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23) - 히브리서 10장 19-31절 - 새 언약의 백성이 얻어야 할 것들
히브리서(10-03)
새 언약의 백성이 얻어야 할 것들
히브리서 10장 19-31절
경부고속도로 개통하여 서울에서 부산까지 10시간 이상이 걸리던 것을 고속도로로 신설로 5시간으로 단축시켰습니다. 농경사회를 기반에서 산업 사회로 전환되는 중요한 대동맥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대로가 열리면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의 새 길, 생명의 새 길이 열렸습니다. 이와같이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길을 가면서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곁눈질하므로 곁길로 빠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본문은 이전까지 다른 내용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습니다. 또한 악한 양심에서 벗어나고 씻음을 받았으니 참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망을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면서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본문은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살 것을 권면합니다.
이제까지 요점 세 가지(19-21)
우리 마음 속에 주의 피가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거룩하고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우술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라고 원하였던 것처럼, 주님의 피뿌리시는 시온좌의 은총 때문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인간들이 공로나 죄에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주님이 우리를 위해 대속하신 십자가의 은총으로 용서 받고 새 피조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19-21)
히브리서는 총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4:13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4:14-10:18까지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10:19-13:25까지는 믿음의 인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1) 신분의 변화(19)
본문은 이제까지 히브리서 저자가 서술했던 내용을 세 가지 요점으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죄인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신분의 변화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의인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은 과거에 사상할 수 조차 없었던 놀라운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옛 언약 아래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먼저 속죄제를 들인 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로 간다는 것은 죄에 대한 심판을 생각하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피는 동물의 피가 가미할 수 없었던 위대한 일을 성취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한 마음으로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희생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20)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육체로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매 년마다 드려지는 반복되는 제사에 드려지는 제물이 아닌 영원한 효력을 지닌 영원한 제사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직접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살 길’이 되셨다고 소개합니다. ‘살다’라는 단어는 분사형으로 ‘살아 있는 길’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고, 어려운 모든 일을 해결해죽,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가, 오늘도 우리에게도 살아있는 생생한 실체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3)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21)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영원하신 위대한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영 단 번의 제사로 하나님께서 드린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인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게 하시는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었습니까? 옛 언약 아래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성전 안에서 휘장이 있었습니다. 이 휘장을 지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복잡하고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속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성전 뒷산인 골로다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심으로 돌아가시고,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성전에 있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 휘장을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찢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New Living Way)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길은 언제나 생명의 길이며, 믿음의 사람들이 고백만하면 활짝 열린 은혜의 대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 길은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새 언약으로 인해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대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는 두려움과 불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그러한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이 대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직접 들어갈 능력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권면Ⅰ-Ⅲ(22-24)
하나님께 나가는 막혔던 장애물이 없어진 것뿐만 아니라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은혜도 주셨습니다. 그 대로(大路)를 따라 나가다 보면 끝에서 만나는 주님, 대제사장은 그 성소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24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22-25)
예수님의 피에 의지하는 담대함 위에서 설교자는 세 가지 권면을 제지합니다. 첫째, 우리는 ‘참된 마음을 가지고 믿음의 확신 안에서 나아가야 한다’(22). 둘째, ‘희망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견지해야 한다’(23). 셋째,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24-25). 첫 번째 것은 개인의 차원에서 실천한 사항이라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공동체라는 정황에서만 실천할 수 있습니다.
(1) 권면(1):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22)
먼저, ‘참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피뿌림을 통해 악으로부터 정결케 된 양심입니다. 그런 양심을 외면적으로 확증하는 것은 물로 씻긴 몸, 즉 세례 받은 신자의 신분이기도 합니다. 이전에 여러 번 나왔다시피 ‘양심’은 좁은 의미의 죄책감 혹은 죄의식만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자각하는 인식 능력, 혹은 죄를 인식하고 있는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작용하면서 우리는 죄의 저주인 형벌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유롭고 주체적인 자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아가 죄 짓는 생각, 언어, 행위에 중독되어 거의 강박적으로 죄 짓던 생활, 과도한 욕구, 욕심, 질투, 타인과의 비교, 교만 등에 추동되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삶까지도 이겨낼 수 있는 새로운 의지와 마음의 힘을 얻습니다. 그렇게 해서 양심은 비로소 악으로부터 정결케 되며 온전해집니다. 예수님의 피가 가진 속죄의 효력을 믿는 상태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일어나는 실제적인 삶의 변화가 세례를 통해 극화(劇化)되고 공적으로 선포됩니다.
