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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1-01)


불안한 꿈을 꾼 바로 왕

창세기 41장 1-16절


제국은 종교입니다. 낮의 종교입니다. 오늘의 종교입니다. 그들이 가치를 정하고 분류합니다. 그들이 생사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충성과 숭배의 대상이 됩니다.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도 됩니다. 하지만 밤에 장래를 보여준 하나님의 꿈이 바로에게 찾아옵니다. 그 역할은 무엇입니까?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설명합니다. 바로는 요셉과의 일반적인 격식을 차린 상견례 과정을 생략한 듯합니다. 그는 히브리인으로 알려진 요셉의 과거, 가족, 사연, 애굽에서의 직업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이는 내러티브의 흐름에서 곁가지일 뿐이라 모두 생략되었겠지만, 이야기의 빠른 흐름은 바로의 초조한 심리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실제로 바로는 형식적인 접견 인사만 받고 즉시 꿈 이야기로 넘어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한 꿈을 꾼 바로(1-7)

하나님의 권능은 사람들을 강건케 하기도 하며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행하실 권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은 결코 불공평하거나 불의하게 행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세상을 위한 최선의 것을 원하십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1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2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 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3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나일 강 가에 서 있더니 4그 흉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5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6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7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1-7)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강건케 하여서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견디도록 하였습니다. 주정관이 석방된 지 2년이나 감옥에 있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은 요셉에 대해 바로에게 탄원하는 약속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40:20에서 그가 바로의 생일에 사면되었으므로, 정확히 2년 후라면, 다시 바로의 생일이 되었을 때입니다.

바로는 이때 이상한 꿈을 꿉니다. 바로는 연속적인 두 가지 꿈을 꿉니다. 먼저 살진 일곱 마리 암소가 나일강에서 올라와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꿈에 나타난 장면들, 곧 소 떼, 강변, 갈밭은 풍요롭고 평화로운 나일강 유역의 풍경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나일강은 애굽에 생명력을 제공하는 젖줄로 신성시되었습니다. 애굽의 강한 힘은 광활한 나일 삼각주와 나일 강변의 농토로 인한 인구 밀집이 가능했던 나일강에서 나왔습니다. 소 떼가 한가롭게 나일 강변에서 풀을 뜯다가 휴식을 위해 물에 들어가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흉측하고 마른 일곱 마리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살진 소들을 잡아먹었습니다(3-4). 악몽을 꾼 바로는 자다가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꿈에서 곡식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왔습니다. 곡식 한 줄기에서 무려 일곱 개의 이삭이 나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입니다. 이삭들이 풍성하다는 것은 각 이삭에 숱한 낱알이 달려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풍에 말라 낟알이 붙어있지 않은 일곱 이삭이 나와 풍성한 이삭들을 삼켰습니다(6-7). 애굽 나일 강변의 동풍은 기온이 높은 사하라 사막이 펼쳐진 남쪽에서 불어오는 열풍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봄과 가을에 부는 계절풍으로, 밤새 불면서 식물을 마르게 했습니다(참조, 겔 19:12; 욘 4:8). 그러나 동풍은 성경에서 빈번히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바람으로 나타납니다(출 10:13; 14:21; 시 48:7; 78:26; 호 13:15; 욘 4:8). 따라서 동풍은 바로의 꿈이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이라는 것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불길한 꿈을 꾼 바로는 즉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해몽가로 추천되는 요셉(8-13)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무능하게 만드시는 권능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그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있어서 실패하게 만드실 권능이 있습니다. 바로가 꿈들을 꾸고 깊은 불안에 빠졌다는 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꿈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모든 술객들과 술사들을 궁정으로 불렀습니다.

8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9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10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11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12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13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8-13)

고대 근동 제국의 왕들은 꿈을 신의 계시 수단으로 간주하곤 했습니다. 따라서 바로는 심상치 않은 꿈을 꾸고 그 뜻을 알지 못해 번민에 휩싸였습니다. 바로는 혼란스런 ‘마음’으로 번민하나 요셉은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되어 차분합니다.

‘번민하다’의 동사 ‘파암’은 5회밖에 사용되지 않은 드문 단어입니다(삿 13:25; 시 77:5; 단 2:1,3). 이 동사는 견디기 어려운 격정적인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상한 꿈을 꾼 느부갓네살 왕의 심리도 이 동사로 표현됩니다(단 2:1,3). 앞서 각자 기묘한 꿈을 꾼 두 관원장의 번민에 대해서는 동사 ‘자아프’가 사용된 바 있습니다(40:6). ‘파암’은 그보다 훨씬 격한 감정에 대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바로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바로는 애굽의 용하다는 점술가와 현인들(지혜자들)을 불러 꿈을 해몽하려 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애굽의 점술가들은 마법을 부렸을 뿐 아니라 꿈 해몽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어원의 의미에 비추어볼 때 제사장직을 겸했을 수도 있습니다.

