이나 흩어진 자들의 귀환을 위한 물리적 길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돌아오시는 길도(40:34) 아닙니다. 여호와의 백성이 그분께로 나아가는 내적-영적 갱신의 길입니다.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52:7-9)를 맞이할 수 있도록 지도자들은 백성을 영적으로 준비시켜야 합니다.

13절까지 폭로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비해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게 두드러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우상이 사실은 바람에 날려가는 헛된 것임에 불과한 것임을 보이신다는 말씀이 심판의 전부인 듯합니다. 오히려 14절부터는 범죄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돌리킴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거치는 것”(걸림돌)은 잘못이나 죄를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지체되지 않도록(56:1) 자기 안에 있는 악한 요소들, 그분을 신뢰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55:6-7). 62:10에서는 예언자가 같은 표현을 사용해, 아마도 그의 제자들에게, 백성이 여호와께서 나아가는 데 방해되는 것을 제거해버리라고 명령합니다.

 

구원 선포(15-19)

하나님의 책망의 목적은 회복과 세움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통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분노를 그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며 그리고 세워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용서와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찬양하는 삶으로 살아갑니다.

 

15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16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17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 18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19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14-19)

 

하나님의 징계 목적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거룩한 행실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백성들에게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기에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삼중으로 소개합니다.

 

(1) 영과 마음의 소생(15)

 

15절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장엄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지극히 존귀하며”라고 소개합니다. 6:1의 ‘높이 들린’과 동일한 표현으로(참조. 53:12) 하나님의 공간적 초월성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높고 높으신 분으로(33:5,16) 땅의 사건에 개입하시지만,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는 않으십니다.

 

(2) 영원히 다투지 않으시는 여호와(16)

 

“영원히 거하시며”는 그분의 시간적 초월성을 보여줍니다. 흥망성쇠를 경험하는 민족들의 신들과 달리 그분은 변함없이 활동하시며 언제나 왕으로 통치하십니다. “시온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8:18)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십니다(41:4; 44:6; 48:12). 또한,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다 이름 하는 이”입니다(15).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은 전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으로 비교를 거부하시는 그분의 배타성과 절대성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홀로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그분의 거룩함은 역동적 힘으로 때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기도 하고(5:24; 10:20; 31:1), 때로는 민족들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도 합니다(41:14; 43:3,14; 49:7). 여호와의 높으심과 영원하심과 거룩하심이 그분 백성에게 구원과 화평의 문을 열어줍니다.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시는 여호와께서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하시는 분입니다(15). 여호와는 초월적이고 배타적이시지만, 당신을 찾는 자를 즐겨 만나십니다(55:6). ‘통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부서졌음을 발견하는 이들입니다. 그분에게서 피난처를 찾는 자는 거룩한 산에서 그분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57:13).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는 회개한 자보다는 현재의 재앙과 환난을 받아들이고 유일한 피난처와 도움이신 여호와를 향해 겸비한 자세를 내보이는 자를 가리킵니다(시 34:18; 잠 29:23). 여호와께서 사회적-종교적으로 짓밟히고 당신 앞에 낮아진 자들의 영과 마음을 되살려주십니다. 현재의 역경에서 구출하여 새로운 소망을 주십니다. “통회하고” 의 ‘다카’는 ‘짓밟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단순히 뉘우치거나 회개한 자보다는 현재의 어렵거나 악한 형편으로 인해 짓밟힌 자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참조. 3:15; 53:5,10). “겸손한”의 ‘샤팔’은 원래 ‘낮다’, ‘낮아지다’, ‘가라앉다’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회적으로는 귀함과 대조되는 천함을, 신학적으로는 ‘자신을 높이는’ 교만에 대응하는 ‘자신을 낮추는’ 복종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공의 앞에 구원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파수꾼과 목자는 부패하고 무능하고(56:9-12), 사람들은 의인이 폭력에 희생당해도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고(57:1-2), 여호와를 잊고 높은 산에서 계곡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우상이나 섬기는데(57:3-13) 무슨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 다시 진노하시는데 어떻게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의로운 심판을 견딜 수 있는 피조물은 없지만, 당신 백성의 피곤함(연약함)을 아시는 여호와께서 영원히 다투지는 아니하시고 끝까지 노하지는 아니하시기에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16; 참조. 60:10; 출 34:6; 렘 3:5). 유배를 포함한 현재의 절망적 형편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고발하시고 진노하신 결과였기에(47:6; 54:8; 64:4), 구원 약속도 이중적으로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의 고발과 진노를 버텨내지 못하고 쇠약해져서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아시기에 계속 고발하거나 진노하지 않기로 결심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께서 이스라엘의 한계(나약함)를 인정하십니다. ‘다투다’의 ‘립’은 원래 법정 다툼을 가리킵니다. 용서와 위로를 선포하시기 전에 여호와께서 지난 심판을 되돌아보십니다. 탐심의 죄악 때문에 화가 나서 그를 치셨고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습니다(17). 유다의 멸망과 유배로 나타난 여호와의 진노와 징계는 이스라엘이 저지른 악 때문이었습니다. 탐심(베차 23.3)은 1차적으로는 물질적 이득으로(33:15; 56:11), 이를 위해 사람들은 폭력을 사용하거나 살인을 범하기도 합니다(렘 22:17). 탐심에 사로잡힌 자는 필연적으로 여호와의 계명을 무시하게 됩니다. ‘얼굴을 가림’은 관계의 단절로 심판을 의미합니다.

 

(3) 목적을 이루지 못한 여호와의 징계(17)

 

여호와의 심판은 의도한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로 돌아오길 거절하고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갔습니다(참조. 53:6). 다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와 심판에 떨어질 위기에 처합니다. 이에 노하지 않기로 하신 여호와께서 “그의 길”을 보시고 이전과는 달리 반응하십니다. 죄악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이들의 절망적 형편에 개입하십니다.

 

(4) 고쳐주시는 여호와(18)

 

여호와께서 불치의 병을 고쳐 생명의 길로 이끌어주시고, 위로로 갚아주시고, 그 가운데 슬퍼하는 자들에게 입술의 열매를 맺어주십니다(18). “슬퍼하는 자들”은 여호와의 진노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를 모르는 자들이고, “입술의 열매”는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의미합니다. 병(진노)에서 신음하는 자들이 고침(구원)을 받고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받기만 하는 우상들과 달리 여호와께서는 감사할 수 있도록 조건도 마련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배신을 일삼는 악한 마음을 고쳐주시기에 이스라엘이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5) 평강의 회복(19)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치료와 평강의 약속이 주어집니다(19). 불치의 병에 걸려 멸망의 길로만 내딛던 이스라엘이 여호와에 의해 값없이 치유함을 받고 평강을 누립니다. “가까운 데 있는 자”와 “먼 데 있는 자”는 각각 예루살렘과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평강(샬롬)은 모든 종류의 안녕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의사이신 여호와(출 15:26)에 의해 보장됩니다.

 

악인의 심판(20-21)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고,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하시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회를 주고 기다리고 용서하여도 거치는 것을 제거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요동치는 바다처럼, 자신과 공동체에서 평강을 앗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20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21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20-21)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낮추십니다. 탐욕스러운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죄를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영원히 진노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을 낮추신 다음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심판과 죄인들을 향한 긍휼로 언제나 고통당하십니다.

 

(1) 요동치는 바다와 같은 악인(20)

 

치유와 평강이 모든 사람에게 약속되지만(19), 다 치유함을 받고 평강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악인은 그 물결이 오물과 진흙을 밀어 올리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요동치는 바다 같아서 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악인은 자신도 평온함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악한 영향으로 공동체도 평강이 없게 타락시킵니다. 여기 악인은 “거치는 것”(14), 곧 우상들을 제거해버리지 않는 자들입니다(3-13a).

 

(2) 평강이 없는 악인(21)

 

여호와에게서 피난처를 찾는 자(13b),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15)는 여호와께 그 길의 고침을 받아 평안을 누리고, 여호와를 잊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끊임없는 두려움과 놀라움으로(11)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구원의 여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상한 심령에 자비의 씨앗을, 절망의 진흙탕에 위로의 씨앗을, 혼돈과 불안으로 두려워하는 영혼에 평강의 씨앗을 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희망이고, 위로고, 생명이십니다. 다른 대상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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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7-01)


우상숭배의 어리석은 실상

이사야 56장 9절-57장 13절


 

관심을 어디에 두느냐가 우리의 사고와 행동 패턴을 결정합니다. 관심이란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신경을 쓰거나 주의를 기울이는 상태를 일컫는데, 한 가지에 관심을 갖게 되면 다른 것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게 됩니다. 그 결과 형성된 삶의 내용이 미래를 결정합니다.

 

  •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맹인이고 벙어리 개들입니다. 들짐승들(외적)이 양 떼를 노리고 우리를 넘어 들어오지만,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위기가 코앞에 닥쳐왔음에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양 떼에게 위험을 알려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삶을 즐기기에만 열심인 자들입니다. 지도자들의 무능력과 탐욕이 공동체를 다시 멸망의 위기로 네몹니다.

 

이스라엘의 부패한 지도자들(9-12)

신앙은 방향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곳을 지향하느냐가 우리의 믿음을 좌우합니다. 좋은 신앙은 하나님을 지향합니다. 떠라서 세속적 욕망을 지향하는 사람은 좋은 신앙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분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좋은 신앙인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9들의 모든 짐승들아 숲 가운데의 모든 짐승들아 와서 먹으라 10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11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12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9-12)

 

하나님께 연합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생각과 삶의 길을 곧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탐욕의 길을 걸으며 주님을 욕되게 합니다.

 

(1) 들짐승 초대(9)

 

여호와께서 들짐승에게 와서 먹도록 허락하십니다(9). 심판 선포보다는 위기 상황에 대한 묘사이며, 현재 형편이 파국적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함을 시사합니다.

 

(2) 눈먼 파수꾼들(10)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개들이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입니다(10). 적의 침입을 감시할 수 없고 보아도 짖지를 못합니다. 지도자들이 모두 무능력하고 무지해 위기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벙어리 개들”은 파수꾼-예언자를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의 양 떼를 지키는 파수꾼-예언자는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도 않을뿐더러 맡겨진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따사로운 햇살에 코를 벌렁거리며 낮잠을 즐기는 개들과 같습니다.

 

(3) 몰지각한 목자들(11-12)

 

제 입에 들어가는 것만 따라다니는, 게걸스러워 만족할 줄 모르는 개들입니다(11; 참조. 미 3:5, 11). 이들은 “몰지각한 목자들”로 모두 제 길을 가며(53:6a) 제 이익만 추구합니다. 공동체의 안위를 책임진 자들이 제 몫을 챙기기에만 열심입니다. 술자리의 즐거움이 이들의 유일한 관심사입니다(12; 참조. 5:22; 22:13). 여전히 마실 술이 있기에 내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내일은 더 즐겁고 기름진 주연을 즐길 수 있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경고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파수꾼-목자들 때문에 재앙의 그림자가 공동체 위에 짙게 드리웁니다. 포로기 이후에도 지도자들의 탐욕과 무능력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의인의 죽음에 대한 탄식(57:1-2)

 

우상숭배는 단순히 사람이 만든 형상에 절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상숭배는 외적 형태보다 내적인 동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이야말로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우상숭배의 현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1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 2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1-2)

 

탐심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탐욕에 이끌리는 사람은 현실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가 만든 세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의인들의 죽음을 보면서도 마음에 두지 않고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탐심에 눈이 어두워져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1) 의인의 죽음에 무관심한 사회(1)

 

지도자들의 타락과 무능력이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켜 일반 사람도 악에 무감각해집니다. 의인과 진실한 이들이 부당하게 죽어가지만 아무도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의인’은 여호와의 임박한 구원과 공의의 성취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정의와 의를 실천하며 사는 사람을 가리키고(56:1), “진실한 이들”(안셰 헤세드)은 이웃에게 호의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정의와 의를 행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관심을 기울이는 자들이 없습니다. 위부터 아래까지 모두 제 유익만 추구하기에 사회 내에 불법과 불의가 일상화됩니다. 의인의 죽음은 억울한 희생 이상입니다. 실로 재앙/악에서 의인이 거둬 감을 당합니다.

