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사야(완료)

이사야(80) - 이사야 58장 1-14절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

백의종군 2024. 2. 23.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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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8-0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

이사야 58장 1-14절


 

사람들은 모두 복되고 형통한 신앙생활을 원합니다. 그들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형통에 이른 성경적 원리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 여호와께서 ‘내 백성’과 ‘야곱의 집’으로 부르시며 고발하는 공동체는 제의적으로 흠이 없어 보이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종교적 열심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제의적 경건을 여호와에게서 복을 받아내는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금식하는 날에도 일꾼들을 다그쳐 일을 시키고 이웃과는 다투거나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금식(1-12)

일반적으로 역경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시야가 좁아져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려는 이와 같은 경향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결합되어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 안에서 더욱 강화됩니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는 그 순간에도 그런 이기심이 우리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우리가 금식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문제로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할 때, 우리는 혹시 이웃들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것은 없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1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2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3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1-12)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들이 범한 배교와 타락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이들은 거룩한 언약 백성답게 살아야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형식적이고 곁치례뿐인 경건이었습니다.

 

(1) 고발(1-2)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백성의 허물과 죄를 고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1; 호 8:1; 암 3:6a). 예언자는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자들에게 경보를 발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고발당하는 공동체는 겉보기에는 흠은커녕 칭찬받을 만합니다(2). “날마다” 여호와를 찾고 그분의 길 알기를 즐거워합니다. 그분께 “의로운 판단”(판결, 법규)을 묻고 가까이 나아가길 즐거워합니다. 절기 때나 특별한 경우에만 하나님을 찾지 않고 날마다 찾습니다. 철두철미하게 하나님께 의존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성전 중심의 제의 종교에서는 제사장과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고, 사람들은 희생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경건은 제의와 성전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는]”(48:1) 제의적 삶이 언약 공동체의 모범적 삶이 됐습니다.

 

(2) 첫 번째 답변(3-4)

 

금식의 예를 들어 이들의 위선적 경건을 고발합니다(3-4). 금식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경건에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기대한 결과(축복)가 없다고 불만을 제기합니다(참조. 말 2:13; 3:14-15).금식이 그 본래 의미를 잃고 복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들은 금식하는 날에 제 유익만 찾았습니다. “오락”(헤페츠)는 ‘[경제적] 이익’을 의미하고, “온갖 일을 시키도다”는 ‘너희 모든 일꾼을 다그치는도다’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금식하는 자들이 일꾼들에게는 더 많은 노동을 강요했습니다. 이들은 탐욕과 착취의 마음을 종교적 경건으로 포장했습니다. 노동으로 힘겹게 사는 이웃을 억압하여 부를 축적했으면서도 그것을 금식이 가져다준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랑했습니다. 금식의 날에도 이웃과 다툼이나 주먹질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한다고 생각하기에 불의와 불법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착취하고 자기 경건을 과시하는 자들의 금식에 하나님께서 반응하십니다.

 

(3) 두 번째 답변(5-9)

 

어떻게 이런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금식과 간구에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금식하는 자들의 불평에 대한 첫 번째 답변이 이들의 위선적 경건과 윤리적 무감각을 고발한다면, 5절부터 나오는 두 번째 답변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참된 금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논점이 금식의 형식에서 내용으로 옮겨집니다. 금식에서 중요한 것은 관련 제의 규정과 전통을 준수하려는 열심이 아닙니다(5). 금식일은 사람이 자신을 괴롭히는 날이 아닙니다. 갈대처럼 머리를 숙이고 베옷을 입고 티끌에 눕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희생제사의 경우처럼 금식도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절대선(絶對善)이 아닙니다. 여호와께 열납되려면 그분께서 “기뻐하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금식의 정의가 전혀 새롭게 내려집니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그분께서 택하신 금식입니다(6). “흉악"(레샤)은 4절의 “악한”과 같은 단어로, “흉악의 결박”이 “악한 주먹으로 치는 자들이 지운 결박임을 시사합니다. 목덜미를 짓누르는 “멍에”는 강자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정치-육체적 속박이나 종살이를 상징하며(레 26:13; 렘 28:10-14; 겔 30:18; 34:27), “멍에를 꺾는 것”은 억압과 종살이에서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압제 당하는 자”는 힘 있는 자에 의해 부당하게 학대당하는 자를 가리키고, “끌러 주며”의 ‘나타르’는 ‘갇힌 자를 자유롭게 놓아주다’라는 뜻입니다(시 105:20; 146:7). “자유하게 하며”의 ‘샬라흐 호프시’는 안식년 또는 희년의 종의 해방과 관련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출 21:26-27; 신 15:12-13,18; 렘 34:8-16). 한마디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이유로 자유를 빼앗기고 종살이하는 자에게 자유를 되돌려주는 것이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금식입니다. 7절은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지금 굶주린 자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집이 없어 떠도는 가련한 자를 맞아들여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어 덮어주고, 가난한 친척을 보고 피하여 숨지 않는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의 어려움에 눈을 감지 않고 연민의 마음을 갖고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여호와께서 택한 금식입니다.

