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27) - 예레미야 11장 9-17절 - 유다의 반역과 재앙
예레미야(11-02)
유다의 반역과 재앙
예레미야 11장 9-17절
반역이란 받은 호의를 배신하고 도리어 악한 음모를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 사이에 반역이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부어 주셨지만 그들은 성읍 수만큼의 우상을 만들고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하나님께 반역ㅇ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반역한 유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은 무엇입니까?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언약의 규정을 따르지 않고 우상들을 섬기면서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들은 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는 치명적입니다.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주 아래 놓이게 됐습니다.
언약의 파기(9-14)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어떤 길에 서 있는지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만약 내 기도가 응답 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행여 돌이켜야 할 죄가 없는지 진지하게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시금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접하고, 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자비로운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9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10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 11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12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13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 14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9-14)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순종하기 쉽지 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펴 달라 기도하지도 말고, 도와 달라는 호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그들을 위한 부르짖음을 들어주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1) 반역의 고발(9-10)
여호와의 시선이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옮겨집니다. 불순종의 완악함에 있어 현세대는 조상들보다 더했습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이 여호와께 ‘반역’을 꾀했습니다. ‘반역’으로 옮긴 ‘계쉐르’는 권력 찬탈을 목적으로 일으키는 정변을 가리킵니다. 언약을 통해 하나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자기 하나님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들은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며 섬겼습니다(10b). 조약을 체결하고 주군을 섬기던 봉신이 다른 주군을 찾아 말을 갈아타는 것처럼, 여호와의 봉신이던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분의 종주권을 거절하고 다른 신들을 주군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호와만을 섬겨야 할(참조, 츨 20:3, 신 5:7) 그분 백성이 이방 신들의 신하가 됐습니다. 이들의 반역으로 여호와께서 이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이 깨졌습니다(10b), 긴장과 충돌 가운데 겨우 유지되던 언약 관계가 결국은 우상숭배의 암초에 걸려 난파했습니다.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10a)가 일반적 언급인지 또는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는 언급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불순종의 반역에 있어 현세대는 조상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상숭배는 출애굽부터 계속된 반역으로, 차라리 언약 백성의 본성에 속했습니다. ‘돌아가서’에 주목하는 후자의 입장은 여기서 아버지 요시야의 개혁을 되돌린 여호야김에 대한 고발을 읽어냅니다. 언약을 깨뜨린 주체로 ‘유다 집’과 함께 이미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이스라엘 집’이 나옵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섬겨 언약을 깨드렸다는 점에서 유다나 이스라엘이나 차이가 없었습니다. 언약의 의무를 준수하지 않아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면, 마찬가지로 언약의 의무를 저버린 유다의 운명도 다를 수 없습니다.
(2) 재앙의 선포(11-12)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주권에 반기를 들고 언약을 깨뜨린 자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십니다.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이다”(11).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그분께서 듣지 않으시기에 치명적입니다. 이스라엘 쪽에서 여호와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없어졌습니다. 예언자의 중보기도도 금지됐고(14), 제사도 그 기능을 상실했습니다(15).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재앙을 그대로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됐습니다. 여호와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은 ‘다른 신들’을 찾아가 살려달라고 울부짖겠지만,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12).