‘지혜자’를 뜻하는 현인은 왕의 조언자로, 학문에 조예가 깊고 판단력이 좋은 학자이자역술인으로 보이며, 꿈 해몽에도 능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이때 주정관이 놀라운 해몽가 요셉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바로에게 요셉과 관련된 자신의 잘못을 실토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복수인 ‘내 죄들’로 표현하는데, 그가 바로와 요셉 둘 다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일 수 있지만. 단순히 자신의 잘못이 크다는 것을 표현하는 어법인 것으로 보입니다. 주정관의 죄는 도덕적인 의무를 위반한 죄라기보다 직무유기를 뜻할 것입니다. 그는 약속대로 석방 직후 자초지종을 고한 뒤 요셉의 누명을 벗겨줬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자신의 신비한 옥중 경험과 요셉의 정체를 감췄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는 대사면을 감행한 바로가 요셉의 꿈 해몽을 듣는다면 어떤 감정적 변화를 보일지 알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로가 꿈으로 인해 번민하자 추정관의 기억 속에 요셉이 되살아났고, 주정관은 그제야 이 사실을 바로 앞에서 묵묵히 고백합니다. 더불어 옥중에서의 기이한 경험을 차분히 설명합니다.

주정관은 요셉을 ‘히브리인’으로 표현하는데(12), 이러한 표현은 자신이 왜 바로에게 옥중 경험을 말하지 않았는지 변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요셉을 폄하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특징적인 신분확인을 위한 단순한 소개일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히브리 사람’이란 말은 단순히 인종적 구분을 위해 반복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꿈 해몽을 위해 석방된 요셉(14-16)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절할 때에 자신의 종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구원하신 것은 이제 그가 다른 사람들을 돕고 섬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비다. 그것들은 왜 하나님께서 인생의 시련들과 어렵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시는지를 말해 줍니다.

14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15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16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4-16)

드디어 요셉이 풀려납니다. 연장된 2년의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억울한 시간을 다시 견뎌냈습니다. 요셉을 소개받은 바로는 즉시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바로는 안달이 났습니다.

스타카토가 찍히듯 짤막하게 나열된 동사들은 바로의 다급함을 잘 나타냅니다. 이에 응하여 감옥에서 왕궁으로 나오는 요셉의 모습은 그의 급격한 출세와 극적인 인생의 반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는 ‘옥’으로부터 요셉을 불러들입니다. ‘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보르’의 기본 의미는 앞서 요셉이 팔려간 이야기에서 살핀 대로 ‘구덩이’입니다. 이것은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처넣었던 바로 그 구덩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결국 요셉은 두 차례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첫 번째 구덩이에서 섭리적 사건으로 빠져나왔을 때는 한 권력자의 집 경영을 책임지는 자리로 승진했고, 이제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두 번째 구덩이에서 다시 극적으로 빠져나와 한 나라의 경영을 책임지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릅니다.

요셉은 바로를 알현하기 위해 면도를 하고 옷을 갈아입습니다. 면도를 한 것은 구레나룻 수염을 기르는 이스라엘의 관습을 벗어납니다. 아마도 바로를 알현하기 위해 애굽의 두발 형식을 따라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갈아입은 옷 ‘시믈라’를 잠잘 때 담요로도 쓸 수 있는 겉옷을 의미합니다(창 9:23; 37:24; 출 22:27). 여기서 요셉이 늘 이스라엘 복장인 겉옷을 입고 생활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보디발의 아내에게 붙들려 벗겨진 옷이 하체만 두른 옷이었기에 그가 나체로 그 유혹녀를 피해 도망간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은 전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겉옷이 지저분해서 바꿔 입었는지 겉옷을 벗고 다른 복장을 하고 갔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웬함은 요셉이 급한 호출을 받은 상황이므로 겉옷만 재빨리 갈아입고 바로에게 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면도까지 하고 간 것을 감안하면, 그가 겉옷을 벗은 뒤 애굽 복장을 갖추고 바로를 알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는 요셉을 접견하자마자 꿈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는 기이한 꿈을 풀어내는 요셉의 신통력을 익히 들었다고 말하면서 요셉에 대한 기대감을 표출한 후에, 자신도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해독해낸 사람이 없었음을 실토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해몽 능력이 자신의 지혜에서 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요셉은 암시적으로 이방의 왕 바로의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심을 말하고, 바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애굽 통치를 받아들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의 꿈 풀이를 통해 바로의 마음에 평정심을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며 바로를 안심시킵니다.


 바로에게 주신 꿈은 바로와 그의 제국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선언입니다. 참 지혜는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것이고, 참 생명의 길은 그분이 보여주신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시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시간 너머를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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