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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2-02)


자신들의 죄를 고백한 형제들

창세기 42장 18-38절


힘이 있으면 일사천리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집니다. 마치 장애물이 사라지고 어려움이 없어지면 해결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변하기 위해서는 고난은 있어야 하고 실패도 있어야 합니다. 형제들에게 고난을 주는 요셉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요셉이 그들을 투옥한 이유는 복수심에 불타서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간첩 협의가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3일 후에 그들을 옥에서 불러냅니다. 고향에서 아버지와 가족들이 굶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을 오랜 기간 옥에 가두어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가자기 너그러운 권력자의 모습으로 변해 있으며, 그의 전략도 수정됩니다.

 

형들의 죄과를 생각 만든 요셉(18-25)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사회적인 조건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선물이고 소명의 자리고 사명의 자리입니다. 직분에 따라 달리 대접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성도들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소중히 대해고 다른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자신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8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9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20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21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23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24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25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18-25)

요셉은 형제 중 한 사람은 볼모로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 막냇동생을 데려와야 그들이 정탐꾼이 아닌 것을 믿겠다고 합니다. 이는 많은 곡식을 들려 보내 고향에서 기근에 시달리는 가족을 구하고, 또 시므온이 결박당하는 모습에서 요셉을 결박하여 팔아넘긴 형들의 과오를 생각나게 하려고 요셉이 연출한 드라마입니다.

(1) 베냐민을 만나기 위한 요셉의 지략(18-20)

요셉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고 선언한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18). 3일 후 요셉은 형들을 옥에서 불러냅니다. 요셉은 왜 사흘 후에 태도를 바꾸고 계획을 변경했습니까? 가나안에 있는 야곱의 가족들이 식량난으로 하루가 급하기에 그들을 오래 가두어둘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한명만 볼모로 잡는 것으로 생각을 바꾼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19절에 암시되어 있듯, 아홉을 옥에 가두고 한 명만 가나안으로 보낸다면, 야곱의 가족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식량을 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먼저 요셉은 자신도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밝히며 그들의 공감을 얻어냅니다. 애굽 총리의 뜻밖의 진술은 형제들을 크게 놀라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진술은 다분히 의도적이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이방인인 나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니,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너희 이스라엘 형제들은 더 그러해야 한다.’ 새로운 제안으로 형제들 중 한 사람만 옥에 갇히는 상황은 과거 형제들 중 요셉만 구덩이에 넣었던 일을 연상시킵니다.

(2) 요셉에 대한 범죄를 후회하는 형제들(21-25)

이제 37장에서 발생한 20여 년 전 사건의 실상이 드러납니다. 37장에서는 구덩이에 갇혀 있다가 최종적으로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감정과 반응이 철저히 생략된 채 독자들의 상상에 내맡겨졌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웅성거리는 대화를 통해 복기된 당시 상황에 따르면, 요셉은 침묵하지 않았고 절규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21). 또한 요셉은 형제들을 향한 르우벤의 질책을 통해 맏형 르우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무척 애썼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형제들은 서로 간의 대화에서 자신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범죄를 고백하며 후회합니다. 그들은 요셉의 괴로움을 외면한 대가로 자신들에게 이토록 큰 괴로움이 임했다고 말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인과응보로 인한 것임을 받아들입니다. 르우벤은 더 구체적으로 자신들이 피를 흘려 핏값을 치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해하면, 그 피를 흘리게 한 대상이 추적되어 그에게서 그 피가 요구됩니다(창 9:6). 르우벤의 말에 비추어 볼 때, 형제들은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긴 뒤 르우벤에게는 그가 죽었다고 속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창 37:30).

그러나 만일 형제들이 노예로 판 사실을 그에게 알렸다면, 이 경우 르우벤은 인신매매를 피 흘림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신매매/유괴와 살인은 둘 다 하나님의 형상인 생명을 찬탈한 범죄로 간주되어 사형에 처합니다(출 21:16).

형들의 대화를 듣고 요셉은 눈물을 흘립니다. 무엇보다 형들이 ‘우리가 아우의 일로 범죄하였도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고 노예로 팔아넘겼음에도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므낫세의 출생과 더불어 과거를 잊기로 결심하면서 형들을 용서한 것으로 보입니다. 형제들은 볼모로 잡힐 사람을 결정하지 못했고, 요셉이 시므온을 지목합니다. 르우벤이 자신을 살리려고 애쓴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장남 르우벤이 아닌 차남 시므온을 볼모로 잡아두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종을 불러 형들의 그릇에 곡식을 채우게 합니다. 종을 시켜 거액의 돈뭉치(은전)를 형제들의 자루에 숨겨놓게 합니다. 그리고 여행길에서 먹을 양식을 별도로 제공합니다. 이 식량도 아마 자루에 담았을 것입니다. 숨긴 돈은 형제들이 지불했던 곡식 대금이 분명합니다. 형제들은 이미 결혼을 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가족을 위한 식량을 개별적으로 구매했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 돈을 몰래 각자에게 반환합니다.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베냐민을 어쩔 수 없이 데려오도록 의도적으로 형들을 도둑으로 모는 것입니까? 형들에 대한 친절입니까? 그들을 절도범으로 몰기 위해서는 총리 관저의 귀중품을 몰래 집어넣는 등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히 가능했기에 그가 식량구입 대금을 도로 숨겨놓은 것은 가족에 대한 애정표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요셉은 그들을 절도범으로 몰아 애굽으로 다시 오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발견된 이 돈뭉치로 인해 근심하며 애굽으로의 2차 여행을 서둘러 계획합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온 요셉의 형들(26-35)

