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마태복음(완료)

마태복음 강해(11) - 마태복음 5장 13-20절

백의종군 2023. 4. 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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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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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완성시키신 예수님

마태복음 513-20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위를 마음의 동기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사람들은 같은 행동을 취했지만, 마음에 따라 죄명이 상해죄가 아닌 살인죄로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시는 기준은 줄곧 마음을 강조하십니다. 행위보다 마음이 먼저이고, 겉만 아니라 속까지 의로워지는 것이 더 나은 의라고 주님께서는 행위의 법을 마음의 법으로 심화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보이신 태도는 사람들로 율법을 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패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성취하러 오셨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했던 시대는 끝나고 그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는 시대가 이른 것입니다.

 

소금과 빛인 성도(13-16)

세상에 똑같이 숨을 쉬고 있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영생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영생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부릅니다. 이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면 과연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복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것을 복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성숙해져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복입니다.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3-16)

예수님의 산상 설교는 계속됩니다. 팔복의 내용을 보면, 어쩌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바보 같이 맞고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팔복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으로 소금과 빛으로 말씀하셨습니다.

(1) 세상의 소금과 빛(13)

본문에서 너희는 제자들을 의미하며, 11-12절에서는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강력한 비유를 통해 제자들의 정체성을 공개합니다.

먼저 소금으로 비유하십니다. 땅에는 마음이 오만하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 무자비하고 순수하지 않고 싸우기를 좋아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땅을 더럽히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땅에 소금입니다. ‘소금이라 말씀하실 때 소금의 어떤 역할을 염두에 두셨겠습니까? 고대에는 소금을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짠맛일 텐데, 그 짠맛이 가져오는 영향과 결과가 무엇이냐는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돋우거나 부패를 방지하고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정결이나 언약 등 다양한 기능과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만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칭하신 것은 세상을 위한 소금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어떤 역할이든 소금은 세상을 살리고 세상을 위한 일이 됩니다. 소금이 그 효과를 발휘하는 과정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희생과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소금이 맛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안에 불순물이 너무 많으면 소금의 가치를 상실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맛을 잃다라고 번역된 원어는 어리석게 되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의 정체가 소금이라는 것은 땅에서 어리석지 않고 현명한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서 팔복 중 마음의 청결과 유사합니다. 마음이 더러워지고 정체성이 혼탁해지면 세상을 위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짠 맛은 소금이라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소금인 제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아무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맛 잃은 소금 덩어리, 다량의 불순물이 함유된 소금은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사람들은 길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돌덩이처럼 됩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에서 목적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세상을짜게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까? ‘소금을짜게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까? 동사 할리스떼세타이(λιαθσεται)는 미래 수동형입니다. 그것이 세상소금중 무엇을 목적어로 취하는지가 관건입니다. 동사에 가까이 있는 단어가 소금이며, 수동태라는 점을 고려하면 후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직역하면, ‘무엇으로 짜게 되겠느냐?’가 됩니다. 무엇이 소금을 짜게 하겠느냐입니다(9:50도 이를 뒷받침한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린 일은 불가능하므로 어리석은 제자는 짠맛을 내지 못함으로써, 즉 어리석은 삶으로 참 제자가 아님을 드러냅니다. 또는 어리석은 소금은 소금의 맛을 여전히 지니고 있으나 그 영향력이 약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소금은 땅에서 제 맛을 유지하지 못해 이물질이 가득한 흙과 뒤섞여서 더러운 취급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구별된 정체성을 따라 살지 못하면, 영향력을 상실해서 땅의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이생에 빠지고 맙니다. 제자들은 땅에 소금으로써 땅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소금은 매우 적은 양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적지만 필수적인 물질인 것처럼 제자는 이런 정체성을 인식하고 경고과 격려를 함께 받고 있습니다.

두 번째 비유인 도 소금과 비슷한 이해가 요구됩니다. 빛의 기능이 다양하지만, 소금처럼 세상의 빛으로 정의됩니다. 산위에 세워진 도성은 숨겨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빛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자들을 가리키며, 이런 사상은 이사야에 종의 노래에 근거합니다(참고 사 42:1-9).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열방의 빛으로 표현됩니다. 특히 이사야 본문에서 열방을 비추는 사역은 여호와의 종이 수행하는 사명이므로 세상의 빛으로 부름받은 자들은 종의 정체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4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흑암에 앉은 백성과 그늘에 앉은 자들의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이사야가 예언한 최고의 빛이며 빛의 사명이 예수님에게서 제자들에게로 위임됩니다.

빛은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빛은 무엇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도시의 빛이 있는 목적은 그 도시를 밝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등불을 켜서 그것을 밑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둡니다. 그래야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을 비출 수 있습니다. 어둠을 밝힐 목적으로 준비한 등불을 준비하고는 그 빛을 막으려고 숨기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 빛의 기능은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소금처럼 어둠을 밝히는 것은 빛뿐입니다. 빛이 비치면 어둠은 사라지고 밝히 드러납니다. “산 위의 동네는 어디를 상징합니까? ‘예루살렘의 은유로 보기도 하지만, 본문은 상징적 의미를 해석할 추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는 부분은 소금이 맛을 잃는 것과 대조해 빛은 가려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빛이 빛을 잃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도 작은 불꽃 하나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이 어떤 물체에 둘러싸이면 가려져 비출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둡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중요한 이해였습니다(1:49). 예수님 안에서 제자들은 빛입니다(참조고후 4:6; 5:8; 살전 5:5). 어떤 것에도 가려지지 않고 세상 사람들 앞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존재들입니다.