8-9절은 참된 금식에 따른 구원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금식을 하면, 귀환 공동체가 역경에 처한 이웃을 돕는다면, 어둠을 뚫고 새벽빛이 터져 나오듯, 새 살이 돋아 상처가 치유되듯 이스라엘의 소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비칠 것이며”는 문자적으로는 ‘터져 나올 것이며’로 약속한 구원이 한순간에 성취될 것을 시사합니다. ‘차마흐’는 ‘싹이 돋다’를 의미합니다. 아마도 40-55장에 나오는 ‘새로운 일들’의 싹틈(42:9; 43:19)과 관련해 사용된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금식을 한다면 제의적 경건 때문에 지체된 치유(구원)가 곧 성취될 것을 시사해줍니다(참조. 51:5; 56:1). 후반절은 안전한 출바벨론을 약속한 52:12b에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합니다. 바벨론에서 나올 때 여호와께서 귀환 행렬의 선두에 서서 길을 인도하시고 후미에서 지켜주신 것처럼, 예루살렘 공동체를 모든 위험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에 병행하여 등장하는 “네 공의”는 공동체의 의로움을 옹호해주시는 분(의 공의)을 가리킵니다. 위선적 경건 때문에 단절된 관계가 온전히 회복됩니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부르면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도와달라 부르짖으면 ‘내가 여기 있다’하고 즉각적으로 개입하십니다(52:6: 65:1). 여호와께서 택한 금식을 행할 때 공동체는 그분의 인도와 보호 아래 살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본문은 구원 약속이 온전히 이뤄지지 않았다고 불만을 제기하는 귀환 공동체에게 주는 답변입니다.

 

(4) 조건적 약속(9b-12)

 

앞에 나온 것을 반복하는 9b-12절은 조건적 약속의 말씀입니다. 9b절은 내용상 3b-4a절과 6절의 요약에 해당합니다. 제하여 버려야 할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이 구체적으로는 불분명하지만, 이웃에게 해를 끼쳐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행태임은 분명합니다. 10a절은 7a절을 받습니다. 공동체의 가진 자는 자기 재산을 굶주린 자의 배고픔을 해소시켜 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많이 가진 자가 없는 자의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음식으로 가난한 자들의 빈속을 채워주는 것이 부자의 금식입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함께하십니다. 10b절은 8a절에 일치합니다. 공동체의 선을 지향하는 삶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으로 이스라엘의 소망을 성취시켜줍니다. 지금까지의 흑암이 사라지고 앞으로는 밝은 대낮에 길을 가듯이 안전하게 살게 됩니다. 11절은 8b절을 받아 확대합니다. 여호와의 조건을 완수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인도하심과 땅의 풍요와 건강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귀환 공동체가 그분께 의지할 때 현재의 궁핍함과 부족함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메마른 땅(예루살렘 공동체)이 “물 댄 동산”처럼,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처럼 됩니다. 예루살렘이 재건되고, 그 후손들에게 명예로운 이름이 주어집니다(12).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는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는 성안의 복구를 시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안식일 준수(13-14)

우리가 음식을 거절하고 기도의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우리를 철저히 낮추고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이며, 하나님 홀로 우리 삶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우리의 시도와 노력을 멈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정신입니다. 현대인들은 바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며 유능한 사람이란 것을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증명하려고 합니다.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13-14)

 

바벨론에서 돌아온 구속받은 자들은 황폐한 성과 벽을 재건할 것입니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황폐해진 인류를 구속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합니다. 언약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육체적 욕망들을 좆지 않고 마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면 번성할 것입니다.

 

(1) 조건(13)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경건 행위로 간주됩니다. 13절은 장사와 관련한 안식일의 이동과 이윤 추구를 금합니다(참조. 느 13:15-19). 안식일은 여호와의 거룩한 날이기에 다른 날들로부터 구별하여“존귀한 날”로 지켜야 합니다.

 

(2) 약속(14)

 

14절은 안식일 준수에 따른 약속입니다. 지금은 이방 압제 아래 “오래 황폐된 곳들”에서 힘겹게 살고 있지만, 안식일을 준수한다면 여호와 안에서 기쁨을 얻고, 승리자가 되어 “야곱의 기업”인 가나안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종교적 형식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의 형식적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제쳐 두고 종교적 형식과 외형만을 고집한 것입니다. 참된 경건은 종교적 외형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자에게 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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