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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75) - 창세기 43장 1-15절 - 요셉이 그의 형제들을 시험함

백의종군 2023. 10. 1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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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3-01)

 


요셉이 그의 형제들을 시험함

창세기 43장 1-15절


야곱은 스스로 움켜쥐려다가 많은 것을 놓쳐버린 인생을 살았습니다. ‘비울 때 채우시고, 내맡길 때 더 큰 것을 얻는다’는 하나님 나라 비밀을 알면서도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저하다 결국 상황에 몰려 겨우 믿음의 걸음을 내듣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 우리를 비춰보시길 바랍니다.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다가 나섭니다. 유다 위로 맏형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가 있습니다. 둘째 시므온은 애굽에 잡혀 있고, 르우벤은 아버지에게 시므온을 데려오겠다고 약속하면서 자신의 두 아들을 담보로 내놓은 바 있습니다(42:36-38). 그러나 이 결연한 제안은 아버지의 공감을 얻지 못했기에 르우벤이 다시 나사지 못했을 것입니다. 레위 역시 디나가 겁탈을 당했을 때 세겜 학살을 주동하여 아버지의 눈 밖에 나 있었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가야 하는 요셉의 형들(1-5)

대다수의 사람들은 문제를 직시하는 데 대해 어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문제들이 우리에게 닥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시하거나 아니면 미루어 버립니다. 저절로 그 문제들이 해결되거나 누군가가 그 문제를 해결해 주기만을 바라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긴장과 무질서, 그리고 더 큰 문제들을 야기시킬 뿐입니다.

1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2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3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4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1-5)

한 해가 지났지만 가나안 땅의 가뭄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야곱의 아들이 애굽에서 사온 식량도 축났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이집트로 다시 가서 식량을 조금 더 사오라고 지시합니다. 형제들은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붙들려 있는 시므온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 절도범으로 몰린 처지에서 두려움이 앞섰을 것입니다. 아버지도 목숨처럼 아끼는 베냐민을 그들과 함께 보내야 하는 문제를 피할 수 없었기에 식량이 축날 때까지 애굽으로 보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가족들은 시므온을 포기하진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그의 생환을 최우선 과제로 여길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가 형제들을 대표해서 야곱을 설득합니다.

유다가 여기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일이었습니다. 이때가 유다의 운명이 바뀐 결정적 시점이며, 이후 유다는 야곱 가문을 주도하기 시작합니다(44:14-34; 46:28; 49:8-11). 르우벤 및 레위와 마찬가지로 유다 또한 아버지의 총애를 받기는 어려운 전력을 지닌 아들입니다. 부모의 뜻을 거슬러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으며, 며느리 다말의 계략에 휘말려 부끄럽게 두 아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39장). 그럼에도 유다가 현재 위기의 해결사를 자처하는데, 그는 최적의 적임자는 아니지만 최상의 해결사적 면모를 보입니다.

유다는 반드시 막내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고 아버지를 설득합니다(3). 애굽 총리가 막냇동생을 데려오지 않으면 접견이 불가하다며(‘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으름장을 놨다고 말합니다. 유다의 말은 42장의 요셉과의 대화 내용과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42장의 대화 내용 중에는 요셉의 말에 일부 공백이 있다는 것이 44장에서 드러납니다. 요셉은 실제로 그들에게 ‘너희에게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44:19). 따라서 원칙적으로 유다는 사실 관계를 왜곡해서 아버지에게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아버지가 염려하지 않도록 일부 진실을 감추고 있는 듯합니다. 사실 요셉은 그들에게 막내를 데리고 오지 않으면 불허했다고 말하면서(44:23에서 이것이 사실로 드러난다) 그들의 혐의가 벗겨져 ‘너희가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엄히 경고한 사실은 감춥니다(42:20). 앞서 형제들이 돌아온 직후 야곱에게 상황 보고를 할 때 그들도 아버지를 안심시키려고 일부 말을 꾸민 적이 있습니다. 베냐민을 데려가야 그들의 신분이 확증되어 자유무역이 허락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아들들의 입장에서 베냐민을 반드시 데려가야 하는 실제적인 이유는 그것이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필사적으로 설득합니다. 유다의 논리와 명분은 뚜렷했습니다. 만일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총리를 접견할 수 없으니 전혀 식량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식량이 동난 온 가족의 죽음을 의미한다. 야곱은 유다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냐민을 위해 희생을 각오하는 유다(6-10)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보다 더 빨리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얼마나 부인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기까지 부인합니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6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7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8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9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10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6-10)

