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욥기(완료)

욥기(12) - 욥기 10장 1-22절 -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욥

백의종군 2023. 11. 13.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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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0-01)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욥

욥기 10장 1-22절


 

타락한 피조물인 인간이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욥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바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믿음을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 9장에서 욥이 반성적 지혜의 일반론을 진술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시는데 그 원인을 알 수 없고, 하나님과 잘잘못을 가릴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욥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이 까닭 없는 것처럼, 까닭 없이 주시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탄원(1): 제게 알게 하소서(1-7)

하나님께 솔직하게 감정과 마음을 풀어서 말할 때, 우리는 감정이 해소되는 것을 느낍니다. 또 그럴 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설 수 있습니다(민 11:15; 시 142편). 너무 힘들 때는 그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감정과 마음을 토해 내시길 바랍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아가 모든 것을 내려놓기를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1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2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3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4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5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6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7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1-7)

 

하나님을 향한 욥의 항변을 들을 것입니다. 욥은 ‘살아있는 것이 너무 끔찍하다’고 토로합니다(1). 욥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피조물로서는 창조주께서 하시는 일을 막거나 되돌릴 힘이 없고, 욥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거나 그의 탄원을 받아들이신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방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그래도 욥이 할 수있는 것은 결국 기도뿐입니다. 욥으로 하여금 기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고통입니다.

1절을 직역하면 “내 불평을 내 자신에게 던지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내 영혼의 원통함 안에서 내가 말하게 내버려두십시오.”입니다. 풀어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 삶이 너무 끔찍해서 말이 튀어나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역개정은 욥기에 쓰인 ‘시아흐’를 불평이나 원망 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번역하는데, 이 어근은 단순히 ‘말하다’라는 중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7:11). “불평”이라는 번역어의 선택은 ‘하나님을 공격하고 도전하는 욥’이라는 신학적 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절 이하에 나오는 욥의 간절한 기도를 “불평”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욥이 간구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저를 나쁘게 여기지 말아주십시오(2a); (2) 제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2b). 그는 자신을 정죄하지 말고 자신을 법정 심판에 소환하여 이토록 가혹한 심판 처분에 내던지시는 이유를 제발 알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벌을 주신다는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가 맞는다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 하나님께서 악인으로 판단하셨는지 그 이유를 말해달라는 말입니다. 이 간구 속에는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판단을 알 수 없으니, 그 판단의 이유를 알려주실 수 있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뿐이라는 신앙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하나님의 판단과 인간의 판단은 같을 수 없다는 진술입니다. 사람은 (욥의 친구들처럼) 잘못 볼 수 있으나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습니다(4). 한 인간의 생명은 아주 짧아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지혜가 부족할 수밖에 없지만 (욥의 친구들처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5). 같은 인간인 친구들은 욥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지혜는 하나님처럼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을 죄 있다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욥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방이 막힌 상태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무죄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는데도(7a) 욥에게 고난을 주시기 때문에 욥으로서는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손아귀에서 그 어떤 것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다른 것에 의지해 이 고난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 역시 없습니다(7b).

 

