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05) - 룻기 2장 14-23절 - 보아스의 은혜를 입은 룻
룻기(02-02)
보아스의 은혜를 입은 룻
룻기 2장 14-23절
우리가 가족나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수고합니다. 그렇게 수고하는데도, 때로는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 가정이나 회사를 어떻게 하면 더 좋게 만들까 하는 마음으로 노심초사를 하면서도 길을 발견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을 따라가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과 나오미는 아무런 생계 수단이 없기에 룻이 추수하는 밭에 가서 곡식을 주워 와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룻은 엘리멜렉의 친척이자 유력한 사람인 보아스의 밭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보아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처음 보는 소녀가 나오미의 며느리라는 것을 알자 룻을 자신의 식구처럼 챙겨줍니다.
룻을 점심 식사에 초대하는 보아스(14-16)
누군가를 도울 때 안타까운 마음만 갖고 끝내거나 말로만 동정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도움은 상대방에게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사랑은 입술로만 하는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약 2:17)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나누고 있습니까?
14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14-16)
보아스가 룻에게 베푸는 은혜는 14절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보아스는 식사 시간이 되자, 룻에게 와서 같이 식사하자고 초청합니다. 룻을 자기 식솔들의 식탁으로 초대하여 빵과 볶은 곡식 등 음식을 제공합니다. 그는 룻에게 빵조각을 줄 뿐 아니라 식초에도 찍어 먹을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식초는 포도 식초로 빵을 찍어 먹는 일종의 소스입니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다’는 것(14)은 보아스가 음식을 넉넉히 주었다는 말입니다. 식사 초대는 환대의 가장 보편적이고 상징적인 행위로 보아스가 룻을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마도 베들레헴에 온 후 룻은 이런 따뜻한 환대를 처음 받아보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음식을 받고 초를 찍어 먹으라는 배려의 말을 들으며 룻의 마음이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식사가 끝나고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 보아스는 일꾼을 불러 룻이 혹시 곡식 단 사이에서 주울지라도 절대 면박을 주거나 창피하게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또, 룻이 더 많이 주워 갈 수 있도록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일부러 빼주라고 하면서 룻이 넉넉하게 주워 가는 것을 비난하지 말라고 합니다. 룻이 곡식을 주우러 다니는 처지라고 창피를 주거나 인격적으로 모욕하거나 일에 방해가 된다고 화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물질적인 배려를 할 뿐 아니라 그녀가 인격적으로 무시당하지 않도록 배려합니다. 룻이 비록 가난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처지였지만, 이런 상황은 룻이 게으르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성이 땅을 상속받지 못하는 사회적 구조와 이스라엘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발생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삭줍기는 이렇게 생계가 어려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존의 권리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삭을 줍는다고 해서 멸시를 받거나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보아스의 당부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잘 반영한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울 때,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며 도움 받는 상대방을 멸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약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의 문제이며, 하나님 사랑을 전달하는 하나님 백성의 의무입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룻에게 은혜를 넘치게 베푸는 이유는 그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통해 자신의 백성으로 들어온 룻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많은 곡식을 주워 집으로 돌아감(17-19)
섬김은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서로를 생각해 주는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섬김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가족 간에도 그렇습니다. 섬김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섬기려는 마음입니다. 섬김의 마음이 넉넉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나눌 것이 있습니다.
17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17-19)
룻은 나오미에게 기쁜 소식을 알립니다. 자신이 누구의 밭에 나아가 은혜를 입었는지 설명합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저녁까지 주워 모은 보리의 양은 1에바(14-23kg)정도 되었습니다. 구 바벨론의 마리 문서에 의하면 성인 남성의 하루 평균 양식이 0.54kg 정도 되는 것을 감안하면, 둘이서 대략 20일 정도 먹을 수 있는 상당히 많은 양을 얻은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이 양이 일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암시합니다(19, 나오미의 반응).
