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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9-04)


멸망할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 예수님

누가복음 19장 41-48절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은 신앙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의 뜻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사랑하시며, 그분의 뜻은 항상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할 경우, 우리는 영적 멸망과 고통을 겪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그분의 뜻을 알고자 해야 합니다.

 

  • 누가복음 19:41-48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성전에 들어가신 내용을 다룹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고 우시며 그 도시의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또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며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지적하십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매일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심(41-44)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깊이 사랑하시며, 그들의 회개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신앙 생활의 기초가 됩니다.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41-44)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표현들을 사용하여 예루살렘의 멸망을 생생하게 예언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로마 군대에 의하여 포위당하고 멸망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는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44). 예수님께서 방문하신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때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거민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고, 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이방인들에게 넘겨 죽였습니다. 이러한 잘못 때문에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됩니다. 로마 군대는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비판(45-46)

교회와 신앙 공동체는 물질적 이익보다 영적 가치를 우선시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질적 이익이 우선시될 경우, 신앙의 본질이 흐트러질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 성장과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 영적 가치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우선순리는 진정한 신앙 생활을 가능하게 합니다.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45-46)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예레미야 7:11을 배경으로 보면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파괴된다는 예언입니다. 예레미야 7:11은 성전이 ‘강도의 소굴’처럼 여겨진 것을 언급하는데, 이에 반응하여 하나님께서 성전을 멸하겠다고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렘 7:14).

‘강도의 소굴’이 예레미야 7:11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알면 예수님께서 이 표현으로 무엇을 지적하셨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7:11에서 ‘강도의 소굴’은 계속 죄를 짓고 있고 앞으로도 지으려 하는 강도들이 안전하게 피하여 재충전하고 다시 강도질을 하러 나가는 은신처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그러한 ‘강도의 소굴’처럼 활용했습니다. 그들은 강도처럼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이 지은 죄는 도둑질, 살인, 간음, 거짓 맹세, 우상숭배 등이었습니다(렘 7:9). 그들은 이러한 죄를 짓고 성전에 와서 속죄제물을 드린 후 제사장으로부터 죄사함의 선언을 받습니다. 이 죄 사함을 통하여 그들은 구원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전에 서서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렘 7:10).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계속 죄를 짓기 위함입니다(렘 7:10). 이렇게 죄를 계속 짓기 위해 성전을 활용하는 자들에게 성전은 강도의 소굴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렘 7:11)

이렇게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솔로몬의 성전은 결국 바벨론에 의하여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헤롯이 지은 성전이 다시금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후 한 세대 내에 이 성전은 다시 로마에 의해 파괴됩니다. 성전에서 장사를 하게 하고 자릿세를 받아 돈을 벌어들인 대제사장은 그것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을 것입니다. 성전 뜰에서 제물을 사서 하나님께 드린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으시고 자신의 죄를 사하시기에 죄를 다시 지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곤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은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안위를 제공하는 장소로 남용되었습니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유대인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누립니다. 구원의 확신은 본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이 확신을 남용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그들은 성도가 아니라 강도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죄를 마음껏 지으며 살다가 교회에 와서는 구원의 확신을 얻기 원합니다. 그 확신은 삶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계속 죄를 지으며 살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를 이렇게 강도의 소굴로 만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된 교회를 어떻게 하십니까?

교회가 강도의 소굴이 되어주기를 원하는 자들은 설교자들이 자신들에게 죄를 계속 지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확신을 갖도록 선포하는 설교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에게 너무도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계속 죄를 짓기 위해서입니다. 이 확신을 무너뜨리는 설교를 하면 그들은 매우 불쾌해하고, 어떤 설교자들은 그들의 그러한 모습에 당황하여 그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해줍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강도의 소굴로 전락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쇠락하는 원인은 성전이 멸망한 원인을 통해서 진단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전락하면 파괴되었듯이 교회도 그렇게 전락하면 쇠락합니다. 삶을 바꾸고 돌이키는 회개가 없는 구원의 확신, 죄를 계속 지을 목적으로 갖게 되는 구원의 확신, 죄를 고의적으로 계속 지으면서 더 죄 짓기 위해 교회를 활용하는 강도와 같은 자들이 갖는 구원의 확신이야말로 교회 쇠락의 제일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을 제공받기 위해 교회를 찾는 강도들을 고객으로 삼아 구원의 확신을 판매하면서 어찌 교회의 부흥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장사터 모델로 운영되는 교회 성장학을 버리고, 교회를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으로 회복시켜야 합니다. 교회를 이용하는 강도들이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회개의 열매가 없는 자들은 구원받은 성도가 아니라 강도임을 자각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열매를 통해 이루어지게 하고, 그 확신을 가진 성도들이 더욱 죄를 멀리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교회가 회복되고 부흥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심(47-48)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은 현대 신앙 공동체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본질이 흐트러지면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다시금 되새기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강화해야 합니다.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47-48)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장사로 삼은 자들을 몰아내신 후에, 그곳을 교육의 장소로 사용하십니다. 날마다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셨습니다. 백성들은 이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48).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강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강도로서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강도의 소굴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강도의 소굴을 말씀의 학교로 바꾼 예수를 죽이려 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강도의 소굴을 필요로 하는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강도들 못지않게 강도의 소굴을 지키고자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이지만 그들이 유지하고 싶은 것은 성도의 모임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강도의 소굴로서의 교회입니다. 이러한 성격을 바꾸려 하는 사람을 그들은 증오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나아가 그 말씀을 따라 생활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는 경제활동을 하는 기업이 아닙니다. 소비활동을 하는 가정도 아닙니다. 교회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려는 정치 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학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으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이처럼 본질적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경제활동을 하거나 정치 참여를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교회를 망치는 길입니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것은 죄 짓는 사람들의 양심을 마비시켜 계속 죄를 짓도록 하는 도적 집단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학교로서 기능하려면 목회자들이 교사로서 거듭나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의 전문가로서 거듭나야 합니다. 그들의 성경 해석 수준은 일반 성도들의 수준을 훨씬 능가해야 합니다. 신학교에서는 목회자 후보생들이 그러한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가르쳐야 합니다. 이미 배출된 목회자들을 재교육하여 그러한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이러한 목회자들이 말씀을 전하는 곳, 성도들이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며 이 말씀대로 사는 삶을 연마하는 곳으로 교회가 회복될 때 교회는 다시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학교, 예수님의 학교인 교회는 더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단체입니다. 성경 없이, 복음 없이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슬픔과 성전 정화를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회개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배의 본질을 되새기고, 영적 가치를 우선시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고, 건강한 신앙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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