 

(2) 평안에 들어간 의인(2)

 

의인은 한편으로는 부당한 폭력에 희생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을 통해 임박한 재앙에서 벗어나 조상들에게로 옮겨집니다. 여호와와 이웃에게 성실한 사람이 종교적-사회적 불의에 희생당한다는 점에서 의인의 죽음은 불행에 속하지만, 불의한 공동체가 필연적으로 맞게 될 재앙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인의 죽음에는 구원의 성격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의인이 ‘악’(하라아) 때문에 죽지만, 그는 악의 필연적 결과인 ‘재앙’(하라아)에서 벗어나 ‘평안’에 들어갑니다. 의인은 죽음을 통해 땅에서의 고난과 억압에서 해방을 받습니다. 의인에게 약속된 평안은 ‘평화로운 죽음’이 아니라 평안을 누리는 장소와 관련한 것으로, 악인의 운명(21)과 대조하기 위해 선택된 표현입니다. 의인 조상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갑니다. “바른 길가는 자”(똑바로 걷는 자)는 의인의 삶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악한 자는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들고(사 59:8), 의인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잠 4:27) 곧장 나아갑니다.

 

이스라엘의 만연한 우상숭배(57:3-13)

습관적으로 거짓을 말하고 탐심이 내면에 범람하며, 어리석음이 우리 눈을 가릴 때, 우리는 영혼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자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으로만 충족됩니다.

 

3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아 너희는 가까이 오라 4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거짓의 후손이 아니냐 5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 6골짜기 가운데 매끄러운 돌들 중에 네 몫이 있으니 그것들이 곧 네가 제비 뽑아 얻은 것이라 또한 네가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내가 어찌 위로를 받겠느냐 7네가 높고 높은 산 위에 네 침상을 베풀었고 네가 또 거기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으며 8네가 또 네 기념표를 문과 문설주 뒤에 두었으며 네가 나를 떠나 벗고 올라가서 네 침상을 넓히고 그들과 언약하며 또 네가 그들의 침상을 사랑하여 그 벌거벗은 것을 보았으며 9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하였으며 네가 또 사신을 먼 곳에 보내고 스올에까지 내려가게 하였으며 10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말하지 아니함은 네 힘이 살아났으므로 쇠약하여지지 아니함이라 11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하지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 아니냐 12네 공의를 내가 보이리라 네가 행한 일이 네게 무익하니라 13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들에게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 바람에 날려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3-13)

 

우상 숭배자들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합니다. 나무 사이에, 골짜기 가운데, 높고 높은 산 위에서 음란한 우상 숭배를 행합니다. 글까지기에서 급류에 깎여 만들어진 매끄러운 돌은 어찌나 인가가 많은지 제비뽑기를 통해 얻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1) 여호와의 고발과 탄식(3-6)

 

우상숭배자들이 여호와 앞에 소환당합니다(3). “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은 이들이 점과 관련한 이교적 풍습과 풍요제의에 빠진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우상숭배로 감히 당신을 조롱하는 자들을 엄중하게 책망하십니다(4).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이들은 죄악과 거짓에 사로잡혀 사는 자들입니다. 우상숭배 가운데 먼저 풍요제의가 고발됩니다(5). “상수리나무”는 일종의 신목(神木)으로 주위가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 가운데 있었고, “모든 푸른 나무는 바알의 풍요제의를 고발할 때 등장하는 전형적인 표현으로 자주 높은 산과 언덕과 함께 언급됩니다. 사람들이 특별히 커다란 나무뿐만 아니라 산과 언덕에 있는 잎이 무성한 온갖 나무 아래서 풍요제의를 드립니다.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5b)는 어린아이 희생제사에 관한 고발입니다. 왕정시대 말엽에는 예루살렘 남서쪽을 두른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을 세우고 어린아이를 희생제물로 바쳤는데(렘 7:31; 19:2-13; 32:35), 여기서는 강바닥과 갈라진 바위틈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공개적 장소에서는 풍요제의가,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는 어린아이 희생제사가 벌어집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몫이었던 이스라엘이 죽은 우상의 몫이 됩니다(6).

 

(2) 우상숭배의 고발(7-10)

 

당신께 드려야 할 전제와 예물을 우상에게 바치는 패역함을 보고 하나님께서 탄식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위로하시려는 그분의 의지가 이들의 우상숭배로 난파 위기에 처합니다. 골짜기에서 높은 산과 성읍으로 옮겨가면서 우상숭배를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은 높은 산으로 올라가 음란의 잠자리를 펴고(7), 창기의 집처럼 치장한 집에서는 옷을 벗고 우상들과 몸을 섞고 욕정을 배설합니다(8). 골짜기와 산과 성읍을 가리지 않고 온 땅에서 우상들과 음란을 즐깁니다. 산당의 풍요제의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계속된 음란이었습니다. 성읍에서도 음란은 노골적이어서 집에서 내놓고 우상을 섬깁니다. 여호와의 구원사가 적혀 있어야 할 문과 문설주에는 창녀의 집임을 알려주는 표지가 자리를 차지합니다. “네 침상”과 “그들의 침상”은 이들의 성적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우상들과 놀기 위해 잠자리를 넓게 마련하고, 이를 우상들의 잠자리로 내줍니다. “벌거벗은 것”으로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습니다. 옮거진 ‘손’은 ‘성기'의 완곡어법에 해당합니다. 9-10절은 죽은 자들의 신 몰렉 숭배에 대한 고발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드려야 할 기름과 향품을 몰렉에게 예물로 바치려고 사신을 스올에까지 내려보냅니다. 몰렉을 만나러 스올로 내려가는 길은 멀고도 위험한 여정이라 지쳤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기력을 회복해가며 끝까지 제 길을 갑니다.

 

(3) 여호와의 탄식과 심판선언(11-13)

 

여호와께서 우상숭배의 늪에 빠진 이스라엘이 거짓을 행한다고 책망하십니다(11). 이스라엘은 혼합주의에 빠져 많은 신, 특히 죽음이 두려워 몰렉을 섬기면서도 여호와께 순종한다고 거짓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땅의 역사를 경영하시는 여호와를 “생각하지” 않고 그분의 의지를 “마음에 두지”도 않습니다.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섬긴 결과가 어떤 파국적 재앙을 초래할지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잠잠하신 여호와의 의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해석했습니다. 그분의 침묵은 이스라엘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시려는 그분의 배려였는데, 이스라엘은 이를 그분의 무능력과 무관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경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우상들을 찾아가 섬겼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반역에 언제나 침묵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고발인과 재판관의 자격으로 이스라엘의 잘잘못을 밝히 드러내 보이실 것입니다(12).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공의와 행실의 이면을 폭로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공의와 행실이 유익함을 가져다주리라 자신하겠지만, 이는 착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은 도움을 구해 부르짖겠지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13). 이스라엘이 “모은 우상들”이 참된 신이라면, 구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람은커녕 그 기운도 견디지 못하고 날려가 버리는 우상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상에 의존하는 자들은 우상과 함께 멸망에 떨어지고, 여호와께 피신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고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습니다.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물으십니다. 무엇에 심취하여 사는지 궁금해하시고 때로 우려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관심하시는 것에 관심을 갖고, 무관심하시는 것에 무관심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심사가 일치할 때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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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6-01)


운명을 바꾸시는 하나님

이사야 56장 1-8절


 

드라마 속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던 사람이 극적으로 운명이 뒤바뀌는 모습을 보면 흥미진진합니다. 주인공에게 자신을 투영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연출하시는 우주적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들어가보시길 바랍니다.

 

  • 예언자는 여호와의 구원이 가까이 왔으니 정의와 의를 행하도록 권면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거의 목전에 와 있습니다. 문 앞에 머문 그분의 구원과 공의가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려면 이스라엘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구원 약속이 성취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은 그분 약속에 소망을 두고 계명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원을 기다리는 자들의 삶(1-2)

신앙은 방향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지향하느냐가 우리의 믿음을 좌우합니다. 좋은 신앙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지향합니다. 따라서 세속적 욕망을 지향하는 사람은 좋은 신앙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방향을 설정합니다.

 

1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 2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1-2)

 

하나님께서는 ‘연합한 사람들’에게 대해 말씀하십니다. ‘연합’은 하나님과 동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며 의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사람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며, 악을 행하지 여호와를 굳게 잡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십니다.

 

(1) 정의와 의를 실천하는 삶(1a)

 

바벨론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의 재건은 별 진전이 없었고 여호와의 통치도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약속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회의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 구절은 지체된 구원에 대한 예언자의 답변입니다. 구원의 지체는 하나님의 능력 부재 때문이 아닙니다.

 

(2) 가까이 온 구원(1b)

 

이스라엘이 그분의 계명을 무시한 결과일 뿐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가까이 왔고, 그분의 공의는 곧 나타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정의를 지키고 의를 실천하면서 여호와의 가까이 온 구원과 공의가 그 모습을 다 드러내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정의와 의를 실천하며 사는 자에게 축복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여호와께 매달리는 자, 곧 언약을 준수하는 자는 생명을 얻기에 복 받은 자가 됩니다. 실천해야 할 정의와 의의 대표로 안식일이 언급됩니다. 아마도 안식일의 준수 여부가 눈으로 확인이 가능해서 선택된 것 같습니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안식일의 준수는 한편으로는 형식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화를 초래하기에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3) 실천하지 자의 행복(2)

 

안식일을 언약 공동체의 표징으로 여기고 지키는 자는 자기 손을 지켜 어떤 악도 행하지 않습니다. 개역개정이 둘 다 ‘사람’으로 옮긴 단어(2)는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가리키는 ‘에노슈’와 ‘벤아담’입니다. 이스라엘은 물론 땅의 모든 사람이 정의와 의를 행한다면 축복의 대상에 포함될 수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정의(미쉬파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질서에, 의(체다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좀 더 관심을 둡니다. 정의와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성과 하나님 백성의 연대성 가운데 구체적으로 실천됩니다. “나의 구원”과 나란히 나오는 “나의 공의”는 그분의 ‘구속’(해방)을 가리킵니다. 구원 약속에 신실하신 여호와께서는 은총의 구속 행위를 통해 당신 백성과의 언약관계를 회복하십니다.

 

이방인과 고자에게 주는 약속(3-7)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인 믿음을 가진 자, 최선을 다하는 신앙인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믿음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복을 받는 신앙인이 되십니다.

 

3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4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6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3-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까지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을 배척하고 차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도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1) 이방인과 조자의 불만(3)

 

언약 백성의 범위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확장됩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과 “고자”의 불만이 극복됩니다(3).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외국인으로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인 자(개종자)입니다. 이들은 앞으로는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라고 말하지 않게 됩니다. 이전에는 여호와를 따를지라도 이스라엘 사람들과 구별되어 그 권리가 제한적이었지만, 이제는 모든 차이가 철폐됩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여호와 공동체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축출되는 일이 없어집니다. ‘고자’의 불만도 다 사라집니다. 여호와를 따르는 고자는 더는 생명이 없는 “마른 나무”가 아닙니다. 그에게 영적 후손과 끊이지 않는 영원한 이름이 주어집니다. 마른 장작과도 같은 고자에게 생명의 축복이 약속되고 언약 백성의 권리가 주어집니다. 신명기 23:1에 따르면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참조. 레 21:18-21). 본문의 고자는 태생적이거나 사고로 고자가 된 이스라엘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2) 고자에게 주는 말씀(4-5)

 

고자가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여호와의 안식일을 준수하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택하고, 그분의 언약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4). 첫 번째와 세 번째 조건은 서로 연결됩니다. 안식일 준수는 언약 공동체에 속했음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고백적 행위에 속합니다. 두 번째 조건에서 여호와께서 좋아하시는 일은 정의와 의의 실천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참조. 55:11). ‘여호와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것’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자들을 고발하는 문맥에 등장합니다(65:12; 66:4). 여호와께서는 당신께 속한 고자에게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5). “기념물(기념비)과 이름”은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를 의미합니다. 고자는 후손이 없기에 그 이름이 끊어질 수밖에 없지만, 여호와께서 이름을 기념비에 새겨 영원히 잊히지 않게 해주십니다. “내 집”은 성전을, “내 성(성벽)”은 예루살렘 성벽을 가리킵니다. 고자에게 예루살렘 공동체의 제의적 권리뿐만 아니라 시민권도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는 고자에게 종교적으로뿐만 아니라 세속적(사회적)으로도 예루살렘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십니다.

