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89) - 시편 74편 12-23절 - 눈여겨보시며 기억하소서
시편(074-02)
눈여겨보시며 기억하소서
시편 74편 12-23절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과 지혜를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라는 것은 고백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에 자기 삶의 주도권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통해서, 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떻게 하면 주인 노릇을 하실까 고민하면서, 그분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뜻이 얼마나 선한지 끝까지 신뢰하는 것입니다.
- 이 시의 전반부에 묘사된 원수의 극악한 성전 훼손과 유린과 도발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에서 시인은 그런 하나님께서 백성과 압제당하는 가난한 자들을 잔인한 힘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구원하시기를 강력히 요청합니다.
창조자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 찬양(12-17)
신앙은 고백으로 나타나지만, 고백만 했다고 해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만 다닌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자기 삶에 개입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그 삶이 동반될 때만 참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변화된 삶의 열매가 있을 때 신앙인 것입니다.
12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13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14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15주께서 바위를 쪼개어 큰 물을 내시며 주께서 늘 흐르는 강들을 마르게 하셨나이다 16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17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12-17)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시인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바벨론으로 끌려온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지난날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되짚어 보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 왕이신 하나님(12)
무엇보다 12절은 하나님을 3인칭으로 묘사합니다. 74편 1편부터 시인은 계속 하나님을 2인칭으로 언급해 왔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주께서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원어를 보면, 1절에서 11절은 계속 하나님을 2인층으로 부르면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도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에서 시인은 갑작스럽게 하나님을 3인칭으로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객관적으로 묘사하여 자신의 기도가 더 설득력 있는 논리가 되게 하려는 시도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옛적부터 왕이셨다는 것입니다.
‘옛적부터’란 13절 이후에 서술되듯이 창조의 시점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왕권을 가진 통치자이셨고 창조 전부터 구원을 베푸신 분입니다. 히브리 원문에서 구원을 베푸신 분의 베푸시다에 해당하는 원한은 팔 동사의 분사 형태인데 히브리시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할 때 군사용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즉 12절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예로부터 왕이시기에 이제도 구원을 베풀 수 있는 분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무질서를 제압하시는 하나님(13-15)
하나님을 다시금 2인칭으로 13절부터 묘사합니다. 즉, 12절에서 3인칭으로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서술한 내용이 13절부터 17절에서는 2인칭으로 하나님과의 대화로 이어지면서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서 17절은 2인칭 남성 단수 인칭대명사인 아타가 거듭 사용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금 기억하시도록 하나님께 요청하는 어법을 사용합니다. 12절과 13절에서 17절은 사용하는 인칭을 변화시켜 가면서 하나님이 어떠신 분인가를 계속해서 묘사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서 14절은 먼저 물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물은 무질서를 상징하는 이미지입니다. 특히 물 가운데 살고 있는 용들과 리어야단은 무질서 가운데 악을 행하는 악의 화신의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물들 위에 하나님 자신의 질서를 부유하신 분입니다. 13절은 하나님께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있는 용돈의 머리를 깨뜨리셨다라고 말하며 14절 상반절은 니오 야단의 머리를 부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까지 통치하는 능력을 지니신 분입니다. 용들과 리오야단은 고대 근동 신화적 동물들인데 성경 기자들이 실제로 이런 동물들의 존재를 믿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당시의 백성들이 잘 알고 있는 이미지를 활용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통제하신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14절에 하반절은 하나님께서 리어야단에 머리를 깨뜨리신 후에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사막이란 물이 없는 곳인데 그곳에 사는 자들이 모래 사는 리어야단을 음식으로 먹었다는 것은 결국 물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됩니다. 13절에서 14절은 무질서의 이미지를 지닌 물과 악의 화신인 용 리어야단을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5절 역시 하나님께서 샘과 강을 쪼개셨고 늘 흐르는 강들을 마르게 하셨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물을 다스리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창조 질서를 수립하신 하나님(16-17)
하나님께서는 우주 질서를 수립하셨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낮이 당신 것이고, 밤도 당신 것입니다. 당신이 광명체와 해를 걸어두셨습니다.’(16)라고 노래합니다. 16절부터는 새로운 이미지를 도입하는데 역시 창조 시점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새롭게 도입되는 이미지는 빛과 광명체입니다. 13절에서 15절의 물의 이미지는 창세기 1장의 제 2일과 제 3일에 해당하는 내용인데, 이제 16절에서 언급하는 내용은 제 4일에 하나님께서 해 달 별들의 광명체를 만드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만물을 만드시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은 하나님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신 일과 여름과 겨울 등의 계절을 만드신 일을 언급합니다. ‘땅의 경계를 정하셨다’라는 것은 제 3일의 바다와 육지를 나누신 이를 다시금 가리키고 있고,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다라는 것은 창세기 1장의 자세히 묘사되진 않으나 이 세상의 모든 일을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표현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향한 호소(18-23)
교회가 위기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성도의 수가 줄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결과일 뿐입니다. 참 위기는 교회가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지 않고,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보다 세상의 약속을 기대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하고 세상을 더 기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보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영광을 더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18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19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원히 잊지 마소서 20그 언약을 눈여겨 보소서 무릇 땅의 어두운 곳에 포악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나이다 21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22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23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18-23)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권능을 떠올리며 고통을 이겨 낸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질서를 정하시고 그 질서를 유지해오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합니다. 없어도 될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지혜와 능력으로 질서를 만들어내십니다.