(2) 착한 행실(14-16)

소금이 맛을 내고 빛이 빛을 주는 것은 구체적인 행동을 동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행동을 제자들의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맛을 내고 빛을 주는 그 행위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이고, 세상은 비로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며 영광을 돌립니다.

좋은 행실은 앞에 팔복더 나은 의’(5:17)와 직결됩니다. 빛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빛과 소금은 제자들의 존재와 역할을 선언합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자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금과 빛이 된 제자들이 구현할 착한 행실은 과연 어떤 것들입니까? 산상수훈의 본론이 시작될 텐데, 제자들의 신앙윤리에 대한 예수님의 명료한 가르침들이 상세히 소개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금이 있어야 음식을 보존할 수 있고,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빛이 있어야 도시의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듯이, 이 땅에 소금과 세상에 빛인 제자들은 반드시 세상에 존재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소금과 빛임으로 착한 행실을 행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산상 설교의 가르침에 순종해서 사는 인생은 어리석지 않으며, 즉 맛을 잃지 않으며 세상을 밝히는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성도로서 부름받은 순간부터 세상을 밝힐 뿐 아니라 세상에 노출됩니다. 은밀하게 선한 행실을 한 것은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반면 아무리 숨어서 죄를 지어도 반드시 드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세상이 교회들이 본연의 모습을 찾도록 걱정하는 시대에 성도들은 삶으로 존재를 입증해야 합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17-20)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존 가르치는 방식에서 전혀 다른 방법들을 쏟아 놓았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율법 교훈을 깨뜨리는 것이 많았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우려를 자아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전통을 파괴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7-20)

본문은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한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무효하거나 취소하려 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1) 율법의 완전성과 영원성(17-18)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패하러 온 것이 아님을 선언합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을 의미하는 전문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들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셨습니다. ‘폐하다완전하게 하다가 대조를 이룹니다. 구약의 율법을 파괴하고 새로운 법을 세우려 하심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에 대해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서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그의 오심이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였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이루며 그것을 가능하게 할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은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구원사적 차원을 갖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구원사를 완성하시는 메시아라는 점에서 율법은 그로 말미암아 완전해집니다. 율법은 구약 역사에서 끝이 아니라 메시아가 가져온 천국에서 완성을 맛봅니다. 율법의 완성은 곧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은 일점 일획도 사라지거나 파괴되지 않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율법의 가장 작은 부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가치 있게 존재합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강조어법으로 절대로, 결코 아니다를 뜻합니다. 즉 가장 작은 알파벳에까지 깃든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다 이루실 것을 강조합니다.

(2) 새 계명: 더 나은 의(19-20)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적용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율법을 파괴하지 않고 완전하게 하시고, 또 그 온전한 율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소금과 빛이 되어 세상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주신 온전한 율법의 일점일획도 파괴해서는 안 되고, 더욱이 그렇게 율법을 경시하는 태도로 누군가를 가르쳐서도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주시는 새 계명에 대한 제자들의 신실한 태도를 강조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 작다또는 크다일컬음을 받는다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개역개정의 번역 천국은 맞는 번역이지만 천국에 대한 왜곡된 선입견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즉 장차 죽어서 갈 천국으로만 여겨 나중에 작다 또는 크다고 일컬음을 심판 차원에서 받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 하늘나라는 예수님께서 가져온 나라로서 현재성이 다분합니다. 제자들은 이미 그 나라 안에 들어온 상태입니다. 계명에 대한 태도 역시 하늘나라에서 행해지는 현재적 삶입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 사용했던 익숙한 문구를 다시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꺼내신 주제가 입니다. 산상수훈 서론의 방점을 로 찍으셨다는 것은 본론에서 이 주제가 차지할 비중을 가늠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를 두고 종교지도자들과 제자들을 대조하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생각했던 란 무엇입니까? 향후 예수님과 많은 충돌을 일으킬 주제이지만, 율법주의가 낳은 자기 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 들어온 제자들의 는 문자적 준수가 아닌 관계적 준수입니다. 율법적 준수가 아니라 믿음의 준수입니다. 의로움을 얻기 위한 준수가 아닌, 의로움 안에서의 준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보다 더 많은 양의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추구하는 의와 전혀 다른 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더 나은 의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 곧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새 계명으로 선언된 의로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만이 확보할 수 있는 입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그 가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와 있고, 그 나라에서 선포되는 새 계명을 삶의 원리로 듣습니다. 그 계명을 준수하며 사는 것이 그들의 소금과 빛 된 의로운 정체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소금과 빛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세상에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다면, 그리스도에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부르심과 역할을 이미 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있고, 이 세상의 교회가 존재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존재론적 요구가 실천적 요구보다 앞서야 되는 이유는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빛과 소금이신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과 그 능력을 우려 안에서 실행하시는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세상을 이길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말고 예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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