 

(3) 이방인에게 주는 말씀(6-7)

 

6-7절은 이방인들에게 주는 약속과 여섯 가지 조건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두 조건은 고자의 경우처럼 안식일과 언약의 준수에 관한 것이고, 처음 네 조건은 지켜야 할 규정보다는 ‘공동체 구성원의 프로필’에 해당합니다. “여호와와 연합하여”는 ‘여호와께 속해 그분을 경외함’을, “그를 섬기며”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분께 제사 드림’을,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는 ‘다른 신들을 버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을, “그의 종이 되며”는 ‘종이 주인을 따르듯이 그분을 따름’을 의미합니다.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된 이방인에게 제의와 관련한 약속이 주어집니다. 이방인이 인도함을 받는 거룩한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자리한 시온 산을 가리킵니다. 한때 우상들의 제단에서 제사를 드렸던 이방인이 시온산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이들은 성전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고 구원의 기쁨을 맛봅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넓은 문맥에서 이방인이 드리는 제사에 대한 호의적 평가는 이스라엘이 드리는 번제(61:8)와 희생(1:11; 57:7)에 대한 혹독한 비판과는 대조됩니다. 정의와 의의 실천이 없는 형식적인 제사(1)는 받지 않으십니다. 더 나아가 예루살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됩니다(참조, 왕상 8:41-43; 마 21:13). 여호와께서 예루실렘 성전을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만드십니다. 성전이 기도의 집이 되면서 그 역할과 기능이 크게 변할 것입니다. 성전은 원래 제사 드리는 곳으로 기도는 부차적이었습니다. 제사 드리는 곳이기에 제사장 역할이 중요했고 제의에 참여하는 자의 역할은 미미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신앙 공동체가 이방인에게 개방되면서부터 예루살렘 성전도 이방인에게 문호를 개방합니다. 여호와께 속한 자는 누구나 성전을 찾아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3-7절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혈통적-종교적 특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방인에게도 이스라엘 사람과 동일한 자격과 권리가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처럼 이방인이 언약 관계 안에서 정의와 의를 행하면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됩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의 전통적 경계가 무너지고 ‘여호와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이 하나님 백성에 속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쫓겨난 자들을 모으시는 여호와(8)

교회의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각성할 때, 교회에 기도가 살아나고 기도가 풍성해집니다. 교회 안에 기도가 풍성해질 때 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열매로 거둘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견고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8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8)

 

약속의 말씀에 앞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들을 모으시는 주”로 소개됩니다(참조. 11:12). 여호와께서는 강대국의 폭력에 사방으로 흩어진 당신 백성을 잊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쫓겨난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아들이는 것을 의무로 삼으십니다. “주”(아도나이)는 여호와께서 명령자이심을 보여줍니다. 명령자께서 쫓겨난 자들을 모으기로 하셨기에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분은 이미 예루살렘으로 모아들인 자들 외에 다시 더 모아들일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미 모은 백성”은 귀향한 유배민을 가리킵니다. 더 모아들일 자들은 이방에 흩어져 사는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이방인들 모두를 가리킬 수 있는데,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는 전자의 입장을, 고자와 이방인을 하나님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현재 문맥은 후자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8절은 원래 독자적 말씀이었다가 나중에 현재의 자리에 놓인 것 같기에 이중적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역사의 대하드라마를 연출하시는 분입니다. 허구가 아닌 실제이며, 우리의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위대한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엮어가는 주인공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께서 연출하시는 드라마에 좋은 배우로 출연해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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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5-01)


이스라엘을 초대하신 하나님

이사야 55장 1-13절


 

많은 어려움을 겪을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의지할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으려 않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자포자기와 냉소가 만연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염증을 느끼고 떠나는 가나안 성도들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좌절하지 않고 외칩니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애절한 부르심을 전합니다.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 이사야 40-55장의 결론입니다. 예언자는 ‘목마른 자’에게 물가로 나아오라고, ‘돈 없는 자’도 와서 사 먹으라고 외칩니다. ‘양식이 아닌 것’에 돈을 쓰고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에 수고하는 자들에게 그는 ‘좋은 것’과 ‘기름진 것’을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먹으라고 초대합니다. 그는 피곤하게 사는 자들에게 목마름과 배고픔에서 단번에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은총에 의한 언약(1-5)

하나님께서는 실망한 그의 백성에 항상 그의 나라로 부르심입니다. 그 초대는 척박한 현실만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피조물이 자기를 만드는 하나님을 자기 논리 안에서만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1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4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5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회복할 것이니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나라가 얼마나 풍요롭고 영광스러운 나라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상들은 아무것도 주지 못합니다. 다른 데서 우리를 만족하게 할 만한 것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1) 참된 양식(1-2)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소리쳐 물건을 파는 장사꾼처럼 와서 물과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외칩니다(1). 그러나 “돈 없이, 값 없이” 물건을 팝니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저 주기 위해서 외칩니다. 장사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풍성한 상을 차려놓고 손님을 초대하는 주인입니다. 사람들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애써 번 돈으로 양식을 사지만, 그 양식이 굶주림을 해소해주지는 못합니다(2). “양식이 아닌 것,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은 우상숭배를 가리킬 것입니다. 일부 바벨론 유배민은 이방 신들에게서 살길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 기름진 것”은 예언자가 선포한 구원의 말씀(약속)을 가리킵니다. 우상들이 주는 일시적 포만감에 빠져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말고, 예언자가 선포한 구원과 해방의 약속으로 갈증과 배고픔을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할 때만 이스라엘은 현재의 절망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2)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헤(3-4)

 

유배민이 들어야 할 하나님 말씀의 구체적 내용, 곧 값없이 주어질 선물의 실체입니다. 3절과 함께 보면, “돈 없이, 값 없이”는 언약의 새로운 성격을 보여줍니다.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의무가 부과된 쌍무적 언약입니다(신 4:40; 5:33; 11:9; 25:15; 32:47). 시내산 언약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시려는 언약은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돈 없이, 값 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의무를 홀로 담당하시고,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에게는 아무 의무도 부과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기에 결코 파기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 되고, 일방적 보호 약속이기에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와 같습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 범죄했을 때(삼하 11장; 24장) 그분께서 당신 은혜를 거두지 않으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부족이나 불순종이 새로운 언약의 유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4절은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분은 다윗을 민족들에게 증인으로, 그들의 통치자와 명령자로 삼으셨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택함받은 왕으로서 통일왕국을 건설하고 주변 나라들을 굴복시키고 통치권을 확장했고, 민족들에게 여호와의 능력을 보여준 산증인이 됐습니다.

 

(3)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시는 여호와(5)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제 이스라엘을 들어 당신 영광을 온 땅에 과시하십니다(5). 그분께서 이스라엘의 수치와 유배에 종지부를 찍고 그를 영화롭게 하실 때 이스라엘과 민족들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됩니다. 이스라엘이 부르면 민족들이 달려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화를 통해 온 세상에 여호와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하나님 말씀의 확실성(6-11)

종종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고 교만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뭐가 부족해서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으려 하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것은 모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초청입니다.

 

6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0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6-11)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아는 것, 경험한 것 안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인간은 앞날을 예측할 수도 없으며 존재 자체가 불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사유 방식과 범위를 뛰어넘어, 인간은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1)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6-7)

 

구원 시대가 돌아온 것을 아는 예언자는 청중에게 여호와를 찾으라고, 회개하고 그분께로 돌아오라고 권면합니다(6-7). 여호와를 찾는 일은 결단과 헌신뿐만 아니라 회개까지 포함합니다. 그분은 아무 때나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만남을 허락하셨을 때만 찾을 수 있습니다(참조. 호 5:6; 암 8:12). 여호와를 찾는 행위는 그분을 부르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능력과 선하심을 신뢰하는 자만이 그분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부르지 않아서 심판에 떨어졌습니다(43:22). ‘그분의 가까이 계심’은 기도의 동기이자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약속입니다. 악하고 불의한 자는 자신의 길과 생각버려야 합니다. “악인”과 “불의한 자”는 여호와의 구원 계획을 거절하고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자기각에 따라 자기 길을 가는 자를 가리킵니다. ‘돌아옴’은 근본적인 전환이며, 기존의 가치관과 인생관에서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악인이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음은 그분께서 긍휼과 용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긍휼은 자식의 과오를 뛰어넘고, 그분의 큰 용서는 자식의 수치 씻어줍니다. 그분의 긍휼에 근거한 용서로 그분과 이스라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심각한 균열이 극복됩니다.

 

(2)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나라(8-9)

 

8-9절은 “생각”과 “길”의 모티브를 받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절대 간격을 비유적으로 기술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사람의 생각과 길과 차원을 달리하는 것으로, 이 양자 사이의 간격은 하늘과 땅 사이의 무한한 간격과도 같습니다. 높이에 있어 하늘을 땅에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역사 경륜에 있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상호보완적이지 않고 양자택일적입니다.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기에 계획을 실천하는 방법(길)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출발점은 이스라엘이 자기 생각과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읽자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수용하지 못하는 유배민을 향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구원을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이해하는 자들에게 고레스의 선택과 그를 통한 유배민의 해방과 민족들의 구원은 차라리 걸림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신학적 전통과 다르다고 하나님께 따지지 말고 그분의 생각과 길의 절대적 우월성을 인정하고 내맡겨야 한다. 그분 결정의 ‘의로움과 선하심’은 그분께서 주신 약속의 흔들리지 않는 토대이지 검토대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 말씀의 확실성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길은 공허해서 결실이 없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그분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열매를 맺습니다.

 

(3) 반드시 결실하는 여호와의 말씀(10-11)

 

하늘에서 내린 비와 눈이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땅을 적셔 싹을 내고 자라게 해서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고 먹는 자에게 양식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그분의 말씀도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그분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고 사명을 완수합니다(10-11). 예언자가 선포한 그분의 말씀은 주로 미래의 예견, 즉 유배민의 귀환과 예루살렘의 회복에 관한 약속으로 그 성취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분 말씀에는 창조적-실천적 능력이 내재돼 있기에 반드시 그 보내진 목적을 이룹니다(40:8). 유배민의 거절이나 저항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 계획을 그대로 이루어 가십니다. 유배민은 자기 생각과 길을 포기하고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를 약속하시는 그분의 영원한 언약, 은총의 약속이 가져다주는 그분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찬양(12-13)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신 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랑을 늘어놓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신 사람을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찾아서 영광을 돌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12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13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12-13)

 

하나님께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 모든 복이 있고, 형통과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곳에 기쁨과 평안, 그리고 노래와 손뼉 침이 있습니다. 주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에 참된 삶이 있습니다.