범죄하면 마음에는 죄책이 생기고 영혼을 침체시키고 오랜 세월 고통을 줍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잊고 벗어나는 방법은 그 죄를 덮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과거의 자신들의 죄과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26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27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28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29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어 아뢰되 30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땅에 대한 정탐꾼으로 여기기로 31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32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33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34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35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 사람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26-35)

여행 도중에 한 형제가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열다가 뭉칫돈을 발견합니다. 식량 대금으로 지불한 돈이 왜 곡물 자루에 담겨 있겠습니까? 돈뭉치를 본 그들은 넋이 나갔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내리신 벌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돌려주기 위해 애굽으로 돌아가진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가나안에서 굶주리며 식량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나안에 도착한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애굽에서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요셉과의 대화 내용 중 아버지가 걱정할 만한 내용은 의도적으로 누락시킵니다. 대신 그들은 혐의가 벗겨지면 마음껏 애굽을 오가며 자유무역을 할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다분히 야곱을 안심시키기 위해 꾸민 말입니다.

비평학자들은, 27-28절에서 형제들이 자루에 있는 돈뭉치를 발견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35절이 모순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43:21에 따르면, 그들은 집으로 가는 도중에 각자의 자루에서 그 돈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35절에서 야곱과 더불어 형제들이 함께 ‘두려워했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그들이 남은 자루에서 뒤늦게 돈뭉치를 발견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형제들은 뒤늦게 각자의 자루에서 돈뭉치를 발견하고 아버지에게 가져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뒤늦게 돈뭉치를 발견한 이유는 그 돈뭉치가 쉽게 발견되지 않도록 자루 깊숙이 들어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 각자 여관에서 그 돈을 발견했다는 43:21의 고백은 이 모든 과정을 요약한 진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야곱은 지금 아들들이 시므온을 노예로 팔아넘긴 뒤 몸값을 받아온 것으로 의심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기 앞에서 시치미를 떼고 두려워하는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지나친 억측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발견된 돈뭉치들은 한 사람의 몸값으로는 지나치게 큰돈입니다. 앞서 살핀 대로 은전 20이라는 요셉의 몸값이 당시 시세로는 적정했습니다. 웃돈을 받았다 해도 열 개의 자루에서 발견된 막대한 돈뭉치는 결코 노예 대금으로 생각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월키는 야곱이 아들들을 절도범으로 의심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이 도둑질한 돈을 아버지에게 버젓이 내놓아 아버지를 걱정하게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베냐민을 잃을까 걱정하는 야곱(36-38)

하나님의 공동체를 살리는 것은 바로 이 희생입니다. 자신보다 타인을 우선하다 보면 나의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전체 피조물에게 유익이 되게 하는 일에 그들의 시간, 재능, 에너지를 바침으로써 산 제물이 됩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하나님만이 줄 수 있고, 하나님만이 지켜 주실 수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했지만, 야곱은 아직까지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36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37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38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36-38)

‘너희가 내 자식들을 잃게 한다’는 야곱의 말에는 뜨끔한 진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물론 야곱은 그들이 요셉을 보호해주지 못해 짐승에게 잡아먹혔음을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야곱은 시므온마저 절도범으로 몰려 잃게 된 것을 그들이 부주의했기 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립니다. 야곱은 베냐민을 보낼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시므온을 죽은 목숨으로 간주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형제들 입장에서는 시간이 촉박합니다. 당장 떠나지 않으면 시므온의 목숨이 보장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두 아들의 생명을 담보하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습니다. 이것은 실행 가능성이 있는 제안이 아닙니다. 누가 형제를 위해 자신의 두 아들을 내놓겠습니까? 따라서 이것은 르우벤과 형제들이 아버지에게 보여준 결연한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베냐민만큼은 죽을 때까지 보호하겠다는 결연한 다짐으로 아들들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야곱은 여전히 베냐민을 ‘내 아들’로 요셉을 ‘그의 형’으로 지칭함으로써, 라헬의 아들들을 다른 아내의 아들들과 구별합니다.


요셉의 기지와 절제로 형제들은 요셉의 일을 기억하였고, 후회하였습니다. 르우벤은 희생을 자처하여 온 가족을 구해내려고 나섭니다. 야곱만 요지부동입니다. 팬데믹이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이토록 우리가 꽁꽁 묶이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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