(2) 권면(2) :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굽게 잡자(23)
두 번째 권면인 ‘소망스러운 고백’ 혹은 ‘소망에 관한 고백’의 근거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지금까지 자비하셨던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장래에도, 종말에도 우리를 은혜로 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소망에 관한 고백’은 종말에 성취될 우리 존재의 영원성, 충만성에 관한 고백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소망에 관한 이 고백을 우리는 어떻게 하면 ‘굳게 붙잡을’ 수 있습니까? 교회의 역사적, 공동체적 유산인 여러 신경들, 교리문답들, 고백서들이 주는 유익은 무척 큽니다. 각 전통에서 생겨나고 전해진 여러 신조들을 묵상하고 공부하는 일, 그리고 공예배와 개인 경건의 시간에 암송하는 일은 분명 우리의 고백을 견지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말로 하는 고백에서 삶으로 하는 고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활과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고대한다고 말했다면, 그 나라에 어울리는 생각과 판단, 말과 행동으로 그 말이 우리의 진심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3) 권면(3) :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24-25)
고백된 소망의 기초 위에서 더욱 열심히 실행해야 할 것이 세 번째 권면에서 제시됩니다. 성도들 서로가 사랑과 선한 행동을 격려해야 하고(24), 그러기 위해서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25). 이 두 가지는 구문상으로도, 개념상으로도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원문의 구문에서 24절이 주절이고 25절 전체는 분사 구문으로 일종의 종속절입니다. 즉, 모이기를 힘쓰라는 권면은 사랑과 선행의 격려를 위해 서로를 돌아봄을 위한 구체적 방도임을 표현하는 구문입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모이지 않고 어떻게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서로 돌아볼 수 있습니까? 또한 신자가 사랑과 선행을 격려 받았다면 그는 속히 그리고 자주 형제자매들을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24절 위문의 구분을 그대로 살려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과 신행의 격려를 위해 우리 서로 돌아봅시다.’ 주동사 ‘돌아보다’는 원문에 ‘카타노예인’으로 나옵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서 앞에서 한 번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3:1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권면 속에 같은 동사 카타노예인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형제자매를 서로 돌아보고자 할 때, 예수를 깊이 생각할 때처럼 같은 정도의 정성과 진실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24절에 있는 명사 ‘파록쉬모스’는 ‘날카로움’, ‘찌르는 것’ 등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 ‘격려’보다는 ‘자극’, ‘도발’, ‘흥분’ 등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신자들 간의 예의 바른, 하지만 피상적인 사귐보다 상당히 강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에 대한 영적 책임을 느낀다면, 우리는 사랑과 선행을 행하도록 좀 더 분명하게 자극해야 합니다.
서로를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모여야 합니다(25). 여기 쓰인 명사 ‘에피쉬나고게’를 ‘모이기’, 즉 모이는 활동으로 볼 수도 있지만 ‘모임’, ‘단체’, ‘공동체’ 등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 후자로 본다면, 설교자는 ‘어떤 사람들이 (신자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관행’에 대해서 경고하는 셈입니다. 본받지 말아야 할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신자들은 모였을 때 종말이 가까움을 의식하면서 힘써 서로를 권면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믿음의 길을 함께 왔다가 점점 믿음의 길에서 멀어지고 있는 분들은 없습니까? 그 분들 손을 붙잡고 이끌어 오시길 바랍니다. 은혜를 맛보고 떠나는 자들에게 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를 힘쓰고, 죄와 타협하지 않고 지금 당하는 시험을 이기도록 합시다. 다시 믿음 가운데 서서 함께 의의 나라를 경험하고 주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을 함께 누리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