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79) - 창세기 46장 28절-47장 12절 - 애굽 고센 땅에 정착한 야곱 가족
창세기(47-01)
애굽 고센 땅에 정착한 야곱 가족
창세기 46장 28절-47장 12절
지위와 부와 감각적 쾌락을 좇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을 거슬러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좇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질적 욕망을 부추기는 문화가 거세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유다가 다시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야곱은 유다를 먼저 요셉에게 보내 자신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준비하게 만듭니다. 앞서 말한 대로 고센은 바로의 궁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유다를 통해 아버지가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은 요셉이 수레를 타고 고센으로 올라갑니다. 드디어 그리운 아버지와 상봉하며 껴안은 채 눈물을 흘립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가 없지만 ‘족하도다’는 야곱의 말에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애굽에 도착한 야곱 일행(28-34)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나 믿는 자를 사용하셔서 우리가 당하는 시련이나 문제에 대해 우리를 돕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어두움 가운데 처하도록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시련을 대처해야 할지 알게 될 것입니다.
28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29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30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31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32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33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34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28-34)
이스라엘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므로 그들은 다시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키고 요셉과 다시 연한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요셉과 헤어진 지 22년이나 지난 후였습니다. 야곱의 편애로 인해 가족이 나뉘어졌고 아들들의 무자비하고 천박한 행위로 여가 자기 곤란을 당했습니다.
(1) 아버지와 상봉한 요셉(28-30)
야곱은 유다를 먼저 애굽의 요셉에게 보내 자신들의 원활한 도착과 정착을 준비하게 만듭니다. 여기서도 형제들 사이에서 유다의 위상과 가족들을 이끄는 그의 리더십이 잘 나타납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고센 땅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요셉이 수레를 타고 아버지를 만나러 그곳으로 올라갑니다.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지만, 애굽 최고 권력자의 자격으로 아버지 앞에 어떤 신적인 존재처럼 많은 신하를 대동하여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수레를 타고 ‘그에게 나타납니다’.
아버지를 만난 요셉은 그의 목을 껴안고 웁니다.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서로 껴안고 울었을 것입니다. 비탄의 눈물이 감격의 눈물로 바뀌었습니다. 두 사람의 상봉 장면에서 통곡의 눈물 외에 다른 대화는 불필요합니다. 그들은 ‘얼마 동안’, 즉 계속 웁니다. 눈물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야곱의 짤막한 감회인 ‘이제 내가 죽어도 될 것 같다’(아무타)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후 17년을 더 살다 죽습니다(48:28). 그는 요셉을 잃기 전 17년 동안 그를 보살폈는데, 이제 남은 17년 동안 요셉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2) 목축에 적합한 고센 땅(31-34)
요셉은 역시 지혜롭고 신중합니다. 그는 가족이 고센에서 안전하게 정착하기 위해서는 바로의 최종적 재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요셉은 바로를 알현할 가족들로 하여금 적절한 대화를 준비하게끔 합니다.
고센 땅 정착은 요셉의 계획이었지 아직 바로의 최종적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기에 바로를 설득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지혜로운 전략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이 애굽인들이 혐오하는 목축업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합니다(34). 이것은 애굽인과 야곱의 가족을 구별 짓게 하여 자연스럽게 그들이 격리된 장소에서 살게끔 만듭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넓은 목초지인 고센 땅은 그들을 위한 가장 적절한 장소입니다.
야곱 가족의 고센 땅 정착을 허락한 바로(47:1-6)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우리의 필요가 채워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항상 채워 주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닌 모든 필요를 채울 공급처가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향해 그분의 뜻을 좇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1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2그의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3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4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 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5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6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1-6)
전략적 준비를 완비한 뒤, 요셉은 바로에게 돌아가 아버지 가족의 도착 소식을 알립니다. 이때 그는 형제들 중에서 다섯 명을 선발하여 바로를 알현하게 만듭니다(2). 가족 전부가 바로를 만날 필요가 없었으며 대표 몇 명만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형들 중 다섯 명’은 문자적으로 그의 형제들의 맨 끝에서부터(미크체) 다섯 명입니다. 이 히브리어 문구 ‘미크체’(‘맨 끝부터’)는 ‘전체’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맏형부터 막내까지 모든 형제들 중에서 다섯 명을 뽑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또한 누구를 뽑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 하필 다섯 명인지에 대해 랍비들이 많은 토론을 하고 심지어 선발된 형제들의 명단까지 추론해서 뽑아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마 12명 중에 요셉을 포함해 6명, 즉 절반이 형제들을 대표하고 있는 듯합니다.
바로는 요셉의 형들에게 예상대로 그들의 직업을 묻습니다. 그들은 차분히 준비된 답변을 내놓으며 양떼를 칠 장소인 고센에서의 정착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합니다(3-4). 바로의 지시와 허락을 받아 애굽으로 이주해온 그들은 ‘이곳에 거류하고자’ 왔다고 답합니다. 실제로 야곱 가족은 고센에 영구적으로 거주하기 위해 애굽에 온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객으로 살기 위해 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400년이 넘는 장기간의 거류가 될 것입니다.
