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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3) - 누가복음 7장 18-35절 -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답하신 예수님

백의종군 2024. 11. 29.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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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7-02)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답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7장 18-35절


 

때로는 남에게 오해를 받거나 내가 남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해를 풀고 이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겸손히 경청하고 묻고, 듣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지사지의 태도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세례 요한도 자신의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 질문을 보냈습니다. 이는 오해를 풀기 위해 진실을 탐구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간접적인 만남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요한은 헤롯에게 체포된 후(3:19-20)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두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내는 장면에서 다시 등장합니다(7:18-19).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의구심에 자신이 바로 그가 기다린 ‘오실 그이’이심을 알리십니다(20-23). 무리를 향해 요한의 정체를 알리고(24-30), 자신과 요한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대한 이 세대의 반응을 평가하십니다(31-35).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요한의 반응(18-23)

예수님을 따라가면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방식으로 흐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불신과 오해로 그치지 말고, 주님께 질문하며 나가길 원합니다. 의심이 확신이 되지 않도록 말씀 앞으로 오해가 아닌 이해를 위해 나가야 합니다.

 

18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19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18-23)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왕을 영접하고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왕은 칼에 힘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겸손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1)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의심(18-20)

 

그러하므로 그 왕을 누가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이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권력이 있더라도 그 마음만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낮은 곳에 있어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 낮은 곳이 울분과 분노만 있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미움과 복수심으로 이를 갈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임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3:11-17). 그것은 메시아가 오시면, 지금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하는 자들, 하나님의 이름으로 치부하고 권력을 누리는 자들, 이방에서 빌붙어 자기 동족을 약탈하는 자들 등등, 그들을 심판하시고 대신믿음으로 인내하는 자들은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메시아였습니다. 요한 또한 그런 메시아를 기대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이었습니다. 단지 악의 무리를 제거하는 것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 새 창조의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하는 것이 구속에 목표였습니다. 그저 악에서 건져 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자로 창조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요한은 여기까지는 몰랐습니다.

세례 요한이 사역한지 일 년도 되지도 못했지만,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마 11:2). 그는 자신이 전한대로 메시아가 그의 나라를 세우길 원했지만, 결과는 이스라엘은 여전히 고통가운데 있고, 자신은 초라하게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 불만족스러웠습니다.

요한의 생각으로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은 확실한데, 그가 오셨는데도 악의 무리를 심판하신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어서 속히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악인들을 심판해야만 했습니다. 구약의 다양한 종말론적인 예언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다만 종말론적인 환상을 예언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 11:1-12은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왔을 때, 일어날 다양한 현상을 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림에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부분적으로만 나타납니다. 이러한 부분적 성취 때문에 요한조차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의심했던 것입니다.

요한은 답답하고 궁금한 마음에 예수님께 두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19; 마 11:3). 그는 예수님께 메시아가 맞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심판자와 구원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하였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정체를 의심하는 요한에게 메시아 사역을 보여주고 설명하는 것으로 자신이 ‘오실 그 이’임을 입증하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뒤에 메시아가 올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곧 오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을 그 메시아로 알고 기대와 소망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더디 온다고 생각하여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한 것입니다. 그 동안에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친 말씀과 행하신 치유(예. 6:17-19)를 보고했습니다(18).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나사렛 회당에서의 선언에 따른 것인데(4:18-19; 사 61:12),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설교에서 ‘주의 보복의 날’을 제외했고, 실제로 희년의 복음을 전할 때도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반면 요한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심판이 ‘오실 그이’를 통해 집행될 것을 예고했습니다(3:17). 요한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으나 심판을 집행하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 자신이 기다렸던 ‘오실 그이’(3:16; 7:19,20; 참조.4:34; 5:32)가 맞는지 질문합니다(19-20). 요한은 예수님께 두 번에 걸쳐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 묻습니다.

 

(2) 이 세대 사람들을 행한 예수님의 책망(31-35)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의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을 때, 예수님께서 병과 고통을 치유하고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고 많은 맹인을 치유한 장면을 보았습니다(21). 요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22)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하기 보다 자신의 사역이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사야 61장 1-2절을 통해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자신의 사역이 ‘지금’ 감당해야 할 메시아의 사명(4:18-19)임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요약하고 이 내용을 요한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하십니다(22). 맹인들이 눈을 뜨고 못 걷는 사람들이 걷고 나병환자들이 깨끗하게 되고 못 듣는 사람들이 듣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집니다(22; 사 26:19; 29:18; 35:5-6; 42:18; 61:1).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눈먼 자가 눈을 뜬 사실이 계속 반복해 나타납니다. 이 사건들은 이사야서에서 예언한 메시아 시대의 종말론적인 현상에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자신이 수행한 메시아의 사역은 치유, 즉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누가복음에 거듭 강조되는 것처럼 나사렛 회당에서 전한 설교(4:18-19; 사 61:1-2)를 실현하는 것이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사야 61:1-2에서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도록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인 것을 입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 사역을 수행하는 것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마다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선언하십니다(23). 특히 이 경고는 예수님을 통해 기대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오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실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요구에 예수님을 맞추기보다 예수님의 요구에 자신을 맞춰야 합니다.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24-30)

세상에는 아무리 많은 것을 제대로 알고 있어도, 더 알아야할 것이 있고, 더 잘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희미하게 알수록 말이나 글이 어렸습니다. 또한, 한 가지만 알수록 지나치게 확신하게 됩니다. 잘 모르면 큰 소리로 말하게 됩니다. 하나만 알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요한이 물어왔던 질문에 대해 대답합니다.