 

(1) 유배민의 안전한 귀향(12)

 

유배민이 바벨론을 떠나 귀환하는 것을 보고 자연도 함께 환호하며 손뼉을 칩니다. 유배민의 떠남(출발)은 구원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기에 기쁨의 순간이고, 여호와께서 앞뒤를 지켜주며 인도하시기에(52:12) 그 여정은 평안한 길이 됩니다. 유배민은 시온에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여호와께로(40:9-11; 52:9-10) 인도함을 받습니다. 황폐한 산들과 언덕들이 유배민의 귀환에서 구원 시대의 도래를 보며 기뻐합니다. 산들과 언덕들, 모든 나무들이 기쁨으로 귀향민을 맞이합니다. 폐허가 된 땅이 이제 유배민의 귀향과 더불어 다시 생명과 축복의 땅이 됩니다. 가시나무와 찔레나무가 자라던 황무지가 변하여 잣나무와 화석류(도금양나무)가 자라는 기름진 산림이 됩니다.

 

(2) 가나안 땅의 축복(13)

 

13절의 “이것”은 앞에 나온 유배민의 귀향과 자연환경의 우호적 변화를 가리킵니다. 바벨론 유배민이 돌아와 복된 땅에 살게 되는 것이 여호와께 “기념”(영예)과 “영영한 표징”이 됩니다. 원래 ‘이름’을 의미하는 ‘셈’은 ‘영예’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59:19).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배로 더러워졌던 여호와의 이름에 다시 영예가 돌려집니다. 유배민의 해방과 가나안의 축복이 그분의 성실하심과 능력을 입증해주는, 곧 예언자가 선포한 구원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는 표징이 됩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백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을 찾아 부르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위세에 주눅 들거나 체념하지 않고 희망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아첨하고 순응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약속을 따라 광야로 나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만 안전과 평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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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4-01)


구속받은 자들의 특권

이사야 54장 1-17절


 

장기화 되는 포로 생활에 백성들은 지쳐갔습니다. 회복의 여망은 사라져가고 암울한 두려움에 희망의 빛이 꺼져갑니다. 광풍에 요동하며 안위를 받지 못하던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희망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어려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 아이를 낳지 못한 불임의 여인이, 산고도 겪어보지 못한 버림받은 여인이 자식을 갖는 것이 가능합니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인의 운명에 개입하신다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분은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사라의 태를 열어 당신 약속을 이행하신 분이 아닙니까? 예루살렘의 재건과 번성에 관한 약속도 이와같이 성취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변함없는 예루살렘 사랑(1-8)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이나 한 교회를 보면서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소망이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할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1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2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3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4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5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6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자에게 함과 같이 하실 것임이라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 7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8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1-8)

 

바벨론에 초토화된 예루살렘은 임산할 수 없는 여인과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생명이 태어날 것을 기대할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이루실 것입니다.

 

(1) 예루살렘의 번성(1-3)

 

1절에서 ‘너’는 시온/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시온을 수식하는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산고를 겪지 못한”은 시온을 임신할 수 없었던 족장의 부인들에 연결해줍니다. 자식이 없었던 사라(창11:30)와 리브가(25:21)와 라헬(29:31)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처럼 시온도 그분의 간섭으로 자녀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1; 51:1-2). 시온은 현재의 비참한 처지에 절망하지 말고 약속에 신실하셨던 족장들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된 여인”은 임신 능력이 없고 남편도 없는 여자를 가리킵니다. 현실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가능해집니다. 약속의 말씀이 명령형으로 주어집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약속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시온은 많은 자식이 새로운 가정을 꾸밀 수 있도록 공간을 충분히 마련해두어야 합니다(2).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 성취돼 불임의 사라가 많은 후손을 본 것처럼 시온도 자녀의 축복을 얻을 것입니다. 자손이 많아져 사방으로 퍼져나가 황폐한 성읍에 정착하고 나라를 차지하게 됩니다(3). “좌우”는 여기서는 사방을, “퍼지며”는 영토의 확장보다는 인구의 증가를, “황페한 성읍들”은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다의 성읍들을(40:9; 44:26) 가리킵니다. “열방을 얻으며”는 무력에 의한 점령보다는 여호와의 구원과 공의가 이스라엘을 넘어 민족들에게로 확대될 것을 시사합니다(42:1, 6; 49:6; 참조. 창 12:3; 28:14).

 

(2) 수치에서 벗어나는 예루살렘(4)

 

고대세계에서 불임은 여인의 수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시온을 수치와 부끄러움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시온은 이제 생명력을 상실한 여자로 조롱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전의 수치와 치욕이 말끔히 잊힐 것입니다(4). 여기 ‘잊음과 기억함이 없음’은 죄사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시온에게 마련됩니다. “젊었을 때”는 가나안에 살던 왕정 시대를, “과부 때”는 모든 것을 상실한 유배기를 가리킵니다.

 

(3) 예루살렘의 남편 여호와(5-6)

 

완전한 용서는 예루살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그녀의 남편이 시기 때문입니다(5). 예루살렘은 여호와에 의해 그분의 아내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한 독점적 권리와 책임을 갖고 계시며, 예루살렘의 실존은 철저하게 그분께 의존적입니다. 예루살렘의 구속자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해방과 번영을 통해 여호와의 능력이 온 땅에 알려지고 민족들이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이제 별거기간은 끝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소박맞은 젊은 시절의 아내인 양 다시 부르십니다(6). 여호와께서 시온을 신혼의 아내처럼 따뜻한 사랑으로 바라보십니다. 훼손된 결혼 관계가 회복됩니다.

 

(4) 일시적 별거(7-8)

 

시온은 이혼증서를 주고 내보낸 것이 아니라 “잠시” 버려졌을 뿐입니다(7). 여호와께서는 “큰 긍휼”로 시온을 받아들이실 것이다. 넘치는 진노 때문에 “잠시” 얼굴을 가리셨지만, “영원한 자비”로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8). 그분의 진노는 훼손된 공의와 정의를 바로 세우시려는 그분의 부정적 응답에 속합니다. 그분의 진노가 일시적인 데 비하여 그분의 자비(헤세드)는 영원합니다. 시온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 기간이 매우 제한적이지만, 시온의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그분의 영원한 자비와 긍휼에 근거하기에 영원합니다.

 

화평의 언약(9-10)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은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않고, 당신의 거룩한 언약 백성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성실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합시다.

 

9이는 내게 노아의 홍수와 같도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하지 못하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10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9-10)

 

하나님의 진노는 노아의 홍수처럼 무섭지만 오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가 끝나고 나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수 같은 비가 내려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1) 무조건적 약속(9)

 

바벨론 유배가 노아의 홍수에 비교됩니다. 심판보다는 심판 이후가 비교 대상입니다. 심판에서 구원받은 인류의 조상 노아에게 항구적인 보존 약속이 은총으로 주어졌던 것처럼(창 8:21; 9:11), 그분의 무조건적 약속이 버림받은 예루살렘에게 주어집니다(9). 여호와께서 심판에 떨어진 예루살렘에게 다시는 노하거나 책망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약속에 따라 노아 이후의 인류가 홍수의 위협에서 벗어난 것처럼 예루살렘도 멸망의 위협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2) 화평의 언약(10)

 

견고함과 영원함을 자랑하는 산과 언덕마저 물에 잠겨 사라지는 대홍수에서도 당신의 은혜를 입은 노아(창 6:8)를 지켜주셨던 것처럼, 심판에서 벗어난 예루살렘을 변함없이 지켜주실 것입니다(10). 중도에 거둬지지 않는 “영원한 자비”(8)로 긍휼히 여기시기에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시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분의 자비와 긍휼이 토대가 되기에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습니다(참조. 렘 31:31 이하; 겔 34:25; 37:26). 화평의 언약은 체결의 결과로 화평이 주어지는 언약을 가리킵니다.

 

새 예루살렘(11-17)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셔서 믿음을 갖게 하시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에는 고난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터널을 통과한 성도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11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12홍보석으로 네 성벽을 지으며 석류석으로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며 13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 14너는 공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네가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며 공포도 네게 가까이하지 못할 것이라 15보라 그들이 분쟁을 일으킬지라도 나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니 누구든지 너와 분쟁을 일으키는 자는 너로 말미암아 패망하리라 16보라 숯불을 불어서 자기가 쓸 만한 연장을 제조하는 장인도 내가 창조하였고 파괴하며 진멸하는 자도 내가 창조하였은즉 17너를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가 없을 것이라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모든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공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1-17)

 

예루살렘은 죄악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자격도 공로도 없는 예루살렘을 화려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풍성한 분이며 구속의 공로는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새 예루살렘의 외적 모습(11-12)

 

예루살렘의 참담한 형편이 3중으로 기술됩니다(11a). ‘곤고한 자’는 여호와 외의 다른 곳에서 도움을 찾을 수 없는 자를, ‘광풍에 요동하는 자’는 광풍으로 원래 자리에서 쫓겨난 자, 곧 흩어지거나 유배당한 자를, “안위를 받지 못한 자”는 위로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아직 온전히 회복을 경험하지 못한 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시온이 안위를 받습니다. 황폐해진 예루살렘이 화려하고 막강한 성으로 재건됩니다(11b-12). 벽돌 대신 청옥으로 성벽의 기초가 쌓이고, 성가퀴들은 홍보석으로, 성문들은 석류석으로, 성벽은 모두 보석으로 만들어집니다.

 

(2) 새 예루살렘의 내적 모습(13)

 

새 예루살렘의 자녀는 모두 여호와의 제자가 됩니다(13). ‘교훈을 받다’는 배움의 지적 활동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준수도 포함합니다. 구원받은 예루살렘 주민들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분 말씀에 따라 살아갑니다. 생명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들에게 “큰 평안”이 주어집니다. 생명과 구원의 지속적 상태를 의미하는 평안(샬롬)에는 영적 번영과 물질적 번영이 모두 주어집니다.

 

(3) 공의가 회복된 새 예루살렘(14)

 

예루살렘이 공의로 굳건하게 세워지기에 다시는 주변 나라들에게 억압과 위협을 당하지 않습니다(14). 이 평안과 공의가 학대와 두려움을 멀리 쫓아냅니다. 공의는 구원을 의미하지만, 13절에 따르면 윤리적 차원도 포함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예루살렘의 자녀들이 그분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며 도덕적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루살렘을 외적-내적으로 아름답게 회복시켜주신 여호와께서 지속적인 보호도 약속하십니다.

 

(4) 안전하게 보호받는 새 예루살렘(15-17)

 

백성을 바벨론의 손에 넘기셨던 여호와께서 다시는 예루살렘을 공격하도록 민족들을 부추기지 않으실 것입니다(15). 앞으로 적이 예루살렘을 공격할지라도 그것은 그분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너로 말미암아 패망하리라”는 변화된 예루살렘의 지위를 보여줍니다. 진노의 대상에서 보호의 대상으로 바뀌었기에 예루살렘을 침략하는 자들은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이 되며, 그들은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무기를 만드는 장인과 무기를 사용하는 전사가 모두 여호와의 피조물로 그분의 통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16). 강력한 무기와 용맹한 전사가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께서 지배하십니다. “파괴하며 진멸하는 자”는 특정 대상보다는 전사의 기능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언급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보호 앞에 침략자들의 모든 무기는 무용지물이 됩니다(17). 대적이 때로는 혀를 사용해서 공격하겠지만, 공의로 굳건하게 세워진 예루살렘에 의해 정죄를 당할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 나온 구원 약속을, “여호와의 종들”은 13절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기업”은 상속재산으로 받을 몫을 가리키고, “내게서 얻은 공의”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구원 또는 승리를 의미합니다.


백성의 희망을 무력화하기 위해 어둠의 권세가 깃든 연장은 쓸모없어질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평화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시대가 불안하고 두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린다면 더 두려울 것입니다. 약속을 붙들고 살면 서광이 비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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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3-01)


지극히 존귀하나 멸시받은 종

이사야 52장 13절-53장 12절


세상은 죄를 용서받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죄인이 용서 받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다양한 선행과 고행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힘으로는 죄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성경의 대답은 ‘고난 받으신 메시아를 믿는 것’입니다.