(1) 가난한 이들의 생명을 잊지 마소서(18-21)
12절과 17절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 묘사했습니다. 이제 18절 이후에는 12절에서 17절의 내용을 근거로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여호와께서 시인의 공동체를 구원해 주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18절은 그런 탄원의 첫 번째 내용으로 기억하소서라는 명령형 어법을 구사합니다. 여호와께서 기억하셔야 되는 내용이란 원수들이 주를 비방하고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했다라는 것인데 앞서 74편 1절에서 11절에 언급된 내용들의 요약입니다. 19절은 가난한 자를 언급함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도입합니다. 가난한 자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속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받아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자신이 가진 권리를 빼앗기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난한 자란 바로 그런 경우를 당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힘을 가진 권세자들에 의하여 억울하게 땅이나 삶의 권리들을 박탈당한 경우들을 가리킬 때도 많습니다.
19절에서 시작된 가난한 자의 이미지는 21절까지 계속됩니다. 20절은 땅의 어두운 곳에 포악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다고 말함으로써 포악한 자들이 언약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아 그들을 가난한 자로 전락시켰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1절은 하나님께서 그런 학대 받는 자 가난한 자 궁핍한 자들을 구원해 주셔야 한다고 기도합니다. 이런 19절에서 21절의 중심에 언약이라는 개념이 나타납니다. 포악한 자가 가난한 자를 핍박하는 사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깨뜨려진 사이인 것입니다. 이제 13절에서 17절과 18절에서 21절을 연결해 보면 창조의 능력으로 악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은 이제 언약 공동체 안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하셔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가난한 자들의 삶의 복을 회복해 주셔야 된다라는 기도가 들여지고 있다는 맥락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를 핍박하는 포악한 자들이란 시편 74편의 문맥에서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당연히 우리는 이 내용을 1절에서 11절에 탄원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포악한 자란 예루살렘 성전에 침략하여 그 성전을 해한 원수들을 말하며 가난한 자란 그런 원수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기에 언약을 기억하사 원수들을 물리쳐 주셔야 된다라는 기도의 흐름이 되는 것입니다.
(2) 당신의 대적들의 비방을 기억하소서(22-23)
마지막으로 22절에서 23절은 하나님을 향한 그동안의 모든 단원을 정리하여 요약합니다. 22절은 하나님께 자신을 위한 변호를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능력자이심므로 악한 자들을 심판하는 분이심을 보여달라는 강력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23절은 대적들의 소리가 하나님께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항거하는 원수들이 성전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소리를 지금도 듣고 계시고 동시에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창조주이시며 언약을 기억하여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풀어주는 분이시므로 더 이상 이런 상황을 지켜보지 마시고 구원의 손길을 펴셔야 된다는 기도인 것입니다.
74편은 공동체 탄식시로 성전 이미지 창조 이미지 언약사상 등을 포괄적으로 함께 사용하여 공동체를 고난에서 건져주실 것을 강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 백성으로 74편과 같은 기도를 고난 중에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시고 언약주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따라 우리의 기도에 그분의 능력과 지혜와 언약의 사랑을 따라 응답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푸실 능력의 왕이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통치자 구원자 창조자 그리고 심판자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로 나누어 하나님의 능력을 언급합니다. 첫째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능력이고 둘째는 자연 만물을 통치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시인의 고백이 더욱더 마음에 와닿는 것은 이 시를 평안할 때 기록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파괴되던 때에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평안할 때는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비로소 빛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