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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2-01)

 


형들의 첫 번째 애굽 방문

창세기 42장 1-17절


애굽에 기근이 올 때 약속의 땅 가나안에도 기근이 왔습니다. 애굽는 안전했지만 약속의 땅은 위험했습니다. 애굽에는 하나님의 꿈을 아는 자들이 있었고 가나안에는 형제를 팔아넘기고 아버지를 속이고 자식을 믿지 못하는 아비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기근은 무엇입니까?

 

요셉이 17세에 애굽으로 팔려갔다면 20년이 지난 것입니다. 13년이 지나 30세에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이어서 7년 동안의 풍년 기간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에 엄습한 기근은 팔레스타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엄청난 식량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온 땅에 알려졌으며, 그 소식은 야곱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입니다. 식량 고갈을 염려한 야곱은 애굽에서 식량을 사오기를 결심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요셉의 형제들(1-5)

자주 우리의 육체적 필요를 사용하셔서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십니다. 우리의 육체적 필요는 배고픔이나 질병, 사고, 경제적인 어려움, 실적, 친구 혹은 가족의 죽음, 그 밖의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필요가 발생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평가해보고 스스로를 돌이켜보면서 그런 위기가 닥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1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2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3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4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5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1-5)

가나안 땅에 기근이 엄습해 식량난에 봉착한 야곱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냅니다. 그러나 야곱은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았는데, 아들들은 그저 서로를 바라봅니다. 말하자면, 그의 아들들은 그저 관망만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20년 전에 동생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그곳에 가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다시 한 번 그들을 재촉하자 비로소 아들들은 애굽으로 떠납니다(3). 그러나 야곱은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두 아들 중 요셉을 잃은 상태에서 베냐민마저 잃을까 염려하여, 그를 보내지 않습니다(4). 야곱은 요셉에 대한 사랑까지 베냐민에게 쏟았을 것입니다.

형제 열 사람은 장거리 무역상 집단의 이동 방식으로 여행 채비를 꾸렸을 것입니다. 그것은 통상적으로 약간의 호위대로 구성된 카라반 무리로 볼 수 있습니다. 현금이나 귀중품을 소지한 당시의 약대 상인들은 무장이 잘된 카라반 무리를 이루며 여행했습니다.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이 민족의 이름인 ‘이스라엘의 아들들’로 표현됩니다(5).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동일한 히브리어가 다른 곳에서는 민족적 정체성을 담은 ‘이스라엘의 자손들’로 번역됩니다. 식량 구매를 위해 애굽으로 갔던 여러 민족의 목록에 갓 태동된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갑니다.

한편, 해밀턴은 현재의 문맥에서 두 이름이 구별되어 사용된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개인적 측면에서 주로 그의 고난과 감정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반면, ‘이스라엘’은 공적인 측면에서 주로 가장으로서 그의 직위와 위엄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이것은 갓 태동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 이동하는 시작입니다.

 

요셉과 형들의 조우(6-8)

과거를 회상하고 기억하도록 하심으로써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십니다. 과거의 잘못들은 고백되어야 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잘못들은 계속해서 문제들을 야기 시킬 수 있습니다. 사실 마음의 평안과 새로운 출발은 잘못을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6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7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8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6-8)

애굽의 국정과 경제를 책임진 총리 요셉은 7년간 저장해 둔 엄청난 식량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한 명이 한 국가를 살리고 나아가 전 세계를 살립니다. 형제들도 식량 구매 행렬에 합류하여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애굽 총리를 접견하고 그의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장면입니다. 요셉의 꿈이 현실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의 꿈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합니다. 형제들이 절하는 장면을 본 요셉은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본문은 만감이 교차했을 그의 감정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고 침묵합니다. 대신 요셉의 즉흥적인 연극이 시작됩니다. 요셉은 엄격한 말로 형제들을 다그칩니다. 단순히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애굽의 권력자로서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형들은 당연히 요셉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37세가 넘은 어른이며, 구레나룻을 면도한 얼굴에 애굽의 머리 스타일과 복장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기 시작(9-17)

냉정한 듯 보이지만 사사로운 복수의 감정보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뤄드리기 위해 냉철한 판단을 한 것입니다. 사랑이 필요하지만 분별없는 온정주의나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일처리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자기 가족을 이 기근으로부터 살리는 것에서부터 가정의 영적 기근을 해결하는 데까지 요셉이 할 일이 많았습니다.

9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10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11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12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13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14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15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16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17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9-17)

요셉은 형제들에게 엄하게 대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로 자신들의 죄와 허물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이켜 구원을 받고 그분을 따라야 했습니다.