하나님을 향한 탄원(2): 저를 창조하신 것을 기억해주소서(8-17)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통치를 의지하며 그 시간을 지나는 것입니다. 성도는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는 어리석은 자들의 헛된 노력을 배제해야 합니다. 그 욥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영적 무능과 타락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8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9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10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1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12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13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4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5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 16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17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8-17)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욥이 하나님께 외치는 부르짖음은 절대 주권자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욥 자신마저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시도하는 것인데 탄원시에서 적지 않게 쓰이는 방식입니다. 이 장면을 아브라함이나 요나와 비교해보면 흥미롭습니다. 아브라함은 규범적 지혜의 원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설득합니다.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망시키는 것은 “부당”한 일이며, “정의”에 어긋나는 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에게는 걸맞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설득의 로고스로 삼습니다(창 18:25).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속성에 호소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선함’(goodness)은 의인을 살리고 악인을 멸망시키는 데 있습니다(현대 신학이 하나님의 선함을 자비와 용서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규범적 지혜는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르는 것을 선함으로 이해한다). 아브라함이 설득을 위해 사용하는 어휘는 전형적인 규범적 지혜의 언어입니다: 의인, 악인, 심판, 정의․ 반면에 요나는 하나님이께서 ‘정의’로운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에 오히려 죽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화를 냅니다(욘4:1-4).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욘 4:2)이라는 표현은 요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선대하시고 악인을 징벌하시는 의로운 분(즉, ‘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요나는 규범적 지혜가 정의하는 하나님의 틀에서 하나님 스스로가 벗어나 있다는 사실에 분노합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에 포함된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욘 4:10)라는 표현은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벗어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은혜’와 ‘까닭 없이’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선악 개념을 초월하신 ‘은혜의 하나님’을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했다면(요나의 속마음은 어떻든 간에), 욥은 동일한 하나님을 ‘까닭 없는 고난’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까닭 없는 은혜와 까닭 없는 고난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욥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욥 1:21; 2:10) ‘창조주’라는 하나님의 속성에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진흙에 우유를 섞듯이 욥을 창조하시고(9-10),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고 지금까지 은혜로 보살피고 지키신 것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합니다(12). 이 문장 속에는 아브라함이 사용한 '의인, 악인, 심판, 정의' 같은 어휘들이 등장하지 않음을 주목해야 한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소유다. 창조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니 피조물을 주권적으로 만드신 분이 그 피조물을 주권적으로 죽게도 할 수 있다(8-9절). 하나님이 인과응보의 틀 안에서 움직이시는 분이라면 오히려 신앙이 쉬울 수 있다. 죄를 지으면 죄인으로서 받는 징벌을 받으면 된다. 악을 행하면 화를 당하면 됩니다(14-1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예상을 초월하시는 “놀라움”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16). 그렇기에 인간이 아무리 의롭더라도 그분 앞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그분 앞에 죄인으로서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15). 참고로, 개역개정이 “부끄러움”으로 번역한 단어 ‘깔론’은 ‘가벼움, 낮음, 천함’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탄원(3): 제발 저를 내버려 두소서(18-22)

세상 살기가 너무나 힘들게 느껴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숨 한번 크게 쉬기 어려운 압박과 고통의 시간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시간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려 줍니다. 몰아치는 상황과 고통을 그저 견뎌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잠시의 평안을 우리는 갈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두고 계십니다.

 

18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19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20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21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22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18-22)

 

욥은 다시 3장의 탄식으로 돌아갑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18), 혹은 태어나자마자 곧 죽었더라면(19) 이러한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욥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20). 이제 자신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21). 그곳은 빛이 어둠처럼 뜨는 곳, 빛과 어둠 사이에 “아무 구별이 없는” 곳(22)입니다. 3장에서 죽음의 공간을 의인과 악인의 구별이 없는 곳으로 길게 묘사한 것(욥 3:14-19)을 여기서는 간략하게 서술합니다. 욥은 죽음의 세계를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벗어난 공간으로 묘사합니다. 다시 한 번 상기하자면, 2:6을 읽은 독자는 욥의 재앙이 욥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욥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어떤 특정한 원리나 그분의 어떤 속성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욥이 할 수 있는 탄원은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잠시라도 평안하게 살 수 있게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둬 달라는 것입니다(20). 이것밖에는 하나님께 탄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개역개정이 “평안하게 하시되”로 번역한 ‘아블리가’는 ‘밝아지다’, ‘빛나다’, ‘기분이 좋아지다’라는 의미입니다(9:27; 암 5:9; 시 39:13).9:27에서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로 번역한 단어와 동일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여생을 잠시나마 밝고 기분 좋게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그야말로 소박한 소망입니다.


욥은 최악의 상황에 빠졌음에도,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고 결국은 회복되고 갑절의 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부터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욥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2:9) 선택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능력입니다. 우리는 평안할 때나 괴로울 때나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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