 

  • 네 번째 여호와의 종의 노래입니다. 낮아졌던 종이 여호와에 의해 높임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종의 외모에 걸려 종에게서 여호와의 능력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종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은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구원과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에 외적으로 가장 부적격한 자가 여호와께서 보낸 그분의 종이었습니다.

 

높임 받는 여호와의 종(13-15)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강한 권능으로 열국을 결박하고 심판하며, 이스라엘을 단번에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는 너무도 약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고, 사람들 앞에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의 몰골의 사람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상상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13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15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13-15)

 

여호와의 종은 ‘형통하는’ 즉 성공하는 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높이 들리고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많이 상한 모습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고난을 받아 상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하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1) 하나님에 의한 종의 인정(13)

 

여호와께서 종을 “내 종”이라 부르시며 그의 미래에 관해 이중적으로 말씀하십니다(13). 종의 사역이 인정받을 것입니다. 헛수고한 것처럼 보이지만(49:4) 그가 뿌린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또한 종은 마침내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멸시당한 당신의 종을 최고의 위치로 높이셔서 영화롭게 하십니다(참조. 빌 2:9). 종은 사람들의 눈에는 실패한 인생이지만, 여호와의 눈에는 성공적으로 사명을 완수한 인물입니다. 시점이 미래에서 과거로 옮겨집니다.

 

(2) 종의 망가진 외모(14)

 

사람들이 종의 외모를 보고 놀라고 얼굴을 돌렸습니다(14). 종은 사람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망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처럼 보였습니다. 신의 진노 아래 있는 자였기에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화를 자초할 수 있었습니다. 시점이 다시 미래로 바뀝니다. 종의 미래적 영광이 과거의 수욕과 대조됩니다.

 

(3) 민족들의 놀람(15)

 

‘많은 사람’에 의해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여겨졌던 종이 ‘많은 민족들’에 의해 인정을 받습니다(15).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거절이 종의 사역을 세계사적으로 넓혀줍니다(49:6). 민족들과 왕들이 종이 행한 일을 깨닫고 다 놀라고 침묵할 것입니다. 종의 고난과 죽음에서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영광을 볼 것입니다. 멸시와 고난을 당했던 종이 왕들의 왕으로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종에 관한 공동체의 고백(53:1-11a)

예수님께서 못과 창에 찔리실 때 우리의 죄와 허물은 용서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도 함께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죄의 대가는 영과 욱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셨기에 죄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죽으심이었고, 모든 인류가 함께 죽는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1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1-11a)

 

보통 이방 나라에서는 외모가 탁월하고 풍채가 좋은 자가 왕으로 인정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여호와의 종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아름다운 것이라고는 없는 사람입니다. 멸시를 받고 사람들로부터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1) 잘못을 고백하는 공동체(1)

 

1절부터 화자가 여호와에서 ‘우리-공동체’(의 대표인 예언자?)로 바뀝니다. 화자 “우리”는 15절의 민족들이 아니라 (후에 종을 인정하게 된 일부) 이스라엘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들었지만(참조․ 42:1-4; 49:16; 50:4-9) 깨닫지 못한 무지를 인정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팔(능력)이 전혀 볼품없는 인물에게 나타났음을 늦게야 깨닫습니다.

 

(2)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종(2-3)

 

2-3절은 사람들이 종을 멸시한 원인이 그의 외적 모습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좋은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새순처럼 태어날 때부터 볼품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모양, 풍채, 외모(아름다운 것)’는 생명의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초라한 몰골을 하여 흠모할 만한 구석이 없었습니다. “풍채”의 ‘하다르’는 왕의 영광을 기술할 때 사용됩니다(2:10,19,21; 35:2; 63:1). 종은 외모만 초라하지 않고 고통과 질병에도 시달렸습니다. 그에게는 시선을 끌 만한 구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표지를 몸에 지니고 사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인 듯 보이는 자가 그분의 구원을 선포했기에 그를 향한 무시와 멸시는 당연했습니다.

 

(3) 종의 대속적 고난(4-5)

 

그러나 4-5절에서 ‘우리’는 종에 관한 자신들의 무지와 과오를 시인합니다. 종의 질병과 고통이 하나님의 구원 의지에서 기인했음을 깨닫습니다. 전에는 종의 병과 고통을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로 보고 그를 멀리하고 멸시했는데 뒤늦게 그가 받은 징벌이 도리어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종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에’ 찔리고 상함을 입었습니다. 종의 고난은 폭력에 의한 약자의 희생이 아닌, 평화와 치료를 주기 위한 대속적 희생이었습니다. 종이 질고와 슬픔을 대신 짊어지고 고난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죄에서 놓임을 받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종의 고난과 거절당함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실천하는 길이었습니다. 종의 상처가 치명적이었음을 시사해주는 “찔림”과 “상함”은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백성에 의한 멸시와 영적 고통도 포함합니다.

 

(4)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6-7)

 

6-7절은 양의 비유를 사용해 종의 죽음이 자발적-대속적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우리 모두’는 길 잃은 양처럼 각자 자기 길을 갔습니다. 참된 목자이신 여호와의 인도를 거절하고 자기 생각과 판단에 따라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여호와께서 종의 고난과 죽음의 궁극적 원인이셨습니다. 죄로 파괴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습니다. 종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 여호와의 구원 의지에 속함을 알기에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과 죽음의 부당함에 항거하거나 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멸시와 폭력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습니다. 종의 고난은 죽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5) 종의 부당한 죽음(8-9)

 

종은 사법적 폭력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종의 죽음이 부당했지만, 아무도 그의 죽음에 관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8). 그의 죽음을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의 마지막으로 당연시하였기에 그의 고난이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볼 이유가 없었습니다. 해방과 구원을 선포한 종이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생명의 땅에서 잘려 죽음에 넘겨졌습니다. 폭력과 거짓을 행한 적이 없었지만, 종은 죽어서 “악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9). 살아서는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고난을 당했던 종이 불의한 재판 끝에 중죄인의 판결을 받고 처형당해 죄인들이 묻히는 곳에 묻혔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무덤에 묻힐 때까지 종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모두 버림받았습니다. 다소 돌출적인 표현인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는 무슨 뜻입니까? “부자”는 여기서 “악인들”과 동격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예언자들이 고발한 고리대금업자들이나 사회적-정치적 지위를 남용해 부를 축적하는 자들인지 혹은 단순한 부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죽은 종의 무덤이 죄인들 가운데 마련됐다는 점입니다.

 

(6) 종의 대속적 죽음(10-11)

 

지금까지 종의 삶을 되돌아보며 경험을 전하던 화자가 10-11a절에서는 앞을 내다보며 말합니다. 이제 그는 깨달아 알게 된 종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선포합니다. 종의 고통과 질병과 부당한 죽음은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좋은 여호와께 드려지는 속건제물이었습니다. "속건제물”의 ‘아샵’은 원래 ‘보상’, ‘배상’을 의미하는데, 소유권을 가진 사람의 권리가 훼손당했을 때 드려지는 희생 제사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범한 잘못(죄)을 해결하기 위해서 보상이 필요했고, 종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자신을 속건제물로 드렸습니다. 죽은 종이 오래 살면서 많은 후손을 본다는 말은 종의 제사가 여호와께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는 비유적 언급입니다. 종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구원과 생명이 주어집니다. 종을 통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구원 계획이 성취되고, 결실을 보지 못했던 종도 자신의 사역이 구원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에 의해 인정받는 종(53:11b-12)

하나님의 메시아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기적,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전제되지는 않고 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예언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에 이미 초상식, 초윤리, 초자연적인 구원의 역사를 준비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구원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전부터 준비하시고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11b…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11b-12)

 

여호와의 종이 이처럼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익울한 일을 자기 종에게 요구하실 수 있는가 싶어질 정도입니다.

 

(1) 종의 성공적 사역(11b)

 

11절의 두 번째 문장부터 화자가 여호와로 바뀝니다. 내용상 5-6절의 요약에 해당합니다. 저주받은 자로 살다가 죄인으로 죽은 종이 여호와에 의해 “나의 의로운 종”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종이 저들의 죄악을 짊어짐으로써 많은 사람이 의로움을 받습니다. 종은 사람들을 죄악에서 구하려고 자발적으로 희생의 길을 간 자였습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주인에게 철저하게 순종한 종에게 상급이 주어집니다.

 

(2) 인정받는 종(12)

 

여기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는 이해가 어렵습니다. 종국에는 종이 왕들의 왕으로 높임을 받는데(52:13) 그가 자신의 대속적 고난과 죽음에 힘입어 구원받는 자들과 몫을 나눈다는 것은 서로 충돌됩니다. 아마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을 나누는 전통을 비유적으로 활용한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명을 완수한(승리한) 종에게 많은 몫을 주실 것입니다. “몫”, “탈취한 것”은 아마도 이스라엘을 포함한 민족들(52:15)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여호와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여호와의 구원이 ‘땅 끝까지’ 미치도록 ‘이방의 빛’으로 세움을 받은 (49:6) 종에게 주는 최상의 보상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은혜는 인간의 상식이나 윤리, 그리고 자연법칙을 모두 뛰어넘는 기적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사실만 생각해도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귀하며 놀라운 일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죽기까지 순종하겠노라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이처럼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그 기적을 묵상하며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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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2-01)


내 백성아! 너희 영광을 알라

이사야 51장 17절-52장 12절


 

하나님의 구원은 불의와 부정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정결한 삶을 살아가라는 초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까? 여전히 과거의 삶에 발목 잡힌 채 종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가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 여호와께서 손에 쥐어주신 분노의 잔을 마시고 취해 땅바닥에 쓰러진 예루살렘에게 기쁜 소식이 주어집니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의 손에서 분노의 잔을 거두기로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9) 하고 간구하는 시온에게 예언자는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17)하고 용기를 내도록 격려합니다.

 

분노의 잔(17-2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하찮은 벌레에 기겁하는 사람이 있고, 궁핍함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으며,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면 두려움의 대상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과연 믿음의 사람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17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18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네가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 19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닥쳤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누가 너를 위로하랴 20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 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 21그러므로 너 곤고하며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 22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23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17-23)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하나님께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9)라고 기도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도리어 예루살렘에게 “깰지어다 깰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잠드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루살렘과 그 안에 살던 자들이 다 비울 정도로 마셔 취해서 잠든 것입니다.

 

(1)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17-20)

 

예언자는 여호와의 손에서 받아 마신 분노의 잔 때문에 정신을 잃고 멍청해진 예루살렘에게 깨어 일어나도록 권면합니다(17). 예루살렘은 스스로 힘을 내서 절망과 무기력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용기를 내서 예기치 못했던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어나다’는 예루살렘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음을 전제합니다. 여호와의 손은 세상의 창조(45:12; 48:13)와 역사(41:20; 49:22) 가운데 계시된 그분의 압도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분노의 잔은 심판의 표상으로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잔은 운명의 피할 수 없는 결정을 상징합니다(참조. 렘 49:12; 합 2:16; 시 75:8). 여호와께서는 범죄한 예루살렘에게 분노가 가득 찬 잔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분노의 잔을 흠뻑 마신 예루살렘도 망연자실하여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땅바닥에 쓰러진 예루살렘은 손을 붙잡아 이끌어줄 자 하나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됐습니다(18). “너를 인도할 자”는 왕이나 통치자보다는 예루살렘의 자녀, 곧 주민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에 닥친 “두 가지 일”은 “황폐와 멸망”과 “기근과 칼”을 가리킵니다(19). 예루살렘은 파괴돼 황폐해졌고, 주민은 칼과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동정과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할 정도로 재앙은 참혹하고 칠제했습니다. 사냥꾼이 쳐놓은 그물에 걸린 영양처럼 여호와의 분노의 그물에 사로잡힌 예루살렘 주민들은 실신하여 길모퉁이에 쓰러져 죽음을 기다렸습니다(20). 하나님의 분노와 견책이 예루살렘의 아들들에게 가득하였기에, 이들이 파국적 재앙을 피할 길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2) 격려의 말씀(21-23)

 

여호와의 분노에 취해 절망적 형편에 놓인 예루살렘에 구원의 말씀이 선포됩니다(21). 예루살렘에게 당신 분노의 잔을 마시도록 명령하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그 잔을 예루살렘의 손에서 거두어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십니다(22). 심판에서 구원받은 예루살렘이 또다시 심판에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억울함을 풀어주다’는 원래 ‘변호해주다’를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 백성을 위해 소송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루살렘이 받아 마셨던 분노의 잔이 예루살렘을 괴롭히는 자들의 손에 주어집니다(23). 천하 낮은 자리로 떨어졌던 예루살렘의 구원과 그 대적들의 멸망이 대조됩니다. 위로자요 변호자이신 여호와께서 종의 지위로 전락한 당신 백성의 운명에 개입하셔서 이들을 구해주기로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해방(52:1-6)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은 놀라운 권세입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과 권세를 가진 자들이 정작 자기들의 손에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에 주신 힘이 얼마나 강하며 우리의 지위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알려줍니다.

