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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1-02)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요셉

창세기 41장 17-36절


 세계적인 전염병 '코비드 19'는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던 세상의 허상과 실상을 드러내주었습니다. 제국의 오만이 상황을 악화시켰고, 지도자의 거만이 시민들을 도탄에 빠뜨렸고, 의학과 과학이 두 손을 들고 때가 지나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로의 꿈은 제국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었습니까?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설명합니다. 바로는 요셉과의 일반적인 격식을 차린 상견례 과정을 생략한 듯합니다. 그는 히브리인으로 알려진 요셉의 과거, 가족, 사연, 애굽에서의 직업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이는 내러티브의 흐름에서 곁가지일 뿐이라 모두 생략되었겠지만, 이야기의 빠른 흐름은 바로의 초조한 심리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실제로 바로는 형식적인 접견 인사만 받고 즉시 꿈 이야기로 넘어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꿈을 설명하는 바로(17-2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문제들과 어려움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잠시 동안 시련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 합당한 종들이 될 필요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자유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구원하셔서 고통 받는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하셨습니다.

17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꿈에 나일 강 가에 서서 18보니 살찌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19그 뒤에 또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20그 파리하고 흉한 소가 처음의 일곱 살진 소를 먹었으며 21먹었으나 먹은 듯 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흉하더라 내가 곧 깨었다가 22다시 꿈에 보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23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더니 24그 가는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삼키더라 내가 그 꿈을 점술가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풀이해 주는 자가 없느니라(17-24)

바로는 요셉 앞에서 급히 자신의 꿈을 설명합니다. 애굽에서 바로는 신격화되던 절대 권력자였기 때문에, 그의 무력감과 조급함은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이로써 창세기 기자는 바로가 한낱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바로가 전한 꿈 내용은 내레이터가 그것을 요약한 1-7절과 동일합니다. 1-7절에서 내레이터는 두 개의 꿈에 나타난 극단적인 비교 대상들을 균형 있게잘 묘사했습니다. 살진 소와 야윈 소, 풍성한 곡식 줄기와 바짝 마른 곡식 줄기, 그러나 바로가 요셉에게 전하는 꿈 묘사는 상당히 특징적이고 꿈에 대한 그의 심리적 상태를 명백히 드러냅니다. 그는 두 가지 꿈을 하나로 묶어 이야기하는데(17), 흉한 장면을 더 상세히 묘사하며 강조합니다.

바로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창세기 내레이터의 단어들과 약간 차이가 나는데, 이는 문학적 변화를 주기 위한 것인 동시에 그의 흉몽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컨대, 흉한 소들에 대해 ‘약하고’가 사용되는데, 구약에서 유일하게 빈약한 짐승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표현은 앞서 내레이터의 개괄적인 꿈 설명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흉함과 파리함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형용사입니다. 이런 상이한 형용사는 단지 문학적 기교를 위한 변화일 수 있지만, 부사 ‘심히’가 덧붙여지고 그 앞에 ‘약하고’가 추가되어 3절에 비해 야윈 소의 흉측한 특징이 한층 강화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흉한 일곱 소에 대한 묘사는 훨씬 부정적입니다.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 또한 그는 그 흉한 암소들을 애굽 땅에서 본 적이 없다고 덧붙입니다. 나아가 흉한 소들이 좋은 소들을 잡아먹었다는 진술에도 바로의 새로운 꿈 내용이 추가됩니다. 흉한 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먹은 것 같지 않게 여전히 흉해 보였다는 진술입니다. 바로가 보기에 이것은 대단히 기괴한 장면으로 섬뜩한 징조를 암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야윈 소들이 살진 소들을 잡아먹었음에도 여전히 흉하다는 것에 대한 요셉의 꿈 풀이가 31절에 나옵니다. 백성은 나중의 흉년이 너무 심해서 앞선 풍년을 기억도 못할 것입니다.

이어서 바로는 곡식 줄기에 대한 꿈을 묘사하는데, 마찬가지로 일부 형용사가 내레이터의 형용사와 약간 다릅니다. 그러나 두 종류의 일곱 이삭이 등장할 때는 내레이터의 꿈 묘사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는 연속적인 두 장면 중 첫 번째 위협적인 장면에서 무시무시한 공포감을 느꼈으며, 두 번째 장면은 그것을 확증하는 꿈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로는 자신의 꿈을 단수로 사용하면서(15), ‘한 꿈을 꾸었으나’; 17,22) 두 개의 꿈을 연속적으로 꾼 하나의 꿈으로 간주합니다. 요셉도 그것이 하나의 꿈임을 확인해줍니다(25). 이러한 흉몽을 풀이하는 사람을 찾지 못했던 바로는 지금 요셉의 해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꿈을 해몽하는 요셉(25-36)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에게 이해력과 통찰력을 주실 권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미래를 이해하고 대비하도록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적인 이해력과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 몇 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이해력과 통찰력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5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26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라 27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28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29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30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하리니 31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32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33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34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35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 36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25-36)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해력과 통찰력을 통해 지상에 도래할 엄청난 어려움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는 바로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고 있을 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이해력과 통찰력을 간구하였을 것입니다.