(3) 바알숭배의 고발(13)
재앙이 임했을 때 우상의 실체가 확실히 드러납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처럼 열심히 향을 피우고 섬겼던 이방 신들이 진짜 신이라면, 여호와께서 내리신 재앙 때문에 부르짖는 자들을 구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수치스러운 물건’에 불과한 우상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수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출발한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뜨리고 본질이 ‘수치’인 우상을 섬기다가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우상숭배가 이미 조상의 죄악인데 재앙이 현세대에 임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13). 유다와 예루살렘이 우상들에게 점령당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우상의 제단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이방 신’이 되셨습니다. 어느 구석진 곳에 남겨져 온갖 우상들과 동거하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쫓아내고 우상들로 채운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든지 무엇인가 하셔야 했습니다.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는 경고가 더는 무의미해졌기 때문에, 언약의 하나님은 반역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십니다. 숭배자들을 수치에 빠뜨리기에 우상은 ‘수치스러운 물건’이고, ‘수치스러운 물건’이기에 숭배자들에게 수치만 가져다줍니다. 바알은 가나안의 풍요 제의를 주관하는 신의 이름이지만, 여기서처럼 때로는 이스라엘이 섬긴 모든 우상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4) 중보기도의 금지(14)
중보는 예언자의 역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언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선포하는 것이었지만, 예언자는 때로는 백성 편에서 하나님께 간구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중보자로 모세(참조. 출 31:11; 34:9; 민 11:2)와 사무엘(참조, 삼상 7:8-10;12:19,23)을 들 수 있습니다(참조. 렘 15:1). 이들은 모두 중보기도를 통해 여호와의 진노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드고아 출신으로 북왕국에서 예언 활동을 했던 아모스도 중보기도로 여호와의 심판을 일시적으로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참조. 암 7:2-3, 5-6).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중보기도의 금지를 명령받습니다.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14). 이미 하나님께서 ‘피할 수 없는’ 재앙을 결정하시고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을 선언하셨기에(11), 예레미야의 중보기도를 들어주실 수 없게 됐습니다. 현세대의 반역과 우상숭배는 그분의 인자와 긍휼과 인애에 호소하기에도 그 한계를 너무 멀리 벗어났습니다. 언약관계를 완전히 짓밟아버린 유다와 예루살렘에게는 오직 멸망의 재앙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피할 수 없는 재앙(15-17)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에서 멀어져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이러한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께서는 복을 거두십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재앙이 닥치기 전에 하나님께 돌이키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우상을 모두 내어버리고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15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은 악한 음모를 꾸미더니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려느냐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그 때에 네가 기뻐하겠느냐 16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17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느니라(15-17)
유다 백성의 반역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감람나무와 같이 심고 가꾸셨습니다. 감람나무는 풍요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말할 수 없이 풍성한 복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경멸하시는 바알을 불러들였습니다.
(1) 제의의 고발(15)
이스라엘이 자랑하고 의지하는 제사와 신학적 전통도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앞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으로 택한 자들이 언약을 깨뜨리고, 그분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로 부르시는 자들이 제사를 남용합니다. 이들은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성전을 찾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거룩한 제물 고기’(기름진 짐승과 거룩한 고기)로 재앙을 비켜지나가게 할 수 있다고 믿지만, 이는 그들의 착각일 뿐입니다(15). ‘이 언약의 말’에 순종함이 없이 드려지는 제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의 행사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으로 남아있을 때, 곧 언약의 규정을 준수할 때만 제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용한 통로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신학적 전통도 언약을 깨뜨린 자들에게는 과거의 유물일 뿐입니다.
(2) 신학적 특권의 고발(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로 부르셨던 시절은 지나갔습니다(16). 감람나무가 귀하기는 하지만, ‘좋은 열매’가 아닌 “악한 음모”를 맺는 감람나무는 쓸모없는 나무로 불에 살라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계속 유효하기 위해서는 그 선택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형식화한 제의적 경건은 차라리 재앙을 더할 뿐입니다. ‘큰 소동’은 징계의 심판이 전쟁으로 집행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제사가 그 효력을 상실하고 아름다운 감람나무가 불쏘시개가 될 때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3) 재앙의 선언(17)
하나님께서 손수 심으신 나무인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바알을 숭배하며 그분을 화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17; 참조. 12-13).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하나님께서 심으신 나무라면, 이들은 그분께 뿌리를 내리고 그분 말씀을 섭취해 성장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뿌리를 바알에게로 돌렸습니다. 바알에게 뿌리를 뻗은 나무가 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에 불을 붙여 태워버리기로 결정하십니다.
성도들은 침묵하는 우상이 아닌 말씀하시며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한 분 왕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로 간 것입니다. 조상들이 그렇게 하다가 망한 것을 보고도 똑같이 언약을 파괴했습니다. 그들은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역사와 성경에 오늘 내가 범하는 것과 같은 죄와 그 결과가 셀 수 없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기 성읍 수만큼 각양각색의 우상을 만들었지만,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부르짖어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자기 욕망의 소리에 자신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뿐, 그 욕망이 좌절되자 더 이상 들을 소리가 없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