 

1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2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4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전에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에 거류하였고 앗수르인은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도다 5그러므로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하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히도다 6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1-6)

 

하나님의 존재는 언제나 신비입니다. 모든 면에서 완뱍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며 안타까워 하십니다. 이것은 철학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께서는 아픈 자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1) 권면(1-2)

 

예루살렘은 용기를 내야 합니다(1-2). 구원을 약속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에 의존해 힘을 내야 합니다. 이방 압제자의 발바닥에 짓밟힌 시온은 이제 흙먼지를 털고 땅바닥에서 일어나 보좌에 앉아야 합니다. 포로 된 시온은 자기 목의 굴레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아름다운 옷”은 예루살렘의 지위와 조건을 보여줍니다. 땅바닥에 떨어졌던 영화가 다시 주어집니다. 구체적으로는, 예루살렘을 떠나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돌아오십니다(7-8). 여호와께서 돌아오신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 이기에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 곧 이방인은 시온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2) 구원 약속(3)

 

이스라엘은 “값없이” 팔렸기에 “돈 없이” 구원을 받습니다(3). 이스라엘의 속량은 이들의 죄악과 배역함 때문에 바벨론에 넘겨주었던(50:1) 당신 소유를 되찾아 오는 여호와의 권리 행사에 속합니다. 소유권의 완전 이양이 아니라 일시적 사용권만 넘긴 것이기에 되찾을 때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3) 역사적 회고(4-6)

 

여호와께서는 땅의 세력에 맞서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소유권을 확정적으로 주장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애굽으로 내려가 나그네살이를 했고, 후에는 앗수르의 억압에 시달리다가 지금은 사로잡혀 바벨론에서 종살이를 하지만, 이스라엘은 변함없이 여호와께 속한 그분 백성입니다. 그분 백성이 까닭 없이 붙잡혀 와서 바벨론 통치자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그분 이름이 날마다 멸시를 당하는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더럽혀진 당신 이름을 위해 침묵을 끝내시고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영예를 지키시기에(그러므로) 그분 백성은 해방을 경험합니다. 구원을 받는 날 이스라엘은 역사를 경영하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는 왕 여호와(52:7-10)

누군가가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가슴이 설렐 것입니다. 그 좋은 소식이 승진, 합격,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 응원하는 선수의 금메달 소식 등등 그 무엇이든 비교할 수도 없는 좋은 소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전해져 옵니다.

 

7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8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 9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10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7-10)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에 요셉은 고난 속에서도 형통했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알 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1)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7)

 

예언자는 달려오는 전령을 보고 기쁨을 노래합니다(7; 나 1:15). 그는 산등성이에 나타난 전령의 가볍고도 재빠른 발걸음에서 그가 가져오는 소식의 내용을 알아챕니다. 간절히 기다리던 기쁜 소식이 마침내 도착했음을 직감합니다. 전령이 가져오는 “좋은 소식”은 ‘평화와 복된 좋은 소식과 구원’에 관한 소식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여호와의 통치’입니다. 예루살렘에게 진노의 술잔을 마시게 하셨던 여호와께서(51:17,20) 승리자로 돌아오셔서 왕으로 통치하십니다(참조. 40:3-5, 9-11).

 

(2) 시온 파수꾼들의 환호(8)

 

망루에서 파수를 보던 자들이 왕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경쾌하게 산을 넘는 전령을 보고 환호합니다(8). 이들은 꿈에 그리던 왕의 귀환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것을 보며 기뻐 다 함께 목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파수꾼들은 이스라엘의 왕이신(41:21; 43:15; 14:6)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는 놀라운 사건을 직접 목도합니다.

 

(3) 예루살렘의 기쁨(9)

 

그는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 곧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에게 소리 높이 기쁨의 환성을 외치라고 권면합니다(9). 기쁨의 근거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40:1에서는 천상적 존재에게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고 명령하신 여호와께서 여기서는 직접 당신 백성을 위로하십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이 위로의 구체적 내용이 됩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에 세계사적 지평이 주어집니다.

 

(4) 하나님의 구원을 목도 하는 민족들(10)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팔”로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민족들로 이를 목격하게 하십니다(10; 51:5). 온 땅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봅니다. 구원의 문이 모든 민족에게 개방되는 45:22과 49:6의 말씀과 달리, 여기서는 민족들이 예루살렘의 구원 가운데 계시된 그분의 능력을 보는 목격자가 됩니다.

 

출바벨론(52:11-12)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건, 우리의 영적 수준이 어떤 하건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통치하시며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다면 우리의 입에서도 찬송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11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12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11-12)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 황폐한 예루살렘에 기쁜 소리가 나며 모두 함께 노래할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있을 때 더욱 여호와를 찾아야 합니다. 고난 받는 백성보다 때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더욱 아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떠날지어다(11)

 

바벨론을 떠나는 유배민은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고 몸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11). “거룩한 성”(1)으로 돌아가는 길이기에 바벨론에서 경험하고 습득한 모든 더러운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합니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을 반드시 제사장들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결과 관련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거룩한 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참조. 출 19:6). 출바벨론과 출애굽 간에는 일부 다른 점이 있습니다.

 

(2) 앞뒤에서 지켜주시는 여호와(12)

 

애굽을 탈출할 때는 두려움에 떨며 급히 떠나야 했지만(출 12:11; 신 16:3), 바벨론을 떠날 때는 도망을 치듯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12).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멸망시켜 유배민의 귀향을 막지 못하게 합니다. 실제 바벨론을 멸망시킨 바사 왕 고레스가 유배민의 귀환을 공식적으로 허락합니다. 출애굽 때는 하나님의 사자(출 14:19-20; 23:20; 33:2) 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출 13:21-22; 신 1:30, 33)이 앞과 뒤를 옮겨가며 이스라엘을 지켜주었고, 출바벨론 때는 여호와께서 행렬의 앞과 뒤에서 인도하고 보호하십니다. 바벨론을 떠나 돌아오는 길이 더 안전하게 보호를 받습니다.


구원은 상호관계에서 완성됩니다. 구원의 손을 내미실 때 잡아야 하며, 부르실 때 응답해야 합니다. 거룩한 옷으로 갈아입고, 하나님 나라의 합당한 시민으로 살아갈 채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따라서 자유는 방종과 거리가 멉니다. 방종은 억압과 속박, 부정한 땅으로의 희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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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1-01)


학자의 혀를 주신 하나님

이사야 50장 4절 – 51장 8절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고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원인은 무엇입니까? 가르침은 넘쳤으나 아픔과 하소연에는 귀를 막았고, 원론적인 답만을 제시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여호와의 종이 고난 중에도 신실하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 자신을 여호와의 제자로 소개하는 ‘나’는 말씀을 선포하는 중에 참기 어려운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만,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주어진 사명을 수행합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해주실 것을 확신하기에 그는 사람들의 핍박에 맞서 싸우거나 불평하거나 피하지 않고 그분께서 아침마다 주시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종의 셋째 노래(4-9)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인이건 의인이건 누구든지 사용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사람이냐 아니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쓰실 때 기뻐하실 만한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4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4-9)

 

이사야 50장 3절까지는 이스라엘 배역하여 팔린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제 종의 노래가 등장합니다. 이 종의 노래는 흑암 중에는 있는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존재이며 백성들의 배역함과 맞물려 종의 사역에는 고난이 수반된다는 알 수 있습니다.

 

(1) 스승과 제자의 관계(4)

 

본문에서 ‘나’는 자신과 주 여호와의 관계를 '스승-제자’로 언급합니다(4). 여호와께서 종에게 준 “학자들의 혀”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전하는 제자들의 혀’를 의미합니다. 제자처럼 말할 수 있게 스승이신 여호와로부터 가르침을 받습니다. 종은 여러 면에서 예언자를 뛰어넘습니다. 필요할 때 계시를 받는 예언자와 달리 종은 매일 ‘아침마다’ 여호와께 가르침을 받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서 계속 교육을 받는 것처럼 종은 여호와에게서 매일 가르침을 받습니다.

 

(2) 자발적 순종(5-6)

 

여호와에 의해 귀가 열린 종은 자발적으로 순종합니다(5). 여호와의 음성에 귀를 막고 뒤로 물러났던 이스라엘과 달리 종은 주저하지 않고 사명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부르신 분의 명령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종의 사역은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반대자들은 그의 선포를 거절하고 그에게 신체적-정신적 폭력까지 가했습니다(6). 매를 맞으며 수염이 뽑혔지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모욕하고 침을 뱉었지만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습니다. 짐승처럼 달려드는 자들에게서 몸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몸을 맡겼습니다. 종은 자신의 고난이 사역의 일부에 속하는 것처럼, 자신을 보내신 분의 의도에 속하는 것처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종은 자신의 도움이 여호와에게서 나옴을 알았고 여호와께서 자기편이심을 확신했기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7).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수치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얼굴을 부싯돌처럼 강하게 하고 부당한 폭력을 이겨냈습니다. 반대자들은 종을 실족하게 하려고 했지만, 그는 실족하지 않았습니다.

 

(3) 여호와의 인정(8-9)

 

종은 법적 용어를 사용해 자신의 정당성(의로움)을 주장입니다(8-9a). 종은 ‘나를 의롭다 하시는이가 가까이 계심’을 확신합니다. ‘가까이 있다’(카롭)는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모두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전자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종의 곁에서 지켜주실 것이고, 후자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곧 개입하셔서 종의 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판결을 확신하는 종은 자신을 죄인으로 멸시하는 반대자들에게 함께 여호와의 법정에 가서 재판을 받아보자고 도전합니다. 여호와의 도움을 자신하는 종은 여호와의 최종판결에 대해서도 자신합니다. 종이 아니라 그의 반대자들이 유죄 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좀이 옷을 해어지게 하는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하고 의로운 종을 부당하게 학대한 자들의 불의가 이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9b).

 

권면과 경고(10-11)

우리의 귀는 정보를 습득하고 지식을 쌓기 위해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들은 것은 입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우리의 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다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귀와 혀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10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11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10-11)

 

이제 여호와의 종은 예루살렘 거민들을 향해 도전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예루살렘 거민들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여호와의 종의 말을 따라 어둠 가운데로 뛰어들 수 있는 자들이 없는냐고 외치는 것입니다.