(1) 좋은 일곱 소와 흉한 일곱 소의 의미(25-31) 

요셉은 바로가 말한 대로 두 종류의 꿈이 하나의 꿈이라고 확인해줍니다. 또한 그는 그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그분이 조만간 ‘하실 일’(분사, 임박한 미래)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 외 요셉은 바로의 꿈을 네 가지로 요약합니다. 1) 두 꿈은 하나의 꿈입니다. 2) 일곱 마리소와 일곱 이삭은 7년을 상징합니다. 3) 7년의 풍년 후에 7년의 기근이 따를 것입니다. 4) 두 번의 꿈은 그 일이 속히 분명하게 이루어질 것을 뜻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요셉이 어떻게 이 꿈의 성격을 즉각 분별하여 해몽할 수 있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의 영이 항상 함께했기에 그가 매사에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으로 경영했으며, 나아가 영적인 통찰력으로 신령한 일을 즉시 간파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보라’로 시작하는 요셉의 어법은 예언자의 어법과 흡사합니다(29). 애굽 왕 바로 앞에 서서 미래의 일을 대언하는 요셉의 모습은 나단, 갓(삼하 24:11-13), 헤만(대상 25:5)과 같은 궁중 예언자를 연상시킵니다. 특히 갓은 다윗을 향해 요셉이 바로에게 전했던 경고와 비슷하게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삼하 24:13).

요셉은 7년의 풍년 예고는 간단히 설명하는 반면, 이어지는 7년의 흉년 예고는 다섯 문장을 할애하여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바로가 자신의 꿈에 대한 묘사에서 흉측한 소들에 대해 더 상세한 묘사를 했던 것에 부합합니다. 나중의 7년 흉년은 극심할 것입니다. 형용사 ‘카베드’는 서술적으로 사용되어 ‘무겁다’는 뜻을 지니며, 이것만으로도 가혹한 가뭄이 잘 표현되는데 거기에 부사 ‘심히’(메오드)가 수식되어 더욱 강조됩니다.

비슷한 풍년 흉년 이야기가 고대 근동에 여럿 있기 때문에 요셉 내러티브가 차용한 것이라는 견해가 대두되지만, 장기간의 풍년과 가뭄의 반복은 대규모 농사에 의존했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했던 자연재해였을 뿐입니다. 또한 고대 근동에서도 숫자 ‘7’은 완전수로, 상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숫자였기에 충분히 비슷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요셉 내러티브의 풍년 흉년 이야기에는 신화적 요소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기근은 여러 차례 하나님의 백성을 자신의 계획대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 사건이었는데, 현재의 가뭄도 그러합니다.

(2) 해몽을 통해 대비책을 제안하는 요셉(32-36)

요셉은 바로에게 중복된 꿈이 확정적이고 속히 발생할 것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합니다(32). 따라서 요셉은 곧바로 ‘이제’라는 말과 더불어 대비책마련으로 넘어갑니다. 이것은 바로가 기대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그는 요셉에게서 단순히 신통력 있는 해몽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로 가득 찬 요셉은 대안까지 내놓습니다. 그는 바로에게 국가적 재앙에 대처할 명석한 사람을 찾아 임명하라고 추천합니다.

요셉의 계획은 삼중적 입니다. (1) 장관을 임명하는 것, (2) 지역 감독관을 임명하는 것, (3) 국가적 배급 제도를 제도화하는 것. 역설적이게도, 사실 요셉이 그 일에 적임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요셉이 은근히 자신을 추천하는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으며, 그의 진언에는 그런 암시가 묻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노예며 죄수 신분이라,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요셉은 진심으로 바로에게 적임자를 구해 이 일에 대비하라고 조언할 뿐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요셉의 대책을 다 들은 후 그 일을 책임질 최적임자로 즉석에서 요셉을 정하며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39). 명철함과 지혜는 지도자의 필수적인 자질이자(신 1:13; 왕상 3;12), 잠언이 강조하는 중요한 덕목입니다(잠 1:5; 10:13; 14:6,33 등).

바로가 요셉의 조언대로 풍년이 깃든 7년 동안 창고에 곡물을 대량으로 저장한다면, 애굽은 7년 대흉년이 와도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망하다’는 문자적으로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를 뜻합니다. 이것은 제의 본문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끊어짐’의 징벌인 사형과 동급의 형벌입니다(17:10-14), 창세기에서는 이 동사가 두 번 사용되는데 (9:11; 17:14), 특히 노아 홍수로 인한 세상의 멸망이 이 ‘끊어짐’으로 표현되었습니다(9:11). 마찬가지로 이 표현은 국운이 걸린 가뭄에 철저히 대비하지 않으면 애굽 제국이 멸망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역사는 힘을 가진 자가 만들고 농사는 자연현상에 따라 진행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미래를 장악하고 계십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분의 말씀 앞에 복종할 대상입니다. 요셉은파라오가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고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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