많은 양식을 얻은 룻은 그것을 들고 성읍에 있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마도 그녀의 발걸음은 아침의 근심 어린 무거운 발걸음과 반대로 매우 기쁘고 가벼운 발걸음이었을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한동안 먹을 것 걱정 없이 살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룻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자랑스럽게 자신이 주운 것을 보여드리고, 자신이 점심 때 먹고 남긴 것을 모두 시어머니께 드립니다. 아마도 룻은 점심에 먹고 남은 것을 시어머니를 생각해서 모두 싸 가지고 온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도 시어머니에 대한 룻의 지극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어디에서 주웠느냐?’, ‘어디에서 일했느냐?’하고 놀라서 룻에게 묻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호의를 베푼 이에게 복을 빌며 감사를 표현합니다. 룻은 그가 ‘보아스’라고 알립니다. 보아스란 이름을 맨 마지막에 이야기함으로 나오미의 놀라움을 극대화합니다.
18절부터는 나오미의 호칭이 바뀌는데 화자는 나오미를 ‘그의 시어머니’로 부릅니다. 이는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나오미에서 룻으로 전환됨을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룻은 나오미를 따라온 보조적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룻과 보아스의 대화와 보아스 밭에서 일한 사건을 통해 룻이 사건을 이끌어가는 독립적인 인물로 이야기의 중심에 등장합니다.
보아스의 정체를 알게 된 룻(20-23)
섬김의 삶은 하늘의 복을 받는 축복의 길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합니다. 항상 부족한 것만 보고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원망하기도 하고 나눔에 인색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이 많으니 나누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눌 때 풍성해지는 법입니다. 교회가 바른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가 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20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21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22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23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20-23)
룻이 보아스란 이름을 언급했을 때, 나오미는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그는 엘리멜렉의 가까운 친척으로 기업무를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헤세드) 베풀기를 그치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하며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 주시길 기원합니다. 이 표현은 나오미가 룻과 오르바에게 축복한 말과 거의 같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은혜는 죽은 자를 생각하여 산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것이고 산 자, 즉 과부들을 잘 돌보는 것이 이들을 남겨놓고 떠난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여기서 산 자와 죽은 자는 서로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가족이란 끈으로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친척으로서 룻에게 넘치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친척이라고 해서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가 없지만 보아스는 기꺼이 은혜를 베풀었고, 나오미는 그의 자비로운 행동에 감사하며 여호와께 복을 빈 것입니다.
룻은 이 말을 듣고 보아스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자신의 일꾼들과 있으라는 호의까지 베풀었다고 밝힙니다. 나오미도 보아스의 말을 따르라고 합니다. 22절에서 ‘만나지 않기 위해’로 번역된 ‘만나다’(파가)라는 단어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만남을 내포합니다. 즉, 이 말은 다른 밭에서 다른 남자 일꾼들이 룻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충고입니다. 보아스와 나오미는 룻을 “내 딸아”라고 부르며 이심전심으로 룻을 걱정하는 보호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호칭을 보면 나오미와 보아스가 비슷한 연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룻은 나오미와의 대화를 통해 왜 보아스가 자신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룻은 한편으로 감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보아스의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젊은 과부의 입장에서 부유한 남자의 호의를 그냥 순수하게만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설명을 듣고 비로소 보아스가 자신에게 넘치는 은혜를 베푼 이유를 이해하게 되고 불편했던 마음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여성이 서로 삶을 나누고 정보를 주고받는 모습은 구약 성경에서는 참 낯선 광경입니다. 여기서 나오미는 비록 직접적인 행동은 하지 않지만, 연장자로서의 지혜와 지식과 지도력을 보여줍니다.
23절은 요약으로 전체 추수 시기 동안의 룻의 행동을 한 절로 요약합니다. 전체 추수 기간은 보리와 밀을 추수하는 시기로 4월에서 6월 정도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룻은 나오미와 보아스의 권유대로 보아스의 소녀들 가까이에서 곡식을 주워 나오미와 자신의 양식을 삼으며 그 시기를 보냈습니다. 나오미도 룻의 헤세드와 보아스의 헤세드로 베들레헴에 돌아와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추수 시기가 끝나면 다시 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룻과 나오미에게 주어진 은혜는 임시적이고 불안정합니다. 다만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란 사실은 나오미와 룻에게 희망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보시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을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 때, 지친 영혼을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며, 기쁨을 주십니다. 주님의 참된 위로를 통해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