 

(1)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10)

 

종의 선포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면 아침마다 그분에게서 계시를 받아 전하는 종(4)의 선포에 귀를 기울여 듣고, 그 가르침에 순종해야 합니다. 거절당한 종(6)이 여호와의 의지를 대변하는 자로 선포됩니다. 종의 선포에 대한 반응이 순종과 불순종의 기준이 됩니다.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는 유배민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을 통하여 구원과 해방의 약속이 주어졌지만, 그 성취는 아직 미래에 속합니다. 경건한 자들은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분께 의존해서 빛이 없는 흑암의 현재를 지나가야 합니다. 유배민을 에워싼 어둠은 종이 선포한 구원의 빛으로 벗겨낼 수 있습니다.

 

(2) 불과 횃불로 무장한 자(11)

 

11절은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는 위협의 말씀입니다. 어둠을 안전하게 걷기 위해 준비한 불과 횃불이 이들을 구해주지 못합니다. 어둠을 밝히려고 마련한 그 불에 자신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들이 준비한 불과 횃불은 아마도 전통적인 구원 신학을 가르칠 것입니다. 이들이 선택한 구원의 길이 이들을 멸망으로 이끈다. 이들은 고통 속에 죽을 뿐입니다.

위로의 말씀들(51:1-8)

 

우리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삶입니다. 수시로 세상의 비방에 노출되어, 신앙적 정체성을 흔들려는 수많은 공격을 막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힘은 강력해 보이지만 서서히 스러져 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한 것은 주님과 그 말씀밖에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2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3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4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5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6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7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8옷 같이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 양털 같이 좀벌레가 그들을 먹을 것이나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1-8)

 

하나님께서는 채석장의 이미지를 사용해 유다의 정체성이 변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석회암 지대에서 떠낸 돌은 석회암일 수밖에 없고, 화강암 지대에서 떠날 돌은 화강암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 백성은 마치 채석강에서 채취된 돌과 같이 그 땅을 떠나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정체성이 바꿜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1) 아브라함의 축복(1-3)

 

첫째 단락(1-3)은 예언자가 선포한 시온의 회복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답변입니다.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자’는 종의 선포(50:4-9)를 따르는 자들이고, ‘의’는 여호와께서 주실 구원을 의미하지만, 2차적으로는 종교적 윤리적 자질도 포함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신뢰하는 자들은 그분 말씀에 복종합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분께서 시온을 위로해주시고 구원해주실 것을 압니다. 의와 구원을 원하는 자는 여호와께 들어야 합니다. “반석”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우묵한 구덩이”는 사라를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소유하고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신앙의 조상입니다. 이스라엘은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성취를 기다렸던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을(창 15:6) 신앙의 조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임의 사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해 나가셨습니다(창 17:16,19). 생산 능력의 상실이란 점에서 사라는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49:21)하며 놀라는 시온을 상징합니다. 시온은 사라가 어떻게 아이를 얻게 되었는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해주셨다는 사실에서 교훈을 끌어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의 복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모든 것을 상실하고 절망에 빠진 그의 후손들의 운명에 개입하시고 위로하십니다. 멸망 이후 폐허로 남아 있던 시온과 그 주변 지역이 에덴처럼, 여호와의 동산처럼 될 것입니다. 슬픔과 절망과 탄식이 지배하던 황폐한 곳들이 동산으로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와 찬송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땅바닥에 쓰러져 수치를 당하던 예루살렘에 축제의 환호와 노랫소리가 다시 들립니다.

 

(2) 임박한 하나님의 공의(4-6)

 

둘째 단락(4-6)은 여호와의 영광에 초점을 맞춥니다. 율법(가르침)이 여호와에게서 나가고, 그분의 공의가 민족들의 빛으로 세워집니다(4). “내 공의”는 여호와의 통치와 관련이 있으며, 그분의 왕적 통치는 만민의 빛이 됩니다. 어둠 가운데 살던 민족들이 여호와의 통치가 가져다주는 공의와 구원을 보고 기뻐하게 됩니다. 시온의 구원 가운데 드러난 그분의 능력과 구원 의지를 민족들과 섬들도 고대합니다(5). 그분에게서 나간 율법을 통해 민족들도 그분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라’는 문맥에 따라 ‘내 팔이 민족들을 다스리리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손으로 민족들에게 공의를 베푸십니다. 여호와의 무한한 구원 능력과 피조 세계의 한계가 대조됩니다(6). 사람들이 영원하리라 믿는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여호와의 구원과 공의는 흔들림없이 지속됩니다.

 

(3) 두려워하지 말라(7-8)

 

셋째 단락(7-8)은 그분의 구원 약속이 반드시 성취되고 그분의 공의는 폐지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의를 아는 자들,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이 악한 자들에게 비방을 당합니다(7). 여호와의 종이 사명을 수행하다 핍박과 모욕을 당했던 것처럼(50:6) 이들도 여호와의 의를 알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려다가 고난을 당합니다. 여호와의 공의와 구원을 신뢰하는 자들은 대적의 비방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를 아는 자들”은 여호와의 구원에 의지하여 그 말씀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그분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합니다. 옷이 좀에, 양털이 좀벌레에 먹히는 것같이 비방하는 자들은 결국에는 멸망할 것입니다(8). 겉으로는 그 과정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비방하는 자들이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그분의 공의와 구원을 신뢰하는 자들은 여호와에 의해 대대로 보살핌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곤고한 자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학자는 그들의 아픔을 자세히 듣고 배우는 자이며, 세상에 그들의 억울함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이것은 고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 길이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요, 에덴을 회복하는 길이기에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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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0-01)


전화위복을 이루시는 하나님

이사야 49장 14절- 50장 3절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바꾸어 복을 만드시는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실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서 떠나 죄를 짓는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시지만, 사실 그 재앙마저도 이후에는 그들을 위한 복이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이 결국 멸망하겠지만 그것마저도 복이 되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 시온은 유배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고 잊힌 존재가 됐다고 불안을 토로하며 탄식합니다.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이해하는 전통 신학 안에서 바벨론 유배는 설명하기 어려운 신학적 단절이었습니다. 시온의 제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은 한순간도 시온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과 관심을 시온이 멸망한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시온의 회복(14-21)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잊으실 수 없습니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은 절대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이름은 절대 잊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속을 상하게 만들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식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도 그러지 않을까 지레짐작하지만, 걱정할 필요없습니다.

 

14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15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17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18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19이는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이제는 주민이 많아 좁게 될 것이며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 20자식을 잃었을 때에 낳은 자녀가 후일에 네 귀에 말하기를 이곳이 네게 좁으니 넓혀서 내가 거주하게 하라 하리니 21그 때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들을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14-21)

 

이사야는 시온, 곧 예루살렘 성을 의인화해서 노래합니다. 시온은 유배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버림받고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고 탄식했습니다.

 

(1) 시온의 탄식(14)

 

시온은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라고 탄식합니다. 그들은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고 잊힌 여자처럼 됐고 여호와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면서 그분의 무관심을 탄식합니다(14; 참조. 40:27; 54:8; 애 5:20). 동사 ‘버리다’와 ‘잊다’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2) 여호와의 답변(15)

 

탄식하는 시온에게 여호와께서 비유를 사용해 그 부당함을 지적하십니다(15). 어머니가 제 몸에서 난 젖먹이를 잊고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 자식을 버리는 여인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극단적인 환경에서 자포자기적 행태를 보일 때가 없지는 않지만(참조. 왕하 6:26; 애 4:10),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당신 자녀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3) 성의 재건(16-17)

 

하나님께서는 지워지지 않게 손바닥에 시온을 새겨놓고 늘 기억하십니다(16). 그분은 한순간도 시온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는 그분께서 손바닥에 새긴 것이 시온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벽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절망에 빠진 시온의 눈에는 잊힌 것처럼 보이지만, 여호와께서는 시온의 재건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시온의 자녀들의 귀환과 시온을 파괴하던 자들의 떠남이 대조적으로 기술됩니다(17). 민족들 가운데 흩어졌던 시온의 자녀들이 여호와께서 평탄하게 만들어준 대로를 통해(11-12) 시온을 향해 가벼운 걸음으로 달려오고, 시온을 허물고 부수던 자들은 급히 시온을 떠난다. 성벽이 파괴된 시온을 괴롭히고 약탈하던 자들이 갑자기 도망하고 새로운 구원 시대가 도래합니다.

 

(4) 주민들로 넘치는 성(18-21)

 

여호와께서 황폐해진 땅을 내려다보며 절망 가운데 사는 시온에게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라고 권면하십니다(18). 시온은 눈앞의 암담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저편에서 오는 소망의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약속을 의지할 때 시온은 사방에서 서둘러 달려오는 자녀들을 보며 그분께 버림받거나 잊히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시온은 그분께서 맹세하신 구원 약속을 믿고 그 성취를 기다려야 합니다. 시온은 흩어진 자녀들이 돌아오는 것을 볼뿐 아니라 이들을 다시 자녀들로 맞아 잃어버렸던 영광도 되찾게 됩니다. 자식들을 잃고 티끌에 내려앉았던 시온에게 어머니의 지위와 기쁨이 주어집니다. 시온의 영광을 최상급으로 표현한 신부의 비유는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회복된 결혼 관계를 암시해주기도 합니다.

시온의 처량한 현재 모습과 다가오는 구원 시대의 충만한 모습이 대비됩니다(19). 주전 587년의 재앙으로 시온은 폐허가 됐고, 일부 남은 자들이 힘겹게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시온이 재건되고 생존의 활기를 되찾게 됩니다. 외부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거주 공간이 부족해질 정도로 주민들이 많아집니다. 시온은 자식을 다 잃어버렸다고 절망했지만, 자녀들이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자녀들이 유배지에서 크게 자라 다시 돌아옵니다.

장소가 협소해서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녀가 사방에서 시온으로 돌아옵니다(20). 시온은 믿기지 않는 현실을 보고 놀라움에 사로잡힙니다(21). 시온의 탄식(14)이 감탄과 놀람으로 바뀐다. 시온은 자신이 여호와께 버림받지 않았음을 두 눈으로 보게 됩니다. 시온이 절망에 빠져 탄식하는 동안 여호와께서는 먼 곳에서 그의 자녀들을 보호하고 키워주셨다. 시온을 잊은 것이 아니라 시온을 기억하시고 그의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돌아오는 시온의 자녀들(22-23)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인간들은 고통이 임했을 때, 마치 모든 희망을 잃은 것처럼 행동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나보다 훨씬 더 멀리 보시고,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어려움을 주신 하나님을 오히려 찬양하고 이 고통 뒤에 무엇이 있을지 기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22주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뭇 나라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치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23왕들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22-23)

 

예루살렘의 회복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회복을 직접 경험한 자들조차 의아학 여길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회복은 이스라엘 자손이 기대하거나 요구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 안내자가 되는 민족들(22)

 

여호와께서 민족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손을 드십니다. 그분의 권능을 보여주는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고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 깃발을 올려 먼 곳에서 민족들을 불러오셨던 여호와께서(5:26) 이번에는 당신 백성을 귀향시키기 위해 깃발을 올려 민족들을 부르십니다. 민족들에게 유배민을 안전하게 시온으로 데려가는 임무가 주어집니다. 민족들이 시온의 아들들을 품에 안고 시온의 딸들을 어깨에 메고 데려옵니다.

 

(2) 시온에 굴복하는 민족들(23)

 

민족들에 의해 쫓겨났던 시온의 자녀들이 민족들의 안내를 받으며 다시 시온으로 돌아옵니다. 민족들을 대표하는 왕들과 왕비들이 시온의 자녀들을 돌보는 양부와 유모로 임명되고, 시온에 절하고 그 발의 먼지를 핥습니다. 시온을 지배하던 민족들이 시온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경의를 표합니다. 물론, 시온의 영화가 궁극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 일을 통해 시온이 당신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시온은 여호와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우상을 섬기다가 수치를 당하지만,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시온의 자녀들은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유배민의 구출(24-26)

두려워하지 말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매일 변하는 세상의 평가에 마음을 너무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무엇보다 귀한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손바닥에 이름이 새겨진 사람들입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세상이 몰라보아도 하나님께서는 아시는 귀한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축복합니다.