바로는 그들이 ‘거주하도록’ 고센 땅을 흔쾌히 허락합니다. 아마도 여기서 바로는 그들의 영구적 거주를 위해(야샤브) 그 땅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국빈급 손님에 대한 당연한 예우였습니다. 이 바로에 대한 축복은 아브라함과 또한 야곱 자신에게 것은 일차로 그들의 직업을 배려한 호의적 조치였습니다. 바로는 덧붙여 그들 중 ‘능력 있는 자들’을 자신의 왕실 가축들을 돌보는 직책에 임명합니다.
애굽 문헌에는 왕실의 가축들을 전문 목축업자들에게 맡긴 여러 사례들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라암세스 3세는 3,264명의 양치기를 고용했는데 대부분 외국인들이며 그들은 왕실의 공식적인 관리로 임명되어 일반 외국인과 달리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고센은 야곱 가족에게 ‘땅 중의 좋은 지역’, 즉 목축하기 좋은 땅입니다. 또한 바로 입장에서는 그들이 애굽인들과 격리되는 것이 서로를 위한 최상의 결정입니다. 더구나 도시 밖에서 사는 유목민 가족이 애굽의 국가 운영에 영향을 줄 여지는 없습니다. 한편, 격리된 고센 땅은 이스라엘에게도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문화적 종교적 영향을 피할 수 없었지만(예. 금송아지 숭배는 이집트의 영향으로 이해된다) 애굽인들이 혐오하는 격리된 목축의 땅에서 자신들의 전통과 신앙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를 축복함(47:7-12)
성도들은 세상에서는 비천한 나그네로 살지만,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겸손하되 자긍심만은 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7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11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12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7-12)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별도로 바로와 알현하게 만듭니다. 바로에게 이것은 연로한 가장에 대한 당연한 예우였을 것입니다. 바로를 만난 야곱은 그를 축복합니다. 그는 첫 만남에서, 그리고 떠날 때 두 차례 복을 빕니다. 이에 대해 많은 주석가와 최근 역본들은 이것을 단순히 관례적인 복을 비는 인사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아들들의 알현 장면에서는 이러한 축복이 전혀 언급되지 않기에 이것은 인사를 겸비한 특별한 축복 기도로 이해됩니다. 요셉은 바로의 아버지(조언자)이지만, 야곱은 그 요셉의 아버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놀이에는 야곱이 이미 바로에 비해 월등히 위대한 아버지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이때 야곱은 아들들과 달리 자신을 ‘주의 종’으로 칭하지 않고 ‘나는’이라는 주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권위를 낮추지 않습니다.
바로에 대한 축복은 아브라함과 또한 야곱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약속의 성취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입니다(12:3; 28:14). 실제로 애굽과 온 땅이 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 요셉을 통해 기근으로부터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지금 야곱이 바로의 복을 빌고 있으며 그로 인해 그는 더 큰 복을 받을 것입니다(47:13-26).
바로는 야곱의 나이를 묻습니다. 이것은 아마 깊은 연륜이 묻어나온 그의 축복 기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원문을 반영한 야곱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나의 삶의 세월은 적으며 험악했나이다. 내 나이는 나그네의 세월을 살았던 저의 조상들의 나이에 이르지 못하나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를 향유한 반면 야곱은 이제 130세에 불과합니다. 야곱의 세월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고 험난했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지시대로 고센 땅을 거주지로 제공합니다. 고센에는 ‘라암세스’가 소재해 있었습니다. 이곳은 나일강 북동쪽 삼각주에 위치한 후대의 도시들인 칸티르(Qantir)나 타니스(Tanis)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이 두 고대 도시의 위치는 대략 파악되어 있지만, 이 둘 중 어느 곳이 라암세스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시대가 언제였든지 그 시기에는 고센의 어느 곳도 분명하게 라암세스로 확인된 곳은 없으며 400년 이상의 기간이 지난 뒤인 출애굽 당시에 라암세스라는 이름의 성읍이 등장합니다(출 1:11). 학자들은 라암세스라는 명칭은 바로 라암세스 2세가 그 성을 수도로 건축했던 주전 1200년대에서야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면서 출애굽 연대를 이 시기로 잡습니다.
그러나 이른 1400년대(1446년) 출애굽을 주장하는 일부 보수적 학자들은 라암세스라는 명칭은 그곳에서 대대적 건축이 되기 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나 확실한 근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보수적 견해의 하나로 어떤 사람은 후대의 라암세스라는 명칭은 출애굽기가 최종 정경화되던 시기에 후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곳의 더 오랜 시기의 도시 이름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해석합니다.
나쁜 자본주의는 자존감을 잃게 합니다. 주의 백성조차 세상의 판단 앞에 위축되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좇아 산다면, 건강한 자긍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화려함 앞에서 초라함을 느낍니까? 소명을 따라 거룩히 살면서 축복을 나눠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