야곱은 이집트 총리에게 막내 베냐민의 존재를 알린 아들들을 원망합니다(6). 그들이 경솔하게 막내아들을 언급해서 자신이 이런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의 이름이 다시 이스라엘로 지칭됩니다. 해밀턴의 설명대로, 야곱은 개인적 측면이 조명될 때 사용되는 반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공적인 측면이 강조됩니다. 가장의 직위와 위엄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또 미래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서 야곱을 드러내고자 할 때 ‘이스라엘’이 사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의 질책을 들은 뒤 유다가 아닌 아들들 모두가 아버지에게 항변합니다. 자신들은 애굽 총리가 그런 요구를 할 줄은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7). 애굽 총리가 자신들의 가족관계를 꼬치꼬치 캐물었고, 그래서 아버지와 막냇동생의 존재에 대해 상세히 답변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베냐민을 ‘아이’로 지칭합니다. 히브리어 ‘나아르’는 ‘아이’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냐민은 이미 다 자란 청년입니다. 요셉은 현재 최소 38세인데(30세에 총리가 된 후 7년의 풍년과 1년의 흉년이 지났다) 베냐민과 요셉의 나이차가 크지 않다면, 베냐민은 현재 30대 초반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형제들은 의도적으로 베냐민을 ‘나아르’로 지칭합니다. 이것은 아마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여전히 어린 아들처럼 아끼기 때문일 것이고, 또한 그가 형제들 중에 가장 어린 동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유다의 간곡한 호소가 이어집니다. 유다는 베냐민이 함께 가면 자신들이 밀정 혐의를 벗고 식량을 구해 전 가족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아버지를 집요하게 설득합니다(8). 이것은 요셉의 경고와 절묘한 병행을 이룹니다. 요셉은 만일 막내아우를 데리고 오면 ‘너희가 죽지 않으리라’고 형제들에게 약속했습니다(20). 유다는 막내아우를 데리고 가면, ‘우리가 죽지 않으리라고’고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요셉의 말은 그들의 간첩 혐의가 벗겨져 죽지 않는다는 의미인 반면, 유다의 말은 그들이 식량을 얻어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권고에도 절묘하게 그들이 막내아우를 데려 오면 가족이 굶어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물로 내놓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집니다. 만일 베냐민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이 그 일을 책임질 것이며 평생 아버지 앞에서 죄인으로 살겠다고 약속합니다. 유다의 희생적 결단을 전하는 9절은 성경 전체 구속사의 중대한 장면입니다. 유다는 막냇동생과 가족 전체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물로 내놓습니다. 유다는 다윗의 조상이며, 궁극적으로 유다의 뿌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십니다. 가족을 구하기 위한 그의 자발적인 희생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 희생을 당하신 그리스도가 엿보입니다. 형제들의 마음은 다급하다. 식량은 고갈되었고 시므온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지금 지체할 시간이 없다며 망설이는 아버지를 재촉합니다(10).

 

아들들을 다시 애굽으로 보내는 야곱(11-1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의 삶을 그분께 드려야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을 바꾸셔서 선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생의 모든 신련과 고난들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11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12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13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15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11-15)

마침내 야곱이 아들들의 간청을 받아들입니다. 야곱은 애굽 총리를 위한 특별한 선물을 큰 통(그릇)에 담아 준비합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의 ‘아름다운 소산물’인 유향, 꿀, 향품, 몰약, 유향나무 열매(피스타치오), 감복숭아(아몬드)입니다. 첫 번째 여행 때보다 두 배의 현금을 준비해서 보냅니다. 이 갑절의 돈은 딸려온 돈에 새로운 식량 구입비를 더한 총액을 가리킵니다(43:21-22).

현재 야곱은 뭔가 일이 잘못되어 누군가의 실수로(미쉬게, 무심코 저지른 실수) 돈 꾸러미들이 딸려 왔을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여행은 첫 번째 여행과 달리 식량을 사는 목적 외에 그 총리와의 특별한 접견을 위해 떠나야 합니다. 더구나 시므온이 현재 볼모로 잡혀 있고 거액의 돈 꾸러미가 딸려 와 범죄 혐의를 쓰고 있을 가능성이 커 대단히 위험한 여행입니다.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의 특별한 은혜(라함)를 구합니다. ‘라함’은 연민에서 비롯된 자비심과 동정심을 가리킵니다. 야곱이 여기서 하나님을 ‘엘 샤다이’라는 특별한 호칭으로 칭하는 이유는 그의 절박함을 잘 드러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는 그의 마지막 말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고백을 연상시킵니다. 설사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베냐민과 그의 가족의 운명은 이집트 총리가 아닌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움켜쥐거나, 사랑하는 것에 더 집착할수록 삶은 더 꼬이고 엉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더 온전케 하시려는 큰 그림 가운데서 상황마다 관여하십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하나님의 큰 그림을 신뢰하며 놓아야 할 것 놓고 맡길 것을 맡기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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