(1) 형들을 정탐꾼으로 모는 요셉(9-13)

요셉은 자신의 꿈을 상기했습니다. 첫 아들의 이름을 과거를 잊었다는 의미인 므낫세로 지었지만, 상황은 그로 하여금 과거를 상기하게 만듭니다. 그가 집안의 왕으로 등극할 것을 암시한 두 개의 꿈 중 열한 명의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했던 첫 번째 꿈이 일단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아직 한 명이 빠진 열 명이며, 부모가 포함된 두 번째 꿈도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영민한 요셉은 현재의 상황에서 형들을 속여 자신의 목적을 이룰 계획을 즉시 구상해냈습니다. 그것은 그리운 부모님과 동생 베냐민의 생사를 확인하고 그들과 상봉하려는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이와 같이 신적 능력에 의한 순간적인 분별력과 판단력을 지닌 놀라운 지혜자입니다. 그는 대국을 이끌 총리의 자격을 지녔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애굽의 ‘틈’을 엿보도록 이웃 나라에서 보낸 밀정의 혐의를 뒤집어씌웁니다. ‘틈’의 히브리어 ‘에르봐’는 원래 은밀히 감추어진 신체(성기)를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애굽의 군사적 약점이나 요새들의 허술한 부분을 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에르봐’가 이런 뜻으로 사용되는 사례는 여기밖에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하나같이 신체의 노출과 성기에 대한 완곡어법으로 사용됩니다(다만 신 23:15에서는 진영의 ‘불결함’을 가리킨다). 해밀턴은 이에 대해 요셉이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 유희를 하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형제들이 자신을 벌거벗겨 구덩이에 내던진 것을 은근히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당황한 형제들은 자신들을 적극 변호하기 시작합니다(10). 그들은 스스로를 ‘당신의 종’으로 낮추어 부릅니다. 이것은 당시에 상전 앞에서 사용하는 관행적 표현이기도 했지만, 흥미롭게도 요셉의 꿈이 성취되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발언입니다. 요셉의 꿈대로 그들은 요셉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두 형제이기에 밀정이 아니라고 강력히 변증합니다. 형제가 한 패거리의 밀정이 되어 몰려다니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우리’에는 무의식적으로 그 현장에 함께 있는 요셉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단호히 그들이 간첩이라고 재차 못을 박습니다(12). 이후에도 두 차례, 도합 네 차례 그들을 간첩으로 몰아세웁니다(42:15,20). 이에 형제들은 가족에 대한 더 구체적인 정보를 제시합니다. 자신들은 열두 명의 형제인데, 막내아들은 현재 아버지와 함께 있고 다른 하나는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었다는 뜻보다는 사라졌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즉 형제들은 요셉의 부재를 실종으로 처리합니다.

형제들이 더 자세히 가족 관계를 설명한 이유는 자신들의 누명을 벗기 위함입니다. 특히 형제 중 하나가 없어졌다는 설명은 매우 특수한 가족 상황으로, 그들이 한 가족임을 변호하는 데 매우 중요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아버지 야곱의 생존과 동생 베냐민의 무고함이 확인되었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동생인 베냐민도 배다른 형제들에 의해 어떤 해를 입지 않았을지 염려되었을 것입니다.

(2) 결백에 대한 증명을 요구하는 요셉(14-17)

요셉은 오히려 가족 관계에 대한 그들의 설명이 그들이 밀정이라는 증거라고 받아친다(14). 말하자면, 바로 그들의 거짓된 가족 정보가 그들이 밀정이라는 증거입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막냇동생을 데리고 와서 결백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확인이 될 때까지 그들은 모두 옥에 수감되어야 하며, 형제들 중 한 명이 고향으로 돌아가 막냇동생을 데리고 와서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해야 합니다. 만일 막냇동생을 데려오지 못하면,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여’ 그들은 밀정으로 확정되고 사형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 또는 왕과 같은 권위자의 이름에 의한 약속과 보장은 이스라엘에서도 관례적이었습니다(삿 8:19; 룻 3:13; 삼상 14:39; 삼하 15:21).

고대에는 대체로 무죄 추정의 원칙보다 유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즉 어떤 의심스런 혐의가 있는 경우 당사자의 무고함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유죄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이 형제들에게 밀정의 혐의를 뒤집어씌워 검증하겠다고 말한 것은 동생 베냐민을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을 3일 동안 옥에 가두었다. 개역개정에 ‘옥’을 가리키는 ‘미쉬마르’가 누락되어 있는데, 이것은 요셉이 갇혔던 옥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운명의 반전입니다. 요셉을 구덩이에 가두었던 형들이 이제 옥에 갇힙니다. ‘삼 일’은 충분한 기간의 관례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3일 수감은 요셉의 억울했던 12년 수감과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요셉의 이런 강경 조치는 형제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간첩 누명이 쉽게 벗겨질 수 없음을 깨닫게 했을 것입니다.


진정한 기근은 양식의 유무 여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 그분을 향한 경외, 형제를 향한 사랑이 있는지 여부가 결정합니다. 이 하나님의 꿈을 이뤄드리려는 요셉이 있는 애굽은 안전했지만, 그 꿈을 살해하려고 하였던 가나안은 위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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