 

24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27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29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24-30)

 

본문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한계와 오해를 꾸짖지 않으시고, 친절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요한이 보낸 제자들이 떠난 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광야에서 활동하던 일을 언급하며 칭찬합니다. 세 번에 걸쳐 ‘무엇을 보러 나갔느냐?’라는 가상의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요한의 정체를 설명하십니다.

 

(1)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24-30)

 

먼저, 무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광야로 나간 것이 아닙니다(24). 갈대를 구경하려고 멀고 거친 길을 걸어 광야까지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광야로 간 것도 아닙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기 때문입니다(25). 광야의 요한은 최고로 청빈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높은 지위에 비싼 옷을 입은 고관대작들을 보려면 왕궁에 가야 합니다. 광야에서 화려한 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 입장에서 볼 때 아주 중요한 인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로라고 일컫습니다. 그는 다른 선지자들보다 더 훌륭합니다.

무리가 광야로 간 목적은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26). 요한은 주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종말에 보냄 받을 것으로 예고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선지자보다 더 큰 자입니다. 엘리야와 같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입니다(출 23:20; 말 3:1).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입니다. 어떤 인간보다 위대하다는 개념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계시하고 실행하는 점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구원사의 관점에서 요한은 주로 오신 예수님의 전령이었으므로 어떤 선지자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요한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더 위대합니다(28). 옛 시대와 새 시대 사이의 차이는 매우 커서 새 시대에서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큽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맛본 자들은 아무리 작은 자라할지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하십니다. 이는 요한은 위대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에 사람이고 결국 성령의 임재를 비롯한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상반된 반응은 요한의 세례에 대한 상반된 반응을 반영합니다(29-30). 1세기 당시 세례는 출애굽 사건에서 물을 건너 해방을 경험한 것처럼 이전의 삶을 돌이켜 구원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요한의 가르침과 세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는 행위였으므로 그의 사역에 동참하는 일은 옳은 선택입니다. 회개의 세례에 참여하는 사람은 요한이 예고한 ‘오실 그이’가 집행할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습니다. 즉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에 참여한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합니다(29).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합니다(30). 요한이 경고한 것처럼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그들은 독사의 후손입니다(3:7). 요한의 세례를 거부하면 그가 예고한 예수님을 거부하고, 결국 심판에 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31-35)

심판과 자비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세상의 모든 악이 제거된다고 해서 저절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뱀을 통하여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악이 기승을 부리고 사단이 교묘하게 유혹하고 위험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창조하시길 원하십니다.

 

31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31-35)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보내셔서 먼저 회개하도록 하셨습니다. 많은 백성들과 세리들은 회개를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였습니다. 반대로 바리세인들과 율법 교사들은 요한의 세례를 거절하였는데, 이는 회개를 요구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에 참여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세대를 향하여 거절하는 부정적인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장터에서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이 비유(31-32) 역시 29-30절의 내용처럼 예수님과 요한의 사명을 하나로 연결합니다.

이 세대는 시장에 앉아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피리를 불면서 춤을 추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곡을 해도 울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해설하십니다(33-34). 이 세대는 요한에게 결혼식 놀이와 같이 좋은 반응을 요구했으나, 요한은 금식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귀신 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는 장례식 놀이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죄인들을 환대하고 식사 자리를 만들어 참여했습니다. 그러자 먹는 것을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고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라며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말하자면,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정치 종교 놀이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당시의 민중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거절한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대로 응답해주지 않자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무시하고 비하하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당시의 악한 세대가 예수님을 통해 욕망을 채우기 원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 역시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대상으로 예수님을 활용하려 합니다. 이 세대의 사람들은 예수님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대로 행하기를 바랍니다. 자신들이 만든 종교경제의 놀이터를 행복의 장으로 만들어주기를 원합니다.

이 세대가 예수님을 배척해 버리면 예수님의 사명은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거절하는 자들도 있지만 반대로 받아들이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35)라고 말씀합니다. 지혜 문헌에서 ‘지혜’는 전형적으로 하나님을 의인화한 용어이며(잠 8장; 시락서 24), 본문에서는 예수님 또는 예수님의 사역을 의인화합니다. ‘지혜의 자녀들’은 ‘이 세대’와 반대로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긍정적으로 반응함으로써 하나님의 목적을 따른 자들입니다. ‘지혜’는 지혜의 자녀들에 의해서 옳다함을 인정을 받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 선생들은 예수님께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이 세대에 속한 자들인 것을 스스로 입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비난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삶은 지혜의 옳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됩니다. 이는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것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29).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분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메시아임을 증명하시며, 기적과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이 본문은 믿음의 여정에서 의심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와 사랑을 의지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열쇠임을 상기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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