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11) - 스가랴 8장 14-23절 -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스가랴(08-02)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스가랴 8장 14-23절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고난의 날이 지나갈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감싸주실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매 순간이 축복이며,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를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며, 우리는 새로운 소망과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와 위로 속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섭니다.
- 스가랴 8:14-17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고, 8:18-23에서는 다시 7장 초반(7:1-7)에서 다룬 금식 문제와 관련하여 궁극적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18-19절에서처럼 금식과 관련되어 있지만, 이는 단순한 금식의 문제를 넘어서는 온전한 평강에 대한 것입니다. 20-23절에서처럼 온 민족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이상이 실현되는 것과 관련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14-17)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그분의 분노로 인해 벌을 내리셨지만, 이제는 다시 축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진리와 평화를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서로 진실되게 말하고 정의로운 재판을 하며, 마음으로 이웃을 해치려는 악한 계획을 세우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싫어하시며, 정직과 공의를 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번영과 평화를 약속하십니다.
14○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나를 격노하게 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으나 15이제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16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17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4-17)
11-13절에서 회복에 대해 분명히 약속한 후에, “손을 견고히 하라”고 조언하였습니다. 이제 14-15절은 왜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말한 후, 16-17절에서는 이에 반응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이미 시내산 언약에서 선포된 십계명에 포함된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덕목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도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언약 백성다운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14-15절에서 선지자는 왜 이스라엘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지를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격노하여 ‘재앙’을 내렸지만,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하셨기에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언약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으나, 이제 뜻을 돌이켜 다시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술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라고 한 시편 기자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곧 마음을 바꾸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에 마음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은혜를 베풀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돌이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것을 16-17절이 말해줍니다. 그것은 정확히 그들의 열조가 버렸던 그것입니다. 열조가 무시하고 듣지 않고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면서까지 외면한 말씀입니다. 여기 ‘진리’는 8:3에서도 언급된 바 있으며,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로 언약 백성이 닮아야 할 덕목입니다. 16절의 ‘성문’은 광장 개념으로 거래나 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룻 4:1-2; 삼하 19:8; 렘 29:7; 암 5:10). 공정하고 ‘화평’을 가져오는 재판을 권고합니다. 17절의 거짓 맹세하는 것은 5장의 환상에서도 죄악으로 지적된 바 있습니다(5:4). 또한 마음에 해하기를 도모한다는 것도 7:10에서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이유를 제시하는 맥락에서 지적된 바 있습니다. 이 모두는 언약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덕목들입니다.
금식과 관련된 약속(18-19)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정의를 행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금식을 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금식은 우리의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로 돌리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강화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18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9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18-19)
7:1-7에서 제기됐던 금식 문제가 다시 언급됩니다. 다섯째 달 금식과 일곱째 달 금식은 이미 7:1-7에서 다루어졌습니다. 여기서는 금식과 관련된 문제를 확대해서, 곧 단순히 벧엘 사람들이 묻는 금식만이 아니라, 넷째달과 열째 달을 추가해서 전반적인 금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7장을 처음에 시작할 때 금식으로 시작하고서는 전반적인 문제로 확대하듯이, 여기서도 역시 7장에서 이어져 오는 내용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금식을 다시금 거론합니다. 하지만, 금식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회복의 약속은 8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약속을 잇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회복과 구원의 때가 되면 고통의 금식이 기쁨이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전 금식은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멸망과 관계가 깊은 금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의 승리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될 것입니다. 이는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멸망이 완전히 잊힐 정도로 회복되는 예루살렘의 온전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회복을 약속하면서도,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돌아옴에 대해 동시에 강조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사실은 금식 문제가 단순히 금식을 준수하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온전히 회복됨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하나님께로 그들 삶의 중심을 온전히 돌이켰느냐 그러지 않았느냐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을 누리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다운 삶,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진리와 평강을 사랑하라는 권고는 하나님의 성품이 그들의 삶에 온전히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이미 바로 앞의 8:16-17에서도 비슷하게 언급된 바 있습니다. ‘진리’는 단순히 사실의 옳고 그름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충실하냐 그러지 않느냐의 문제를 포함합니다. ‘평강’ 역시 단순히 전쟁이나 다툼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면에서 온전함이 회복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평강’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마땅히 갖춰야 할 태도이자 덕목입니다.
온 민족이 주께로(20-23)
신실하고 진실된 믿음이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힘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각 민족의 진정한 회개와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통해 모든 민족이 그분께 나아올 것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더 많은 이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20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다시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올 것이라 21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22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23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20-23)
그 날 주님이 돌아오셔서 진실로 화평을 사랑하는 백성들 가운데 거하실 때, 그리고 땅과 하늘이 이 백성을 위해 이슬을 내리고 곡식을 풍성하게 내어줄 때, 그리고 아무도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남을 해하려는 마음 없이 은혜로 사는 사람들로 가득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공동체를 첫 이스라엘처럼(출 19:5-6)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기이하게 회복되고 축복을 받는 모습을 보고 온 열국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나아올 것입니다(20; 참조 사 2:2-4; 60:1-3; 66:18–21; 미 4:15). 온 열방과 온 민족이 주께로 나와 예배하게 된다는 예언은 8:13에서 이스라엘이 ‘복’이 됨으로써 비롯되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때의 복은 개인적인 복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타자’를 위한 혹은 ‘타자’를 향한 확대된 개념의 복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나아오게 되는 길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는 본래 아브라함 언약(창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과 시내산 언약을 체결하는 배경(출 19:6, ‘제사장 나라’)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약속이자 이스라엘을 향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20-23절은 온 민족이 주께 나오는 장면을 점차적으로 발전시키며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7-8장의 맥락에서는 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들로 여겨지는 벧엘 사람들만 금식 문제를 제기하며 나아왔는데, 이제 20절에서는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들로 확대됩니다. 이것이 22절에서는 성읍에서 나라로 확대됩니다. 이렇게 점진적으로 온 민족이 주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것을 확대하는 것은 여호와의 약속이 점차 확고하게 이루어질 것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함입니다. 23절의 옷자락을 잡는 행위는 복종하거나 충성한다는 표시의 행위일 수도 있고, 도움을 구하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삼상 15:27, 사울은 자비를 구하며 사무엘의 옷자락을 붙잡기도 했습니다). 문맥상으로는 도움을 구하는 행위와 더 가까워 보입니다. 또한 23절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표현은 언약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여기서는 언약의 온전한 회복을 가리킵니다(8:3; 겔 48:35).
금식 문제는 성전과 관련해서 처음 제기되었고(7장), 이제는 성전을 포함해서 이스라엘에게 온전한 미래상을 제시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합니다(금식과 같은 종교적 관습의 현안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이룰 여호와의 날을 제시합니다). 성전 재건이 완성되고서도 이스라엘은 성전이 파괴되기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또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며언약 백성의 삶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성전 재건은 온전한 의미의 회복,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전 역시 금식처럼 관습으로만 남고 그 의미는 퇴색할 것입니다. 성전은 본래 여호와의 거하심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서의 예배를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확인받습니다. 여호와와 그의 백성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됩니다. 온전한 관계의 회복은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는 것으로(19), 스스로 복이 됨을 통해(8:13) 이루어집니다. 그때 온 민족은 여호와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일(8:20-23)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 재건을 통해 하나님이 제시한 미래의 청사진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지만, 이제는 그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진리와 평화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파하는 힘이 됩니다. 우리의 신실함과 순종은 하나님의 축복을 초대하며, 모든 민족이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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