 

24용사가 빼앗은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 25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두려운 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내가 구원할 것임이라 26내가 너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자기의 살을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함 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네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24-26)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면 우리는 머누 쉽게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기도 하고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아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녀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1) 시온의 탄식(24)

 

바벨론에 멸망당한 경험이 있는 시온은 여호와의 구원 능력에 의심을 품습니다(24). 여호와께서 유배민의 귀향을 약속하시지만 무슨 능력으로 세계를 정복한 바벨론의 손에서 유배민을 구해내실 수 있겠습니까?

 

(2) 여호와의 응답(25-26)

 

어떤 나라와 신도 바벨론 제국의 폭력에서 제 민족을 구해낼 수 없지만, 바벨론을 대적하시는 분이 여호와라면 사정은 전혀 달라집니다(25). 바벨론을 대적하시는 여호와께서 시온을 억압하던 자들이 서로 죽이고 피를 흘리게 하실 것입니다(26). 서로 제 살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듯이 제 피를 취하도록 마시게 하실 것입니다. 바벨론이 내부 분열과 다름으로 멸할 것을 시사해줍니다. 바벨론의 폭력에서 시온의 자녀들을 구하시는 여호와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모든 육체가 그분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육체”는 시온을 억압하는 자들과 구별되는, 여호와의 권능과 영광을 목도하는 자들입니다(참조, 40:5). 이들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유배민을 구하는 여호와의 능력을 보고 여호와께서 시온의 구원자요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이심을 알게 됩니다. 구속자(고엘)는 씨족사회의 유산에 속하는 표현입니다. 억압자들의 손에 떨어진 시온의 자녀들을 구출하는 것이 여호와의 권리이자 의무에 속함을 보여줍니다. 야곱의 전능자는 야곱이 대표하는 모든 지파를 위해 개입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함축하는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의 책망(50:1-3)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는 잘 모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롬 하나님께서는 죄인이건 의인이건 누구든지 사용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사람이냐 아니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1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1-3)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시고 이방의 손에 파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도, 이방의 손에 너기신 것도 아님을 밝히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악과 배역함 때문에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1) 유배에 관한 논쟁(1)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배는 구원사적 전통 안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파국이었습니다. 유배민 가운데 일부는 그 책임을 여호와께로 돌렸습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어느날 갑자기 이혼 증서를 손에 들려주고 내쫓아버리셨다고, 빚에 쪼들려 채주에게 팔아넘기셨다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에 맞서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임의적 결정이나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이들의 죄악과 배역 때문이었음을 주장하십니다(1). 여호와께서 무관심하거나 능력이 없어서 유배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 여호와의 무한 능력(2-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찾아오셔서 불렀지만, 이스라엘은 응답하지 않았다(2). 그분의 ‘손’이 짧아서, 힘이 없어서 이스라엘이 구속함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구해주시려고 구속의 손을 내밀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도무지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와줄 마음도 있고 도와줄 능력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무시하고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하다고 불평을 늘어놓거나 그분의 구원 능력에 회의하지 말고 먼저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그분의 무한 능력에 의지해야 합니다. 유배민은 한마디 호령으로 바다와 강을 말리시고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신 출애굽의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뜻을 거스르고 등을 돌렸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분은 잠시도 우리를 잊지 않으셨으며, 보이지 않게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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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9-01)


온 세상을 구원할 여호와의 종

이사야 49장 1-13절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특별한 때에만 임하고, 구원의 날이 어떤 특정한 날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한 날, 특별한 시기에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때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 이사야 42:1-4의 첫 번째 종의 노래에서는 여호와께서 종을 민족들에게 정의를 베풀 자로 소개하시고, 오늘 본문부터 시작하는 두 번째 종의 노래에서는 종이 민족들을 불러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낼 그분의 종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좋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구원이 땅 끝까지 미치도록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신 자입니다. 종의 사역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땅으로 확장됩니다.

 

여호와의 종의 두 번째 노래(1-6)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바로 우리의 사명이 되었고, 우리가 바로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몇몇 선교사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이방의 빛입니다. 우리가 이방의 빛으로 헌신할 때, 그 빛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이방의 빛이 되어, 이방 민족들을 구원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방의 빛의 사명은 우리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1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2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3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4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5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6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1-6)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없어지지 않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의 구원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들을 섬기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고 졸지에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1) 종의 자기소개(1-3)

 

‘여호와의 종’은 ‘섬들과 먼 곳 백성들’을 초대하여 자신을 소개합니다. 종의 사명에 처음부터 세계사적 전망이 주어집니다. 종은 자신이 여호와의 종으로 태어났다고 주장합니다. 여호와께서 모태에서부터 종을 부르시고 이름을 기억하셨습니다(1; 참조. 렘 1:5; 갈 1:15). 종의 실존이 여호와께서 부르신 목적에 온전히 종속됐습니다. 종은 여호와께서 특별한 의도에 따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자로, 그분의 의지에 순종하는 삶이 종의 실존 이유이자 목표가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종의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종을 예리한 화살로 만드셨습니다(2). 종은 대적과 싸우려 무장하신 여호와의 칼과 화살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신적 권위가, 어떤 방어벽도 꿰뚫을 수 있는 관통력이 주어집니다. ‘손 그늘에 숨기다’와 ‘화살통에 감추다’는 원래 여호와의 보호를 보여주는 표상인데(참조. 시 17:8; 27:5; 91:1; 렘 48:45), 여기서는 ‘준비 완료’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용사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칼과 화살을 예리하게 준비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끝내셨습니다. 사용할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대표적인 전쟁 무기인 칼과 화살의 비유는 종의 선포가 저항에 직면하겠지만 결국 승리할 것을 시사합니다. 여호와의 칼과 활로 준비된 종에게 사명과 역할이 맡겨집니다(3).

 

(2) 종의 탄식(4)

 

종이 주인의 명령과 의지 아래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사적 의지와 활동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3) 여호와의 긍정적 응답(5-6)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은 종이 되는데, 그러면 이스라엘이 사역의 주체가 되기에 이스라엘이 종 사역 대상으로 등장하는 5-6절과 충돌합니다. 종을 개인으로 간주하면 ‘이스라엘’은 종의 본질을 보여주는 명예로운 호칭이 됩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종만이 유일하게 ‘거룩한 남은 자’이기에 그에게 임시로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지위와 사명이 주어집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신실한 종은 원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셨던 모습입니다. 홀로 참된 이스라엘을 구현한 종이 사람들을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여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는 칼과 활임에도 종의 사역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4). 그 결과 때문에 좋은 탄식하지만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종은 사역의 실망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판단을 여호와께 맡기며 사람들과 다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예언자적 사명과 선포를 거절했지만, 좋은 여호와는 자기 활동을 인정해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좋은 자신의 신적 사명을 눈에 보이는 열매, 곧 ‘사람들의 인정’으로 입증하려 하지 않습니다. 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소명의 확신에서 신적 사명의 정당성을 찾습니다. ‘보응’(보상)은 ‘예언자적 사명의 인정’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여호와 안에서 많은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종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특별한 목적을 갖고 모태에서부터 자신을 직접 빚어 만드셨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5). 이스라엘을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임을 확신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과정은 종에게도 감춰져 있으며, 종은 단지 이를 위해 말씀을 선포하면 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실패한 자처럼 보이지만 여호와의 눈에는 존귀한 자입니다. 자신을 지으신 분께 소망을 두는 종에게는 여호와께서 힘이 되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거절당한 종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앞으로 종에게 맡기실 일에 비하면 이방 가운데 흩어진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일은 차라리 쉬운 일에 속합니다. 그분의 구원 계획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땅끝을 내다봅니다(6; 42:1-4). 여호와께서 종을 ‘이방의 빛’으로 세워 온 땅에 구원을 전하게 하십니다.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의 거절이 종의 역할을 세계사적 차원으로 옮겨놓습니다.

 

흩어진 자들의 귀향(7-13)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찾고, 겸손하여져서 하나님을 바라는 날이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날이 바로 오늘이요. 지금이라고 말했습니다(고후 6:2).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은 지금 당장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두려워 말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은혜의 문, 구원의 문은당신을 향해 활짝 열릴 것입니다.

 

7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8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9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헐벗은 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10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11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12어떤 사람은 먼 곳에서, 어떤 사람은 북쪽과 서쪽에서, 어떤 사람은 시님 땅에서 오리라 13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7-13)

 

유다 백성은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나라를 잃고 타국에서 종이 되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유다 백성이 이방인 바벨론의 압제 아래 있는 것은 커다란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이 겪는 어려움의 원인은 외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백성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다른 신을 따른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1) 낮아진 종의 높임받음(7)

 

1-6절에 나타나는 ‘종’은 7절에 등장하는 ‘종’과 구별됩니다. 전자는 여호와께서 모태에서부터 부르신 그 곧 세분의 종이고, 후자는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 상 권력에 의해 종의 신분으로 전락한 자입니다.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는 바벨론 유배민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의 운명에 개입하십니다. 그분께서 땅바닥에 떨어진 이스라엘의 운명을 다시 높여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운명과 민족들의 운명이 뒤바뀝니다. 이스라엘을 멸시하고 경멸하며 종살이시키는 민족들이 이스라엘에게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왕들이 일어나 땅에 엎드려 과거 종이었던 이스라엘에게 신하의 예를 표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높임은 물론 여호와의 신실하심에 근거합니다.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넘겨주셨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분께서 택하신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기했지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는 변함없이 언약 관계에 신실하십니다.

 

(2) 열매 맺는 종의 사역(8)

 

현재 문맥에서 8-12절은 열매 없는 사역에 실망한 종(4)에게 여호와께서 주시는 응답입니다. 여호와께서 종에게 은혜의 때에 응답해주실 것과 구원의 날에 도와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8). 여호와께서 종을 도우셔서 그의 사역이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해주시고, 종을 보호하여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십니다(참조, 42:6). 종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황폐한 땅이 다시 상속재산으로 주어집니다. 모세(언약 체결)와 여호수아(땅 분배)의 역할이 종에게 맡겨집니다.

 

(3) 해방과 귀향 (9-12)

 

9a절도 종의 사역에 관한 언급입니다. 바벨론 유배민에게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이 종에게 맡겨집니다. ‘잡혀 있음과 흑암’은 유배생활을 가리키지만, 유배민의 귀환이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기에 불신앙과 같은 영적 무지도 포함합니다. 9b-10a절은 귀향길을 내다봅니다.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길은 위험한 여정이지만, 목자의 인도를 받는 양 떼처럼 안전하고 풍족하게 지날 것입니다. 9b절은 그 이유를 알려준다.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이들을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시고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샘물 근원”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시원한 그늘을 보장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출애굽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당신 백성을 이끌어주셨던 것처럼, 긍휼히 여기시는 분께서 유배민의 그늘과 샘물이 되셔서 이들의 여정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길을 함께하시며 보호해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무한한 권능도 보여주십니다. 귀향민의 진행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 어려움 없이 지나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10-11). 바벨론 유배민만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흩어진 자들이 모두 돌아옵니다(12). 목적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고 해방과 귀향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4) 찬양(13)

 

하늘과 땅뿐 아니라 산도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습니다(13). 모든 피조 세계가 창조주가 마련한 놀라운 일을 기뻐하며 환호하게 됩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구원에 세계사적 전망이 주어집니다. 찬송의 동기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당한 자”는 하나님 외에 다른 곳에서 도움을 찾을 수 없는 가련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위로와 긍휼이 그분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온전하게 회복시켜줍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때는 오늘입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하고 기꺼이 이방의 빛으로 살아가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은혜의 때, 구원의 날이 풍성하게 열려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이방의 빛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날마다 체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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